치유/내적치유

[스크랩] [내적치유-세미나(2)/크리슨 해리슨 목사]상한 마음 (1)

힐링&바이블센터 2006. 11. 20. 19:14

상한 마음 (1)

 

 

 

 

크리슨 해리슨 목사


욥기 17장 1에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고 했습니다. 성경 원어에 보면 ‘내 영이 상했다. 깨졌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난 정말 죽고 싶다. 나의 날이 다 하였다.’ 이것은 정말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한 심령 속에 살게 되면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상한 심령이 우리 안에 오게 됩니까? 잠언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어떤 때 슬픔을 느낀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 친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우리는 슬퍼하게 됩니다. 우리가 애타하고 아파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느끼는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슬픔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년 동안, 많은 수개월 동안,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가족 안에 기쁨이 없고, 고통만 있습니다. 슬픔만 있습니다. 슬픔 가운데 몇년씩 살아온 것입니다. 웃음도, 사랑도 없고, 서로 웃고 즐기는 것도 없습니다. 가족 안에는 슬픔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경험 중의 하나였습니다.

 

 

제가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 저의 아버지가 저희 어머니를 떠나가버렸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아버지를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저를 낳은 다음 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너무 늙으셨고, 너무 지치셨습니다. 그분들은 전쟁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사랑하셨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언제나 저에게 무엇을 주곤하셨습니다. 옷도 주시고, 음식도 주시고, 장난감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저를 만지시지도 않고, 저를 안아서 들어 올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번도 사랑에 대해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제가 다른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했습니다. 거리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지만 그 아이들과 놀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분들을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가족에 대해 그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코 밖에 나가서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굉장히 외로웠습니다. 저에게 장난감이 있었는데 저는 장난감과 놀았고, 장난감과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난감이 저의 친구였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의 경험입니다.

 

 

제가 6살이 되었을 때 제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와 새 아버지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 1년은 좋았습니다. 같이 휴가도 갔었고, 정말 가족같았습니다. 그런데 1년 뒤에, 제가 7살이었을 때 결혼이 잘못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두분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제 안에 많은 갈등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7살이었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냥 아픔만 느낄 뿐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바에서 일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바에 자주 가셔서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두분이 밤 늦게 오시곤 했는데 그때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무엇인가 던지시곤 했습니다. 굉장히 끔찍한 싸움을 하셨습니다. 매일 밤, 저는 그분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잠자리를 방해받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가 10살 때 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밤에는 그분들이 싸우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자정쯤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눈을 볼 수 있었는데 눈이 또렷하지 못했습니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흐릿한 눈으로 싸우고 계셨습니다. 알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제발 싸우지 마세요. 제발 그만 두세요.” 제가 그분들께 간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저에게 “다시 자러가라. 너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니까 참견할 것 없어.” 저는 다시 잠자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배개를 들고, 머리 위에 덮어 썼습니다. 제 귀를 막았습니다.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겠끔. 그날 밤부터, 저는 매일 밤 그런 식으로 잠을 잤습니다. 저는 어떻게 할 수 없었고, 너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그때 첫번째로 상한 심령을 갖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제에게 첫번째 문제가 왔습니다. 분노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굉장히 분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제 자신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 너무 낙망했습니다. 저는 제 안에 분노가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가? 분노가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계속 화를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싸우는 챔피온이 되었습니다. 저는 럭비를 했었는데 아주 거친 선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고통을 제 마음 가운데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자라났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많은 수년 동안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치유하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치유하시고, 회복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너무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은 아무도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계속되고 계속되는 문제들입니다. 슬픔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이것이 좀 더 컷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깨어진 관계 속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다든지, 결혼관계가 깨어졌다든지, 그러면 우리는 슬픔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는 길은, 역시 잠언 15장 4절에 보면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거짓말 하고 거친 말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 밑에서 살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보통 이것은 권위가 있는 사람이 이렇게 할 때 그렇게 됩니다. 부모님이나, 형님이나 오빠나, 학교 선생님이나, 회사의 상사나, 그분들이 좋지 않는 말을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제가 어떤 가족과 잠시 머문적이 있는데 그때 이상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아닙니다. 다른 나라인데, 낮 시간에는 가족에 활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놀고, 친구들이 집으로 옵니다. 아주 좋은 시간을 가집니다. 어머니는 전화를 들고 수다를 떱니다. 어머니 친구들도 집으로 놀러옵니다. 아주 활기가 넘칩니다. 그런데 저녁 6시 30분이 되면 아버지가 집으로 오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더이상 떠드는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아이들이 놀지 못하고, 어머니가 전화를 들고 수다를 떨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조용하게 됩니다. 저녁 먹으로 다 모이면 먹기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드시고, 어머니 드시고, 아이들 먹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가족들이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 가족의 분위기에서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주 나쁜 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주 거친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가족에서 살게 된다면 이것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거짓말하는 아버지가 계신다면, 거짓말하는 남편이 있다면 이것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 아니고 아주 거친말을 하고, 나쁜 말을 하는 가정 속에서 살게 된다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 가족들을 기억하는데 말들이 아주 거칠었습니다. 어떤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말을 들을 때는 어떤 때는 온 몸이 다 마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을 갖게 되는 세번째 원인은, 골로새서 3장 21절 말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하노라』. 이것은 정확한 성경번역이 아닙니다. 헬라 원어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에게 상처주지 말아라, 너희 자녀에게 압력을 가하지 말아라. 노하게 하지 말아라. 만약 너희가 그렇게 하면 너희 자녀들은 수줍음 타는 사람이 되고, 감정의 굴곡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불안정한 아이들이 된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아비들이 자녀들의 심령을 상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심령을 갖게 되는 세번째 요인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가족을 사랑해야 할지 모를 때 어머니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가 불안정한 사람일 때, 아버지도 역시 결손 가정에서 왔을 때 어머니가 모든 부담감과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비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 아버지를 비난하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부모가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아버지의 그 부모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계속해서 갑니다. 모든 종류의 상처와 아픔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아무 잘못도 아닙니다. 그냥 일어나는 일입니다.

 

제가 어떤 예를 들겠습니다. 첫번째, 아버지가 너무 바쁜 경우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바쁘신 것이니다.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실 수가 없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가족을 사랑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돈을 줍니다. 그러나 돈을 주는 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닙니다. 굉장히 빈약한 방법입니다. 아버지는 너무 바빠서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을 향한 아주 순결한 접촉입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끌어 안아 올리고, 안아주고, 함께 놀아주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 징계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어떤 가정은 징계하는 것을 모릅니다. 오로지 벌주는 것만 압니다. 징계하는 것, 훈계하는 것과 벌 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훈계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어떻게 훈계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잘 훈계받은 아이들은 안정감을 누리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할지 영역을 잘압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훈계할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들도 부모들로부터 훈계받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계는 아이들에게 옳은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벌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들은 훈계라는 것을 모르고 오로지 벌주는 것만 압니다. 그리고 벌주는 것도 너무 좋지 않는 방법으로 합니다. 제가 어떤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에 줄이 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3살짜리 아이입니다. 제가 이 줄을 봅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배가 고팠습니다. 이 선을 맛있어 보여서 이것을 입에 갖다 대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고, 아이가 그것을 떨어뜨렸습니다. 5분 후에 다시 이 줄을 보았는데 너무 맛있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입에 갖다 넣을려고 하는데 엄마가 빰을 치는 것입니다. 벌 주는 것, 어떤 때는 아주 혹독하는 벌을 줍니다. 그렇지만 훈계는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 훈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자기 활동영역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어머니가 점점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두번째 예는, 아버지가 대화할 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조용한 타입의 아버지입니다. 저와 제 아내가 영국에 있었을 때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중국인으로 기독교인이었고, 간호원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주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쉬지도 않고 말하는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모임에 앉아 있지를 못했습니다. 항상 여기 보고, 저기 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친구가 있었는데 영국인으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조용한 것입니다. 응, 아니, 그것 밖에 이야기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두분의 휴가가 같은 날짜에 있었습니다.

 

 

영국인 친구에게 멋있는 장소에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중국인 친구에게 같이 그 집에 휴가를 가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분들이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중국인 친구에게 휴가를 어떻게 보냈는지 물었습니다. “나무들이 너무 멋있고, 산이 너무 근사하고, 호수가 깨끗하고, 공기는 깨끗하고....”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은 굉장히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읽으시고, 아침을 드시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곤 옷을 입으시고 문으로 가셔서 “안녕”하시고 일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저녁 6시에 가족이 모두 식사를 하고 나면 아버지가 7시 30분쯤 오셔서 혼자서 식사를 하십니다. 저녁 드신 후에 텔레비전을 켜서 보십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10시 30분이 되면 “잘자”라고 이야기하신 후 자러가십니다. 휴가 6일동안 “안녕”, “잘자” 이 말밖에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대화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가정은 기독교인 가정입니다. 어머니는 아주 좋으시고, 조용한 분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어머니를 아주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어머니는 요리하기를 좋아하십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요리하시고, 교회교인들을 위해 요리하십니다. 요리하시지 않을 때는 뜨게질을 합니다. 가족을 위해, 교인을 위해 뜨게질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흠이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좋으신 그러나 조용하신 분이시셨습니다. 그래서 그 집은 엄마, 아버지가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대화하는지를 모르십니다. 몇년 동안 같이 살아왔지만 서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그분들이 어떻게 자녀들에게 대화를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대화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역시 그 아이들도 어떻게 대화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안에 상한 심령이 있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같이 교회로 갑니다. 밖에서 외면적으로 보면 아주 좋아보였습니다. 엄마, 아버지, 아이들이 같이 교회로 가는 모습이 얼마나 좋아보입니까? 그러나 내면적으로 보면 그 가족의 안에 있는 면들은 고통스로운 것입니다. 아무도 서로간에 어떻게 대화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서로를 위해 기도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너무 슬픈 것입니다.

 

세번째 예화는 엄격한 아버지. 그분은 분명히 나의 아버지인데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요.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너무 무섭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목소리는 크고, 너무 자주 화를 내시고, 술도 마십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굉장히 엄격하고 딱딱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 생기면, 더 교육을 받기 원한다거나 돈이 필요하다거나, 내 생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거나 할 때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엄마에게 가는 것입니다. “엄마, 아버지에게 이야기해 주실래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이야기하기가 두려워요. 너무 엄격하고 무서워요. 그분은 저를 두렵게 해요.”

 

네번째 예화는 책임감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어떤 책임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낮 동안에는 일을 하십니다. 밤에는 친구들과 나가십니다. 주말에는 변명을 하시고 또 나가십니다. 집에 계시지를 않습니다. 책임감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책임의 일부분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이 서신을 쓴 배경에 대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쓰여진 문화 속에서 이 서신이 쓰여졌습니다. 어떤 서양문화도 아니고, 여기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에베소 사람들, 고린도 사람들, 로마사람들, 갈라디아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만함을 갖고 있는 배경이고, 지적으로 굉장히 자녀들이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고, 우상숭배하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배경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서신을 썼을 때는 어떤 그리스도인의 율법을 확실하게 전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서신을 썼을 때는 하나님이 방법, 하나님의 길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다이아나라고 하는 여신을 숭배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서신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아비들아, 너희들이 자녀들을 기르는데 책임이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제발 엄마에게 모두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책임감없는 아버지를 갖게 되면 모든 책임을 엄마에게 떠맡기게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점점 부담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머니가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가족의 재정적인 것,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 집을 수선하고 유지하는 것, 방문객이 집에 찾아오는 것을 맞이하는 것 등 엄마가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엄마에게 큰 부담감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엄마가 아이들에 대해 점점 부정적으로 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더 이상 엄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느끼는 것은 엄마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고 연민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또 아이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가끔 가다가 찾아오는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찾아올 때마다 초콜렛이나 필요한 것을 사오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나를 힘들게 하고, 나쁜말도 하지만 아빠는 한달에 한번 정도 올 때마다 항상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문제있는 잘못된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섯번째는 충실하지 못한 아버지입니다. 또는 엄마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는 ‘신실하지 못하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라날수록 갑자기 마음으로부터 그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정말 그 신실하지 못하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고통을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새아버지에 대해 신실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13살 때 하루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었는데 저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저는 그냥 집을 뛰쳐 나가버렸습니다. 제 속에서 무엇인가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어디 가서 죽고 싶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또 엄마도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우리 부모가 신실하지 못하다면 우리 안에 너무 많은 고통을 유발시킵니다.

 

 

제가 대만에 있는 DTS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 21살 된 가장 어린 분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아주 영리하고 순결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해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항상 자기 엄마, 아빠에 대해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큰 항공사의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한 주말에 집에 갔다가 왔었는데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굉장히 비참해 보였습니다. 굉장히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손도 떨리고 있었습니다. 자매님이 이야기하기를 “아버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이 가족을 떠날 것이다. 나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계속 울기 시작했습니다. 상한 심령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매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자매님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예를 들면, 아버지가 안계신 경우입니다. 아버지가 다른 곳에서 일하시고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경우입니다. 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버지가 누구와 함께 집을 나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있기를 원하는데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죄책감을 갖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무엇인가 잘못하셔서 계속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주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도 그 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벽 밖으로 결코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의 친 아버지이지만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정말 나를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또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 어떤 분은 상한 심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그 상한 심령을 인도하시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치유하고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상담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성경말씀을 나눕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뭐 특별히 어떤 종류를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까? 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미나 안에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한 사람당 15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함께 경험할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나쁜 뿌리가 자라게 하는 기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상한 심령은 바닥이 없는 컵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여신다면 그 과정이 아주 빠르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에 하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안에 상한 심령이 있다는 것을 느끼신다면 손을 가슴에 얹어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버지의 치유의 능력과 사랑이 여러분에게 올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특별하게 어떤 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만약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야만 하는 죄가 기억나신다면 기도하실 때 그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것을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만약 상한 심령이 없으시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만약 기도하는데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우리가 가서 기도해 드리겠고, 여러분이 이 앞에 나오셔서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해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62편에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할 수 있습니다. 그냥 듣기만 하십시오.

 

 

사무엘상 1장 15절에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토한 것 뿐이오니』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토했습니다. 또 이것도 들어 보십시오. 2장 19절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어지어다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물 쏟듯 하나님 앞에 쏟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아픔을 하나님 앞에 물 쏟듯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상한 마음일지라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의 사랑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를 원하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삶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구에 어떤 고통과 아픔이 있는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이곳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회복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열어드립니다. 성령님,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쏟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힘드신 분이 있다면, 마음 안에 갈등이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갈등을 없애주시고 도와주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을 격려해 드리고 싶은데 여러분이 앞으로 오실 수 있고 저희들이 기도해 주고 싶습니다.

※ 위의 글은 예수전도단 가정 치유세미나 기간동안 크리슨 해리슨 목사님의 세미나 내용을 글로써 그대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출처 : 대명교회(大名*大明*大命)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