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내적치유

상한마음-2

힐링&바이블센터 2006. 11. 20. 19:13

상한 마음 (2)

 

 

크리슨 해리슨 목사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대구를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리고 예정하신 뜻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대구를 사랑하시고 더욱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도시 안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어제밤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다 회복시키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뿌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뿌리가 두가지가 필요한지, 첫번째 뿌리가 필요한 것은 자라게 하는 흙이 필요합니다. 쓴뿌리, 거절하고 거역하게 만드는 뿌리를 자랄 수 있게하는 아주 비옥한 땅, 그 흙이 어떤 것인지 보았습니다. 그 흙이 바로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열고, 삶을 열어서 많은 치유하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 열어 드릴 때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입니다.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기도하기 힘들만큼 우리가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듣고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있는 아픔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십시오.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출애굽기 1장 14절에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이 괴로왔던 것은 고역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역과 묶임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아, 너무 힘들어, 너무 고통스러워" 이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부르짖은 내용입니다. 어떤 번역은 사람들이 소리질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속에 고통할 뿐이었지만 하나님은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도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너무 힘들고, 기도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내려주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6장 9절에 보면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의 마음이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주셨는데 불구하고 모세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상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포기했나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여기 어떤 분은 마음 안에 상처를 갖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갈등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설교 말씀을 듣고 반응하기가 힘든 분이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다면 ‘나는 정말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났구나 나는 실패했구나' 하고 절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돌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기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비록 기도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계속해서 어제의 강의 이어서 할려고 합니다. 다시 뿌리에 대해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두번째 뿌리에 대해 말했던 것이 뿌리가 자라기 위해 씨가 땅에 뿌려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씨가 무엇이죠? 씨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당하는 여러가지 경험들을 말합니다. 그 경험들은 우리에게 굉장히 고통을 주었던 것들입니다. 어쩌면 그것들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그런 일들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삶 가운데 한번 일어났지만 굉장히 격렬하고 아팠던 경험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픈 경험들이 어렸을 때 일어났다면 그 아픔은 문제가 있는 또는 결손 가정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어제 저녁에 잘못된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문제있는 가정에 대해 이해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런 가정의 예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문제 있는 가정에 대해 이해하시고 그 상황들을 다 알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있는 가정들은 처음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계속 그 세대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성경 말씀에서 몇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사사기 11장 1~3절에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길르앗은 문제있는 가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있었고 아내는 길르앗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길르앗은 기생과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생으로부터 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생으로부터 낳은 아들까지 합쳐서 모두 같이 살았습니다. 아들이 자라면서 본 부인의 아들이 기생의 아들을 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생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입다는 집을 뛰쳐 나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잡류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훔치고 싸우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족으로부터 거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치유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입다는 굉장히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입다에게 가서 우리를 위해 전쟁에 나가 싸워달라고 했고, 그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용감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입다는 어떻게 가정을 가져야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는 결혼했지만 첫 딸이 굉장히 아름다운 딸이었습니다. 가족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입다가 성질 급하게 한 맹세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맹세 때문에 외동딸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집니다. 입다가 문제 있는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이 다른 예입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삭은 한 아들을 좋아했고, 리브가는 다른 아들을 좋아했습니다. 두 아들을 같이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굉장히 큰 문제였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한 아들을 좋아하고 엄마가 다른 아들을 좋아한다면 언제든지 가정은 나누이고, 많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이것이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이것은 이삭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발생된 것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거기에 거절당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삭은 선택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알았던 것은 오로지 선택받은 아들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결과 이삭이 어떤 아버지가 되었는가 하면 ‘이것은 나의 아들이고, 내가 택했다. 그래서 이 아들만 사랑하겠다.' 이런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2절에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에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나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고 했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초신자였을 때 사무엘상에 있는 이야기를 여러번 설교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선지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설교하실 때 보통 1절과 2절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른 해설을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왜 그 사람은 아내가 둘있었죠"라고 물어보면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그냥 그때 전통이었어요. 죄가 아니예요.” 목사님께서 별로 그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대부분 두 아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아마 부정한 일인가? 성적인 죄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만 두 아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굉장히 평범하지 않은 일입니다. 성경 시대에는 두 아내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 중 어떤 사람은 머리에 마치 종이 울리는 것 같이 ‘아내가 둘이잖아?'라고 놀라실 분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중에 어떤 분은 아버님이 두 아내를 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결혼을 만드셨습니다. 모든 종류의 사람이 결혼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찬도, 모슬렘인도, 불교인도, 흰두교도인도, 믿지 않는 사람도 다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고안하셨을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었고 오로지 한 남자에 한 여자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결혼을 고안하신 의도셨습니다.
누가 자기 남편에게 두번째 아내가 있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말레이지아에 있을 때 친구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시골에 있는 아주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친구는 의사였고, 넷 집이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뒷 쪽에 이상한 소음이 있는 것입니다. 꼭 기계소리 같았습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층으로 올라가 봤습니다. 거기에 조그마한 소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중국 아이인데 아주 귀엽고 예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30세 정도로 아주 매력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엄마 앞에서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엄마가 발을 들어서 아이를 발로 차고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발로 찰 때마다 그런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 아이가 넘어지고 난 다음 다시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다시 발로 차고, 아이는 넘어지고, 아이는 다시 앉고, 엄마는 다시 차는 이런 일이 계속 반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엄마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찰 때마다 아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어떤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남자는 이 여자가 하는 일을 말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남자에게 돌아서더니 그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비난하자 이 남자는 떠나버렸습니다.
제가 친구에게 저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그 여자는 둘째 부인인데 그 남편은 점심 때마다 그 여인을 보러 오고, 밤이 되면 도시에 있는 첫째 부인에게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레이지아 사람이었지만 말레이지아어, 영어를 말하지 못하고, 중국말 만했습니다. 그래서 이 둘째 부인은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여자아이를 중국에서부터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는 이 중국 아이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둘째 부인이었습니다. 누가 둘째 부인으로 있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이 경우처럼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보면 한나를 사랑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많은 것들을 주곤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한나의 진짜 필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나가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한나에게 “당신이 아들을 낳아 주어서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나, 너가 하고 싶은 대로 이 아들에게 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나가 이 아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교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나가 말하기를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칩니다."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이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엘리라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엘리도 어떻게 가족을 가져야 하는지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2장을 보겠습니다. 11절, 12절에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엘리의 아들들은 불랑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엘가나는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와 함께 아들 사무엘을 1년에 한번 방문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경우라면 …. 만약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을 교회에 데려가서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여기 제 아들입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 아이를 돌봐아주세요." 그리고는 부모님은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에 한번 그 교회에 가서 여러분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좋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 안에 고통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가정에 대한 어떤 개념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은 불량자였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사무엘이 자라난 집의 가정 환경이었습니다. 엘리는 아주 아주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아들들을 다스려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아들에게 가르칠지 몰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무엘이 자라난 가정 환경이었습니다.
8장을 보겠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보면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아버지, 나쁜 아들, 그것이 바로 같은 패턴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엘리와 같은 패턴이었습니다. 엘리는 영적이었지만 나쁜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아주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엘도 어떻게 그 아들들을 다스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문제 있는 가정에서 사무엘도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있는 가정은 성경에서 굉장히 이해되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 모든 세세한 것들을 다 볼 시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역시 다윗도 그런 문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가장 어린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막내 아들이 양을 돌보도록 밖으로 내 보내졌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종이나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아주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양을 돌보라고 다윗을 내보냈습니다.
이 시대에 양을 돌보는 사람은 양과 함께 잠을 자야 합니다. 밤에 집에 올 수 없습니다. 양들과 같이 2,3주 같이 보내야 합니다. 바로 다윗은 거절당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가졌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교제하는 그런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노래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주 강해서 곰이나 사자가 오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사람들과 관계와 교제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었을 때 이것은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끝을 다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아주 아름다운, 순결한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중심이 정말로 효과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이것은 먼저 깨끗하게 순결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치유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결과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현재만 보시지 않고 그 결과도 함께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한번 보십시다. 사무엘상 16장 12절 말씀에 『이에 보내어 그를 데리고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외모였습니다. 남자의 외모가 어떤지, 빰이 붉고, 눈이 총명하고, 성경 말씀에 얼굴이 아름다왔다고 했습니다. 바로 핸섬한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 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두번째 직업이었습니다. 사울이 악신에 의해서 고통을 받을 때 다윗은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자, 여기 젊은 남자가 귀신 들려 화난 왕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 왕은 화가 나면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수금을 들고 그 방으로 들어가서 두려워하면서 수금을 타야만 했습니다. 왕을 내내 지켜 봐야 했습니다.
17장 15절에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아비의 양을 칠 때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양치는 일과 두가지 일을 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팔레스타인의 골리앗이라는 용사가 이스라엘에게 도전해 왔습니다. 굉장히 큰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갑옷을 입으려고 했는데 갑옷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만 들고 그 사람에게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곰도 죽였습니다. 사자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거인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돌팔매로 거인을 맞추어 거인은 죽었습니다. 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사울왕은 옛날 오래된 영웅이 되었습니다. 7절,8절에 보면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며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말은 여인들이 도시로 나와서 템버림을 들고 춤추면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빰이 불고, 눈이 빼어나고 아주 잘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아! 다윗, 새로운 영웅! 다윗은 아주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이 다윗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18:20에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라고 했습니다. 제가 초신자였을 때부터 미갈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듣기를 미갈은 아주 좋지 않은 여자라고 들었습니다. 다윗이 성령이 충만해서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출 때 미갈은 창문 밖으로 내다보고 멸시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미갈은 평생토록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이 우리에게 보통 설교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정말 문제가 무엇입니까?
미갈이 나쁜 사람이고, 다윗이 나쁜 사람이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 두 사람 결혼했죠?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초기에 미갈이 다윗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19장 11절부터 12절에 보면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고 했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미갈은 화가난 아버지를 혼자서 대면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결혼 첫 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42,43절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취하였더니 그들 두 사람이 자기 아내가 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두 여자를 아내로 더 취했습니다. 그럼 미갈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44절에 보면 『사울이 그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역시 다시 결혼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사무엘하 3장에 보면, 사울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3장 13절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두 아내가 더 있고 미갈은 다시 결혼했습니다. 미갈은 지금 아주 행복합니다.
15절, 16절에 보면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미갈을 데리고 왔습니다. 미갈은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여기 말하기를 남편으로부터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 미갈을 울면서 따라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있는 곳에 가까이 왔을 때에 사람들이 남편에게 “가라 더 이상 미갈은 너의 아내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정말 미갈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5장 13절에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처첩들은 더 취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여자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다윗은 정말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정욕으로 사람들을 취하는 것만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갈이 상처받은 여자가 된 것입니다. 미갈의 마음은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받은 고통 때문에, 다윗의 마음도 역시 고통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다윗도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주 나쁘고 못된 짓을 했습니다. 정말 많은 문제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왜 이런 실제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어야만 합니까?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있는 가정을 이해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면 사무엘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문제있는 가정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우리는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실한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쉬는 시간 후에 문제 있는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더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쉬는 시간 전에 같이 기도하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치유함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 기도합시다. 제가 심령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정말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대구에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어디 가든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제 심령으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굉장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삶에 깨어진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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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왕의 왕이시요, 주의 주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구의 왕이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위의 글은 예수전도단 가정 치유세미나 기간동안 크리슨 해리슨 목사님의 세미나 내용을 글로써 그대로 풀어놓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