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라는 선물1)
2002901006 노명아
제1부 - 들어가면서 : 고통을 지각하는 뇌
세상을 해석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인 두뇌는 정작 그 세상과는 단절된 채 외로이 고립된 상태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의식을 주는 기관이 우리의 의식적 자각 너머에 놓여 있는 것이다. 뇌는 위와 달리 소리를 내지 않고, 심장과도 달리 열심히 일할 때 우리에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두개골은 뇌가 현실과의 모든 직접적인 접촉을 못하도록 보호해준다. 뇌의 온도는 불과 이삼 도 정도만 변할 따름이다. 그것을 초과하는 열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 아무 것도 듣지 못하며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신경외과 의사가 일단 두개골을 연 다음에는 더 이상 마취를 하지 않고서도 마음대로 살펴볼 수 있다. 생명을 정의하는 시각, 청각, 미각 등의 모든 감각은 간접적으로 뇌에 이른다. 모든 감각은 인간의 사지를 통해 감지되어 신경 통로를 따라 호송되며, 신경 전달이라는 공통 언어로 발표된다. 고립되어 있는 뇌에게는 그 정보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뇌는 단지 보고를 받을 뿐이다.
신경 전달은 화학적 성질과 전기(電氣)적 성질을 띠고 있다. 흥분된 신경의 ‘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축색돌기를 따라 나트륨과 칼륨 이온들이 삼투막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며 그 과정에서 이온들은 전하가 파동의 형태로 축색돌기를 따라 올라갈 때 전하를 양극에서 음극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감지하는 모든 감각 이를테면 마늘 냄새, 그랜드 캐년의 장관, 심장 마비의 고통, 오케스트라 소리 등은 서로를 향해 전기적인 성질을 띤 이온들을 뱉어내는 신경 세포들의 그러한 과정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뇌는 이 모든 전기적인 부호를 해석해서 그 성질이나 기원에 따라 시각적 이미지, 소리, 냄새, 일순간의 고통 따위로 인식할 수 있도록 나타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세포 수준에서 고통의 네트워크는 언제나 정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의식적인 고통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 몸이 신호들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기 때문이다.
뇌만큼 창조주의 지문을 더 잘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각 신경세포는 다른 신경세포들과 약 천 개의 접합점을 갖고 있으며 대뇌 피질에 있는 어떤 세포들은 6만개 정도의 접합점을 갖고 있다. 상아색 상자 속에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뇌는 바깥 세상의 왁자지껄한 혼란을 감지하기 위해 이러한 접합점들에 의존해야 한다. 순식간에 1초에 5조 번의 화학적 과정을 거치는 이 모든 활동에서부터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의미의 유형을 형성한다. 충치, 각막 손상, 고막 파손, 구강 궤양 등에 의한 고통이 머리 속 어디에서 시작되든지 그 고통은 열두 개의 두개골 신경 중 하나를 따라 이동하며2) 청각, 후각, 시각, 미각, 촉각을 전달할 때 쓰이는 것과 동일한 암호로 뇌까지 전달된다. 신경 전달 체계는 물질 세계의 방대한 현상을 암호로 바꿔 전달하는 경제성과 정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경세포들은 인간의 몸에서 가장 큰 세포들이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같은 말단부위에서 신경세포는, 어떤 종류의 신호를 뇌에 보낼 것이지 주변에 있는 신경 세포들과 상의하기 위해 수상 돌기들에 의존한다. 큰 신경 세포 하나는 만 개 정도의 염색체의 접합들과 교차하면서 같은 길에 있는 다른 신경 세포들과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고통과 같은 감각은 손끝에서 시작되든 발끝에서 시작되든, 회로를 완주해서 뇌에 이르기 전까지는 등록되지 않는다. 수천 개의 신경섬유들이 일부는 뇌에서 내려오고 일부는 신체의 손발에서 올라가면서 중간에 있는 일종의 교환소-출입문, 일련의 출입문들: 이를 출입문 통제이론이라 한다-에 모인다. 한 지점에 모이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은 마치 고속도로의 톨게이트처럼 일종의 병목 현상을 유발하며, 고통을 지각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뇌에서 긴급한 충동들이 내려오면 이는 올라가는 신경 섬유들이 지닌 모든 고통의 신호들을 막아버린다. 따라서 고통이 계속 진행하여 뇌에서 어떤 반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몸에는 수백만 개의 신경 감지기가 있다. 이것은 몸의 각 부분의 필요에 따라 정확하게 배분되어 있다. 눈의 각막이 고통을 느끼는 데는 1㎡당 0.2g의 압력이 필요한 반면, 팔뚝은 20g, 발바닥은 200g, 손가락 끝은 300g의 압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발을 살짝 때리면 모르고 그냥 넘어가지만 눈을 때리면 엄청나게 아픈 것이다. 만일 망치질을 할 때마다 망치를 잡고 있는 손이 고통의 신호를 뇌로 보낸다면 목수가 될 사람이 참으로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감각이라기 보다는 지각에 가깝다. 고통의 신호가 되기 위해서는, 개개 신경들의 반응이 가까이에 있는 신경들에 영향을 미쳐, 반복된 신호를 통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합해져야 한다. 고립된 신경에서 나오는 고통의 신호는 거의 의미가 없고, 중요한 것은 그 신호들이 뇌에 의해 공급되는 해석이나 주변의 세포들과 맺는 상호 작용이라는 사실이다.
고통은 바깥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안쪽 즉 해골이라는 상아빛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는 우리가 고통이라는 감각을 만들어 내 우리 자신에게 준 것이지만 고통이 바깥 세상에 의해 우리에게 일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고통은 언제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사건인 것이다.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암호를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회복이라는 것은 대부분 환자의 마음과 영혼에 의존하기 때문에 고통은 마음의 상태로, 전 인격을 포함한다.
제2부 - 무고통의 고통 : 나병과 나병환자들
나병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두려움을 오랫동안 유발해 왔다. 그 이유는 주로 나병을 방치해 둘 때 생기기 쉬운 끔찍한 외관 손상 때문이다. 역사상 나병만큼 오명으로 얼룩진 병은 하나도 없었다. 그 대부분은 무지와 그릇된 사고의 틀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1873년 노르웨이 과학자 아모어 한센은 나병을 일으키는 인자를 밝혀냈다. 그것은 ‘나균’으로 결핵균과 매우 흡사한 세균이었다. 그때 이후 나병은 모든 전염성 질병 중에서 가장 전염률이 낮은 질병의 하나로 밝혀졌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결핵의 증상처럼 피부의 일부가 죽고, 감각이 상실되며, 약간의 신경이 손상되는 고통을 겪는다. 나병의 상처들은 얼굴, 손, 그리고 발에 나타난다. 그것들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전염될 수 있다. 나병 간균은 그것이 증식하기 위해 더 시원한 온도를 선호한다. 그리고 그곳은 대부분 표피에서 가까운 곳이다(귓불, 눈, 코, 고환). 나병의 간균이 좀 더 시원한 부위에 있는 신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신체의 면역 체계는 안에 떼를 지어 모여 있는 대식 세포3)들과 임파균들을 파견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신경을 격리하는 덮개 안에서 부풀어 오르고 아주 중요한 자양분을 막아 버린다. 그래서 손이나 발이 마비되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이 무서운 질병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파괴적인 면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고통을 느낄 수 없었으므로 그가 무심코 상처 부위의 조직을 계속 파괴시키고 있는 한, 백약이 무효했다. 그래서 손을 수술 받아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던 그는 새롭게 이식하여 꿰맨 힘줄들을 순식간에 망가뜨려 버린 것이다. 발의 최대 적은 가시나 못 같은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걸음으로 인한 자극이다. 그로인해 감염이 생기고, 감염으로 인해 발가락이 조금씩 조금씩 없어지는 것이다. 모든 상처는 나병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고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수술 전에는 용케도 상처를 입지 않던 소년들이 때로 수술 후 더 많은 문제 속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손에 새로운 기동성과 힘을 회복한 그들이 더 열심히 일하기 쉽고, 더 많은 위험을 무릅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통은 ‘자아’라고 하는 일종의 경계를 제공하면서 그 사촌 격인 촉감과 더불어 몸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에게는 고통이 정상적으로 제공하는 기본적인 자기 보호 본능이 결여되어 있다. 고통은 인간의 신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병은 단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했을 뿐이고, 그것을 넘어선 모든 손상은 무고통의 부작용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료인들은 나환자들에게 고통이 없는 삶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최악의 문제는 고통이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해야할 일은 고통 없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영국의 생물학자 니덤은 보통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 사소한 상처를 입고, 일생 동안 약 4천 번의 상처를 입는다고 추정했다. 엄지손가락을 비롯한 손가락의 상처가 모든 상처의 95%를 차지하는데, 나환자들은 상처 입은 손을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종종 심각한 손상에 이른다. 환자가 상처 난 발을 계속 딛고 걸어 다니면, 감염이 시작되고 발 전체에 퍼져 뼈나 관절들을 상하게 되고 결국 절단해야 할 것이다.4) 건강한 사람은 끊임없이 걸음걸이를 바꾸는 반면 발이 무감각한 사람은 결코 걸음걸이를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나환자의 걸음걸이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고통이 전달되는 통로도 침묵을 지켰고, 중앙 신경 체계도 적응할 필요성을 감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2.5㎠당 4.5kg이나 9kg, 또는 13.5kg의 동일한 힘이 발 표면의 동일한 부위를 계속 두들겼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발바닥에 궤양이 생긴 것을 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위험을 알리는 몸의 반응인 고통은 내 주의를 끄는 데 필요한 소리라면 어떤 크기의 소리도 다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의 ‘외침들’을 잃어버렸다. 그들에게는 고통이라는 필수불가결의 장치가 결여되어 있었다.5)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의 사례가 백 건도 넘게 의료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고통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이미 고통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좀처럼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개 그것에 분개한다. 일단 고통이 경고의 신호가 아니라 원수처럼 생각된다면, 그것은 알리는 본연의 힘을 잃는다. 고통의 메시지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침묵하게 하는 것은 불길한 소식을 듣기 싫어 화재 경보 장치를 끊는 것이나 같다. 고통은 절대로 외부에서 침투하는 적이 아니다. 나의 몸이 나에게 어떤 위험을 알려 주기 위해 파견한 충성된 전달자이다. 고통의 신호를 침묵하게 하려고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은 사실상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세계 인구의 5%에 해당하는 미국인들이 세계에서 생산되는 마취제의 50%를 소비한다. 만일 과학자들이 정말 완전한 ‘무고통’의 약을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렵다. 우리는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고통에 귀를 기울인 다음 그것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류머티스성 관절염 환자들은 고통 때문에 자신들의 손과 발이 온전하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고통을 없애달라고 호소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과도하게 복용한 나머지 뼈의 석회질이 없어져 손가락 마디마디가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그 딜레마는 고통을 침묵하게 하고 신체를 망가뜨리느냐, 고통에 귀기울이고 신체를 보존하느냐 하는 것인데 공평하게 경쟁을 해도 고통이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고통은 왜 불쾌해야 하는 것이며, 왜 지속되어야 하는 것인가? 고통에 대한 불쾌감, 바로 그것이 고통이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보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위험이 우리 몸을 위협하는 한, 자연적인 고통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지속된다. 우리는 그 신호를 꺼버릴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3부 - 고통의 경험
1. 고통의 의미
우리는 고통 없이는 잘 살아갈 수 없다. 고통의 경험은 세 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고통의 ‘신호’이다. 말초 신경의 말단에서 위험을 느낄 때 내보내는 경보다. 2단계는 척수와 뇌의 기저부가 수백 만 개의 신호들 중에서 어떤 것이 뇌까지 전달될 가치가 있는 메시지인지를 가려내는 ‘척수의 관문’ 역할을 한다. 척수가 절단되면, 하반신 마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절단된 척수 바로 밑의 말초 신경이 아무리 신호를 계속 보내도 뇌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고통의 마지막 3단계는 뇌의 상단부(특히 대뇌 피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사전에 메시지를 취사선택해서 반응을 결정한다. 고통은 신호, 메시지, 반응이라는 모든 과정이 완성될 때까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에는 고통을 이런 저런 방향으로 바꿔 가며 자각하는 능력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고통의 가장 중요한 면인 동시에 가장 다루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이 3단계에서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다면 고통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일 즉 고통을 주인이 아닌 종의 위치에 두는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고통은 가장 외롭고 가장 개인적인 감각이다. 고통은 사실상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고아와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고통이 사람의 개인적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돕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신경이 손상되어 정보의 흐름이 뇌까지 흘러가지 못하면 기본적이 자아감까지도 위태롭다. 나환자들은 그들의 손발이 실제로 죽은 거라고 생각한다. 팔다리가 제자리에 있고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뇌에는 실제로 느낀 이미지를 품기 위한 아무런 감각적 피드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마비된 손발이 나머지 신체에 속해 있다는 본연의 자각을 상실한다.
고통의 수수께끼
인간에게 있는 커다란 뇌의 전두엽들은 반성하고 해석하는 일에 관여한다. 대뇌 피질은 고통에 대한 뚜렷한 반응을 다루지만 전두엽은 그 반응을 수정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전두엽 앞쪽의 백질 절제술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큰 고통 대신 작은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백질 절제술을 받은 뇌는 더 이상 고통이 인생의 지배적 우선 순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피하려는 강한 반작용은 요구하지 않는다. 신호와 메시지 단계인 고통의 1단계와 2단계는 아무 방해 없이 진행된다. 그러나 마음의 반응 단계인 3단계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는 전반적인 경험의 본질을 바꾸어 놓는다.
플라세보는 유효 성분이 없는 심리효과용 약을 의미한다. 설탕 덩어리나 소금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런 위약들은 고통을 진정시키는 놀라운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플라세보는 고통을 통제하는 데 마음으로 반응하는 단계에서 마력을 발휘한다.
수족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잠깐 동안은 여전히 팔 다리가 있는 듯한 착각을 한다. 잘린 손이나 다리에 대한 기억이 뇌의 상층부 어디에 생생하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증상은 대개 점차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극히 드문 경우지만, 이러한 가상의 수족에 대한 착각은 장기적인 고통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의사는 고통을 느끼는 그 부분을 치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의 의의
인간의 몸이 고통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고통은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잘 고안된, 현저히 드러나는 특징으로 위험하다는 경고에 대해 우리가 반응하도록 강제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경고들이 의식적인 뇌와 관계하여 고통의 3단계를 우리가 경험해야 할 필요가 꼭 있을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고통이 주는 아픔으로 인해 존재 전체가 위험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보호에 대한 반응으로 고등한 뇌를 너무 두드러지게 연루시킴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두 번째 이익은, 불쾌함이 기억 속에 각인됨으로써 앞으로 언젠가 우리를 보호해 주게 된다. 우리가 혐오하는 부분인 고통의 바로 그 불쾌함이 고통을 언제나 효율적으로 만든다. 고통은 독특한 감각이다. 다른 감각들과 달리 고통의 감지기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위험이 남아 있는 한 끊임없이 의식적인 뇌에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른 모든 것을 무색하게 하는 이 감각은 일단 사라지고 난 뒤에는 가장 기억해 내기 어렵다. 고통의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을 중단해야 할만큼 비참하다는 것을 느끼고 지금 당장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뒤엎을 수 있다. 육체적 고통의 끈질긴 강요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바로 고통의 의도다.
고통은 자멸의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 그러나 또한 고통 자체도 파괴적일 수 있다. 고통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이 에너지를 약화하고, 우리의 전 생애를 지배할 수도 있다. 마음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고통의 3단계는 우리에게 고통에 대해 미리 대비하게 한다. 건강할 때 고통에 대한 준비를 해놓음으로 나중에 닥칠 고통을 미리 대비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최악의 시간은 그것이 공격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이다. 고통이 객관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회복 과정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므로 고통은 참아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고통이라는 언어로 우리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그럴 때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2. 고통의 세 단계 : 신호 - 메시지 - 반응
고통이 신체의 한 부분에 고장이 났다고 비상 사이렌이 울릴 때, 보통 사람이라면 무력감과 초조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능력을 덜 믿고 그 대신 망가진 부분을 고쳐주는 정비사 의사를 찾게 되고, 그를 더 신뢰한다. 그러나 고통을 처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 과정을 거꾸로 바꾸는데 있다. 우리는 의학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치유자는 인간의 신체라는 사실에 대해 환자들의 확신을 회복시켜줄 필요가 있다. 고통은 환자의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환자만이 의사를 인도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은 지혜롭게 사용되어 의학적인 면에서 인간의 종이 되어야 한다.
1) 1단계 : 상처 부위에서 나오는 고통의 신호
1단계에서의 고통의 신호는 크고도 끈질기게 아픔을 호소하기 때문에 그 메시지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고 행동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 행동을 바꾸지 않고 그 신호를 침묵하게 한다면 훨씬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분명히 아스피린 같은 진통제는 유익한 면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우리가 먼저 고통의 긍정적 역할에 관심을 갖고 그 다음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행동해야 한다. 주의를 다른 데 돌림으로 1단계의 고통의 신호들을 더 새롭고 참기 쉬운 것들로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
2) 2단계 : 전달 경로를 따라 이어지는 메시지
경피적 전기 신경자극기(TENS)는 본질적으로 고통을 제어하기 위한 현대식 접근법으로, 고통의 강도에 따라 자극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이 방법의 유익은 척수에서 나온 신경들은 뇌의 연수 바로 밑에 있는 비교적 좁은 통로를 지나는데 그 병목처럼 생긴 통로가 외부 감각들로 인해 막히면 고통의 메시지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심한 경쟁 때문에 수많은 신호들이 약해져서, 메시지로 바뀌어 뇌까지 도달하는 고통의 신호가 점점 더 줄어든다. 이 방법은 흔히 고통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진 두 가지 요소인 두려움과 걱정을 감소시킨다.
3) 3단계 : 마음의 반응
나환자들은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질병이 남긴 흔적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마저 잃어버렸다. 마음은 이런 무고통의 결과들에 대해 단지 괴로움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으로 반응했다. 고통이라는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고통’이 괴로움이 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뇌는 약학의 대가이다. 뇌에서 분비되는 마취제는 모르핀보다 만 배나 높은 진통효과가 있다. 뇌의 신경 전달 물질들은 고통을 제어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의 가능성을 열었다. 뇌의 신경전달 물질들을 인공적으로 제조해서 외부 간섭에 의한 고통을 더 잘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직도 초기 단계에 있고, 여기에는 많은 위험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의 요청에 따라 뇌가 만능약을 분비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뇌 자체에 있는 진통제를 자극하는 방법은 거의 무한한 잠제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두개골 속에서 심리학과 생리학이 만나는 것이다. 고통이 반드시 마음을 무디게 할 필요는 없다. 바바라 울프는 그의 책 「고통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통으로부터 돌려놓을 수 있는 활동을 권하였다. 만성적 고통을 정복하는 것은 고통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생산적 활동을 연습하고 증가하고자 하는 환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특정한 고통을 없앨 수는 없지만 덜 아프게 할 수는 있고 그럼으로써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비록 개별적인 고통이 선하지 않을 때도 분명히 있지만, 고통 체계 자체는 선하다.
최악의 경우
고통의 최악의 경우가 있다. 저자는 이것이 앞에서 말해온 고통 제어 기술의 대부분을 소용없게 만드는 고통으로, 암 말기에 따르는 고통과 같이 아무 유익한 목적도 없이 그저 쇠약하게 하는 고통이고, 환자가 죽음이 곧 임박함을 깨닫는 고통이다. 진행중인 암의 고통은 임박한 죽음을 계속 상기시켜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환자들 대부분은 고통이 삶 전체를 잠식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손쓸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분주하고 붐비는 병원 한복판에서 말기 환자들은 두려움과 지독한 외로움에 사로잡혀 죽었다. 이것은 의료업이 죽음을 얼마나 형편없이 취급하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는 돌봐줄 사람이 없을 때뿐이다.
시셀로 손더스 박사는 그녀가 1967년에 세운 호스피스를 통해 말기 질병에서 오는 고통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많은 병원에서는 고통에 관한 약을 처방할 때 PRN(for Pro nata:필요한 만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접근을 시도했는데 미리 조심스럽게 투약량을 결정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꾸준히 혈액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심각한 고통뿐 아니라 지나친 진정 작용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손더스는 환자 자신이 투약량을 조절하는 것을 시험했는데, 그 결과 말기 환자들이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환자들을 대부분 독방이 아니라 4인실에서 생활하게 했다. 가족들이 밤새 같이 있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도 배려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게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두려움이 아닌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호스피스를 방문하는 사람은 도처에서 생명의 흔적을 보았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 즉 질병 말기에 수반되는 심각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몸을 쇠약하게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환자의 생각을 분산시키고 의식을 전환하도록 해주고, 고통에 이바지하는 주관적 요인들(두려움, 걱정)을 진정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고, 또한 환자들이 자신을 희생자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있는 동반자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손더스는 돌보는 공동체를 창조한 것이다.
호스피스 운동은 의학의 초점을 치료에서 돌봄으로 전환했다. 생명을 연장하려고 인간적 방법을 쓰지 않기로 한 말기 환자들에게 사랑의 보살핌을 확대하고 있다. 의학적 치료의 범위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호스피스는 인간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존엄과 긍휼로 다루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대부분 직면할 가장 큰 최후의 두려움인 죽음의 공포와 그에 따라는 고통을 무력하게 할 수 있다. 대니얼 캘러헌의 말처럼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치료의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병들었을 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3.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
한스 셀리에 박사는 인생 말년에 그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인간에게 높은 스트레스를 가장 잘 유발하는 감정적인 반응으로 복수심과 비통함을 거론했다. 반대로 감사가 건강에 가장 유익한 유일한 반응이라고 결론지었다. 고통을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고통에 대해 복수심이나 비통함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의 몸이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언어이다. 신체가 고통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고통의 체계는 선하고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우리의 근본 신념을 흔들어 놓을 수 없다. 그들이 불평하는 고통 그 자체가 의사에게는 진단과 치료 과정을 결정하기 위한 주요 지침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암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치명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것들이 신체 일부를 고통에 덜 민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불쾌함은 질병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충성스런 방어 작용에서 생긴다. 신체의 가장 불쾌한 면도 신체의 건강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고통의 충고를 따르려 애써야 한다. 내 몸에는 고통보다 더 충성스러운 옹호자가 없기 때문이다. 감사를 권유하는 이유는 신체에 대한 사람의 근본적인 태도(마음의 산물)가 건강에 주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사하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통이 전해주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주의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의 깊게 경청할 때, 고통은 우리가 몸의 어떤 부분을 혹사하지 말아야 할지를 가르쳐 줄뿐만 아니라, 신체가 필요로 하는 긍정적 요소들을 넌지시 일러준다. 신체 조직은 대체로 활동과 더불어 번성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된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것은 생리학의 엄격한 표어이다. 초기 우주비행사들은 심각한 골다공증의 위험에 처해 있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중력상태인 우주에서는 뼈들이 운동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신체는 뼈들이 분명 필요 이상의 칼슘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므로 칼슘을 재분배하거나 소변을 통해 배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들은 신체적인 활동을 끊임없이 함으로 최대한도로 자신의 감각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나중에 예기치 않은 고통이 생길 때 잘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달을 위해 촉각의 자극이 필요할 바로 그때 반대로 아이들을 중립적인 감각들로 감싸주곤 한다. 자녀가 조금만 불편을 겪어도 지나치게 후한 동정심을 베풀곤 한다. 이렇게 함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녀들에게 “고통은 나쁜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고통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학습된다. 고통을 가라앉히는 현대의 기술은 일종의 문화적 퇴화를 가져와 고통에 대처하는 우리의 전반적 능력을 위축시켰다. 고통을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은 개개인들에게 미리 고통에 대비하도록 훈련시키는 길뿐이다.
어떤 합당한 목적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참는 사람들이 있다(다이어트). 반면 그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고통은 충격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제력을 가질 때 마음의 내적인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삶의 외적인 양상까지도 바꿀 수 있다.
고통에 대비하기 위한 최선의 한 가지는 비극이 닥칠 때 내 곁에 서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갖는 것이다. 광범위하면서도 밀접한 가족 제도 덕분에 인도인들은 고통을 혼자 겪는 일이 드물다. 서구에서보다 인도에는 분명 더 많은 고통이 있었으나, 고통과 고난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은 훨씬 적었다. (환자에게 더 이상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하면, 환자는 진통제를 맞을 수 있는 첨단 병원에서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자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둘러싸여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서구의 현실과는 매우 차이가 있다.) 말기 질병과 큰 고통의 가능성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내에서 그것들을 미리 직면하는 것이다.
4. 고통을 더하는 것들
의식적인 마음 안에서 고통을 대한 자각을 높여주는 반응들이 있다.
두려움
실험실과 병원에서 연구한 결과, 두려움이 고통을 더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거의 모든 사람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두려움을 경험한다. 의사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말하라고 격려해야 한다. 그래야 함께 그 두려움을 고통의 신호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고통과 마찬가지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좋은 두려움은 존중하기를 원한다. 좋은 두려움이 있으면 일을 너무 빨리 밀어붙이지 않게 되고 치료한 곳을 또다시 다치게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환자들은 재활 운동을 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고통에 대한 나쁜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한다. 그럴 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질 수 있고, 두려움이 줄어들면 고통도 결과적으로 줄어든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불행은 선택 가능하다.”
분노
반사성 교감 신경 영양 장애(RSD:Reflex Sympathetic Dystrophy)는 손이 뻣뻣해 지는 현상을 특수하게 일컫는 말이다. 이런 반사성 교감 신경 영양 장애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분노에서 발전될 수도 있다. 이것은 정신과 육체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교감 신경들은 혈압, 소화, 심장박동 같은 무의식적 활동들을 관장한다. 그리고 전체 교감 신경계는 분노나 난처함 같은 감정적 영향에 매우 민감하다. 반사성 교감 신경 영양 장애에 걸리면 신경들이 과민 반응을 보이고 그 자체의 고통을 만들어 낸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장애에 대해 경고 신호를 주는 심리적 특징들을 밝혔는데 두려움, 의심, 정서적 불안정, 고질적 불평, 의존적 성격, 내성적 성격, 걱정, 염려, 히스테리 방어적 성격, 적대적 성격 등이다. 이런 특성이 있는 환자를 만나면 수술하기 전에 개인 상담을 하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엄밀하게 볼 때, 분노와 원한의 감정은 대개 환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사실이다. 분노는 스스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분노가 처리되지 않고 마음과 영혼 속에서 곪아서 터지면, 그 독소가 육신에 퍼져 고통과 치료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버니 시겔의 말대로 “미워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더 건강하다.”
죄책감
두려움이 고통을 증가시키고, 분노가 반사성 교감 신경 영양 장애 같은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과 더불어 죄책감이 고통이 영향을 미친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독특하게 저주받았다고 느끼는 나환자들에게는 죄책감이 정신적 괴로움과 혼합되어 있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만성 고통을 다루는 상담자들도 가장 힘들고 고통에 민감한 환자들은 죄책감이 깊이 뿌리 박혀 있고, 자신들의 고통을 당연히 형벌의 형태로 해석한다.
형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형벌을 받는 대상이 형벌 받는 이유를 분명히 알 때만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자기가 왜 벌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아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해롭다. 성경에서 형벌 받는 이야기를 보아도,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왜 벌을 받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부분 오늘날 겪고 있는 고통-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형벌 사이에는 전혀 밀접한 관련이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롬8:28).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기 위해 나와 함께, 그리고 나를 통해 일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외로움
외로움은 보통 고통과 함께 온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마음속에서 지각되는 것으로 독특하게 나에게만 관계되는 것이며, 누군가와 진정으로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어느 누구도 나의 육체적 고통을 지각할 수는 없지만, 참으로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진 누군가-가족, 친구와 같은-가 있다. 고통을 공유하는 것은 인간됨의 중심 의미로 볼 수 있다. 인간들은 최소한 인간답게 행동할 때는 동물들의 행동과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보살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고통과 치유에 실제적이고도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친다. 고통 가운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로움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종종 외로이 누워 있기 때문에 고통 외에는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6) 고통받는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 주는 일은 전문적 기술이 필요 없다. “누가 가자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환자들은 대개 조용하고 주제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필요할 때 언제든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사람, 계속해서 시계만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 껴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며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들과 가족들 옆에서 나란히 서 있는 자체가 본질적으로 치료의 한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무력감
로널드 멕잭은 “실제로는 사람들이 고통을 제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느낌만 주어도 고통의 수준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환자들은 그들이 무언가를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느낌으로써 고통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가진다. 종양학자 폴 해밀턴의 말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의사는 약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질병에 대처하는 능력은 환자 자신에게 있다. 의사나 보건 전문가들의 임무는 환자가 그 능력을 발견해서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어떤 확신에 집착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환자들을 지혜롭게 돕는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 것과 지나치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알고 있다. 칼 메닝거 박사는 만일 어떤 사람이 신경 쇠약이 시작되고 있다면, 그에게 할 수 있는 충고는 집 문을 잠그고 기찻길을 건너가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모든 환자 개개인의 치료 과정은 대부분 환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에 달려있다. 따라서 의학은 회복에 영향을 미치는 놀라운 마음의 힘을 동력화하는 방법을 찾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 지금까지 두려움, 분노, 죄책감, 외로움, 그리고 무력감이 고통을 강화할 가능성이 가장 큰 반응들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버니 시겔 박사는 세 종류의 환자가 있다고 말한다. 약 15% 내지 20%의 환자들은 죽고 싶다고 한다. 이런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는 심한 방해를 받는다. 그들을 아무리 낫게 하려 해도 그들이 계속해서 낫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약 60% 내지 70% 환자들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한다. 그들은 의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의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선택권이 주어지면 수술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나머지 15% 내지 20%의 환자들은 시겔이 ‘예외적인 환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거동하며 희생자 노릇하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때때로 다루기 어려운 환자들이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도전을 주는 사람들로 자신들의 권리와 다른 의사의 진단 요구하며, 절차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집단은 회복될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이기도 하다.
환자에게 중요한 심리적 정서적 요인은 희망과 낙천적인 태도이다. 의료인들이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 중의 하나는 희망이다. 이것으로 그들은 환자들에게, 내적인 힘이 있어야 고통과 고난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깊은 확신을 불어넣을 수 있다. 환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손을 내미는 것은 단지 의학적인 도움만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극적 질병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얻기 위해서다. 환자들이 손을 내미는 것은 바로 희망을 얻기 위해서다.
5. 쾌락과 고통
프로이드는 ‘쾌락의 원리’를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로 강조했다. 그러나 해부학자는 인간의 신체가 쾌락이 아닌 고통을 훨씬 더 강조한다고 본다. 피부의 약 2.5㎠당 아픔, 추위, 더위,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이 수천 개도 넘는다. 그러나 쾌락을 느끼는 세포는 단 한 개도 없다. 쾌락은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쾌락은 고통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쾌락은 감각 기관으로부터 나오는 정보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이 고통보다 훨씬 더 강하다.
고통 쾌락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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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
평온한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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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통 |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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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고통이 제공하는 보호가 없이는 삶을 쉽게 즐길 수 없다. 고통과 쾌락은 이상하게 얽혀 있다. 현대의 산업화된 서구 세계가 풍요 때문에 쾌락을 경험하기가 더 어려운 곳이 되었다. 역사상 오늘날만큼 고통을 제거하고 여가를 활용하는 데 성공한 사회가 없는데도 말이다. 만족은 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만족이 밖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고, 무언가 물건을 하나라도 더 사야 만족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풍요로움을 갖추고 있는 현대 세계가 지속적인 즐거움을 찾기에는 참으로 더 어려운 곳이다. 사회는 쾌락을 따로 분리시켜 다시 포장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쾌락의 자연적인 경로를 단축시켜 버렸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은 서로 협력한다. 고통과 쾌락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오는 것이 아니라 둘이 결합되어 쌍둥이로 온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더 큰 기쁨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더 큰 고통이 선행한다”고 말한다. 지속적인 쾌락은 우리가 투자해온 어떤 것 속에서 의외의 보너스로 주어지는 경향이 많다. 그리고 그러한 투자에는 대부분 고통이 수반될 가능성이 많다. 고통 없이 쾌락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섬김의 행위로서 자발적으로 고난을 선택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주는 과정에서 오히려 삶을 발견하며 사실상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만족과 평안의 수준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곧 인생(Lif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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