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내적치유

[스크랩] 5 상처의 파괴력: 과거지향적인 삶을 살고 미래를 파괴한다

힐링&바이블센터 2006. 5. 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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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의 파괴력:

             과거지향적인 삶을 살고 미래를 파괴한다


    상처가 없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상처에 대한 태도는 각각 다르다. 어떤 이들은 상처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심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어떤 이들은 상처를 숨겨두고 쉬쉬하면 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까짓 것...하면서 우습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상처로 인하여 계속 억눌림과 괴로움을 당하며 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처를 우리는 꼭 치유하여야 할까? 상처는 어떤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까?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여성은 상처와 동거하는 것이 썩 괜찮은 것처럼 살고 있다. 그 상처가 오랜 친구처럼 익숙하고 마치 자신의 일부처럼 되어 있어서 상처치유에 대하여 그렇게 반색을 하며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주 자기 연민이라는 깊은 늪에 빠지기도 하고 홀로 고독하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하면서 상처와 더불어 사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상처와 동거하는 것이 매우 매력적이며 예술적이며 철학적이며 시적(詩的)이며 고상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보게 되면 그 인생이 매우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이다. 그리고 과거 지향적이다. 미래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언제나 상처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상처와 동거하는 것이 썩 괜찮은 것이 아니고 상처와 굿바이하는 것이 썩 괜찮다는 것을 모른다.

 

    실제로 어떤 것을 건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건강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진정한 건강은 샬롬에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 샬롬은 단순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와는 다른 의미이다. 샬롬은 관계에서 나온다. 진정한 건강은 샬롬을 의미하고 이 샬롬은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 이웃과의 건강한 관계에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샬롬이 풍성하게 임하고 있을 때 우리는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처는 이 샬롬을 파괴한다.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그 뿐 아니라 상처는 병들은 과거, 괴로운 현재, 소망 없는 미래를 낳는다.

 

    어느 날 주일예배를 드리는 데 한 교인이 늦게 들어왔다. 우연찮게 뒤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보라색 스웨터를 입고 들어왔다. 나는 본래 보라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너무 예쁘게 보였다. 예배가 끝난 후 그 교인에게 달려가 “어쩜 그렇게 예쁘세요...”라고 마음에 느꼈던 것 그대로 말해주었다.

 

    친교시간이 끝난 후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나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교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저에게 예쁘다고 말한 저의(底意)가 무엇이지요?”라고 화가 나서 묻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예쁘다고 말한 저의가 무엇이냐? 나는 잠시 당황하여 내가 정말 어떤 저의를 갖고 말한 것이지...스스로 반문해보았다. 아니다. 그냥 예쁘니까 예쁘다고 했을 뿐이다. 예쁘다고 하는 것도 순수하게 받아드리지 못하고 그 배후에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인지 묻고 있는 그 교인이 순간 나는 병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칭찬도 칭찬으로 들리지 않고, 사랑한다고 해도 믿지 않고 예쁘다고 해도 저의가 의심된다면 그것은 분명 건강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어느 교인의 집에 가서 목사님이 심방설교를 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짧은 설교를 했다. 심방이 끝난 후 돌아오자 그 심방 받은 교인은 전화를 걸어왔다. “목사님, 우리 집에 오셔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을 강조한 저의가 무엇이죠?” 또 저의(底意) 타령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라고 전했을 뿐인데 그 말씀에 또 무슨 배후가 있으며 저의가 있을 수 있는가? 이 분도 병들은 것이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듣지 못하고 그 안에 숨겨진 저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건강한 사람들의 태도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든 태도들은 숨겨진 상처로 인하여 나타나는 반응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은혜롭게 듣는데 유독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 배후에 이상한 뜻이 숨겨져 있다고 의심한다면 목사의 설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듣고 있는 성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상처는 대부분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에 묶여 살게 한다.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고 과거 지향적 삶을 살게 한다. 또한 모든 인간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또한 치유를 바라보지 않고 상처만 바라보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 일생을 허비하게 된다. 그래서 상처의 치유는 꼭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사울과 헤롯왕은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고 그 상처로 인하여 일생 과거에 매여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두메 사람으로 이스라엘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던 헤롯왕은 이스라엘에게 왕으로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들이 가장 원하는 성전을 확장공사를 하였다. 헤롯왕이 종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스라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유다를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유대에 왕이 태어났다면서요?” 하고 질문하자 순간 헤롯왕은 상처에 직격포를 맞게 된다. 왕으로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유대에 왕이 낳았다는 소식은 헤롯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치유되지 않는 헤롯왕의 상처는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을 다 죽이는 참상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상처와 함께 동거하는 것이 그렇게 괜찮은 것이 아니다. 참으로 위험하고 손해 보는 일이다. 이 상처로 인하여 얼마나 행복하고 풍성하고 건강한 생활을 도적맞는지 알아야 한다.  단순히 익숙해졌다고 해서 오랫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고 해서 그대로 묵인한다면 많은 보화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땅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인생을 도적맞는 것이다. 이것을 사단은 노리고 있다.


주예수영성마을

http://cafe.daum.net/bride23




출처 : 아버지와 함께 쓰는 신학이야기
글쓴이 : 윤남옥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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