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리더십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

힐링&바이블센터 2011. 12. 25. 14:44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개국이래 리더십의 혼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지도자 중의 지도자라는 대통령에 관해서는 특별히 그러했다.
독재자로 불려지던 이승만, 경제 발전을 위한 강력한 드라이브 정책을 시행한 점에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군사문화를 이 나라 정치 경제 사회에 물들여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물이란 말을 들었던 사람, 경제대란 속에서 두고두고 원망을 받는 분까지 정말 여러 형태의 지도자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도자 문화는 별반 나아진 점도, 달라진 점도 없어 보인다.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리더십개념도 그렇고, 백성들이 갖고 있는 리더십 개념도 괴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만 나오고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계속 뽑지 않는가?

요즘 각종 신문 잡지의 사설과 칼럼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현재 반복되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의 문제들의 핵심에는 각 부서 지도자들의 '대통령 바라보기'라는 병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각 부서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소신있게 일하지 못하고, 모든 최후 결정을 위해 '보스 바라보기'를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나랏님의 한마디에 의해 좌지우지 움직이는 것은 이조시대보다 혹시 더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통령의 결단이 없으면 보스의 용단이 없으면 일이 안되고, 그 분이 결정할 때까지 손 놓고 있을 때, 백성들은 역시 그 사람이 없으면 일이 안된다며 그 사람을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한다면 그건 리더십이 뭔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사실 우리는 지난 세월들에 대해 역대 대통령들만 비난할 수는 없는 처지이다. 선거 과정이 어쨌든간에 우리 손으로 그들을 뽑지 않았던가? 군사 문화 욕을 하지만, 그 물 속에서 자라 온 사람들이 지도자로 세워지는 한 그 판은 반복되는 것이다. 절대로 참된 지도자를 길러내지도 못하고, 그런 사람을 세우지도 못하고, 그런 사람이 있어도 알아 보지 못할 뿐이다.

이런 건 정치 분야 뿐 아니라, 이 나라 경제 분야를 둘러봐도 똑 같다.
이 나라는 재벌이란 매우 막강하고 거대한 경제 구조를 가진 나라다. 그 구조가 하도 특이해서 외국 신문 잡지를 보면 재벌이란 단어를 번역할 수가 없어서, 한국말을 소리나는 대로 그대로 쓰기도 할 정도로 독특한 시스템이다. 이런 창립자 혼자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전권을 휘두르며 해도 되던 때가, 아니 그래야 효과적으로 벌 수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든지,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더 이상 가신 경영을 하면 안되는 전문성과 경쟁력의 시대가 오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영방식은 보스정치판과 다를 바가 없이 해왔고, 결국 IMF 같은 어려움 속에서 파탄이 나고 말았다. 그들은 "내가 이런 식으로 해서 이 기업이 이렇게 커왔고 성공한 건데 무슨 말이 그리 많냐? 경험이 없어서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가신 그룹들과 자기 방식대로 기업을 계속 밀어부친다.
변화를 꾀했던 일부 극소수 기업을 빼고는 대부분의 재벌은 적당히 조정의 폼만 잡다 말거나 족벌경영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결과 대우, 현대같이 설마 저런 대기업이야 하던 곳까지 모두 큰 어려움을 맛보고 있다.
이런 재벌 문제의 근본 원인과 해법도 정치계 문제와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건 리더십 문화의 문제이다.

대우자동차 해외 매각에 대한 베를린 자유대 박사과정의 정승일씨의 논문을 한 예로 보면, 이런 대우 사태 어려움의 근본원인이 기술부족, 자본 부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런 문제를 낳게 한 것은 회장의 독단적 경영 (우리는 그런 류를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라고 부른다.)과, 역시 주변 경영자들의 해바라기 현상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이 땅의 모든 해 아래 있는 것들은 결국 군대 문화와 잘못된 리더십 개념 속에서 병들어 있다. 조금 유식하게 현대언어를 쓰자면 수퍼맨과 카리스마적 리더를 꿈꾸고 있는 경영 관리자들 (혹은 중간 지도자 층들)과 백성들의 문제다. 욕을 하면서도 그 과정은 수단과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즐기고, 안되도 되게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하며, 그런 것을 기대하고 즐기는 군사문화로 이 나라는 온통 젖어 있다. 그런 깡패두목 같은 것을 '리더십이 있다'라고 말한다.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큰 소리치는 사람을 무서워 하며 떠 받드는 세상이며, 도로에 나가면 온통 빵빵거리고, 보험은 들어놨지만 사고나면 삿대질하고 소리쳐야 하며, 신호등 고장나서 새치기 안하고 차례대로 양보하다간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비켜주지 않아 결국 자기만 못가는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그럼, 교회는 어떠한가? 성경적 기독교 문화로 움직이고 있는가?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고통 받던 한민족을 향한 위로와 긍휼로 부흥이란 달콤한 꿀단지를 맛보던 시대가 있었다. 그 때 카리스마적이고 수퍼맨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 개척이 되고 Mega-church의 부흥을 맛보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서 이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때가 와도, 군대와 정치판과 경제판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다 거기서 배워서 그런거 같다. 요즘엔 군대도 많이 달라져가고 있는데...

그런걸 보면 교회 내에서 신앙적 열심은 특출나지만, 도대체 성경이 우리의 생활 방식을 바꿔놓은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교인들의 삶의 방식은 물론이고 교회 지도자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작금의 대형교회의 목회 방식이나, 후계자 문제도 그렇다. 운영방식도 정계 재계 교계 모두가 거의 다름이 없다. 정치에 나타난 세습제도와 경제계의 재벌 세습에 이어, 교회도 그 길을 뒤따르고 있다. 정계, 재계, 교계 모두가 현재 운영방식은 군사문화의 잔재를 버리지 못하고 있고, 리더십 역시 동일한 패턴이며 중간관리 층과 백성들은 3군데 모두 '보스 바라보기' 현상과 카리스마적인 수퍼맨이 나타나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메시아 증후군에 싸여 있다. 그래서 정계, 재계, 교계 모두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부터, 미래를 위해 중요한 succession 문제까지 똑 같은 원리로 움직이며, 그에 대한 변명도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건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이나 대교회 담임목사나 원리적으로 똑 같은 이유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이 시대의 화두는 '변화'다.

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없다. 리더는 누구인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Kotter교수나 수많은 학자들의 말처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다.그러나 기존계급은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에, 변화를 위협으로 느끼고 거부하게 되어 있다. 그건 지도자이건 백성이건, 교인이건 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개혁가였다. 요즘 CEO 예수란 책이 잘 팔린다는데, 예수님은 경영가는 아니었다. 그는 지도자였다. 왜냐면 그는 개혁가였으니까. 기존 종교계에 그는 너무도 위험한 변화를 요구한 분이었다. 그래서 기존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밉다 못해 죽이고 싶어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물은 또 다른 메시아, 수퍼맨, 카리스마적 리더가 아니다.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의 콜린스 교수도 이 시대 최고 기업들을 연구한 결과 영속적이고 영향력있고 성공적인 비전기업들을 뽑고 보니, 카리스마적 리더 때문에 그렇게 된 기업은 거의 없었다. 그런 기업은 초기에 잠깐은 반짝 했지만, 결국 그 다음 대에는 고난과 어려움이란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옛날처럼 총수님의 결정과 처분만 바라보다가 다 쓰러졌다.

주님은 기업만 Built to Last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교회도 영속적이고 든든하게 세워지기를 원하신다. 필요해서 세워지고 그 기능 다하면 없어지고, 또 세워지는 건 Para-church 들 뿐이고 그 시대의 부흥사와 전도자와 기관 지도자들 뿐이다. 교회와 교회 지도자는 그래서는 안된다. 교회가 비록 초기에는 카리스마적으로 보이는 분들에 의해 잘 세워졌지만 (사실 그건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다), 결국 든든한 지도자'들'에 의해 견실하게 주변에 영향력을 끼치며 계속 가야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선배 목사님들을 폄론하고 격하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희생적 목회와 헌신은 인정받아야 하고 훌륭했다.

그러나 그 때 그랬다고 지금도 그래야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 분들이 쓰임받아 일으켜 놓은 것이 모래성 처럼 파도 한 방에 사라져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로의 계승은 참된 성경적 지도력에 의한 계승으로만 가능해 지는 것이란 말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더 이상 음부의 권세와 세상 방식 운영과 세속적 리더십으로 인해 주님의 교회가 무너지고 안 겪어도 될 고통을 계속 겪고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개혁가이다.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제 살을 깎고, 껍질을 벗는 아픔을 마다하지 않고 미래를 꿈꾸고 그 비전으로 백성들을 매료시켜서 끌고 가며, 알차게 하는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그건 대통령 한 사람으로 안된다. 그건 목사 한 사람으로 안된다. 모든 중간 관리자와 백성들이 그런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그 때 진정한 만인 제사장 개념이 실현될 수 있다. 리더십 없는 성도들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시대에 '김육'같은 인물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월간 중앙은 문화공보부의 당시 이 달의 인물로 선정된 김육을 '조선 최고의 경제관료 잠곡 金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었다. 사회학 박사 이재광씨는 그 특집 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민생안정과 경제가 유학의 뒤켠에 나앉았던 조선시대에 金堉은 경제를 알았고, 경제의 중요성을 체득한 예외적인 관료였다. 그는 대동법의 확대실시를 평생에 걸쳐 목숨을 걸고 추진했으며, 화폐제도 도입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조선 후기 영 정조시대의 경제적 번영이 대동법과 화폐제도 정착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면 조선 후기 경제발전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작품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649년 11월. 임금을 바꾸는 큰 일을 치른 조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

당쟁과 나랏님 바뀌는 일에 몰두하던 당시 조정, 민생과 경제는 엉망이고 백성들은 2중 3중의 엄청난 각종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치 휘발류, 자동차세에 교육세 등 각종 세금과 보험료와 각종 요금을 서민과 월급쟁이들한테만 오지게 부과해 놓고 (그런데, 그 교통세와 교육세는 목적세인데 왜 목적대로 안 쓰는거지?), 정책 미숙으로 경제난이나 유류파동이 닥치면 해결이 안되니까 대뜸 요금 올려 세금 더 걷고, 못타고 못 키고 못쓰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대처하는 오늘날과 별로 다름이 없던 시대였다.

그 속에서 김육은 공납제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조선 최대의 역사(役事)로 꼽히는 대동법과 화폐제도란 개혁안을 들고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이재광기자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런 정국에 어떻게 보면 전혀 엉뚱한 상소 하나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우의정이었던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당시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만 한정적으로 시행되던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상소에는 ‘옳다고 생각되면 실시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벌을 내려 달라’고까지 쓰여 있었다. 관직은 물론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각오였다..."

물론 이 개혁운동은 조정의 명문대가의 반대에 부딪혔다. 왜냐면 지주계급인 그들의 안정을 위협하는 거였으니까...

결국 이 개혁이 시행되는 데는 백년대계라는 말처럼 100년이 걸렸는데, 이유는 기득권층인 지주들의 결사항쟁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의 공자처럼 여겨졌던 송시열 같은 인물까지 가세했고, 그들은“잠곡이 너무 설쳐댄다”, 상소 문구를 꼬투리잡아 “임금을 협박했다"며 하극상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라를 위해, 그는 임금이든 누구에게든 그 의지를 굽히지 않고 개혁을 강조했고, 가평군 잠곡에 가서 양반으로서 농사를 지으며 토굴 생활까지 했던 그는 70이 넘은 세월에 다시 복귀해 그 대과업을 완수해 내고야 만다.

이박사의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게다가 잠곡은 선천적으로 개혁가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의 혈관에는 뜨거운 개혁의 피가 넘쳤고 가슴에는 민중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 피와 애정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는 늘 자신이 김 식(金湜)을 낳은 청풍(淸風) 김씨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5대조 김 식은 중종 때의 혁신적 개혁가. 조광조와 더불어 개혁을 꿈꾸다 기묘사화 때 자결한 인물이다. 세차례의 난을 겪으며 도탄에 빠진 민중을 보면서 그는 더욱 선조에 대한 확신이 섰다.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산다는 것은 아주 쉬운 논리였다. 그러나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층이 있는 한 요원한 길이었다.

민중에 대한 사랑, 국가 부흥, 개혁. 이 세가지는 결국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하나였다. 그리고 정의와 목숨을 건다는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절대절명의 수단이었다. 동시에 사리사욕과 당리당파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개혁가의 피와 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성향은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고, 또 그에게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혔다."

개혁가는 예나 지금이나 비난을 받고 모함을 받고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세우셨듯 그런 사람들을 세우신다. 결국 그의 대동법은 시행되었고, 그 결과 온 백성이 기뻐했고, 나라가 안정되자 시종일관 대동법을 반대했던 송시열조차 “대동법으로 만백성이 기뻐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곡이 평생을 걸고 추구했던 대동법은 그의 '사후'에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길, 그것이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이 리더십의 비전에 의한 삶이리라.

김육의 업적은 시대를 초월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리더십이라 여겨진다. 그는 임금도 대통령도 아니었지만 나라를 바꿨고 백성을 살렸다. 위치와 지위가 아니라, 영향력으로 인해 그는 참 리더라 일컬어질 수 있다. 그의 글을 모은“잠곡선생유고집”에 실린 다음과 같은 말은 특별히 내 가슴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신하가 나라에 봉사하는 길은 진퇴를 명백히 하는 일이다. 마음이 변해서는 안된다. 필요할 때 물러나는 것이나, 반대로 없어도 좋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죄다. 나라에 유익한 일을 못할 때는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투철한 포부를 다 펴지도 못한 상태에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그토록 만류해 오늘까지 왔다. 거기에는 철석같이 굳은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국가를 중흥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상통했을 뿐이다.”

이 땅에는 비전보다도 가치관보다도, 의리가 앞세워지고 있다. 야쿠자 깡패 조직도 아닌데 대의보다 의리와 충성이 앞세워지고, 나이와 계급으로 밀어부치는 군사 문화와, 재림하실 예수는 무시하고 당장 우리를 구해줄 메시아 병에 걸린 백성들에 의해 이 사회가 끌려가고 있다.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그건 누구 말대로 패거리 집단일 뿐이다.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이란 죄다 군대 지휘관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고, 인간관계가 좋다는 것은 아첨과 술수에 능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것이 이 시대의 리더십 개념이다. 그러다보니 필요한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의 방식과 판치는 부조리에 질려 해외 이민, 개인사업과 벤처기업한다고 물러나고, 무능한 사람들은 철밥통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자리를 붙잡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텔레토비는 아니지만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다.

교회에도 의식있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고 (기도'나' 한다며) 입을 다물고, 능력있는 사람들은 개척교회 한답시고 물러나고; 기득권 세력으로 여겨지는 장로 집사 목사들이 주요 직분과 자리에 안주하며 각종 결정에 목소리를 높이고, 마땅히 해야 할 전도와 양육 같은 '사역'은 하지 않는 일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선비 김육의 말처럼 오늘날에도 군신의 의리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나라를 위해, 오직 경제와 백성을 위해, 오직 교회를 위하는 참된 비전 앞에 헌신하는 참된 리더들이 사회와 교회 안에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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