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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 7- 21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8. 11:12


제목-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본문- 요한일서 4: 7- 21

20, 3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였는데, 그 중 1위가 바로 ‘넌 할 수 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부모님이나 친구로부터 긍정적인 말, 할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가장 목말라 하고 있음이 확인된 셈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그의 어머니의 격려가 그를 세계적 발명왕으로 우뚝 서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보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황당한 일로 어이없게 만들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조롱했지만, 그 때마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늘 이런 말로 그를 위로 했다고 합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엄마는 널 믿는다....."

가장 존귀한 인격으로 지금까지 모든 인류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슈바이처는 음악, 철학, 신학, 의학 등 박사만도 헤아릴 수 없었을 만큼 학문적 깊이와 명예의 다양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문명 사회를 등지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슈바이처를 그렇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슈바이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단다....."

교육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이 맨발로 뛰노는 마을을 지날 때면 유리 조각들을 말없이 주워 주머니에 넣고 간 것으로 유명합니다. 모든 교육자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자랄 때 늘 어머니께서 이렇게 그를 축복했다고 합니다. "애야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기도의 어머니 덕분에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 한 마디가 생명을 살리는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6장 6- 7절은 말씀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그렇습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자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6장 4절에서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훈계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훈계를 흔히 잔소리라고 그럽니다. 요즘은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왜 잔소리를 설교에 빗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설교가 잔소리로 들린다면 큰 일이지요? 훈계를 못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도둑놈도 자기 자식은 나랏님처럼 되라고 훈계한다지요? 훈계를 못해서 자식이 잘 못 되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교양입니다. 주의 교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젊은이가 반듯하게 자랐으면 우리가 뭐라고 칭찬합니까? "야, 그 친구 참 교양이 있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는 뭐라고 그래요? 호남 사투리로는 "싸가지가 없다"고 그러지요. 그런 사람을 만나 기분이 별로 안좋을 때 우리 권사님 중에 잘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 어째 기분이 껄쩍지근 허구먼...."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라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가르치되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는 거예요. 그런데 입으로 가르치는 훈계는 10%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교양인데 자녀들의 인격과 신앙에 90% 이상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활신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일날만 되면 예쁜 옷 입히고, 예쁜 모자 씌우고, 예쁜 신발 신기면 아이들이 물어보지요. ‘엄마 어딜 가는데...?’ ‘예수님 만나러 교회 가는 거야’ 그 아이들 머릿속엔 교회 가는 날은 깨끗한 옷 입고 머리 땋고 최고의 모습으로 주님 만나는 날로 각인이 되겠지요. 그렇게 훈련이 되야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주일날 예배를 참석할 때는 정장을 입을거 아니겠어요?

주일날도 시장 갈 때 입는 옷과 별 다를 바가 없다면 그것은 큰 문제 아닙니까? 아이들은 교회와서 떠들고 노는 것 같아도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출입하면서 배울 것은 다 배우는 줄로 믿습니다. 어릴 때 그 마음속에 주어졌던 도전들이 그 아이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의 교양입니다. 생활신앙을 통하여 믿음의 부모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혹 부모가 싸울수 있지요. 어떤 부모는 결혼 40주년이 되도록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면서 자랑삼아 말하는데, 상담심리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지요. 어느 신혼부부가 결혼 후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자신의 농장에서 말을 타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말이 말을 잘 안 들으니까 하는 말이 "하나" 하더랍니다. 그렇게 세 번째가 되니까 말없이 말에서 내리더니 총을 꺼내 머리를 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신부는 그 날 이후, 한번도 남편에게 대들지 못했답니다. 말 다툼 하기 시작하면 남편은 "하나" 하고 경고를 주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더 싸우겠습니까? ‘아이쿠 이 남자하고 살다가는 총에 맞게 생겼구나’ 그들 부부는 몇 십년을 살았지만 부부싸움 한번 안 했다는 것이지요. 결국 부인에게 심각한 심리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겹쳐 상담가를 찾아 심리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가 살면서 싸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제는 자식들 앞에서 어떻게 그 문제를 원만하고 지혜롭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해요. 그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싸울 수 있지만, 엄마, 아빠가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하는가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료 목사님들이 가끔씩 저보고 목회를 잘 한다고 그래요. 저는 그 평가가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왜 동역자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할까?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찾았습니다. 바로 아버님께서 42년동안 목회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자랐기에 충분한 목회실습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교인들과 교인들과의 문제가 발생할 땐 어떻게 중재하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갈등을 겪을 땐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가를 몸으로 체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글 "미학"에서 이런 말합니다. "예술이란 모방에서 시작한다" 그렇습니다. 창조는 그 다음입니다. 지금 미술대학에 가보면 17- 18세기 때의 인물화 데생하는 것도 벅차하지요. , 중세에 하던 것 흉내내는 것도 큰 실력이라고 그것 가지고 대학 입학 시험보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방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옛 선현들은 좋은 것은 흉내라도 내라고 했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사랑과 용기와 실천적인 것인 줄 믿습니다. 그것을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의 교양으로 가르쳐라.

젊은이들에게 또 물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을 존경하십니까? 놀랍게도 대부분이 존경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고맙게는 생각하지요. 키워주었지요. 등록금 대 주지요. 먹여주지요. 때마다 옷 사 주고 휴대폰 사 주니 고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지는 않는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같이 살아보니까 부모의 삶이 본받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식에게 부모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 부모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성공한 셈이지요. 다른 사람한테 인정 받을려고 그러지 마세요. 자식들이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인생의 모델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계속된 반복어를 사용하는 것이 두 개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이 7절, 11절, 12절 등에서 반복되는 이유는 사랑의 상호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할 만 해야 사랑하지요.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지요" 그럴 듯한 말 같은데요. 사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고 있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할 때 "서로"는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관계로서의 서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께부터 준비하여 어제 종일토록 사회봉사부 구제위원회와 여선교회가 서로 협력하여 설을 맞이한 지역의 불우가정과 장애가정 90여 가정을 참기름 한 병과 떡국 떡 한봉지씩 담아 집에 까지 방문하여 나누어 드렸는데 얼나나 감사한지요. 특히 장애우들이 사시는 곳은 이곳 소사구와는 상관없는 원미구에서도 오정구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곳이어서 우리 교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이지요. 다시말하면 교회나오라는 부담스러운 메세지가 담겨진 사랑이 아니라 그냥 전하는 사랑이기에 더욱 좋았습니다.

사랑을 베풀되 조건없이, 이해관계없이 나누는 것보다 기분좋은 일은 더 없는 줄로 믿습니다. 밤 9시가 넘어서 끝난 배달 사역후 집으로 돌아가시는 선교회장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피곤으로 가득할 터인데 말입니다. 사랑을 전하고 돌아설 때의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요. 사랑할 만 해야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 강조하신 말씀이 있어요. 19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먼저"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오면 보답으로 사랑을 하지 말고 너희가 먼저 하라는 거예요. 사랑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설에도 결단코 사랑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사랑하세요.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 18절에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어디서 생깁니까? 불순종에서 생깁니다. 불순종하고 나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나서 수풀에 숨어 버렸어요. 하나님이 찾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우리가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음으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왜 자꾸만 숨습니까? 두려우니까 숨지요. 그 두려움을 누가 주는 것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우리를 죄의 길, 불순종의 길로 가게 만들고 나서는 죄를 얻게 한 후에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숨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장엘 가도, 멀리서 목사님을 보면 반가워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주칠까봐 슈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 있지요. 저는 짖꿏게 쫓아갑니다. ‘아이구, 집사님 시장 나오셨어요?’ 도망갈 길이 없지요. 담배를 피우다가 저를 보고 얼른 담배를 잡은 손을 빼서 뒤에 돌렸는데, 계속 붙들고 인사하니까 담배가 점점 꽁초가 되어 손을 뜨겁게 달구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면 두려움이 생겨요. 두려움이 생기면 더 멀어집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멀어진 사람은 이유가 있어요.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거예요. 사단은 우리에게 미움을 주고, 사단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유혹을 주고, 그리고 죄 속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 라고 하십니다. 미움은 사단이 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우리에게 준 것이 미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마지막 절에서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느니라’

최근 "트로피 허즈밴드"라는 말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보았더니, 미국에서 생긴 신조어인데, 요즘은 남편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자기 일이 있기에, 과거 같으면 남편이 직장가면 아내는 집안 청소하고, 설거지 하고, 음식준비하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조간 석간 다 준비해 놓았다가 "신문" 그러면 신문 딱 갖다 바치고 " 담배" 그러면 재떨이까지 갖다 바치는 것이당연한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생활을 꿈꾸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화성으로 가야 합니다.

최근 '듀오'라고 하는 결혼전문업체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젊은이의 80%가 맞벌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단순히 맞벌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맞벌이를 할 경우에 아내를 위해서 가사나 육아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맞벌이가 아니라 실제적인 맞벌이 부부의 형태를 갖겠다는 것입니다.아내가 사회적인 지위로 인한 활동으로 인하여 늦게 귀가 할 수도 있고, 밤을 샐 수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아이도 돌보아주고 설거지와 청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의 생각은 아직까지 이중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결혼한 아들집에 갔더니 아들이 앞치마를 하고 열심히 부엌일을 하는 것이 맘에 걸리는 것입니다. ‘아휴 저게 얼마나 못났으면 남자가 부억일을 다 하나’ 그러면서 며느리가 원망스럽지요. 반대로 시집간 딸네 집에 갔더니 사위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일을 돕는데 너무나 이뻐 보이는 것이지요. 아들이 그러면 꼴불견이고, 사위가 그러면 이뻐 보이는 것이 쉰 세대의 심정 아닙니까?

운동 경기를 하면 우승팀에게 트로피를 주듯이, 아내들의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희생하고 협력한 공로로 남편들이 상을 받을만 하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 "트로피 남편"인 셈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기대를 가졌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의 남편들은 모두가 트로피 남편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은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있는 여성 사업가 50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30%가 트로피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그녀들의 성공 이유를 설명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제는 협력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디 가서 무슨 사랑을 하겟습니까? 부부가 사랑하지 못 하면서 성탄절에 종 치고 있으면 뭐해요? 적어도 우리 가정에서 사랑의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는 심정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선교회의 사랑의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든지, 우리 교회에서의 사랑의 주도권은 우리 지역이 맡는다든지 하는 아름다운 결심들이 새해에는 쏟아져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는 교회가 된다면 오늘날 교회는 다시금 세상을 향한 영적 주도권을 회복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피 흘리셨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 줄 믿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사랑 실천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사랑 할 만 해서 한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먼저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머뭇거린다면 언제 사랑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먼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기억하며 주님, 이 한 해에도 사랑의 주도권을 가진 성도요, 교회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