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4장12-21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2000년 02월 27일 곽선희 목사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매일같 이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 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 다. 특별히 이 세상이 향방없이 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은 미래학자의 말 치고 맞아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치 럭비 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 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 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 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 습니다. 어쩌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더 확실하게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 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 노래라고 하는 것, 노래라고 하지 않았죠. 소리라고 했죠. 소 리, 가락, 그렇게 했습니다 만은 그 다음에 뭐 자꾸 변하는데 트로트, 재즈, 락앤롤, 비틀즈,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요새 와서 테크노. 아무리 제가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 려고 해도 이게 정말 노래인가, 이 발악인가 노래인가 알 수 없어요. 아무리 좋아지려고 해도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저는 제 나이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합니다만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노래, 어느 나라 노래든지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 떠 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 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 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 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되요.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무서운 맹수들도 한번은 사랑해야 생명을 생산합니다. 또 사랑 속에서 생명 이 자랍니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 사랑하는 걸 보면 신기합디다. 그 렇게 사랑해서 생명은 태어나고, 키 워나고, 자라납니다. 그런고로 생명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옛날 책이나, 혹은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는 이것 을 가마에다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 얘기니까 그저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가마꾼이 색시를 태우고 앞에서 가마꾼이 메 고 가고 뒷사람이 또 메고 갑니다. 이런 경우 앞에서 가는 사람은 앞을 내다보며, 앞을 환히 보면서 가마꾼 이 가마를 메고 갑니다 만은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입 니다. 앞에는 가마가 꽉 막았는데 이걸 붙들고 갑니다. 이래서 옛날 어른들은 이걸 이렇게 설명합니다. 앞에 있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 딸려 가는 가마꾼은 믿음이요, 가운 데 있는 색시는 사랑이라고. 그래 서 신랑집에 가면은 이 두 가마꾼은 물러가고 가마는 해체됩니다. 그리 고 신부만 신랑 방에 들어갑니다 그 런고로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그렇 게 옛날 어른들은 비유해서 설명했 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 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때는 심지어는 죽음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참 사랑에 감격 하면 죽는 문제가 하등의 문제가 되 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 입니다. 월남전 때에 있었던 실화 입니다. 전세가 불리해 가지고 일 선에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후퇴할 때가 이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 후퇴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총에 맞았습니다. 뒤에서 쏘는 총 에 맞아서 지금 비틀거리고 있습니 다. 이렇게 후퇴 먼저 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보니까 저기에 비틀거리고 쓰러져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 은가, 여기서 이 사랑하는 친구 하 나가 그 총알이 비오듯하는 가운데 를 뚫고 들어가서 저걸 구출하겠다 고 하니까 소대장이 말렸습니다.
"이미 총을 맞았고 피를 많이 흘렸 고, 저 사람은 살지 못한다. 굳이 네가 거기에 들어갔다가 너까지 죽 을 거 없지 않느냐? 가지 마라"
그 랬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거기 서 손을 들며 쓰러져있는 그 친구를 바라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대로 그 총알 속을 뚫고 들어가서 친구를 업고 나옵니다. 업힌 친구 는 귀에다 대고 자기를 업고 가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빙그레 웃으 면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나는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아무 여한이 없다"
그리고 죽 었어요. 죽은 시체를 업고 와서 내 려놓을 때에 소대장이
"거 봐라! 너 그거 죽을 사람, 어차피 죽을 사 람 살리려고 하다가 너까지 죽을 뻔 했다"
그럴 때에 이 친구는 말했습 니다.
"아닙니다. 내 친구는 내 등 에 업혀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참 사랑!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면 뭐 고생이 다, 질병이다, 문제가 되지 않고 죽 음까지도 넉넉하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에요. 결국은 사랑입니다. 이 귀한 사랑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예요. 둘째는 사랑이 병들어서 문제예요.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 에요 병들었어요. 또 사랑에 거짓 이 문제입니다. 사랑에 속았어요.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 게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 도 있습니다. 사랑의 무지가 문제 입니다.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사 랑을 모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사랑의 Discommunication입니다. 사랑이 통하질 않습니다. 분명히 사랑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의사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 랑이 절단됩니다. 그 문제는 내가 믿질 않기 때문에. 분명히 사랑하 고 있고 사랑 받고 있는데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되고, 사 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사랑을 모르면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의 원초적 속 성을 설명하는 귀중한 말씀이 이어 집니다. 사랑이 중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이 참 사랑의 의미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 이 참 사랑으로 그 의미를 다시 찾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 랑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은 위대한 말씀 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 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여러 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느껴봤습 니까? 우리는 간간이 결정적 시간 을 맞습니다. 어떤 경우에
"맞아,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 고 크게 깨달 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세상 은 달라집니다. 세상 역사가 바뀝 니다. 삼라만상이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완전히 사랑의 세계 를 보게됩니다. 제 개인 얘기를 해 서 미안합니다 만은, 전 어렸을 때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는 한 번도 맞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 버지로부터는 매를 많이 맞았습니 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만은 어떨 때는 왜 이렇게 자꾸만 때리시나 좀 불만도 많았습니다. 저는 날짜도 기억합니다. 열일곱살 되던 때, 그 때 마지막으로 맞았습니다. 그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잘못이 아니었 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슨 반항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명 도 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맞았습 니다. 저를 때릴 때에 어머니가 말 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가실 때에 딱 붙들고 한 마 디 하시는 것을 제가 문 안에서 들 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들을 사랑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
오 늘은 분명히 당신이 잘못했는데 왜 다 큰애를 말로 타이르지 않고 때리 냐고, 아버지는 이렇게 조용히 대답 합니다
"자식은 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무슨 말을 . 그렇게 하느냐고, 사랑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지. 저 는 문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사랑 하긴 하는가보다. 그때부터 생각을 다시 돌리고 보니까 정말 아버지의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신 거예요. 과거도 미래도, 아버지는 엄청나게 나를 사랑했어요. 사랑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어 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수 용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말씀을 듣습 니다, 사랑의 계시를 봅니다, 사랑의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다 하나님의 사 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사랑의 뿌리요, 사랑의 원초적 생명력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 니다. 자 그리고 오늘 성경은 우리 에게 일러줍니다. 그가 먼저 사랑 했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사랑은 다 철 난 다음의 사랑입니 다.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네 살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여러분 젖 먹던 생각이 난다면 그 사람은 다섯 살까지 먹은 사람이요. 결국은 가 장 소중한 사랑은 네 살 전에 있는 겁니다. 그 모든 소중한 사랑은 기 억에 없어요. 그런고로 사랑은 깨 달으면서부터 사랑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모르고 있어요, 엄청난 사랑 을 받고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래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사랑이 없으면 세상에 당신이 존재하질 못 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 나를 사랑하시고, 벌써 오래 전 부터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 과 원수 되었을 때, 내가 아무 것도 모를 때 그는 나를 사랑하셨어요. 나는 때때로 내 손을 내밀고
"여기 다가 내가 원하는 걸 주세요. 그래 야 사랑이 아닙니까?"라고 고집을 피우지만,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주시지 않는 것이 사랑이죠. 우리 는 자녀들이 뭘 달라고 할 때에 부 득불 가졌던 것도 빼앗을 때가 있어 요. 왜? 빼앗는 게 사랑이니까. 철 난다는 게 뭡니까? 철이 나고 부터는 그게 아니죠. 빼앗는 것도 사랑이고, 때리는 것도 사랑이고, 잔 소리도 사랑이고.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게 철이 난 것 이죠. 이제부터 알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상으로서의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받은 사랑에 만족할 뿐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타 임즈가, 뉴욕 타임즈가 베스트셀러 로 제1위로 뽑은 책 한 권이 있습니 다. Chicken Soup for the Couples Soul 이라고 하는 그런 책인데요.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 니다. 수잔 앤드슨이라고 하는 아 주머니가 있는데 설흔네살입니다. 직장여성입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서 그는 실명하게 됩니다. 장 님이 됐습니다. 참 마음이 괴로웠 지만은 1년 동안 치료받은 다음에, 그냥 집에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 직장에서 잘 받아주어서 다시 직장 에 나가게 됩니다. 버스를 타고 직 장에 나갈 때 남편이 동행해 주었습 니다. 참 공교롭게도 남편의 직장 과 자기 직장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 남편은 일찍 떠나서 자기를 데려 다주고 그리고 다시 자기는 자기 직 장으로 갑니다. 이렇게 얼마동안을 했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이렇게 말 합니다. 남편은 군인인데요, 여보, 내가 늘 이렇게만 할 수가 없구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어 차피 당신은 언젠가라도 혼자 다녀 야 되겠는데 오늘부터는 혼자 직장 에 나가면 어떻겠냐고. 이 아내는 그때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 를 데려다 주는 것이 귀찮은 모양이 지?' 지겨우냐고, 내가 살아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하냐고, 짜증을 냈습니 다. 남편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러면 내가 도와주마 했는데 도 이 아내는 화가 났어요. 아니라 고 나 혼자 간다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직장에 나갔습니다. 하루 나 가고, 이틀 나가고, 보름동안을 나갔 습니다. 어느 날 버스운전사가 이 렇게 말합니다. 운전기사가 말하기 를
"아주머니, 참 복이 많으시네요. 부럽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아니 제가 이제 시각장애자인데 뭐가 이 렇게 부럽냐고 그러니까
"아닙니다. 아주머니가 여기 버스에서 내려서 저 사무실에 들어갈 때, 그때까지 저 밖에서 잘 생긴 군인 남자가 당 신을 매일같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어갈 때 손을 흔들 었습니다"
그때에 이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남편이 나를 이렇 게 혼자 보내놓고 뒤따라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뿐이지요. 이미 내 주변에는 벌 써 사랑으로 충만한 거지요. 문제 는 깨달음이 없는 거요. 내 마음이 완악해서 내 마음에 사랑의 기본 요 소가 없어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 거죠. 오늘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벌써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이 뭐냐 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 니다.
"네가 내게 대하듯 나도 네 게 대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율법이요 사랑이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하든 말든 관계없이 나는 너 를 사랑한다"
독선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 할 것이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참 사랑은 이것들이 아닙니다.
"그리 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여 러분 자 녀를 사랑하십니까? 자녀 사랑해서 효도 받고 싶습니까? 자녀 사랑하 면서 실망하십니까? 사랑을 다시 한번 점검하세요, 재진단 해보세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을 대 할 때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세요. 그 고달픈 세상 을 살면서 나를 사랑하시던 그 어머 니의 사랑을 똑바로 생각하면 내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여건에서 자식 사랑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을 알고 감격할 때, 이제 누구를 사랑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성 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마땅한 것 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요, 그건 공로도 아니요, 그건 자랑 거리도 아니요, 보상을 바랄 것 아 무 것도 없어요. 당연히 사랑해야 죠. 여기에는 아무 보상적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그랬어요. 사랑의 채널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부모 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하나님도 몰라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나 를 알고 이웃을 아는 것이에요. 여 러분 부모의 사랑을 고루고루 받은 사람은 그 성격이 아주 부드럽고 좋 아요. 어렸을 때 사랑을 바로 받지 못한 사람, 이거 삐뚤어져 놓으면 이건 구제불능이에요. 이것처럼 불 쌍한 게 없어요. 사랑이 궁핍해서, 사랑이 모자라서. 이런 심리학적 결론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사람은 절대 로 자살을 하지 않는답니다. 할아 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좀 다르거든 요. 내 자식은 내가 때리는데 손자 는 못 때리거든요. 어느 쪽은 좀 맹목적이기도 해요. 그러나 이 사 랑을 받고 자란 자녀는 절대로 절망 하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의 힘이 요, 현대를 사는 생명력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두 려움이 없다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해도 두려움 이 없고, 이웃을 대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만사 아무리 바뀌어 도 환경과 아무관계 없습니다. 나 는 사랑에 취해 가지고 살아가고 있 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새 말로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유명한 주석가 벵겔(Bengel)은 4단 계로 설명을 합니다. 사랑도 두려 움도 없다면 무지함이요, 사랑 없이 두려움만 있다면 율법이요, 사랑도 두려움도 다 있다면 갈등이요, 두려 움이 없는 사랑 그것이 믿음이라고 요. 참 사랑, 그 안에는 평화와 용 기와 창의력이 있는 겁니다. 사랑 은 억지로 갈취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이 벌써 나를 사랑하시고, 십 자가 안에 계시된 그 무궁무진한 사 랑의 진리를 항상 새롭게 깨달아 가 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 리는 나 자신도 사랑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 님은 사랑이라 이것을 간증하며 항 상 자유하게 승리하는 그런 생을 살 아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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