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설교 자료실

사랑하며 요일4:7-11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8. 11:09

사랑하며 요일4:7-11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을 느끼고 받을 줄 아는 사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줄도 알았고 고백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볼 줄도 알고 느낄 줄도 알고 고백할 줄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줄도 몰랐고 느낄 줄로 몰랐습니다. 말라기1:2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가룟 유다는 사랑의 고백을 한 일이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사랑의 고백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사랑을 볼 줄도 알았고 느낄 줄도 알았고 고백할 줄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주목해서 보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 사랑의 이야기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남편 여럿을 두었던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사랑을 베푸신 모습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는 사랑의 장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도 자기를 못박는 원수들까지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요한은 또한 배반자 베드로를 예수님이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는 사랑의 장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사랑을 볼 줄 알고 사랑을 느낄 줄 알고 사랑을 평생토록 기억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받을 줄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자기를 특별히 사랑한다고 느끼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주 어린 애기처럼 예수님의 품에 안기곤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묘사할 때는 언제나 수식어 하나를 사용했는데 그 수식어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수식어였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 아마 이와 같은 요한의 언행에 다른 제자들이 질투했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요19:26). "막달라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요20:2).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요21:7).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 왕자 병에 걸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사랑 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특별하게 사랑하신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 새 가족 반과 기존 신자들 중에도 목사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한다고 느끼는 공주병에 걸린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사람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입을 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16) 라고 미친 사람처럼 외치며 다녔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노라 알았노라 믿었노라" 이렇게 외치며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볼 줄 알고 느낄 줄 알고 고백할 줄 알고 받을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왕자 병과 사랑 병에 걸린 사도 요한을 더욱 더 사랑했을 것입니다. 사랑은 쌍방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LOVE는 MUTUAL한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끼니까 주님은 요한을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요한은 12제자들 중에서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으면서 이 세상을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제자가 되었고 제일 마지막까지 제자의 일을 했습니다. 사랑을 느낄 줄 알았고 사랑을 받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아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랑을 계속해서 느끼며 유지할 수가 있습니까? 첫 사랑의 현장으로 자꾸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의 현장으로 자꾸 되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가로도 가 보아야 하고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었던 장소로도 가 보아야 하고 최후의 만찬 석상으로도 가 보아야 하고 십자가 아래로도 가 보아야 하고 디베랴 바다가로도 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건지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현장들로 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보고 느끼고 받고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대학생 때 주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느끼고 받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쓴 일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보고 느끼고 받고 고백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을 베풀고 나눌 줄 아는 사람)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녔습니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어느 사람보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지만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고 마지막가지 십자가 밑에 서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요한만큼 이웃 사랑을 강조한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은 입을 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중얼거리면서 다녔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사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 주면서 사랑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사랑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랑을 많이 체험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베풀게 됩니다. 사랑을 체험하고 입으면 마음이 부드러워 지고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따뜻해 지고 마음에 눈물을 머금게 됩니다. 사랑을 조금씩 실천하면 이기적이던 기질이 이타적인 기질로 조금씩 바뀌어 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차츰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져 갑니다. 저는 지난 20여년 동안 조금이라도 사랑을 베풀며 살기로 마음을 먹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 습관도 기질도 조금씩 바뀌어 집니다. 여러분들, 사랑할 수 있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성품과 사랑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기질을 가지도록 훈련을 해야 하고 그리고 계속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일본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합니다. 북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더 간절하고 뜨겁고 애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을 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물을 드려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사랑의 모델을 보여준 사람)
사도 요한은 사랑의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감동을 받고 배우고 실천을 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기가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실물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모델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서 구유에 태어나셨고 예수님이 사랑의 모델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9). "사랑은 여기 있으니...."(10).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탄생 사건과 예수님의 죽음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모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보내는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제물로 죽게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의 사건에 나타났고,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 우리들을 찾아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임재 사건에 나타났고,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다 부어 주신 죽음 사건에 나타났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되는 것으로, 거하는 것으로, 그리고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타내 보여야 할 사랑의 모습도 분명해 집니다. 이전에 설교한 대로 사랑은 되는 것이고 사랑은 거하는 것이고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과 같이 되는 것(becoming)입니다. 느낌도 생각도 생활 스타일도 그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찾아가서 거하는 것(dwelling)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고 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giving)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셀라 선교사는 우리 조선을 찾아와서 조선 사람처럼 되었고 조선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조선 사람들에게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다 주었습니다. 아펜셀라 선교사는 목포 해변에서 물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고 죽으므로 자기의 일생을 조선 땅에서 마쳤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3세는 아직도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린튼 선교사의 후손들인 스티브와 요한은 지금도 한국에 살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과 결혼해서 살고 있습니다. 스티브와 요한 린튼의 어머니는 지금도 전라남도 광주에서 결핵병원의 원장으로 한국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되는 것이고 함께 거하는 것이고 그리고 주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도 그 전 주간에도 몇몇 가정을 심방하면서 새 신자들과 함께 소박하게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사랑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행복을 느꼈습니다. 사랑을 주고 받을 때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좋아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되는 사랑 거하는 사랑 주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북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과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인 에로스적인 사랑에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쁘고 가치 있는 것만을 사랑합니다. 둘째 자기 만족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셋째 자기 성공과 자기 성취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적인 사랑에도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특징은 예쁘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둘째 자기 만족이나 행복이 아닌 상대방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랑합니다. 셋째 상대방 속에 아름다움과 가치를 만들어 내면서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이고 창조적인 사랑을 부어 주시고 도와 주셔서 이 사랑을 조금씩 이라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톨스토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서든지 신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곳에 신이 머문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느니라"(4:12). 둘째,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4:18). 심판대 앞에 설 때도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4:18).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서 사랑을 베푼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사랑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돈과 쾌락에 대한 사랑은 커지고 있는데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점점 식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받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눌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게 사랑의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기쁨을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처럼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