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푸시는 하나님
<본문> 요일 4:9-10
I. 들어가는 말
1. 우리 사람에게도 실제 인물과 이미지화된 인물이 있습니다. 요즘에 매스 미디어는 실물과 관계없이 image-making을 통해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내기도 합니다. 연예인들도 자기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창조된 이미지대로 행동합니다. 코믹 이미지로 창조된 사람은 언론 인터뷰를 할 때도 그렇게, S-라인 섹시 이미지면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미지로 만든 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은 우리가 가상으로 만든 인물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런 것은 없을까요? 실제로 우리는 실제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신이 만든 ‘이미지 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살이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 또는 성공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신적 이미지를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그 신을 섬깁니다.
3. 저는 지난 주에 예일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의 『베품과 용서』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자신 나름대로 신을 만드는데 대표적인 것이 흥정꾼 하나님과 산타클로스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1) 우리가 만든 흥정꾼 하나님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아들을 00 대학에 붙여주시기만 하면 평택대학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가 1000명이 되게 해 주시면 제가 교회 옆으로 이사오겠습니다.” 무엇이든지 거래를 하려면 양 편의 이익이 부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일을 사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준 재능, 마음, 충성조차도 다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과 거래한다는 말입니까? 또 하나님은 조건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지, 우리가 어떤 선물을 드리면 그것에 보답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와 거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2) 또 한 가지 우리가 자주 만드는 하나님은 산타클로스 하나님입니다. 산타는 조건 없이 줍니다. 성탄절 시즌에 길거리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백화점 문을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산타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사탕을 내밉니다.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그 아이가 도둑질을 해도, 부모의 말을 거역해도 상관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 중에는 “산타는 착한 아이를 알고 계신데”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산타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면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면서, 자신과 같이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합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죄에 대해서 심판합니다.
3) 동양에는 용왕님 하나님이 있습니다. 용왕님은 처녀를 좋아하시고, 잘 삐칩니다. 처녀를 바다에 빠뜨리면 잠시 잠잠하고, 먹을 것을 갔다주면 고기를 많이 잡게도 해주십니다. 용왕님은 무엇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에게 선물을 안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고, 아부든지 상관없이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용왕님은 정성을 좋아하고 제사 밥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합니다. 인간이 자기들끼리만 너무 좋아지내면 화를 냅니다. 자신의 존재를 파도를 치게 해서 배를 침몰시키는 것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런 용왕님을 사람들은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존경은 하지 않습니다. 단지 힘이 있으니까 조심하는 것뿐입니다.
4.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흥정하는 분도, 산타클로스도 용왕님도 아닙니다. 창조주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용왕님보다도 힘도 세고, 산타클로스보다 더 베푸시는 분이지만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고 어떤 것도 흥정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발적으로 베푸시는 분입니다. 주는 분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것을 얻어내려고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와 있는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II. 베푸시는 하나님
1. 먼저,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명백히 보여진 것입니다. 계시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베푸심이 어떻게 보여졌나요?
2. 첫째, 하나님의 베푸심은 자발적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여기에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어떤 의무 사랑이라거나,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어떤 이득을 본다거나, 아니면 누구에게 보이려고 한다거나 그런 뉘앙스가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우선성과 자발성을 말합니다. 또 본문 바로 앞 구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은 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베푸십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분의 성품이 바로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품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3.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자발적으로, 또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행하나요? 사실 우리가 남에게 주는 대부분의 것에서 우리는 그 보상을 기대합니다.
1) 우리는 결혼이나 졸업이나 좋은 일이 있는 사람에게 축의금을 줍니다. 또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조의금을 줍니다. 물론 이것은 의무도 아니고 세금도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빚’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한 액수대로 못 받으면 서운해 합니다. 또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얼마를 했는지 기억했다가 혹은 기록했다가, 그만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의금이나 축의금은 진실로 주는 것이 아니라 예금 아니면 빚 갑기인 셈입니다.
2)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받는 식사 대접은 어떤가요? 미국 신문 만평에 이런 기사가 났답니다. 어떤 사람이 지인에게서 호텔에서 좋은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감사하기도 했지만 그 호의를 되갚아야 할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대접을 받은 후 자신이 후에 갚을 값으로 80불을 주는 장면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받아도 부담이 됩니다. 암묵적으로 그것은 갚아야 할 빚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받으면 갈비탕 한 그릇이든지, 그것도 안 되면 우산이라도 하나 줍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베풂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입니다.
4. 만약 하나님의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이런 성격의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마음일까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을 암묵적으로 요구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요구하든지, 충성을 요구하든지, 때로 그것도 안 되면 건강을 뺏어가든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리 보험을 듭니다. 약간의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가끔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는 갚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람의 바른 응답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베푸심은 자발적인 것이요 아무 것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5. 둘째, 하나님의 베푸심은 그 목적이 받는 사람을 유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주시는 이유는 죽은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선물은 꼭 받는 사람을 유익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예를 들어 가난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장학금 전달식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여러분이 가난하지만 이 장학금을 받고 그 가난을 잘 이기세요.”하는 태도는 받는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열등의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받는 사람이 수치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베푸는 것으로 만족을 주지만 우리에게는 수취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볼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받는 사람들을 왜소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물은 “나는 위대하고 중요한데, 너는 보잘것없고 하찮구나”라는 메시지와 함께 다가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를 안정시킨다. 하나님의 선물은 “너는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네가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다가온다. 그런 메시지를 받으면, 자연스레 감사의 마음이 솟구친다.
2) 인간의 베풂은 사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도 많습니다. 어제 발간된 유명 일간 신문 기사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대학 갈래요’ 김민경에 작학금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꿋꿋이 학업과 봉사활동을 해 화제를 모은 부산 부일전자 디자인고교 3학년 김민경(18. 오른쪽) 양이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게 됐다.
박XX(왼쪽) XX그룹 회장은 11일 직접 부산을 찾아 김양에게 고교 과정의 남은 1년과 대학 4년간의 학자금 전액을 지원하는 장학증서를 전달했다.
김양은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단칸방에 살면서도 전교 1, 2 등을 놓치지 않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자기 용돈을 벌어 쓰는 것은 물론, 봉사활동으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지난 1월 한국방송(KBS)<현장르포 동행> ‘아빠, 대학 갈래요’ 편에서 소개됐다.
XX사는 이날 장학증서 전달에 이어 ‘꿈을 향한 도전은 아름답다’는 주제로 기획하고 있는 공익광고 모델로 김양을 발탁했다.
저는 이러한 선행을 행하신 대기업 회장님께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그 회장님과 회사는 아무런 이익이 없이, 혹은 아무런 이익을 바라지 않고 이일을 했을까요? 결과적으로 그 회사는 선행을 행하면서 회사 선전을 하고 또 그것을 기업 이미지 광로고까지 연결하게 되어 큰 이익이 된 것입니다.
6. 하나님의 베풂의 특징은 되갚음 금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그 분의 사랑에서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되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U-turn 금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1) 흔히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에 비유하는데 그것은 적절한 비유가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의 유비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기에는 마땅치 않다.”(61)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는 많이 주고 적게 받으려고 주는 것이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보답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에 공짜 사랑은 없습니다. 효를 바라고, 은혜를 갚기를 기대합니다. 자신이 베푼 사랑을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2)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되갚으려 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적 태도입니다.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자기의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갚는다는 것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과 독립되어서 우리의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아의 독립을 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되갚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III. 올바로 베푸는 우리
1. 우리가 베풀어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베푸는데 있어서 U-turn 금지를 명령하시지만, 그 베풂을 흘러 보낼 것을 말씀합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풂에 있어서 사람은 제조업이 아니라 유통업입니다. 하나님만이 제조업자이고, 모든 인간은 유통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유통업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 유통업을 하려면 제조업자로부터 물건을 받아야 합니다. 받은 만큼만 유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체험한 만큼만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베풂은 본래 자발적이지도 본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신 것을 깨닫는 한에서 그것을 내보내게 되어 있습니다. 11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구절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직설법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그것에 따른 우리의 윤리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령법입니다. 명령법은 직설법에 근거합니다. 직설법이 없으면 명령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베풀 수 없습니다. 직설법 없이 명령법만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볶음입니다. 행함 마음도 힘도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하라, 효를 하라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들볶는 소식인 것입니다.
3.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성경이 말하는 베풂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측은지심에 의해서, 혹은 잉여 생산물을 나누어 줄 수는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목숨을 바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베풂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베풂이 되려면 결국 자기는 손해보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하는 것인데, 인간에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든 베풂은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조금 줌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든지, 아니면 조금 베풀면서 마음의 안위를 얻든지, 아니면 기부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지탄을 모면하든지, 아니면 미래에 무엇인가를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주게 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주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를 위해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재탄생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처럼 베풀고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 없이 사람이 베푸는 것은 인간관계론의 베스트셀러를 낸 Dale Carnegie 식 베풂입니다. 그는 친구와 지인들에게 많이 주고 베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결국 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사실 이 지혜에도 대부분 도달하지 못합니다. 조그만 것을 얻으려고 움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큰 것을 얻으려면 손을 펴서 내밀고, 결국은 그것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사서 나중에는 큰 것을 얻데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이라는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부 팔렸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성공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하나님의 베푸심일까요? 또 우리가 따라야 하는 베풂의 모델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베풂은 그냥 아무 대가 없이 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주는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 속에서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 어떤 가난한 농부가 무 농사를 했는데 그만 집채만 한 무를 하나 생산해서 임금님께 진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농부는 농토와 보물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을 시기한 부자였던 형은 좋은 말과 귀중품을 임금님께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임금님은 자기가 최근에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무를 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동생은 순수한 마음에서 드려 상을 받았고 형은 욕심에 따라 벌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동생도 완전히 순수했을까요? 그런 상을 기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임금님에게서 칭찬, 혹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조금은 상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요? 만약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임금님이 아니라 “이 소자”에게 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베푸는 사람의 사랑은 바로 이 농부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IV. 나가는 말
1. 저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선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자아중심적이 됩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도 옛 사람이 살아 있어 믿지 않는 사람과 대동소의 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은 불신자를 폄하하거나 비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선행을 하고, 마음을 곱게 쓰더라도 불신자는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약간의 선행과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관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결국 자기가 중심에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신자는 무엇입니까? 신자는 이제 베푸시는 하나님을 따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생긴 사람들입니다. 자발적이고, 희생적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만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우리 마음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변화된 마음에서는 가능한 것입니다. 완전히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하지만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볼프는 이기심, 교만, 게으름이 하나님처럼 우리가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 가지가 한 순간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옛 옷인데 우리는 새 옷을 입었어도 옛 옷이 더 편해서 자꾸 그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 옛 옷을 매일 매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그 자비하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일찍 이런 꿈을 버립니다. 그것은 하늘에 가서야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베푸심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어떤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하녀가 외로운 나머지 앵무새를 키웠는데 그 앵무새는 그녀의 자식이자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앵무새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은 그 앵무새를 박제했고, 얼마 자지나 않아 그녀는 이 앵무새에게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그 박제된 앵무새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심지어는 그 앵무새가 죽을 때의 모습을 성경 말씀과 연관하여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늘이 열리면서 거대한 앵무새가 자신 위에 맴도는 것을 보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하녀는 외로움에 앵무새에 빠졌다가 급기야는 앵무새를 신격화한 것입니다. 앵무새가 외로움을 달래주는 애완동물에서 신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마음 속에서 신을 만듭니다. 우리 마음을 위로해 줄 신, 우리의 필요를 채워줄 신을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신을 우리 마음 속에서 지워버리고 성경의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베푸는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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