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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7장 1절 : 성결로서의 성화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2:49

3) 고린도후서 7장 1절 : 성결로서의 성화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삼는 것으로는 고린도후서 7장 1절이 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성화의 개념으로 주로 갖는 것은 ‘성결’이다.1) 아마도 성화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이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각적으로 되어지고 이후 점진성을 띤다고 한다. 그것은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때 그는 성화되었으며, 이후 신자가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의 성화가 있다고 본다. 2)
성화에 대한 견해는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신학자로 여기는 Augustine에서 보게 된다. 그는 칭의와 성화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았지만 칭의는 구원받은 죄인을 의롭게 하신 하나의 사건임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으로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서 성화가 칭의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사람의 성질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성화를 신적 생명의 새로운 초자연적 부여로, 즉 독점적으로 교회의 경계에서 성례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새롭게 주입된 능력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세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성례였다. 그는 성인이든 유아든 구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례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의 세례에 대한 이해는 죄 씻음 이외에도 성령의 역사로 인한 적극적인 성화의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진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연합되고 동화된다고 믿음으로써 성찬으로 성화가 이루어지며, 또한 이 성찬의 참여를 통하여서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어 봉헌되고 성화의 삶이 있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견해들은 중세기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다양한 성화의 견해가 나올 때까지의 성화의 개념은 신적 권능에 의한 성화적 은혜가 성도의 영혼에 주어져서 성도의 새 생명은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 인한 덕성들의 열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 개혁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진 성화의 개념은 구원받은 자에게서 칭의와 성화를 명백히 구분하여 전자를 사람의 법정적 신분에 영향을 주는 신적 은혜의 법적인 행동으로 간주하였고 후자를 사람의 내면적 성질을 변화시키는 도덕적 또는 재창조적 사역으로 간주하면서도 이 둘의 불가분리적인 연결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성화를 사람의 도덕적 성격 속에서 다룸으로써 선행들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은혜스러운 사역으로 간주되는 경향으로 갔다. 그것은 원래 성화는 영혼 속에서의 신적 사역이 변화된다면 생(生)의 주위(periphery)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 로마서 6장 12절, 고린도전서 6장 15절, 20절 등에서 성경은 성화가 신체와 영혼에 미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도 한 이유이다.
그에 따라서 성화는 즉각적이면서도 점진적인 개념으로 가져갔다. 비록 이를 다른 표현으로 묘사하였을지라도, 즉 J. Wesley가 성화를 초기의 성화와 온전한 성화란 단계에서 보고, J. Murray가 결정적인 성화를 말하고, S. M. Horton, H. C. Thiessen이 신분적인 성화를 말하고, 최영교가 지위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와 궁극적 성화를 말하는 등 다양하게 말해지고 있어도 결국은 즉각적이면서도 점진적인 성화라는 성격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화의 개념에는 성결로서의 성화도 말해지고 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인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도 바로 이 성결로서의 성화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러면 이 구절의 주석적 의미는 과연 성결로서의 성화를 말하고 있는가? 이를 헬라어 원문과 영어의 대조에 의해서 보도록 하겠다.
tauvta" ou\n e[conte" ta;" ejpaggeliva", ajgaphtoiv, kaqarivswmen eJautou;" ajpo; panto;" molusmou' sarko;" kai; pneuvmato", ejpitelou'nte" aJgiwsuvnhn ejn fovbw/ qeou'.;
;Since we have these promises, dear friends, let us purify ourselves from everything that contaminates body and spirit, perfecting holiness out of reverence for God.
여기의 ‘사랑하는 자들’인 ajgaphtoi는 직역하면 ‘사랑함을 입은 자들이여’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애(贖罪愛 )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들은 ‘이 약속’(ejpaggeliva")을 받은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약속’은 앞 절인 6장 18절의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하신 전능하신 주의 말씀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약속을 받은 자인만큼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두려움 속에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에서 두려움( fovbo")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공경)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ejpitelou'nte" aJgiwsuvnhn)고 권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앞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상관이 있다. 공동번역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고 하였으며, 표준새번역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 가운데서 완전하게 거룩하게 됩시다”고 하였고, 현대인의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합시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볼 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의한 관계성 이다. 왜냐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것이다”는 거룩성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에 의해서 갖게 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은 곧 그들의 거룩함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과 동일한 개념의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약속을 받았으니 육과 영(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권하는 것은 육과 영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거룩한 생활을 합시다’ 라거나,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라는 말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아버지가 되신 것에 의해서 자녀에게 갖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 거룩과 상반되는 악은 그 모양이라도 가까이하지 말고 멀리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거룩한 생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우리를 향하신 뜻을 성취하신다. 그것이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이다.
따라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는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인격 전체가 깨끗해야 될 것에서 성결 할 것을 요구하며 성화를 이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입고서 날마다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되며 의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거룩 속에 두시고서 사죄와 칭의의 은혜를 입히시며 우리의 생명을 보전해 가신다.
성결이란 우리가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거기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그만큼 성결한 사람이 되어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리고는 그 위에서 더욱더 성결해져야 가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마침내는 완전한 성화에 이르는 성결한 자가 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성경에서 ‘거룩’으로 말해지는 성화란 우리 자신에게서는 발견되어질 수가 없고, 내 안에 새로운 사람인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다시는 죄가 지배하지 못하는 정죄 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정죄를 받을 것이 없는 것을 두 글자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거룩’이요, 그 거룩한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이미 거룩한 자이다. 따라서 성화는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으로서의 거룩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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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성화’란 용어는 영어로는 ‘sanctification'이다. 이 용어는 헬라어 ἁγιασμος를 번역한 것으로 그 뜻은 ’거룩함‘이다. 그러나 모든 번역 성경은 동일하게 ‘sanctification'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가령 베드로전서3장 15의 “”너희 마음에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를 KJV은 ”But sanctify the Lord God in your hearts:“로 번역하였으나, NIV는 “But in your hearts set apart Christ as Lord.”로, 그리고 RSV는 “but in your hearts reverence Christ as Lord.” 라고 각각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가 kuvrion de; to;n Cristo;n aJgiavsate인데 ‘거룩하게 하고’인 aJgiavsate의 원형인 aJgiavzw의(to sactify)의미가 ‘거룩하게 하다’로 여기에는 ‘깨끗하다’, ‘성별하다’, ‘경외(숭배)하다’의 뜻을 포함하고 있어서 문맥의 내용을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한글개역)로 번역하기도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공동번역), 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높이며’(표준새번역) 등으로 번역이 다양하다. 그리고 그 번역에서 ‘거룩’의 공통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서 거룩 되어져 가는 것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경외하는 것으로서의 개념으로 거룩을 다루고 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거룩’은 성경 번역에서 ‘sanctification'으로 번역하기도 하는가 하면(YLT), 또는 ’holiness'로도 번역하였는데(KJV, NIV, RSV 등), 이를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거룩’으로 번역한 것을 사람들이 용어로 사용함에 있어서는 ‘성화’로 다루어 왔다. 이렇게 ‘거룩’이란 말은 ‘성화의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으며, 성화를 ’성결‘로 동일시하는 경향에 있다.

2) 칼빈을 비롯한 신학자들의 성화론에 대한 견해는 성화의 시작을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와 함께 보면서 완전한 성화를 영화의 단계에서 본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와 함께 되어진 것인 동시에 또한 성화의 과정을 요구하는 불완전한 성화의 개념을 갖는다. 그것은 L. Berkhop가 말한 대로 “성화는 온전하면서도 아직 발전되지 못한 새 사람으로서의 완전한 크기까지 성장해야만 한다.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는 예외 없이 부분적으로 완전하지만 의도되는 발전의 정도에 있어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이와 같이 새 사람은 부분적으로 완전하지만 현세에서 영적인 정도에 있어서는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다. 신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동안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화의 이해는 웨슬레에 이르러서는 성화의 단계를 사람이 거듭날 때 성화가 시작된다는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와 그 후에 오는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라는 견해를 갖게 하였다. 그가 성화의 단계를 이 둘로 보게 된 것은 거듭남으로 인하여 성화의 단계에 들어섰으나 온전한 성화에 이르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온전한 성화는 초기의 성화를 경험한 자가 이후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에 의해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