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설교 자료실

믿음의 양면성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2:47

믿음의 양면성에 대해 공부했다.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는 채널이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믿음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고, 근본적인 성화의 은혜를 우리 안에 주입시킨다. 근본적인 성화는 또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체험되고 실현된다. 성령 안에 살면 근본적으로 성화된 사실, 실제를 경험하며 살게 된다. 그런데 성경께서 이 근본적인 성화를 우리의 삶과 체험 속에 실현하실 때 나에게 먼저 willingness가 있어야 한다. 죄에서 자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을 경험케 하는 것은 그렇게 변화된 사람으로 살려는 갈망을 주신다. 죄와 옛 자아를 미워하게 하신다. 이제는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을 살기 원해야 한다. 우리 삶 속의 가장 큰 짐은 ‘나는 내가 심히 무겁다’는 의식. 옛 자아의 부패성을 내가 혐오한다는 것. 죄의 근본적인 쓴 뿌리는 옛 자아의 욕망이다. 앞으로 여러분이 사역을 하면 할수록 여러분 안에 무서운 죄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일을 한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은밀하게 나를 위해 설교하고 나의 탁월함과 인기와 명성을 위해서 주의 일을 하는 내 자신을 본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것으로 괴로워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이찬수 목사도 그런 고백을 했다. 나는 그 양반을 보면서 메시지도 깨끗하고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최소한의 솔직함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분도 이런 것을 잃어버리면 목회자의 생명이 끝난다. 성령은 항상 자원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를 인도하신다.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 위에서 회개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옛 자아를 죽이는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가 꼭 있어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 초대교회 등 항상 부흥 운동이 일어날 때는 철저한 회개가 일어난다. 지금 교인들이 냉랭한 것은 첫 출발에서 죄의 끈을 끊지 않으니 진전이 없는 것이다.


② 믿음은 순종으로 역사한다.

순종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육신에 속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고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믿음의 통로로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법을 즐겨 순종하는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중생의 은혜, 근본적인 은혜가 믿음의 통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믿음은 온전히 하나님을 순종케 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반역하던 원수된 마음이 청산되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기 원하는 순종의 dynamic이 심겨진다. 롬 6장 앞부분에 바울은 성화의 사실을 말하면서 이어서 우리가 순종의 종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생명력이 우리 안에 심겨져서 하나님을 항상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


③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갈 5:6).

순종은 사랑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로로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presence channel.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 믿음은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사시게 함으로써 예수의 성품을 산출하게 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회개, 순종, 행위, 사랑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믿음의 양면성을 통해서 살펴보게 된다. 많은 경우, 믿음이 그 안에 구체적으로 함의된 내용이 상실된 것으로 전달될 때가 많다. 그래서 믿음의 양면성을 이해해야 한다. 분리해서 잘못 가르치면 무율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과 분리해서 회개와 순종, 행위, 사랑을 강조하지 않으면 잘못하면 율법주의적 오류로 빠진다. 이런 믿음의 두 측면(receptive, operative)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구별할 필요도 있다. 왜? 어거스틴이 믿음을 정의할 때 항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계속 논쟁할 때 가톨릭은 어거스틴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이 더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믿음의 수동적인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은혜가 역사하는 산물로서 이런 책임(행위, 사랑)들도 함께 수행하게 된다.

 

** 행함/믿음/행함

A 행함믿음B 행함X○○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육신의 행함, 육신적인 동기성령의 산물로 얻어지는 행함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는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고 강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또 예수를 믿은 다음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믿은 후에도 A행함을 할 수도 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아직 잔재한 육적인 소욕을 따라서 신앙생활 할 수 있다.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것도 육적인 동기에서 할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우리도 혼합된 상태에서 살 가능성이 많다. 자기를 나타내고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육적이다’고 했다.


** 율법/은혜/율법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롬 8:4 참고. 성령을 따라 사는 성령의 열매. 은혜 가운데 살면 율법의 참된 영적인 의미를 이루는 실천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은 B 행함이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양면성 중에서 operative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너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무율법주의에 대항해서 분명히 진실한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측면. 그러나 바울 사도는 믿음의 receptive한 측면을 먼저 강조한다. 믿음은 빈손이다. 모든 하나님의 공로를 빌려오고 받아오는 수동적인 역할. 롬 3장 등에서. 그런 후 6장에서 무율법주의에 대항해서 operative한 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야고보서와 바울 서신의 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