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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48절 : 하나님의 온전에 이르는 것으로서의 성화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2:51

2. 성화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의 주석적 의미에서의 고찰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5장 48절, 로마서 6장 1-14절, 고린도후서 7장 1절, 에베소서 4장 22-23절, 빌립보서 2장 12-13절, 히브리서 12장 14절, 베드로전서 1:2; 12; 15; 2:2; 21, 베드로후서 1장 1-11; 3:11; 14 등이다. 이 구절들은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말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5장 48절 : 하나님의 온전에 이르는 것으로서의 성화

4복음서에는 성화의 용어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성화론자들은 4복음서에서 많은 구절을 성화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또한 자신들도 온전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어야 하는데, 성령은 신자의 전체 삶에 관련되어 있으면서 죄 없는 완전의 삶으로 성결케 해 나가신다는 것으로 본다.

그에 대한 실증적인 성경 구절로 마태복음 5장 48절인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Esesqe ou\n uJmei'" tevleioi wJ" oJ path;r uJmw'n oJ oujravnio" tevleiov" ejstin.)를 들어서 성화를 주장한다. 그것은 이 말씀에서 신자의 목표,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목적인 온전함(τελειο?)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온전함은 미래에 성취될 목표로서 하나님 백성 앞에 두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형용은 그가 쓴 저서 ‘산상보훈 40강’에서 “전(全) 산상보훈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산상보훈처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산상보훈은 타고난 성품에 의존되지 않는다. 산상보훈에서 언급하는 것은 자연적인 성질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은혜로 성취되어지는 기독교인의 특징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기독교인들은 노력을 통해 산상보훈의 특징들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거룩의 완성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그것들은 성취되어질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겉으로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헌집에 페인트만 칠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의 사상, 전말, 행동이 달라지고, 세계관, 인생관, 사회관, 결혼관이 달라진다” 라고 말함으로써 산상보훈의 실천을 성화적 개념을 갖고서 말하였다.

과연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성화의 개념 속에서 말씀되어진 것인가? 본 구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보훈의 일부인 마태복음 5장 43-48절의 한 구절이다. 산상보훈은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 예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이다. 산상보훈에서 말씀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로도 못 들어간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 즉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마5:20).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의로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성취시키지 못한다. 모세의 율법을 온전한 성취는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으로 율법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되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는…라고 말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마5:28, 32, 34, 39, 44) 라는 형식을 취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율법의 진정한 가르침을 받으며 정신을 보게 되지만 온전히 따르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며, 이런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들의 의를 만들어 나간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그러니 내게서 물러가라!.”(마7:22-23) 라고 배척을 받게 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로는 이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구하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산상보훈은 “나를 인하여 (모욕당하고 핍박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참으로 행복하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마5:11-12)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해주시고 있는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예수님이시며, 이 의가 미친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의 속에 있는 자이다. 이 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 아들이 택하신 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눅10:28).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저희’에게 제한시키신다.1)

이렇게 마태복음 5장 48절인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성화를 말하지 않는다. 성화를 말하는 그 어떤 의미도, 요구도 여기에는 들어있지 않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인 ‘율법에 의한 의’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한 가지라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전체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되므로 율법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이를 어기거나 이를 어기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마5:19).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얻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라고 말했다. 그러한데 그보다 더 나은 의를 사람이 이를 수가 있겠는가? 그럴 수가 없다. 사람은 날마다 자기 죄를 깨달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점차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져간다는 성화란 기대할 수가 없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도 노력하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질 수 있다는 성화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너희가 세리나 이방인과 차별되는 것이 무엇이냐를 알게 해 주신다.2)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전함’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서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목표를 뜻할 뿐, 이생에서 우리가 그 목표를 온전하게 성취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듯이(마6:12),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를 빌 줄 알아야 한다(마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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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원론은 칼빈의 5대교리를 따른다. 전적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를 말하는 칼빈의 5대교리는 그 머릿글자인 Tulip으로도 불리운다. 칼빈의 5대교리의 하나는 무조건적 선택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을 다 선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제한속죄에서 말해지고 있듯이 속죄는 제한되었다. 이는 속죄를 받는 자의 그 수는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신부만이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조건을 갖춘 후 되어진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흠이 없이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되어진 것으로 ‘사랑 안에’ 예정되어진 데 따라서 되어졌기 때문에 무조건적이다. 이는 ‘하나님에 의한 사랑’이 성도 외에는 다른 어떤 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이른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의 실행으로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정도의 사랑은 세리들도, 또 이방인들도 한다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며 그들의 온전치 못한 의를 지적하셨다(마5:4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