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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어의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2:50

 

1. 성화의 어의

성화란 용어는 사실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구약 성경이든 신약 성경이든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성화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화란 용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일반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것은 교회사에서 등장하는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등의 신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용하는 대부분의 글과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에서 많은 부분은 칼빈의 글이며, 특히 기독교강요이다. 그러나 그 또한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의 신학이 정립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왔다. 칼빈은 일찍이 1536년판 기독교강요에서 인간 영혼을 다루는 자리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미스티우스, 키케로를 인용할 뿐만 아니라 크리소스톰, 오리겐, 그리고 어거스틴을 인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칼빈은 헬라 교부들 중에서 크리소스톰을 좋아하였다. 그 이유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고대 교부들 중에서 모든 교부들보다 월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어거스틴이었다. 칼빈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거스틴을 인용하였고, 그의 표현을 채택하였다. 교리 면에서 볼 때 칼빈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와 성례관에서 영향을 받았고, 은혜와 예정을 다루는 각 장에서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의 논증을 자신의 목적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어거스틴의 성화관에 대한 인식의 영향 속에서 칼빈의 성화론이 형성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오늘날 칼빈의 신학 사상과 그 교리 체계를 따르는 칼빈주의자들인 개혁주의자들 또한 칼빈을 비롯하여서 그가 영향을 받아왔던 자들이 가졌던 성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신학 사상과 교리 체계에서 말하는 성화에 대한 이해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것이 성경의 관점에서 말해질 수 있느냐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성화가 말해지고 있는지가 다루어져야 한다. 그런 까닭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성화를 말하는 어의와 함께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보면서 그 구절들을 올바르게 주석함으로써 그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통하여 성화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성화를 말하는 구절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은 주로 신약이다. 그러기에 주로 신약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성화론의 성경적 관점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도 성화를 말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구약 성경에서의 성화를 다룬 후에 신약 성경에서의 성화를 다루도록 하겠다.


1) 구약 성경에서의 성화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인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성경에서는 주로 거룩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 단어인 ‘거룩하게 하다’(to sanctify)라는 말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인데,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는 ‘카다쉬’(`dq qadash)이며, 이 용어의 명사형은 ‘코데쉬’(vd<q, qodesh)이고, 형용사형은 ‘카도쉬’(v/dq;,,,, qadosh) 이다. 성화와 관련된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을 중심하여 생각할 때, 성화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래되는 것이며, M. Noth가 지적한 바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에 관련된 선언이며, 하나님 백성의 특성에 관련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하게 하다’의 카다쉬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이것이 ‘자르다’(to cut)의 의미인 ‘카드’(qad)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보다 더 높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카다쉬의 본래의 의미는 “다르다, 구별하다”는 뜻으로 히브리어의 뜻은 칼로 베면 둘로 갈라지듯이 무엇을 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하다’의 카다쉬는 구별, 성별을 뜻하는데, 이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구별되는 것을 말함으로써 카다쉬는 “떼어 놓다, 자르다, 분리하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거룩하게 하다’는 카다쉬는 분리의 개념이 원래적 의미이다. 따라서 성화란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거룩의 원래적 의미는 ‘구별’(aloofness), ‘분리’(separateness), '위엄‘(majesty)을 나타낸다. 성화, 곧 거룩이라는 의미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이것이 근본적 개념임에 틀림없으며, 이 거룩이 갖는 근본적 개념의 의미가 분리, 구별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그들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애귭과 차별 있게 구별하신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너는 내 백성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이 낳은 백성과의 관계성을 ‘거룩’으로 규정하신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11:44), “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11:45).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화의 근본 개념이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의미에서의 ‘거룩’인 것은 Leonardo Boff의 주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인간에게 함께 사용된 거룩이라는 이 단어는 분리시킴과 동시에 연합”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성화로 말해지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의 거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 분리시키고 자신과 연합시켜 세상으로부터 구별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화라고 말하고 있는 단어는 LXX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명사인 ?γιασμ??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같은 뿌리인 ?γ?ο?, ?γ?ασω, ?γ?ωσυνη에서 볼 수 있듯이 거룩의 용법으로, 구약에서는 Collin Brown이 주장하듯이 그 기본적 의미는 분리가 아니라 어떤 반응의 양태들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만남이라는 적극적인 사상에 관련되어 있는데, 곧 야웨의 거룩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약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데, 곧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시간, 장소, 예배, 성물들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너희가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내가 거룩하니”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느 이방인과 같이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거룩하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것은 그들이 속한 레위 지파가 거룩하기 때문이며, 레위 지파가 거룩한 것은 그들이 속한 제사장이 거룩하기 때문이며, 제사장이 거룩한 것은 그들이 속한 대제사장이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며, 대제사장이 거룩한 것은 그를 기름부어 거룩한 자 삼으신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사람이든지 또는 물건이든지 모두가 다 ‘성별’의 개념을 가진다.


2) 신약 성경에서의 성화

구약 성경에서의 성화 개념이 갖는 사상은 신약 성경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1:7)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란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 성도란 용어는 거룩함의 개념 속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구별임을 말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이 거룩이라는 말을 표현하기 위하여 두 개의 어휘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는 그 모두에서도 확인이 된다. 하나는 ‘하기아스모스’ (?γιασμ??)인데, 이 말은 형용사인 ‘하기오스’(?γι??)란 말과 함께 쓰이는 말로서 ‘(가장)거룩한 (사람, 사물)’을 뜻한다. 바울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에 사용된 단어가 ‘하기오스’(?γι??) 이다. 여기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여서 ‘거룩’의 개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인 ‘하기아조’(?γιαξω)가 있다. 이 단어는 동사형으로 ‘거룩하게 하다’ 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분리되고 떨어진 상태를 지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번역한 성경에서 ‘거룩’과 함께 ‘성화’로 번역을 혼용하여 왔다. ‘하기아스모스’(?γιασμ??)를 ASV, RSV에서는 ’거룩‘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KJV 에서는 '거룩‘과 ’성화‘로 혼용하여서 번역하였다. 그러면서 ‘하기아스모스’(?γιασμ??)는 상태로서의 성화(?γιοτη?)나 본질로서의 성화(?γιοσυνη)보다는 성화시킨다(sanctifying)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고서 ‘하기아스모스’(?γιασμ??)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는 과정을 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과정의 결과를 뜻하기도 하여 결과로서의 거룩, 성화, 성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번역에서 성화시킨다는 개념을 갖는 것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신약 성경에서의 성화가 갖는 본래의 근본적 개념은 그리스도에 의한 완성된 ‘거룩’으로 이것에 의해서 성령에 의하여 날마다 성취의 개념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님의 거룩한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영원히 효력 있는 것은 날마다 죄가 나타나지는 우리를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는데서 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 이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산 자로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룬다. 하나님께 죄인 되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의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거룩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는 공식이 구약의 경우에서와 같이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성립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화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거룩됨(함)으로써의 관계론적 결과이지 과정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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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우리 말 개역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개역혼영, 또 다른 번역 성경인 개역한자, 개역한글침례,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에서도 동일하다. 반면에서 우리 말의 새로운 또 다른 번역인 공동번역 성경은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신”이라고 번역하였으며, 현대어 성경은 더욱 설명을 붙여서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로 번역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을 하나님의 소유적 개념으로 설명하여서, 이와 상대적 개념이 되는 사단의 소유적 개념으로부터 구별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창세기 3장 15절인 “여자의 후손은 사단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다.


2. 성화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의 주석적 의미에서의 고찰

1) 마태복음 5장 48절 : 하나님의 온전에 이르는 것으로서의 성화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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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마서 6장 1-14절 : 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서의 성화
(*본 글에서 글의 성격상 헬라어 원문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여 사용하였는데 글자가 깨져 나옴으로 알아 볼 수 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하오니, 깨져 알아볼 수 없는 글은 그냥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성화가 말해지고 있는 것으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인 로마서 6장 1-14절에서 이것의 주석적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그 진의(眞意)를 보도록 한다.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신성종은 그의 저서 로마서 강해에서 로마서 6장 1-14절을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성화를 레위기 20장 6절에서 찾는데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으니라”를 들어서, 성화란 “나(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요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왜 성화되어야 하느냐를 레위기 11장 45절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서 찾았다. 그는 또한 성화의 방법의 근거를 세 가지로 말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객관적 근거가 된다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방법론적 근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화시켜 주며, 내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화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가 보는 로마서 6장은 성화장(聖化章)이 되며, 그 전반부인 1-14절은 성화의 기초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성도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2, 3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역사적으로 일어났으며 실제적으로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났다고 하였다. 둘째, 세례는 영적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즉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4, 5절). 셋째, 성도(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디(4절). 넷째,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즉, 접붙임을 받은 자란 뜻이므로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5절). 다섯째, 옛사람(죄의 몸)은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는 죄의 종 노릇을 할 수 없다(6절). 여섯째, 성도는 죄에서 자유한 자(7, 8, 22절)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죄가 성도 위에 주관할 수 없고(9절), 왕 노릇 할 수 없기 때문이다(12절). 여덟째, 성도는 이미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친 자이기 때문이다(13절). 아홉째, 성도는 은혜 아래 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의 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에 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의의 병기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한 자로서 살아야 한다며, 로마서 6장의 전반부인 1-14절은 성화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후반부인 15-23절은 성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

김영진은 그의 논문 ‘로마서 6장 1-14절에 나타난 성화의 신학적 기초와 성화의 방법’(The Theological Basis and Method of Sanctification in Romans 6:1-14)에서 그에 대한 주석을 (1) 반대자에 대한 반박 및 근거 제시(1-2절), (2)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에 의한 연합(3-5절), (3)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도에게 가져온 결과로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된 것과 의롭다 함을 얻음 및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갖는 기독론적 의미의 설명(6-9절), (4)성도의 구원론적 정체성의 확신(11절), (5)구체적인 성화의 권면, 곧 그리스도인의 의의 병기로서의 성화의 삶의 규정(12-13절)이란 구조분석에 의하여서 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의 대비를 통해서 확인하면서,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구원론적 정체성으로 다루며, 12-13절을 성화의 삶으로 연결시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1-11절은 12-13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성화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1-11절을 보는 이러한 이해는 이 구절을 해석하는 자들에게서 동일하다. 그러면 이것에 의해서 12-13절이 성화의 의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주석적 의미를 원문과 영문 및 국문 번역을 대조하며 살펴본다.

(1) 로마서 6장 1-14절의 원문과 영문 및 국문 번역의 대조에 의한 주석적 의미
1절 / Tiv ou\n ejrou'men ejpimevnwmen th'/ aJmartiva/, i{na hJ cavri" pleonavsh/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한글개역)
“그러면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도록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해서 머물러야 되겠습니까?.”(의역)
바울은 6장 이전인 5장 20절의 “죄가 더 증가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나타났다”는 논증에 대한 반대자들의 논박을 예측한 수사학적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죄가 넘치는 중에 은혜가 넘치게 된다면 단순 논리로,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 가운데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절 / mh; gevnoito. oi{tine" ajpeqavnomen th'/ aJmartiva/, pw'" e[ti zhvsomen ejn aujth'/
“By no means! W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한글개역)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그 속에서 더 살겠습니까?.”(의역)
예측하고 있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바울이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원어는 mh; gevnoito로 아주 강한 부정(否定)이다. 바울은 그 대답의 이유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던 자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 더 이상 머물러 살 수 있겠느냐는 신자의 정체성을 단호히 규정짓는 것에서 하고 있다. 바울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도 볼 수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하고 있는 데에는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5장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을 의롭게 하시고 생명에 이르게 하신 것을 언급하였다(롬5:12-18). 그러면서 이를 율법과의 대조에서 그 차이를 설명한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0-21). 율법은 우리의 죄를 낱낱이 들춰낸다. 율법의 등장으로 사람은 죄를 쌓는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공로가 우리의 죄를 사(赦)하실 것이고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이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를 더 이상 정죄(定罪)하지 못하며(롬8:1, 34), 따라서 죽음의 심판(審判)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이것의 근거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에서 ‘죽은’이 ajpeqavnomen란 부정 과거 시상(不定過去時相)으로 말해주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단번에 된 사건, 곧 십자가 골고다에서 그리스도에게 대표되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역사적 사건에 있다. 그리고 단번에 되어진 그리스도의 그 역사적 사건인 십자가의 구속의 피 공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하늘의 총회에 가입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죄 사함의 효력으로 영원히 미쳐서 그 피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히9:12).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죄에서 해방시켜 기쁜 마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히9:14).1)

3절 / h] ajgnoei'te o{ti, o{soi ejbaptivsqhmen eij" Cristo;n !Ihsou'n, eij" to;n qavnaton aujtou' ejbaptivsqhmen
“Or don't you know that all of us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한글개역)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의역)
1-2절에서 우리가 결코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인 사실을 들었는데, 본 절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는 데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와 ’세례‘는 같은 개념의 말이다. 세례란 말의 의미가 ’연합‘(결합)2) 이기 때문이다. F. F. Bruce는 로마서 6장 3절의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와 함께 고린도전서 12장 3절인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갈라디아서 3장 27-28절인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를 인용하여서 신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음과 부활이 그들의 영적 체험의 일부가 된다면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능력으로 성령 안에서 받은 세례는 그들을 그리스도와 한몸으로 결합시켜준다고 세례를 연합(결합)으로 말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이 얼마나 감격스런 영광된 것인지를 D. M. Lloyed-Jones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의 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교리가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 하나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오히려 유쾌한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만일 합당하게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처럼 큰 확신과 위안을 주는 교리 체계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받은 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받은 세례‘로 말해지고 있다. 박윤선은 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죽으심과 합하여”란 말은 “죽으심 속으로”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죽으심 속에서 세례 받음은 믿는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신 공로를 누림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 신자들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으니 만큼 죄와 우리와의 관계도 죽은 것처럼 결국은 단절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죄와의 단절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죄와 상관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여서 죄를 도무지 발휘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3),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고도 살게 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지어야 되겠는가? 라고 바울은 묻고 있기 때문이다(1-3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를 죄 사하여 주셨다는 것이 우리가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의 올바른 이해는 죄를 사랑하던 우리가 이제는 죄를 사랑하지 않고서 살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죄 받는 일이 결코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죄의 노예 상태가 아니다(롬7:25, 8:1). 따라서 본 절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받은 세례가 우리를 죄를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는 거룩한 자로 만들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화적인 존재를 말해주는 구절로 삼을 수 없다.

4절 / sunetavfhmen ou\n aujtw'/ dia; tou' baptivsmato" eij" to;n qavnaton, i{na w{sper hjgevrqh Cristo;" ejk nekrw'n dia; th'" dovxh" tou' patrov", ou{tw" kai; hJmei'" ejn kainovthti zwh'" peripathvswmen.
“We were therefore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ay live a new life.”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한글개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죽으심과 연합한 세례를 통하여 그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의역)
‘함께 장사되었나니’(sunetavfhmen)는 '함께 묻혔다‘는 것으로 생명이 아주 끊어져 소생할 수 없이 무덤에 묻어 버림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으로, 그 죽음의 효과는 우리가 죄 값으로 죽을 죽음을 완전히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죽을 죽음이 이제는 매장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함께 장사되었나니‘는 죄 값으로 당할 죽음의 완전한 해결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있는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th'" dovxh" tou' patrov")는 하나님의 권능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의 권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하셨다.

5절 / eij ga;r suvmfutoi gegovnamen tw'/ oJmoiwvmati tou' qanavtou aujtou', ajlla; kai; th'" ajnastavsew" ejsovmeqa: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like this in his death, we will certainly also be united with him in his resurrection.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한글개역)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동일한 모양으로 연합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에 대해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의역)
이 어귀에서 '연합한 자(‘suvmfutoi)란 “접붙인다”는 뜻으로 질이 전혀 다른 두 나무가 결합하여 같은 질의 나무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자가 이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한 것은 죽으심만이 아니라 또한 부활하심에서도 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된 것이며, 부활을 기다린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죄인 되고 하나님과 원수 된 자인데, 이러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가 쏟아져 죄 사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켜 가신다. 따라서 우리의 ’거룩됨‘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우리에 의해서도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거룩됨‘은 우리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과 연합하여 한몸이 될 수 있게 자신 안에 두심으로써 실현시켜 가시는 것이다.

6-7절 / tou'to ginwvskonte" o{ti oJ palaio;" hJmw'n a[nqrwpo" sunestaurwvqh, i{na katarghqh'/ to; sw'ma th'" aJmartiva", tou' mhkevti douleuvein hJma'" th'/ aJmartiva/: oJ ga;r ajpoqanw;n dedikaivwtai ajpo; th'" aJmartiva".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한글개역)
“우리가 이것, 즉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소멸되도록 하여, (그 결과로서)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으려 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의역)
‘우리가 알거니와’ 에서의 ginwvskonte"는 원형이 ginwvskw로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의 복음이 가져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자, 곧 죄로부터 해방된 자이기 때문에 죄가 더 이상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므로 죄를 사랑하던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거나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 당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에 연합된 몸으로서 죄의 몸이 완전한 구속, 곧 부활에 이를 때까지 계속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옛사람의 죽음은 날마다 경험하는 것이다. 옛사람에게서는 성화된 것이 없으며 또한 성화되어가는 것도 없다. 날마다 죽어야만 하는 죄의 사람인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을 것을 권한 것은 성화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은 옛사람의 악한 욕망이 분출되는 모든 것에서 이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새사람의 입음이 실현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다.

8-9절 / eij de; ajpeqavnomen su;n Cristw'/, pisteuvomen o{ti kai; suzhvsomen aujtw'/, eijdovte" o{ti Cristo;" ejgerqei;" ejk nekrw'n oujkevti ajpoqnhv/skei, qavnato" aujtou' oujkevti kurieuvei.
“Now if w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will also live with him. For we know that since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he cannot die again; death no longer has mastery over him.”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한글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이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의역)
본 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11절 / o~ ga;r ajpevqanen, th'/ aJmartiva/ ajpevqanen ejfavpax: o~ de; zh'/, zh'/ tw'/ qew'/. ou{tw" kai; uJmei'" logivzesqe eJautou;" ((ei\nai)) nekrou;" me;n th'/ aJmartiva/ zw'nta" de; tw'/ qew'/ ejn Cristw'/ !Ihsou'.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In the same way, count y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한글개역)
”왜냐하면 그가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것이며, 그가 사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자신들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십시오.“(의역)
여기서 ‘단번에’로 사용되고 있는 헬라 원어인 ejfavpax는 once for all으로 그 뜻은 ‘한 번으로 영원히’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단 한 번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희생제물에 의한 피 흘림을 완성하여 영원히 효력있게 미치신 사실을 뜻한다(참조. 히7:27).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여 죽으신 것은 죄를 꺾기 위해서 단 한번 죽으셨지만 그 피의 영원한 효력으로 지금은 하나님과 영원히 살아계신 것을 들어서 그 결과 우리들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산 자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을 권한다.

12-14절 / Mh; ou\n basileuevtw hJ aJmartiva4) ejn tw'/ qnhtw'/ uJmw'n swvmati eij" to; uJpakouvein tai'" ejpiqumivai" aujtou', mhde; paristavnete ta; mevlh uJmw'n o{pla ajdikiva" th'/ aJmartiva/, ajlla; parasthvsate eJautou;" tw'/ qew'/ wJsei; ejk nekrw'n zw'nta" kai; ta; mevlh uJmw'n o{pla dikaiosuvnh" tw'/ qew'/. aJmartiva ga;r uJmw'n ouj kurieuvsei: ouj gavr ejste uJpo; novmon ajlla; uJpo; cavrin.
"Therefore do not let sin reign in your mortal body so that you obey its evil desires. Do not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sin, as instruments of wickedness, but rather offer yourselves to God, as those who have been brought from death to life; and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him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For sin shall not be your master, because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한글개역)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들로 하여금) 몸의 욕망들에 순종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여러분의 지체들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맡기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여러분의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으므로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의역)

이 구절에 대한 일관적인 해석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주권적 행위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 생명을 삶 가운데 드러내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임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인식하고서 이에 합당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성도는 죄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주권으로의 지배세력이 뒤바뀌었으며, 따라서 죄의 법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새로운 조건과 질서 속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조건 하에서 변하게 된 성도의 구원론적 정체성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 여기에 일치하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헌신의 의무를 말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성화적인 삶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11절의 ‘여길지어다’를 하나님의 지시, 명령으로 보고 이를 강조함으로써 이것이 12, 13절의 성화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의 인식론적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사람의 정체성에 합당하도록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체를 그 분을 섬기고 헌신하는 일에 드림으로써 우리의 거룩을 드러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죄악으로 더불어 싸워야 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서, 이를 성화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1절에서의 ‘여길지어다’인 logivzesqe는 count이며, 그 뜻은 ‘셈하다’는 개념이 아닌 ‘간주하다’로 맹약적(盟約的)으로 태도를 결정하고 간주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간주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되신 것을 그와 연합한 우리와의 관계에서 심사숙고하여 생각한 가운데서 고려하여 갖는 것으로서, 14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우리는 죄의 법인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생명의 법인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더 이상 우리 몸을 죽음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을 죄의 지배에 맡겨 악의 도구가 되어서 쓰여질 이유가 없다는 것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 의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의 주인이 죄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11절의 ‘여길지어다’는 12-13절에서 우리에 대한 삶의 책임과 의무를 요구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성화를 지시하시는 것으로 말해주고자 하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해주고자 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2) 로마서 6장 1-14절의 이해
로마서 6장은 성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다루며, 이 중에서 1-14절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 받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서 그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일방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하여 우리가 연합 당한 것이다. 이 연합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 이 연합 당함으로 우리는 주인이 바뀌었다. 죄의 종 되었던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종으로 삼아 주시니 우리가 의의 종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의로운 행동을 할 때만 의의 종으로 삼아 준다는 계약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 의해 의와 악을 구분하는 세계에서는 이미 ‘죽은 자’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려내었다는 것은 내 쪽에서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된 것이 우리의 희망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죄의 힘에 의해서 되어졌듯이, 우리가 의의 종이 된 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이나 우리가 선택한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결과이다. 로마서 6장 19절, 22절에서는 이 의의 종이 된 것을 거룩함에 이른 것으로 표현하여 말하였다.5)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의 종 삼으시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려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심을 받아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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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우리 육신에서 발휘되고 있는 모든 ‘죄로부터’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발휘되고 있는 우리 육신에 속한 마음, 죄가 행해지고 있는 우리 생활에서 그 죄의 사함을 주신다. 그래서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바라보고 의존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것이 달라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몸을 부정케 하는 의미에서 이다.

2) 세례의 의미는 주로 죄 씻음, 죽음과 새 생명, 연합 등으로 다양하게 말해지고 있으나, 세례의 본질적 개념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 외의 것은 이 연합에 의해 있게 되는 결과적 의미들이다. 여기서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됨을 말한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우리가 지금 두 번째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다(참조. 롬5:17). 종종 세례를 구약의 할례와 동일시하는 견해를 말하는 자들이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구약의 할례는 손으로 행하는 것으로 그것이 죄에 대하여 피 흘림에 의한 죽음의 심판을 예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의 세례는 손으로 하지 않은 전혀 영적인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에 의한 죄 씻음과 새 생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Ladd는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일한 상관관계의 것이 아닌 전혀 대조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말하였다(G. E.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신성종, 이한수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p.616.)

3) 죄와의 단절의 역설적인 것으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의 설명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곧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로서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담에게서는 나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성은 전혀 가질 수가 없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는 전혀 발휘되지 못한다. 그와 같이 만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받은 세례 받음을,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을 죄와의 단절로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결코 죄성에 의한 악한 죄가 발휘될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며(롬6:2), 마음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할 것을 생각하면서도 육신은 원치 않는 미워하는 짓을 행한다(롬7:15).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이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죄임을 말한다(롬7:17). 그러기에 바울은 자기 육신 안에는 의는 하나도 없으며, 죄가 아직도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이것이 인간의 형편이라고 말한다(롬7:18-24).

4) 대부분의 주석은 hJ aJmartiva를 주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Hagen은 hJ aJmartiva를 주어로 번역해야 하며, 이 경우 본절은 윤리적 요구가 아니라 죄의 지배가 금지되었다는 확고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5) 바울이 로마서 6장 19절, 22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인 ‘거룩함(holiness)은 aJgiasmovn 이다.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거룩함에 이르라”는 ‘slavery to righteousness leading to holiness’으로서 앞 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의에게 종이 된 것’으로, 죄라는 옛 주인에게 해방되어 의라는 새 주인의 종이 된 것의 관계성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I put this in human terms because you are weak in your natural selves. Just as you used to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in slavery to impurity and to ever-increasing wickedness, so now offer them in slavery to righteousness leading to holiness.), 그리고 22절의 “거룩함에 이르러”는 ‘the benefit (which) you reap leads to holiness'으로서 앞에서 말하고 있는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로 인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인 거룩, 곧 마침내 영생을 누리게 된 것을 말한다.(But now that you have been set free from sin and have become slaves to God, the benefit you reap leads to holiness, and the result is eternal life.) 따라서 성경에서의 ’거룩함‘을 그 의미의 바른 이해가 없이 ’성화‘란 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