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공간/칼럼

수직적 영성

힐링&바이블센터 2008. 7. 12. 17:13

구소련의 유명한 문호였던 톨스토이는
인간 실존의 절망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이 저 중앙 아시아의 넓은 들판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 오더니만
무시 무시한 들소가 뿔을 세우고, 그를 향하여 돌진해 왔습니다.
그는 소를 피해서 전력을 기울여 질주를 했는데 점점 더 거리는 좁혀지고
나중에는 소의 뿔이 엉덩이에 닿을락 말락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앞에 마른 우물이 있어서 뛰어 들어갔습니다.
우물에서 떨어지다가 그 가운데 나와있는 나무에 철렁하고 걸렸습니다.
그는 나무를 잡고 겨우 안정해서 앉아서 위를 쳐다보니
들소가 발로써 흙을 파고 코김을 내뿜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밑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몸서리쳤습니다.
그 밑을 내다보니까  마른 우물인데 밑바닥에 독사가 새끼를 낳아가지고
독사들이  밑에 우글우글 합니다.
자! 위를 쳐다봐도 절망이고  내려봐도 절망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지 끝에 보니까  벌들이 꿀을 쳐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밀어 꿀을 찍어서 입에 대보니  정말 달고 맛있거든요.
그런데 뭐가 싹뚝싹뚝해서 보니까  저 끝에 나무 줄기를 새앙쥐가 와서 갉아 먹고 있습니다.
언제 가지가 부러져서 독사가 우글우글한 마른 우물 밑바닥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인생은 결국 위를 봐도 절망이요, 밑을 봐도 절망이요, 앞으로 봐도 절망이요, 뒤를 봐도 절망인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소리내어 울지 못하듯

너무 절망적인 일들을 만나면, 절망이라는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습니다.

 

겨우 겨우 사력을 다해  언덕위로 들어 올린 바위 덩어리가 다시 굴러 내려 제 자리로 돌아오고

삶의 모든 가능성은 나를 비껴가고 평범한 축복마저 나와는 상관없이 저만치 갈때가

바로  절망조차 생각나지 않는 때 입니다.

 

이런 때에는  하나님에게 조차 상처를 받는 때이기도 합니다.

천지간에  누구하나 기댈곳 없는 처량하고 초라한 때이기도 하지요.

어디 그런 사람이 한 둘 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이런 가혹한 지경으로 몰고 가시며 외면하십니다.

그래서 더 야속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흠모하는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삶은 하루 하루가 사형선고와 같은 삶이었다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매일 힘들었고,

매일 아팠고,

매일 배신당했고,

매일 상처 받았고,

매일 헐벗었고,

매일 위험했고,

매일 죽을 일만 쌓였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일에 대하여 초연한듯 합니다.

우리도 이제 바울의 영성을 그림자 만큼만이라도 흉내낼 수 있도록 거룩한 욕심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가혹하고 형벌같은 하루 하루의 삶들을 사람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뿌리 깊은 영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에게 섭섭하거나 상처받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성을  수직적 영성 혹은 그리스도론적 해석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절대절망으로 몰고가신 이유는

사람을 의뢰하지 말고"죽은 자를 살리시며 마침내 건지시고 도우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바울되게 한 동력이었으며, 평생을 사방으로 우겨쌓임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고

거꾸러 뜨림을 당해도 넘어지지 않을수 있었던 자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붙들고  의지하고 있는  끈들을(배경, 자원, 힘, 도울사람..) 하나씩 끊으십니다.

그리고 결국  다 끊어져야  하나님을 끈으로 붙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붙들고 의지할 세상줄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은 무정하게 보이지만 우리가 꼭 붙잡고 있는 사람줄, 배경줄, 돈줄, 지식줄을

 강제 철거하시는 것입니다.

 

어미새들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때가 되면  무정하리 만큼 먹이도 안주고 자꾸 둥지 밖으로 밀어 내는 것입니다.

둥지에서 머뭇거리다 떨어지면 죽는 것이고 죽을만큼 힘들지만 날개를 퍼덕이며 창공을 날아오르면

사는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킴 같이 훈련시키십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만 의뢰하라 하심입니다.

도와줄 사람이 많거나  세상에 누릴것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은  악세서리가 되고 천국은 우화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망이라는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을 만큼 훈련시켜 우리를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고

천국을  돌아갈 내 본향으로 손꼽아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독하고 처절한 고난은 사랑과 축복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잠잠함이여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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