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
구제에 대한 비유 두가지 1. oops! 평형을 뒤집어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크게 나누면 그 지역에 사는 무리들과 예수님을 따라 집을 떠나온 제자들,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라는 랍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니면 어떤 신기한 치유이적을 행하시는지 보거나 듣기 위해, 혹은 자신이 직접 치료를 받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그룹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다보니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분이 메시야가 아니실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열두제자외에도 이미 많은 이들이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씩 나타납니다. 12:1 절에 보면 “무리 수만명”이 따르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15:1절에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고 계시잖아요.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어디가고 왜 세리와 죄인들만 남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2절에 보면 한무리의 사람들이 또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 ugh! 모순을 분석하라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갔는가? 수만명 중에 왜 세리와 죄인들만 남았는가? 하는 것과 남은 이 중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남아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15, 16장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는 두 무리와 제자들을 앞에 두고 두묶음의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우선 설교의 시작은 바리새인들의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두 번째 물음부터 해결해봅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왔는가?” 하는 것이었죠? 신약, 특히 누가는 바리새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 바리새파는 순수한 평신도 신앙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면, 그리고 율법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면 어디라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병고침의 기적보다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어쩌면 미리 예수님께 연락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몇월 몇일에 바리새파 갈릴리 지부 총무님과 서기관 임원, 그리고 젊은 바리새 모임 회원들이 방문하고자 하오니 시간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식으로 말이죠. 11장에 예수님과 바리새파, 서기관 사람들과 있었던 설전이후 아마 첫 번째 만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예수님의 말씀을 꼬투리잡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에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에서 생각하기엔 “부정한” 자로서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자와 식사를 하면 저녁까지 부정하여졌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3. aha!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그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께서 일부러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들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이 바로 “원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유명한 누가복음 15장의 세 잃어버린 비유를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가는 목자처럼, 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처럼 하나님에서 멀어진 자들을 찾는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늘에서는 이와 같은 죄인하나가 회개하면 의인 아흔아홉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던 너희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냐? 두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이 아무리 재산의 반을 탕진했어도 여전히 아들이고 그것도 유산을 상속할 자격이 있는 아들이다. 너희는 부정에 대한 규정은 기억하고 그 부정한 자를 진 밖으로 찾아가 진찰하고 깨끗케 하라는, 그리고 부정해진 병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잃어버린 것인가? 그리고 16장에서는 재물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15장에서 한 세가지 비유설교에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말을 이어가십니다. 그런데 첫 번째 비유는 척 들어도 별로 모범이 될만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가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공은 어떤 부자의 재산을 맡은 집사였습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주인의 돈과 재산으로 고리대금업을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물건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자신은 그 이자만 챙겨도 큰 장사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자가 높을 수록 자신의 재산도 커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인에게 알려졌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이 불의한 청지기를 불러 해고되었다고 이야기하고 내일까지 마음대로 쓴 재물에 대해 장부정리를 해 놓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장부와 창고물건의 숫자가 맞지 않으면 바로 고발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그는 이제 미래를 도모합니다. 자신이 거의 두배에 가까운 고리를 받아오면서 자신의 평판이 좋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분명 그것도 주인의 이름으로 빌려준 것이었지만 원래 집행하는 사람이 더 무서운 것이잖아요. 그는 자신이 몰래 창고의 물건을 빌려주었던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자신이 받으려고 속였던 이자를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합니다. 꼭 자신이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쫓겨나더라도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주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지도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4. Whee 복음을 경험하라 아직도 청지기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한 일이고, 그것도 삭개오처럼 자기 재산을 내주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불법으로 착취하려던 것, 또 이제는 받을 수 없게 된 그것으로 선심을 쓴 것이었으니까요. 15장의 세 비유, 특히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비유를 듣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듣고는 반응을 보입니다.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들이 비웃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청지기는 칭찬받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악한 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다면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자기것도 아닌 주인 것으로 말장난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은 저도 이 비유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19절부터 나오는 나사로와 부자 비유가 설교로 더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다지 배울 것도 없고, 모범적이지도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에 던졌던 질문 중에 첫 번째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어디가고 왜 “세리와 죄인들”만 남았을까? 만약 세리와 죄인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가? 아마 그들은 하나님 “저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주님 것을 제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제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 것을 빼앗지 않겠습니다”라면서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정도로도 칭찬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비로우시단 말입니까? 이젠 저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겠네요... 바리새인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도 그 청지기는 부정해” “아직도 용서받을 수 없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웃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틀렸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두 무리가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여러분 나는 어떤 무리에 섞여 있습니까? 내게 주신 것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있습니까? 내 것이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다른 사람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때로 주님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미 삶의 무게로 지친 그들을 도와주진 못할망정, 내 명예를 위해, 내 자존심을 위해, 내 위치를 위해 그들을 더 힘들게 하고 있진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15:1절에 나온 “세리와 죄인들”은 12:1절에 나온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다니면서... 처음에는 “나는 괜찮아” “좋은 가르침만 얻을거야” 그러다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바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탕자입니다” “제가 바로 길 잃어버린 말썽장이 어린 양입니다” “제가 바로 불의한 청지기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있는 그들을 바리새인들이 보기엔 “죄많은 백성” “죄인”으로 보였던 것은 아닐까요? 5. Yeah 결과를 예견하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주일마다 교회로 몰려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회개합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불의한 청지기처럼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른 사람에게 지웠던 평가와 비판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재물이라면 포기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베풀고, 나누라고 합니다. 재물은 더욱 모으고 준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던지 돈을 섬기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으로 거듭납니다. 예전보다 더욱 더 예리한 판단을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는 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말씀으로만 들립니다. 설교도 평가하고 교회도 평가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속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에게는 거지 나사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부자는 경건생활은 열심히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말씀만을 듣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하고 기도로 끝내버립니다. 그들은 나중에 죽은 자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이 와서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31)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이가 누굽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도...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도... 그들의 귀엔... 아니 우리의 귀엔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귀한 복음을 들읍시다. 우리가 부정한 청지기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그 첫걸음은 바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가치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더 나은 것으로 하늘나라의 것으로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16:1절에 보면 고리대금, 즉 이익을 남기기 위해 더 받는 것을 하나님은 “허비한다”고 보셨습니다. 세상가치로 볼때는 투자이고 저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땐 그것은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청지기가 하나님의 것을 나누어 줄 땐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나누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바리새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제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물질을 내것인 줄 알고 사용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시간과 관계를 내 것인줄 알고 헛된 것에 쏟아넣었습니다. 더 모으려고 하고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주님의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그 넉넉한 복음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평화를 나누며 살겠습니다. 내게 주신 물질을 나누며 살겠습니다. 더 늦지 않게 내가 불의한 청지기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