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누가복음 19장

힐링&바이블센터 2008. 2. 18. 21:51
누가복음 19장

삭개오 / 므나비유 / 예루살렘 입성


1. oops! 평형을 뒤집어라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교육철학은 미국의 합리적이고 경험론적인 교육철학을 많이 답습해왔습니다. 특히 미국의 교육철학은 시장경제논리가 일찍이 적용되어서 “최대의 이익” “결과” “성과”를 내기위한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이 많은 연구와 시도들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지금의 미국교육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것은 유아교육도 마찬가지여서 1960년대 미국을 휩쓴 하나의 “유아교육서”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에 속합니다. 저자는 자녀를 “좀더 미국적인 독립심이 강한 자녀”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자녀를 좀더 독립적이고 합리적으로 키우기 위해 좀더 일찍 혼자 침대에서 자는 것을 연습시키고, 재정적인 것도 일찍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아이들이 하는 청소와 봉사를 용돈에 연결시켰습니다. 가정마다 아기침대를 사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서 좀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960,70년대에 미국보수주의는 여러문화적 코드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는데 자유를 열망하는 젊은 부모들에게 이 책은 거의 성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을 좀더 일찍 독립적으로 키우고 합리적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이 유아교육이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립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자유보다는 “방종”을 선택해 히피문화와 마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자라면서 미국정신분석학이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이론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성격장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2. ugh! 모순을 분석하라

그들은 특히 “나 self”를 찾지 못했습니다. 독립심을 키우려고 했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 “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든지(거울전이),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기대어 나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상화전이) 혹은 온전한 한 인격의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을 그려 인식했습니다(경계선장애). 특히 이런 사람들은 갑자기 화를 내거나 우울해졌습니다. 한 사람안에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좋을 땐 한없이 좋고 갑자기 싫어지면 갑자기 욕을 퍼붓고 공격성을 보였습니다.


미국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더 합리적인 유아교육의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모두가 같은 길을 시작했는데...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을때는 많이 늦어있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아무튼 그들은 아이를 한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그들이 만들기 원하는 사회에서 원하는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나고 있는 다수 중의 하나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파블로프로부터 시작된 행동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파블로프는 인간은 종을 울리고 밥을 준 개처럼 교육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면 다른 방법은 어떻습니까? 인지주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주지주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같은 일을 시작한 사람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도... 또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사람은 똑같이 자라나질 않았습니다. 무언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되어갔던 것입니다.


3. aha!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17장 후반부를 보면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날과 때는 정확히 알수 없다고 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7: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어떤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같이 자라고 같이 생활하는 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부모들에게 이 질문은 “어떻게 아이를 교육해야 구원받습니까? 성공합니까?”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18장과 19장은 세명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18:18~23절에 나오는 어떤 관원입니다. 이 관원은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십계명을 모두 지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관원은 예수님께서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시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두 번째 사람은 18:35~43절에 나오는 여리고 성의 소경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자로 구걸을 하던 사람입니다. 예수란 분이 앞을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자, 예의도 없이 소리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믿음으로 보게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17장의 사마리아 문둥병자처럼 예수님을 좇습니다. (43절)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19:1~10절에 나오는 세리 삭개오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이지만 로마관원으로, 그것도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세리, 그 중에서도 세리장이었습니다. 매우 큰 부자였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셨고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고 잘못 거둔 것은 네배로 갚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좇았고 결국 초대교회에 큰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4. Whee 복음을 경험하라

관원과 여리고 성의 소경 이야기사이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은 원래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법정스님의 책 제목처럼 “무소유”을 깨달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열므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귀인이 왕위를 인증받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의 총독이 되려면 로마로 가서 인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먼 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을 열명의 재산을 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스리게 했습니다. 한참 뒤에 귀인은 왕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맡은 이들을 한명씩 불러 계산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한 므나(은전 100개)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의 원님으로 임명한다!”하고 그 자리에서 관직을 하사했습니다. 두 번재 사람은 한 므나로 다섯므나를 남겼습니다. 왕은 또 기뻐하며 다섯고을의 원님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 번째 종입니다. 세 번째 종은 그 돈을 고이고이 수건에 쌓았다가 왕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인자할 것만 같은 왕이 불같이 화를 내며 “왜 은행에다가 두어 이자라도 받아두지 않았는가!” 하면서 그 한므나마저 빼앗아 열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무소유한 자만이 구원을 얻은 것이라면 세 번째 종은 억울합니다. 왜냐면 열므나 다섯므나 가진 사람보다 그는 적게 가졌고 그리고 적어도 하나님께서 맡긴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삭개오와 소경과 열므나, 다섯므나를 벌은 종과, 근심하며 돌아간 관원과 세 번째 종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세상의 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돈”과 “재물”로 판단하려는 안경을 벗고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5. Yeah 결과를 예견하라

먼저 한므나를 수건에 쌓아두었던 사람과 근심하며 돌아간 관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의 재물을 가지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은 근심만 했고 한므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 자신의 가정만을 돌보았습니다.


반대로 열므나 다섯므나를 벌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로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게도 있고 논밭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했습니다. 아무리 벌어도 내것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소경은 눈을 뜨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볼 수 있게 되자마자 예수님을 좇아갑니다. 시력을 잃었던 사람이 개안수술을 받게 되면 상당수가 다시 소경이 되길 원한다는 것 아십니까? 많은 사람이 자살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이 소경이었던 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갔습니다. 눈을 뜨면 하고 싶었던 그 많은 꿈들보다 예수님 따르기로 선택하고 좇아갔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을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한끼 식사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어렵게 모은 재물을 나눠줄 수 있었습니다. 이젠 재물 모으는 것보다 로마의 관원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되는 것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도 예수님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신앙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도 열심입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장사도 열심히 합니다. 맡은 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부모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축복주시기를 원하지만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자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유아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자녀를 키운 부모, 혹은 자녀를 키워야 할 부모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혹시 내가 잘못키우진 않았을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더 좋은 책은? 더 좋은 방법은? 진리는 어디에 있는거지?”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이 어둡고 악하여서, 바쁜 일상속에서 하루 10분 무릎꿇고 기도하고 성경한장 잃을 시간이 없다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함께 기도할 시간도 없이 학원에서 피곤한 아이들을 다른 학원으로 보내는 우리 부모들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을 좇는 자, 예수님을 따르는 자, 그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 소경은 그가 비록 소경있었으나 예수님을 좇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었고, 삭개오는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 열므나 다섯므나를 벌은 종들은 자신의 생업보다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일만을 감당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더 귀하고 중한 일을 맡기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이들을 키우실 것이라는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예배하며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세상사람들이 걱정하고 근심하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됩시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제 ‘근심하며 돌아가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좇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세상의 부와 하나님의 축복사이에 양발을 걸치고 아니, 세상이 준 안경으로 하나님의 축복마저도 판단하려 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지만 이 믿음으로 소경과 삭개오처럼 바로 오늘 예수님을 좇겠습니다. 열므나 다섯므나를 벌어들인 종들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겠습니다. 함께 예배하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주님의 증인되겠습니다. 나의 자녀이기에 앞서 우리 자녀를 직접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보더 더 좋은 것으로 우리 아이들을 키우시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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