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심리/심리치료

도날드 위니캇과 영성

힐링&바이블센터 2007. 2. 24. 15:09



                                     앤 율라노프 박사(뉴욕 유니온 신학교)
                                     번역: 이재훈(한국심리치료연구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위니캇은 놀랍도록 단순한 문체로 사람들의 정신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1971년까지 우리 곁에서 살았던 영국의 분석가입니다. 그의 이론은 환상이 지닌 긍정적인 역할, 파괴성의 변형 그리고 우리의 창조적인 삶의 가능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론들과 구별됩니다. 그는 소아 정신과 의사로서 시작해서 어린아이들과 성인들을 위한 정신분석가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분석한 사람들 중에는 아주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성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 세계에서 온 유명한 분석가들도 있었습니다.

분석가로서 위니캇의 창조성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가 프랑스에서 한 작은 소년을 면담할 때입니다. 불어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통역을 위해 다른 분석가더러 함께 있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분석가는 나중에 위니캇이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술회했습니다. 그 면담은 대기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소년은 옆에서 갑자기 마치 고양이처럼 냐옹하고 말을 거는 한 영국 할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이와 접촉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접촉이 이루어졌고, 아이는 즐거워하면서 자신의 환상 생활과 기억들을 아주 친밀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율라노프 2001년 134쪽 참조).

영성이란 우리 모두가 그 안에 거하고 있는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성령은 생명력, 동물적인 근원 충동과 관련되어 있는, 생명을 주는 자요, 취하는 자이며, 우리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시고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고전 2:10, 히 4:12-13). 성령은 우리를 갈등을 가져오고, 낡은 확신을 깨뜨리고, 우리가 사는 방식과 목표의 수정을 강요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막강한 에너지인, 거룩의 현존으로 인도해 줍니다.

많은 임상가들은 영성을 종교와 구별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종교에 대해 나쁜 경험을 했기 때문이건 아니면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건, 종교가 그들의 삶을 제한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개인적 공헌을 위한 공간을 제공해주는 보다 커다란 용어처럼 보이며, 규칙이나 정해진 행동과 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명상이든, 관상 기도든,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이든, 또는 불가지론이거나 무신론이든, 우리의 영적 입장은 우리의 임상 작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적 생활에 대해 말하지 않고, 돈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듯이, 우리는 내담자들에게 우리의 영적 입장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영성은 분명코 우리가 피분석가들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적 현존과 도덕적인 수준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력 또한 우리와 환자 사이의 전이-역전이에 특정한 영향을 끼치며, 우리더러 이 측면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영원한 진리의 상징들을 해석하기 위하여 문화 안에서 지배적인 철학적 지향을 빌려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진리를 해석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어거스틴은 플라토를, 틸리히는 실존주의를 사용했고, 같은 맥락에서 이재훈은 한의 실재를 해석하기 위해 한국 샤마니즘을 사용했습니다(이재훈 1994). 놀라운 사실은 인류가 새 천년을 맞이한 오늘 이러한 신학적 과제를 수행하는데 심층심리학이 가장 적절한 학문적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가들 중에서 프로이트와 융은 종교에 대해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제거하고자 했고, 융은 종교를 다시 연결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상징들에 투사했던 리비도가 풀려나게 되었고, 따라서 이전에 종교에 의해서 담겨졌던 정신 에너지가 인간의 정신 안으로 쏟아 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심층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위니캇의 심층심리학이 영성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가? 또는 역으로, 영성적 관점이 위니캇이 말하는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어떤 기여를 하는가?” 라는 우리의 주제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심층심리학과 영성이 두 개의 다른 전통이면서도 서구에서는 영혼의 돌봄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커다란 전통을 형성해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과 자기의 삶을 담아주는 그릇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간명한 기도가 이를 잘 요약해 줍니다: “나를 아는 것은 당신을 아는 것입니다”(율라노프, 2001, 125). 이십세기에 이르러 이 커다란 전통이 둘로 나뉘어졌고, 의식과 무의식, 본능과 감정의 측면에서 정신을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의사도 아니고 목사나 사제도 아닌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영혼을 돌보는 전문직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베텔하임 1982, 35). 융은 그의 분석심리학을 새로운 종교로서가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상징들과 다시 연결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무의식을 탐구하는 심층심리학은 종교적 삶과 그 연구를 위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 전통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밤새 우리가 꾼 꿈에서건 낮 동안에 우리를 따라다니는 증상에서건,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우리의 뺨 위와 목 아래에서 숨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신비스런 무엇의 현존을 가리키는 그러한 경험들은, 특히 그것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와 우리 주변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초월의 경지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물론 무의식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의식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또 하나의 주된 통로를 더해 주었습니다.

심층심리학은 영성 생활에 구체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것은 영과 육체 사이의 갈등과 대화가 발생하는 장소를 우리 자신의 자기 안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호한 진리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논의나 교리적인 논쟁을 하기보다는 우리의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불화와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특정한 신앙에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면서도 우리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다른 신앙 전통들을 수용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합니다. 우리는 내전과 인종 학살과 빈부간의 거대한 격차를 통해서 끔찍스런 파괴성이 난무하는 와중에서 어떻게 영적 실천을 계속할 수 있을까? 를 묻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담자들과 우리의 세계 안에 그처럼 많은 고통이 있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종류의 영적 삶이 진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하는 이는 누구일까요?

영성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특정한 삶을 향해 부르시고 그 삶을 받아주시는, 그리고 우리의 심리치료 면담에서 항상 함께 해주시는 이 신비한 저자에 대해 명상하게 함으로써 심층심리학을 위해 기여하고 있습니다. 영성은 이 저자에 대해 지적으로 아는 것으로 인도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말없이 그리고 합리성을 뛰어넘어 이 고요하고 완전한, 그리고 우리 심장의 고동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심장이 멎은 후에도 거기에 계시는, 이 신비한 현존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십니다.

특히 위니캇을 논의함에 있어서, 저는 그의 이론을 영성 또는 영성 실천과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과 영성은 서로 다른 목적과 언어들을 가진 두 개의 독립적인 학문 전통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니캇은 심층심리학의 주요 주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매우 독창적인 접근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마치 창조적인 작곡가처럼, 그는 성과 공격성과 창조적 삶에 관한 주제들에서 신선한 변형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 존재의 능력과 행위의 능력

성 정체성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고 아직도 여성들이 동등하게 일하고 교육받고 선거하고 보수 받고 승진하고 존중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이 시대에, 위니캇은 성에 관한 독창적인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존재와 행위라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속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개념은 우리의 성격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융의 개념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위니캇은 융의 아니마(자아와 자기 사이를 연결하는 심리적 교량) 개념에 대해 말하면서, 아니마는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항상 알고 있는 나의 일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위니캇의 신선한 접근은 우리와 타자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환상이 지닌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그의 강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위니캇은 그가 중간 공간이라고 부른,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유아의 삶 속에 있는 공간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유아는 점차로 절대 의존 상태에서 상대 의존을 거쳐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다 자기와 타자의 독립이라는 또 하나의 단계를 더합니다. 우리는 환상을 믿음으로써 즉, 우리가 어린 시절 애지중지하는 장난감이나 담요가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이 공간을 가로질러 갑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첫 번째 상징으로서 심리적 기능을 지니며 따라서 우리의 자기감을 확장시켜주는 것입니다. 곰 인형이나 담요 또는 인형 등의 중간 대상은 돌보아주는 사람을 상징하며, 동시에 우리가 이 소중한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것과 함께 우리가 발견하고 창조하는 자기감을 상징합니다.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를 침범하지도 않고 방치하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의존을 신뢰할만한 돌봄으로 받아주고 허용해주고 응해주는 엄마(친 엄마, 할머니, 아버지, 손위 형제, 보모일 수도 있는)에게 의존하는 우리의 경험에 기초해 있습니다.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초기에 확립되며 우리의 신체 안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느낌을 갖고 세상 안의 대상들을 만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자를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하나된 존재로 느낍니다. 위니캇은 주로 유아가 그의 엄마와 갖는 경험에 대해 말합니다. 저는 그러한 상호 하나됨의 상태가 우리가 창조적인 사고, 새로운 사랑 관계, 상실했던 우리 자신의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통찰, 초월적인 것과의 새로운 영적 연결 등을 경험할 때에도 발생한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때 우리는 타자와 하나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자아는 잠재력의 상태로 존재하며 그것이 실제로 피어나는 것은 타자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존재하는 상태에 머무릅니다. 많은 영적 수행자들 또한 이러한 존재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노력합니다.

유아를 안아주고 돌보아주고 음식, 장난감, 목욕, 잠에서 깨우기, 잠재우기 등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현실을 제공해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처음에 우리는 타자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때 타자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들, 안아주기 또는 떨어뜨리기, 잘 돌보기 또는 학대하기, 현실을 아기가 감당할 수 있게 조금씩 제공하기 또는 너무 커다란 소음으로 아기를 침범하기 등은 우리의 미래 정신 건강과 질병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의존의 이미지를 확장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것, 창조적인 생각, 영적 삶에 대한 우리의 초기 관계를 포함한다면, 우리는 영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체화하기 위해 부모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적 삶의 시작 단계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듯이, 우리의 영성이 튼튼하게 자라나 우리의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할 때까지, 자신의 무릎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의존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허공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우리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구라고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상처는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의 것이며 황량한 느낌만을 전해줍니다. 심리치료에서 치료자는 그것을 치료 과정이 내담자의 상처 깊은 곳에 도달할 때 내담자와의 사이에 발생하는 정서를 통해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이 분위기는 이름없는, 말없는, 희망없는 슬픔이 젖어들게 됩니다. 또는 후회, 불안, 분노, 공허감, 미움, 심지어 증오와 같은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압축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위니캇 또한 그 자신과 그의 환자들 사이의 이 공간을 탐구하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 임상적 과제가 영적 과제를 위해 기여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임상장면에서, 우리는 환자의 의존성을 신뢰할만하게 받아줌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공간으로부터 환자의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이 다시 살아나고 자기감이 자라납니다. 영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상징적인 형태로, 즉 우리에게 거룩의 현존을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능력에 손상을 입었다면, 우리는 상징화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영적 삶 역시 힘들게 됩니다. 영적 전통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들 안에는 심지어 이미지 없음의 이미지 또는 자기 상실의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3세기 불교의 수도자였던 도겐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나, 온갖 번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생수를 가져다주시는 기독교 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 그 자체를 내려놓는 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우리를 찾아오시고 항상 거기에 계시는 믿을만한 실재의 원천에 대한 그림들을 제공해줍니다. 이 이미지들은 우리가 이 원천과 연결될 수 있으며, 이 실재의 중심이 우리와의 연결을 회복할 것임을 약속해 줍니다. 우리의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삶 속에서 우리를 안아주는 존재 그 자체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 현존은 돌보아주는 어머니라는 구체적인 인간의 현존을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영성에 대한 감각이라는 점에서 위니캇이 공헌한 것 중의 하나는 신적인 연결을 위한 매개자로서 인간과의 연결을 그가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위니캇은 아이에게 신을 주는 것으로 그를 돌보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영성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간의 연결관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심지어 잘못된 방식으로 돌봄을 받을 때에도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능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각자 안에 거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의존해 있는 우리에게 주는 누군가의 작은 돌봄만으로도 자체를 펼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존재할 수 있는 능력에 연결되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탄력성 있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위니캇의 이론이 잘못 이해될 때 발생하는 위험은 우리가 충분히 좋은 부모로부터 신을 만들어내고 나쁜 부모로부터 악마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부모들 역시 인간입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우리가 그들을 실망시키고 우리의 잘못으로 그들의 성장을 방해한 적이 많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지음을 받았으며,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영적 수준에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존재를 돌보는 능력을 갖게 되고, 우리 자신의 창조적 작업이나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서 어떤 생각이나 계획을 가질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주는, 우리 존재의 여성적 기반입니다.

위니캇은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남성적 요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게 하는 본능 에너지입니다. 이 남성적 요소가 있기에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할 수 있고 그들에게 투사도 할 수 있지만, 그들 자신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독립된 존재로 지각합니다; 만약 그들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좌절된다 해도 우리는 상처를 입지 않고 다만 좌절을 경험하며, 그 좌절의 경험은 타자가 우리와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타자 또는 생각, 통찰, 초월의 표시까지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의 잠재력과 한계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추상화할 수 있고 그것을 이전의 것이나 전통 안에 있는 일반적인 지식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유성만큼이나 타자의 고유성에 대해 민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끝까지 해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통찰을 실현하고, 목표를 향해 밀어 부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산출하고 우리 자신과 타자들을 뚜렷이 구분되는 실체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행위의 능력을 영성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좌선, 명상, 정의를 세우기 위한 활동 등에 참여하는 활기찬 영성 생활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행동을 통해서 드러낼 것이고, 우리가 궁극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 궁극을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인형이나 곰인형을 가지고 즐겼던 중간 공간은 영적 생활에서 종교 전통 안의 상징들을 포함하도록 확장됩니다. 우리는 거룩의 이미지들과 영성에 관한 교리에 대해서 알기도 하고 또 모르기도 하며, 그것들이 가리키는 영을 포착하기도 하고 포착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환상을 공간을 허용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유한하지만 그 공간을 무한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작년 9.11 테러리스트 공격에 의해 비행기 충돌로, 화염과 건물 붕괴로, 또는 창문으로 뛰어내림으로써 삼천 명이 목숨을 잃은 후에, 뉴욕 사람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영적 생활의 공간은 공포의 이미지들에 의해 침범 당했고, 궁극적인 존재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고 우리를 버렸다는 두려움에 의해 오염되었습니다. 위니캇이 어린아이들에게서 발견한 그리고 우리가 성인의 심리치료와 영적 삶의 공간에서 발견하는 환상의 중간 공간은 상처 입은 시민들에게 위로와 재생을 제공합니다.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어떤 것이든, 좋든, 나쁘든, 슬프든, 두렵든, 분노로 가득 차있든, 그것을 허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들과 놀이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성찰하고,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영성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영적 삶은 우리의 자아가 소유하고 있는 시간 감각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영적 삶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100% 살아있는 현재, 또는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완전히 민감하게 깨어 있는 현재의 순간 또는 제로 지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앞을 향해 기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뒤쪽을 향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폭발하는 건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을 짓누르는 공포 속에서도 그들이 버림받지 않았으며, 홀로 남겨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죽음의 시간에 자유롭게 창조적인 신적 현존이 그들을 반겨주실 것을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맞잡고 뛰어내리는 것을 통해서 이 창조적인 자유를 명백히 드러냈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 서로의 존재를 안아주었고, 서로의 의존을 받아주었으며, 서로 연결됨으로써 존재와 행함 모두를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이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사랑했든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우리와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영은 우리 모두가 함께 그 안에 거주하는 실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희생자들의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또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유일신 사상의 위대성은 그것이 우리를 고유한 단일체인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될 수 있는, 각각 다른 개인으로 인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위니캇은 유일신 사상을 독립된 자기들을 인식하는 우리 안에 있는 남성적 요소와 연결시켰습니다. 유일신 사상은 내 하나님이 다르고 네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의 차이들로부터 하나됨을 만들어내시는 우리 모두를 위한 한 하나님을 믿는 사상이며, 이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전체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와 우리 모두는 우리의 존재의 능력과 행함의 능력, 여성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를 한데 엮어 각각 고유한 통합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자들과 나뉘어지지 않은 존재로서 서로의 품에 안겨질 필요가 있으며, 타자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행동하기 위한 본능적 에너지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에너지 패턴들, 즉 존재의 능력과 행함의 능력을 통합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쁜 측면을 직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리치료에서 어떤 내담자들은 상처 입은 그들의 존재 능력을 너무 많은 행함으로 위장한 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공허함을 느끼는 모습을 봅니다. 다른 내담자들은 좌절과 실패가 두려워서 행동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옵니다. 물론 그 치료 방법은 그 상처가 어디에서 발생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를 입었든지,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또는 우리 자신에게 오는 파괴성을 직면해야 하며, 그것을 변형시키기 위한 우리 자신의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파괴성과 그 변형

위니캇에 따르면, 아동 발달의 초기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증오를 연합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본능과 공격 본능이 하나의 전체로서 융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실패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분열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분열은 성적 상대와의 관계, 우리 자신의 생각 그리고 우리의 영적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본능적인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연결되지 못한 본능적인 열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론은 매우 잘 배울지는 모르나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생성해내지는 못합니다. 또는 역으로, 많은 독창적인 통찰을 만들어내지만 그것들을 전통 안에 있는 이론들과 함께 엮어내지는 못합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유사하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열정적인 만남의 순간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견고한 영적 연결을 발달시키는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합니다. 또는 역으로, 진지하게 영적 수련을 행할 수는 있지만, 신성을 경험하는 뜨거운 순간이나 하나님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위니캇은 어린아이가 흥분된 사랑과 고요한 사랑이라는 두 종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합니다. 흥분된 사랑은 엄마에 대한 본능적인 식욕으로 가득 차있으며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과 타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지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무자비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강렬하게, 열광적으로, 집요하게 마음껏 즐기고자 하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짜릿한 사랑은 공격성과 섞이게 되고 마침내 이빨을 지닌 사랑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고요한 사랑은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서로 안에 거하는 특징을 띕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의 무자비한 사랑은 허기나 성적 욕망, 또는 밀고, 때리고, 깨물고, 소리지르고 싶은 욕구로부터 오는 흥분된 공격에 의해서 엄마에게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관심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이것은 아기가 자신의 본능적 반응을 억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스스로의 힘으로 아기의 이 활기찬 공격을 살아남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공격에 의해 상처받고 철수하거나, 보복하거나, 아기로 하여금 자신의 자연스런 본능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해서는 안되며, 그보다는 탄력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때 아이는 자신의 본능적인 활기로 인해 엄마나 자신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해 보상하고 싶어하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엄마가 이러한 회복의 몸짓을 미소나, 부드러운 토닥거림이나, 또는 좀더 큰 아이일 경우에는 말로 수용해줄 수 있다면, 그때 아이는 자신의 감정과 충동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제 아들은 어렸을 때 제가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제게 꽃을 주곤 했었습니다. 만약 엄마가 그의 흥분된 공격을 수용해주지 못하고 그녀와의 연결을 회복하려는 아이의 노력을 거절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본능적 잠재력과의 연결을 단절시킬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잠재적인 전체 자기는 부분들로 깨어질 것이며, 일부는 의식 안에 허용되지만 일부는 금지된 채 무의식의 영역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또 일부는 그 자체의 삶을 살지만 다른 일부는 거식증이나 과도한 성적 방종, 또는 작은 일에 화를 내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과장된 형태의 삶으로 왜곡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부모도 완전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어떤 부분이 전체로부터 떨어졌는지에 대한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니캇은 분석을 통해서 우리가 최초에 아동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통합의 수준보다 더 많은 통합을 가져올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율라노프 2001, 49, 60-66). 제가 믿기로는, 영성이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적 전통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원천 또는 창조주께 의존되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기독교는 이 창조주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가 온전할 것과 풍성한 삶을 살 것을 바라시며,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우리의 의존성을 받아주신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 살아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존재를 안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가 느끼는 공격성과 흥분된 사랑을 살아남으시고, 계속해서 우리와 관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을 기뻐해 주십니다. 이렇게 영성은 인간의 한계를 지닌 분석가가 항상 할 수 없는 의존의 공간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분석에서 두려운 퇴행으로 보이는 것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영성은 우리에게 항상 제공하고 있습니다. 영성은 우리에게 “오라, 와서 실재의 중심에 계시는 근원자에게 의존하고, 성령이 우리를 만나는 장소인 의존에 도달하라”고 촉구합니다(율라노프 2001, 120). 이러한 의존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 삶의 실재에 관한 진정한 명상을 시작할 수 있게 하며, 이때 우리의 시작과 끝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영성은 우리의 의존을 우리의 삶의 중심에, 즉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유지해온 자아 개념을 잃어버리는 장소인 동시에, 우리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존재의 능력과 행함의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해주는 바로 그 장소에 위치시켜줍니다. 영성은 정신분석에 퇴행으로 보는 것을 진전으로 봅니다.

이처럼 영적 관점은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공격성과 사랑의 분열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분열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자유로운 열정의 즐거움을 갖지 못한 채 너무 창백한 것이 되고, 우리의 정욕은 타자를 배려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지며, 자발적인 본능적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만성적인 경향성을 갖게 되고, 대의를 위한 우리의 열정의 불꽃이 꺼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에너지들을 담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분열이 우리의 종교 영역으로 확장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선한 존재이거나 나쁜 존재로만, 또는 현존하거나 부재한 존재로만 묘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정의와 자비는 연결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감히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또는 우리가 잘못된 태도를 지닐 때 우리를 내치시기 위해 열정적으로 고속도로를 달려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발과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그 기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했다고 훈계하는 자신의 제자들을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녀만이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충일한 삶과 충만한 영성을 위해서는 에로스와 파괴성이 융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위니캇은 파괴성의 변형에 관한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위해 의존을 필요로 했으나 수용 받는 대신에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뉴욕 프로이트 학회에서 그의 생각을 발표하기 위해 뉴욕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는 호텔로 돌아와서 심장의 발작을 겪었고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그는 회복을 위해 2년 동안을 노력한 후에 마침내 영국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시에 뉴욕에서 그가 발표한 내용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이미지에 대한 파괴를 그 타자가 살아남을 때, 우리의 공격성은 진정한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인사하고, 우리 자신의 창조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타자가 지닌 외적 성질을 확립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가 타자의 현실성과 부딪치게 될 때, 아이가 갖고 있는 타자에 대한 그림은 파괴됩니다. 그러나 그 타자가 파괴되지 않고 아직도 거기에 그 자체로서 완전하게 살아있다면, 아이는 진정으로 현실적인 대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엄마가 아이의 흥분된 사랑 충동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살아남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가 그녀를 보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아이의 사랑과 공격성이 혼합된 강렬한 본능적 공격에 의해 파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니캇에게 있어서 최초의 공격성은 운동성, 즉 목적 없는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아이는 차츰 자기에서 속한 것과 자기가 아닌 것을 구별하기 위해 공격성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이 공격적인 에너지는 분노 및 증오와 혼합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흥분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에게 분출했던 최초의 무자비성은 이제 타자를 손상 입히고자 하는 좀더 불길한 공격으로 변합니다. 과연 타자는 이 공격을 살아남을까요?

우리의 파괴성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비단 어린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추구하는 생각이든, 예배하는 신이든, 실천하는 영적 삶이든, 그 대상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원할 때마다 우리는 나쁘고, 파괴적인, 타자를 해칠 수 있는 강렬한 에너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욕망이 지닌 모든 힘을 사용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면, 누군가가 상처를 입게 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배신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경쟁을 파괴시키는 것은 아닌가? 어린이에 대한 위니캇의 연구는 우리가 전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 사나움의 요소를 거쳐가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만약 우리가 뒤로 물러선다면, 우리의 전적인 본능적 반응을 억제한다면, 우리는 절반의 생명력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선명한 색깔을 갖지 못한 채, 창백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해낸 온전한 존재의 능력과 행동의 능력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위니캇에 따르면, 파괴성의 변형은 우리가 타자를 향해 강렬한 본능적 에너지를 가지고 나아갈 때 그 타자가 우리의 파괴성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파괴되어지는 것은 위니캇이 우리의 주관적 대상이라고 부른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 이미지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앞에 서있게 되는 것은 자체의 객관적 현실을 지닌 타자의 타자성입니다. 그때 그 타자는 우리의 공포나 소망의 산물이 아니라 진정된 현실이 됩니다. 그때 타자의 객관적 존재는 우리를 위한 진정한 원천이 되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작은 근원 지점이 됩니다.

우리의 파괴성은 우리의 소망, 욕구, 공포, 우리 자신들 바깥에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타자들에 대한 지각으로 변형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타자들, 즉 그들에 대한 우리의 전망만을 반영하거나 인격화하는 주관적 대상입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진정되고 독립적인 자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타자의 객관적 실재입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창조적인 개인들은 그들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글 속의 인물이나 그림 속의 색깔이 그들로부터 도망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의 생명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실재성을 갖게 되며, 더 이상 끝없이 조작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예술가의 비전은 그의 그림이나 글이 창조해내는 진정한 실재에 의해 파괴되고 맙니다. 보기 드문 용기를 보여준 화가 마티스는 그림 그리기는 진정된 것을 드러내기 위해 파괴성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루 내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의 조수에게 사진을 찍게 하고는 그 그림을 파괴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새롭게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마티스는 사진 속의 그림을 참조하면서 진정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항상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잘라내고 버리면서 그의 그림을 다시 그렸습니다(율라노프 2001, 140).

영적 삶에서, 우리는 본능의 신선함이 지닌 모든 힘을, 또는 본능의 모든 무자비성을 허용한다면, 그리고 허기와 분노와 동경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영적 삶 안으로 가져오게 됩니다. 이 말은 우리를 만나시는 분이 우리가 마음속에서 그려낸 그림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틈새가 생기고 거룩하신 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파괴됩니다. 또는 우리의 아이가 병든 채 태어나거나 병들어 죽고, 전쟁이 우리의 아동기를 빼앗아가고, 지진이 우리의 집을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의 악의에 의해 희생되는 등 인생의 살벌함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그림을 파괴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지도, 개입하지도, 우리를 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지도 않으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서 계십니다. 우리의 파괴성은 하나님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마치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찢어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그림을 파괴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한 우리의 투사를 파괴할 때 또는 삶이 그것을 파괴할 때, 대상은 또는 성령 자체는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그 반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낡은 이미지들을 풀칠해 바르고, 그것들을 떠받치는 것인데, 이런 종류의 영적 삶은 탄력성과 견고성을 갖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파괴성이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는 두려움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영적 삶은 삶의 치열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살아남지 못합니다.

위니캇은 대상의 외부성을 확립하는데 사용되고 남은 공격성이 무의식으로 들어가 무의식적 상상력으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율라노프 2001, 116-119, 49-59). 저는 이것이 개인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 모두를 포함해서 우리의 지각의 창을 닦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다만 언제나 반갑게 인사할 뿐인 타자의 새로움에 대해 개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 안에 존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도, 수십 년 동안 간직해왔던 생각에도, 평생 동안 해왔던 기도에도 적용됩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타자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타자의 신비한 실재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타자에 대한 실재는 우리에게 항상 새롭고, 신선하고, 계속되는 생명의 창조에 대해 놀라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 그 이상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 그 이상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거주하는 신비를 정의 내리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허용할 때 타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더욱 깊어집니다. 이것이 삶을 신명나는 것으로 만들고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의 삶을 더욱 소중한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창조적인 삶

위니캇에게 있어서 창조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단순한 존재의 행복감을 느끼고, 우리의 이웃을 돌보고, 실재의 중심에 닻을 내리고 있다고 느끼는 좋은 삶을 말합니다. 위니캇은 그가 병원에서 죽기 전까지 교정을 보았던 책인 「놀이와 현실」에서 어거스틴이 그의 기도에서 발견했던 자기-경험과 하나님 경험 사이의 신비한 연결을 자신의 고통에서 발견한 한 여성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기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멸은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삶의 중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해 버립니다. 위니캇이 볼 때, 분석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기-경험을 발견하고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새 천년을 시작한 이 시기에, 심층심리학은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스런 자기의 핵심으로 다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창조적인 삶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위니캇에게 있어서 자기는 환상 경험을 통해 구성되기 시작하며, 이 환상 경험이야말로 삶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끼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됩니다. 영성 또한 우리 자신의 핵심에서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해있고, 어떻게 실재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구할 수 있는 환상의 공간을 제공해 줍니다. 삶에서 겪는 깊은 상처들은 우리를 이런 질문 앞에 세웁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향해 가고 있는 비행기 안에 납치된 승객들, 그 빌딩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그들의 두려움과 사랑의 마지막 순간에 핸드폰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이 똑 같은 질문을 직면했습니다. 그 비극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중의 많은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궁극적인 것에 연결되어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성령의 핵심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그 핵심으로부터 삶을 사는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숨는 삶을 사는가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신비스런 핵심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생성되어 나옵니다. 태초에 성령이 형태 없는 수면을 덮고 있다(창 1:2)는 성서의 말씀처럼, 성령은 여성적인 존재의 능력과 남성적인 행동의 능력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를 암시와 영감과 열정의 불꽃을 주는, 형태 없는 어떤 것으로 경험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생성케 하는 힘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내기를 기다리는 어떤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니캇에게 있어서 자기는 그 핵심에서 고요하고 의사소통할 수 없으며, 거기로부터 모든 살아있음이 나오는 원천입니다. 분석가는 이 핵심을 훔치거나 해석을 통해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보다는 피분석가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자기 경험을 창조하고 발견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분석가가 해야 할 일은 이 생성적 활동이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인데, 이것은 또한 환자의 파괴성을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중심에 있으며 실재의 중심에 있는 이 알 수 없는 핵심으로부터 모든 의사소통이 발생합니다. 위니캇은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자기를 발견하고 창조하고자 노력하는 정신의 통합적인 힘을 믿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무자비한 공격성으로부터 상상력으로 건너간다면, 우리는 성인으로서 날마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데서 솟아나는, 아이의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독창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창조성은 우리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입니다. 창조성이란 말은 돈, 사회적 지위, 아이, 책, 강의, 무기, 또는 새로운 패션을 산출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성이란 말의 의미는 신체 안에 확실히 자리를 잡은 자기를 지닌 채 항상 새롭게 지각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타자들과 공유된 실재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위니캇은 우리가 살아 숨쉬는 것 안에도 창조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자기-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정신적 질병과 사회적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데, 이 문제는 뉴욕 시 빈민지역에서 자란 내 환자의 말처럼,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는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살아가기는 형태 없는 상태의 경험에서 시작되며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타자가 우리의 자발적인 몸짓을 만나줄 때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닫은 채 서로를 방어하고 우리의 공상에 따라 서로를 강요하고 통제하려고 하기보다는 서로 상대방의 자기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타자에 의존되어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공포가, 우리 모두가 처음에는 엄마에게 의존되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여성을 차별하게 만듭니다. 위니캇은 “감사는 인정받은 의존이다” 라고 말합니다(율라노프 2001, 86). 우리들 각자는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의 창조적인 삶을 촉진시킬 수도 방해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핵심 자기와 영적 실재의 핵심으로부터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것을 통해서 의사소통합니다. 위니캇은 그런 삶을 참자기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일차적 창조성의 삶을 남김없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의 지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무의식 안에서 작용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향해 개방할 수 있게 하는, 상상적 삶으로 변형된 무자비성을 포함하는 삶입니다.

그때 우리의 파괴성은 우리의 영적 삶 안에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들을 우리의 이웃과 하나님께 투사하고, 동시에 그것들이 타자의 현실에 의해 파괴되도록 허용합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지만, 더 이상 그것들을 실제 타자와 동등시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와 우리의 영적 삶이 마치 영원히 파괴된 것처럼 느껴지고 다시는 그것들을 되살려낼 수 없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들과 그것들이 가리키는 실제 타자 사이의 공간이 틈새처럼 느껴지고, 우리는 삶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 틈새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들 안에서 계속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이미지들을, 우리의 투사들이 파괴된 후에 살아남은 성령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실재의 중심은 무한히 자유롭고 측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정의 내릴 수 없으며 유한한 상징들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미지 상실에 의해 파괴되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며, 우리의 투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살아있는 성령 사이의 공간에서 우리의 영적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의 삶이 펼쳐지는 공간인 우리와 타자 사이의 공간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치료 실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료 작업을 안내해주는 이론들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궁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들은 틀릴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이론들도 그것들 못지 않게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특정한 개인을 치유하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부터도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안다고 하면서 모를 수 있습니다. 어떤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성령께서 우리의 치료 작업을 안내해주고 내담자와 치료자 사이의 공간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해냅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신뢰해야 하며, 우리 자신이 그 공간의 일부이라는 것과 그 공간이 더 큰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위니캇은 그의 환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로운 상황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즉 질병의 치료에서 끝나지 않는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분석가의 소망 근저에 놓여있는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이 병든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하는 요소일 것입니다(율라노프 2001,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