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리더십

[스크랩] 고건 VS 이명박

힐링&바이블센터 2006. 9. 11. 16:59
 

고건 VS 이명박

김규 지음

국일미디어 / 2005년 11월 / 374쪽 / 13,500원

▣ 저자  김규

중앙대학교에서 문학과 언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오랫동안 언론계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다양한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중앙대, 국립순천대, 한서대 등에 출강 중이다.


▣ Short Summary

저자는 서문에서 “우리 국민은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지도자를 뽑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왔다. 권력의 힘에 눌려 주권을 포기하거나, 정파나 지역성에 치우쳐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였다. 그럴듯한 포장이나 바람몰이에 휩쓸려 감성적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선출했으므로 국가지도자가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선택했더라면 그처럼 쉽게 비난하거나 등을 돌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지도자에 대한 신중한 선택과 국민적 지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결국 모든 책임은 주권과 권력을 가진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라고 집필의 변을 밝혔다.


따라서 이 책은 두 예비후보의 각종 면면을 비교, 분석하고 문제가 제기된 사항들을 추적, 검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예술행정과 경영행정’, ‘공리주의자 고건 전 총리, 실리주의자 이명박 시장’이라는 단어로 압축되는 두 인물, 한쪽은 합의형 리더십을, 다른 한쪽은 개발형 리더십을 발휘하는 두 인물을 파헤치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정계(政界)와 관련 없는 민간으로부터의 이러한 시도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가 아닐까 생각된다.


저자는 위 두 인물에 대한 철저한 사전검증을 돕기 위해 2년에 걸쳐 각종 기밀자료와 인터뷰, 토론 등을 거쳐 이 책을 저술했다. 강조하건대 이 책은 두 인물에 대한 개인의 견해나 주장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위해 충실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할 뿐이다. 더불어 이를 계기로 사상의 공개시장에서 좀 더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다음 대선에서는 국민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국가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차례


머리말 - 훌륭한 국민만이 훌륭한 지도자를 만들어낸다


제1부  21세기 한국의 지도자는?

01 시대는 인물이다

02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를 지배하는 국가지도자의 아이러니

03 21세기 한국이 원하는 지도자

04 국가지도자는 미리 검증되어야 한다


제2부  고건 _ 달인인가 신드롬인가

01 고건의 뒤에는 항상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다

02 김구 선생 장례식에서 애국을 결심하다

03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되다

04 고등고시에 합격하다

05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되다

06 최연소 도지사가 되다

07 격변하는 청와대

08 교통부ㆍ농수산부 장관이 되다

09 국회의원 출마, 1승 1패 기록하다

10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하다

11 명지대 총장이 되다

12 최고의 공무원, 국무총리가 되다

13 다시 민선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다

14 참여정부의 국무총리직을 맡다

15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사태, 대통령권한대행이 되다

16 고건의 강태공론, 민심을 낚는다


제3부  이명박 _ 신화인가 야망인가

01 목부의 아들

02 고려대 상대에 입학하다

03 상과대학 학생회장이 되다

04 ‘박정희 대통령 보증’으로 현대건설에 입사하다

05 태국 고속도로 공사에서 고속 질주를 시작하다

06 청와대 지시를 불도저로 밀어버리다

07 입사 5년 만에 이사가 되다

08 35세에 현대건설 사장에 취임하다

09 현대건설 회장이 되다

10 망해도 내가 망해

11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다

12 서울시장 후보에 도전하다

13 제15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다

14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생활을 하다

15 제32대 서울시장에 당선되다

16 서울을 리모델링하라


제4부  고건 VS 이명박

제1장 Personality

01 가계와 성장과정

02 군대에 가지 못한 두 사람

03 재산

04 성격과 종교

05 지적능력

06 인력 풀

07 박정희 대통령과 두 사람


제2장 Policy

01 누가 경제를 살릴 것인가

02 북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03 서울시장 누가 누가 잘했나

04 리더십 유형

05 누가 진정한 실용주의자인가

06 고건, 이명박 SWOT 분석


제3장 Issue

01 고건의 쟁점들

02 이명박의 실수들


제5부  2007 가상 시나리오

01 경선의 지뢰밭을 통과하라

02 2007년 대선의 핵심 포인트는

03 두 정당의 선택은

04 참여정부의 성적표가 두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05 2007년 국민의 선택은

고건 VS 이명박

김규 지음

국일미디어 / 2005년 11월 / 374쪽 / 13,500원


제1부  21세기 한국의 지도자는?


시대는 인물이다. 해방공간은 김구와 이승만, 김일성의 시대였으며 1960~70년대는 박정희의 시대였다. 1980년대는 전두환, 노태우, 3김의 시대였고, 1990년대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시대였다. 이들은 해방 후의 우리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그 흐름을 주도해나갔다. 나아가 그들의 행보 하나하나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될 만큼 중대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이름을 뺀 채 해방 후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리만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주요인물의 궤적을 탐색하고 인과관계를 해석하는 추적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역사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집단의 이데올로기와 이익을 대변하며 그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얼마 후, 새로운 인물을 선택해야 할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선택된 인물은 한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시대를 만들어 가느냐는 바로 우리의 몫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정당사회학』이라는 저서에서 대표자와 국민들의 관계가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를 지배하고, 위임받은 자가 위임한 자들을 지배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맞는 이야기다. 민중들은 어렵사리 지도자를 뽑아놓고, 이번에는 그 지도자를 몰아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민중들이 권력을 교체하는 과정은 정말 처절하리만치 눈물겹다.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과 재화가 소모된다. 그들은 또다시 자기들이 뽑은 지도자에 의해 철저히 지배당하며, 또다시 “잘못 뽑았다”고 땅을 치며 후회한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음 주기의 선거를 위해 이를 갈며 투쟁을 전개한다. 이것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빚어지고 있는 ‘국가지도자의 아이러니’다.


대의민주주의의 이런 부조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현대 자본주의는 아직 더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이 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가 계속되는 한 ‘국가지도자의 아이러니’도 계속되고, 잘못된 선택이라고 여기는 집단들의 투쟁도 계속될 것이다. 반복적이고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할 대표자를 뽑지 못한다면 그 대가는 국민 스스로가 치러야 한다.


각 기관의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국민들은 ‘경제회생’과 ‘각 집단의 통합과 조정’을 국가의 우선과제로 꼽고 있다. 맞는 이야기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만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 중 어떤 과제를 더 우선시하느냐는 결국 국민들의 선택이다. 만약 국민들이 경제문제를 상대적 우위로 설정한다면 차기 국가 지도자로 경제를 살릴 인물을 뽑을 것이다. 그보다 국가를 통합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인물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하면 통합형 국가지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에는 과연 어떤 국가지도자가 필요할까? 각종 조사결과를 종합해보면 주요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다.

1) 경제를 살려야 한다.

2) 국가와 사회 각 집단을 통합, 조정해야 한다.

3)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

4) 국정관리능력을 갖추어야한다.

5) 국가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6) 전문성과 지적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7) 국제적 식견과 외교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누가 이러한 국민의 여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국가지도자를 선택함에 있어 철저한 분석과 검증 대신, 정서적 친근성과 지역성 등에 크게 의존해왔다. 후보자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무엇인가, 어떤 경제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지향하는 국가적 비전은 무엇인가를 따지지 않고, 어디 출신이며 어떤 정치적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꼽아왔다. 즉 바람몰이에 휩싸여 표를 던지곤 했던 것이다. 국가지도자에 대한 검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 선진국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국가지도자의 자질을 검증한다. 그들의 검증방법은 지나치리만치 냉혹하다. 또한 이렇게 하여 검증된 내용은 숨김없이 공개된다. 이런 과정을 어렵게 통과해야만 지도자가 되기 위한 후보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국가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상의 공개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이를 통해 도덕적 결백성과 자신의 정책방향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 우리 모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소주잔도 기울여가며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결국 실패한 지도자를 뽑아내는 국민은 실패한 국민이다.


제2부  고건 - 달인인가 신드롬인가


고건이 태어난 1938년의 시국은 몹시 어지러웠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대륙침략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에 임용된 고형곤 교수의 집안은 비교적 안정돼 있었다. 부인 장정자 여사의 친정집이 비교적 부유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교수로 임용되면서 낳은 아들 이름을 직접 지으면서 고 교수는 놀랍게도 고려 태조 왕건의 이름자를 땄다. “어린애 보고 왕 되라고 한” 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대비해 볼 때 공격이나 싸움보다는 만 사람의 중지(衆志)에 따라 추대된 그 인생 역정의 모양새가 좋아 보여” 지은 이름이었다. 만약 이름이 사람의 역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아버지의 예언대로 고건은 이름처럼 살고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특기할 만한 사항은 김구 선생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6년 6월 26일 백범 김구는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때 장례식을 보면서 ‘김구 선생님 같은 애국자가 한번 돼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나중에 그때의 결심이 결과적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경기고 졸업을 앞두고 고건은 서울대 정치학과 응시를 결심했다. 아들의 의견을 들은 고 교수는 “뭐 하러?” 하고 물었다. “김구 선생 같은 애국자가 되려고요.” “그러려무나.” 고 교수는 더 이상 되묻지 않았다. 학생회장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졸업이 다가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문리대를 나와서 시험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고등고시, 한국은행, 신문사 세 군데였다. 떳떳하게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디든지 시험을 보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들어갈까 고심한 끝에 고시 쪽으로 방향을 잡고 뒤늦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1961년 12월 5일, 고건은 마침내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 고건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고건이 지역개발담당관을 맡을 무렵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 박 대통령을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게 된다. 그가 먼저 착수했던 일은 ‘산림녹화 사업’이었다. 고건은 성공사례를 슬라이드로 만들어 박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보고했다. 박 대통령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치산녹화 10개년계획’을 수립하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후 고건은 새마을운동의 전담자가 되어 박 대통령이 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새마을운동을 설계하였다. 새마을운동 추진에 대한 고건의 기여도는 매우 높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새마을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많은 성과를 도출해낸 능력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어떤 분석가들은 새마을운동을 “박 대통령이 머리를 만들고 고건 국장이 몸통을 만들었다.”, “박 대통령과 고건의 공동작품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고건은 1975년 11월 12일 전라남도 지사로 발령되었다. 그때 나이 37세. 건국 이후 최연소 도지사였다. 고시 동기 중 가장 빠른 승진 기록이었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 파격적인 인사는 박 대통령이 고건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여와 업적을 보상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그간 쌓은 경험을 현장에서 직접 펼쳐보라는 의미도 숨어 있었다. 고건의 도지사 임명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고건이 전남도지사로 임명되자 아버지 고형곤 박사는 급히 가족, 친척을 서울 집으로 소집했다. 변호사였던 장남 고석윤과 고건은 물론 전북 옥구에 살던 중량급 친척 수명이 참석했다. 고 박사는 이 모임을 ‘비상계엄 가족회의’라 명했다. 고 박사는 돈의 유혹이 많은 도백이란 자리가 아들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일생 중 단 한 번의 훈시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째, 술 먹고 실수하지 마라.

둘째, 청렴해라. 부패의 과정을 살펴보면 로비하는 놈이나 그에 응하는 공무원 둘 다 나쁘지만 현실적으로 냉정히 따지자면 로비하는 놈이 더 나쁘다. 상대 공무원은 오히려 멍청한 놈이라고 봐야 마땅하다. 공무원은 몇 푼 받아먹고 어리석게 이름과 직위를 팔지만 로비하는 쪽은 그 몇 십 배 몇 백 배의 이익을 정확히 남기기 때문이다. 절대 ‘농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셋째, 파벌을 만들지 말고 줄서지 마라.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개인에게 충성하지 마라. 예전에는 충성의 대상이 군주였다면 지금은 국가다. 대통령이나 상사가 아니다. 대통령 얼굴만 쳐다보는 고위관리들의 작태를 닮지 마라.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월 고건을 정무 제2수석비서관에 임명했다. 고건은 도지사 출신으로 처음으로 정무 2수석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러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졌다.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14일 비서실을 개편하며 고건에게 정무 1,2수석 자리를 합쳐 정무수석을 맡으라고 했다. 고 수석은 정치분야 중 제도와 공식적인 사안에 집중하였다. 1980년 5월 17일은 토요일이었다. 잠시 후 비서실장이 수석들을 불러 모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국보위에 대한 건의는 연기시켰다.”는 이야기를 했다.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는 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고건은 성북구 장위동 집에서 외출을 삼가고 주로 독서를 하면서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뉴스와 광주로부터의 전화로 알게 됐다. 5월 20일경 밤늦게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추기경은 “고 지사가 청와대에 있는데 어떻게 광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라고 하소연하였다. 고건은 “사표를 제출하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며 울먹였다.


고건은 1985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중 1987년 5월 26일 내무장관에 발탁되었다. 고건의 내무장관 입각 보도를 듣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정권말기인데 왜 거기에 들어가느냐고 다들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고건의 생각은 달랐다. 어려울 때일수록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 24시간 내에 명동성당 사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고 내무장관은 당시 대책회의에서 88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고, 바티칸이 반발하면 경제에 큰 피해가 우려되며, 강경 진압이 되면 자칫 계엄령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점 등 3대 불가론을 펼치며 이를 반대했다. 이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 전두환 정권은 실질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고건 내무장관의 재임기간은 불과 49일이었다. 뒤늦게 막차를 타서 짧은 기간 동안 호된 고생을 치렀으니 내무장관 재임은 영화가 아니라 사서 한 고생이었다.


1988년 10월 2일 올림픽이 폐막한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울시장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지방행정은 그의 전문영역이었다. 누구누구 사람이라는 편 가르기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전문 행정관료로서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건설부는 1989년 3월 서울시 수서, 대치 지역을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지정했다. 수서사건은 당초 특별분양을 받은 민간조합에 경제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군부대, 언론사 등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특혜의혹이 확산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 시장은 수서 부지 고도제한을 해제해 고층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하라는 청와대와 국회 쪽의 압력을 끝까지 뿌리쳤다. 그러다 1990년 12월 27일 노재봉 내각이 들어서면서 고건 시장은 전격 해임되었다.


고건은 1997년 3월 5일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보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수성 총리의 후임이었다. 고 총리의 발탁은 임기만료를 앞두고 민심수습과 국정운영의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됐다. 김 대통령 역시 대북 문제 등 안보와 경제 살리기에 충실하고 내각은 총리에게 맡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야당 역시 고건의 총리 지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국회임명동의안도 무난하게 처리됐다. 이로써 고 총리는 1962년 2월 공무원에 임용된 지 35년 1개월 만에 최고위직 공무원 자리에 올랐다. IMF 사태가 터진 직후인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고 총리는 선거관리에 집중했으며 경제문제는 주로 임창열 부총리가 맡았다.


정권이 바뀌면 총리를 비롯해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고 총리는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총리직을 그만둘 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지명한 김종필 씨의 국회 임명동의안 처리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국무위원 임명이 법적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무총리의 제청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주일간 총리직을 유지하면서 새 정권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하고 퇴임했다.


국무위원 제청 문제로 김대중 정부와 인연을 맺은 고건은 1998년 봄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제의받는다. 1998년 6월 4일에 실시될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였다. 선거결과 고건 후보 183만 8,348표(52.9%), 최병열 후보 151만 2,854표(43.5%)를 기록하여 32만 5천여 표 차이로 고건 후보가 제2기 민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취임 후 시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바로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였다. 상암동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축구 전용경기장을 만들고 쓰레기 매립지로 버려져 있던 난지도 땅 105만 평에는 월드컵 공원을 조성해야 했다. 그는 이 모든 사업을 차질 없이 수행해냈다.


고 시장의 퇴임을 앞두고 2002년 6.13 지방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전국 16개 광역 자치단체 가운데 현직 단체장이 스스로 불출마를 결심한 경우는 고 시장이 유일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분위기는 달랐다. “당에 대한 애정이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라는 등의 노골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2002년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월드컵 폐막식이 열리던 날, 고건 시장은 4년 동안의 시정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집무실을 정리했다. 청렴을 신조로 삼는 고 시장의 손에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나올 때도 달랑 가방 하나뿐이었다. 대신 그의 가슴 속에는 시청 앞에 메아리친 “오! 필승 코리아”라는 함성이 가득 차 있었다.


2003년 2월 25일 출범하는 참여정부는 총리 인선에 고심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대선 때 ‘책임총리제’를 공약한 바 있었다. 대통령과 내각이 권력을 분점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의 전 단계를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개혁대통령, 안정총리를 기본 골격으로 적임자를 물색했다. 선상에 떠오른 사람은 오명 전 장관과 고건 전 총리였다. 고심 끝에 참여정부의 총리 내정자는 고건 전 총리로 결정됐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출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2004년 3월 9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으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헌정사상 56년 만에 처음인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극한 대립 끝에 마주보고 달려오는 두 대의 기관차가 끝내 충돌하고 만 것이다. 이로써 정국은 다시 무풍지대로 접어들었다.


고건 권한대행은 ‘행정의 달인’이란 평에 걸맞게 정부 각 부처의 업무보고를 꼼꼼히 챙겨 공무원들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이른바 ‘현미경 들여다보기’ 행정으로 정부 각 부처의 누수를 철저히 차단했다. 그는 자신의 직책이 “권한대행이 아니라 고난대행이다.”라고 표현을 했지만 여론은 그의 편이었다. 여야 할 것 없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국민들 역시 안정적 국정을 이끌고 있는 그에게 “믿음직하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방송인 출신의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은 “이 정권 출범 후 가장 편안했던 시기는 고건 총리가 권한대행을 한 3개월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마침내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기각’을 결정했다. 노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하자 고건 총리는 사의를 표했다. “대통령께서 큰 강을 건넜으니 말(馬)을 바꾸는 게 순리인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고건은 2004년 5월 25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30년간의 공직생활을 접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고건은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평상적인 헌정 상황에서 대통령권한대행을 한 유일한 총리로 기록되었다.


제3부  이명박 - 신화인가 야망인가


이명박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런데 무덥고 지루한 어느 여름날, 바로 손위 누이인 귀애와 막내동생 상필이 이명박이 보는 앞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미 전투기들이 마을을 폭격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명박의 가슴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념과 체제의 대결로 인한 비극은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각오가 생겼으며, 후일 현대건설 회장 시절 적극적인 북방개척의 의지를 다지는 체험적 바탕이 되었다.


이명박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옷감 장수 아버지를 따라 영덕, 홍해, 안강, 곡강 등 포항 인근의 장터를 누볐다.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그는 이른바 ‘시장경제’를 몸으로 익혔다. 그러면서도 원리원칙이 반드시 이긴다는 상도도 익혔다. 이명박은 훗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그 많은 술자리에서 누구보다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그것을 가난이 자신에게 물려준 하나의 유산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명박은 1959년 12월,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입학 시험일까지 남은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장에서 부모님 일을 돕는 한편 시간을 쪼개어 공부를 했다. 합격자 발표일, 합격자 명단에는 ‘이명박’이라는 세 글자가 또렷이 쓰여 있었다. 드디어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등록금을 낼 수 없었던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이태원 시장 사람들이 등록금을 융통해주고, 일자리를 하나 주선해 주었다.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다 시장의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일이었다. 낭만의 대학생활이라기보다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5ㆍ16 군사정권의 강압통치에 저항하던 대학생들은 군사정권의 한일회담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대학 3학년생인 이명박도 서서히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작은 결심을 한다. 상과대학 학생회장 출마를 결심하는 것이다. 개표 결과, 이명박은 4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당선됐다.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 이명박’. 이제 인생의 대전환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포항 시장통 출신의 촌놈이 아니었다.


이명박은 6ㆍ3 한일회담 반대시위 사건으로 계엄사령부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가 끝나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비상계엄령은 해제되었다. 결심공판은 민간재판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64년 6월 말에 들어간 서대문형무소 생활은 그 해 10월 말 끝났다. 실 복역 기간은 반년이었다. 1965년 초, 이명박은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다. 중퇴를 목표로 했으나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단 목표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은 자유롭지 못했다. 6ㆍ3사건으로 내란선동죄라는 전과딱지를 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돌아와 직장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이명박에게 신문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외건설 현장에 나가 일할 역군 모집’ 현대건설이라는 회사에서 태국현지에서 일할 사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1차 필기시험을 치른 이명박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부장 면담요’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특이한 전보였다. 2차 시험 일자를 알려주는 내용도 아니고 인사부장과의 면담이라니, 굳어진 얼굴로 찾아간 그에게 인사부장은 학생운동 전력을 문제 삼았다. “무슨 방법이 없겠소?” 고심하던 이명박은 정면승부를 결심했다.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대통령 박정희였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전력을 밝히고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토로한 뒤, 사회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히 빚을 지는 것입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이낙선 비서관은 청와대 수석회의를 열어 이명박의 현대건설 입사를 허락했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일만 하는” 조건부 승인이었다. 훗날 이 일은 세인들의 입에 “이명박의 신원보증을 박 대통령이 섰다.”고 회자되었다.


진해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던 12월 초, 정주영 사장이 직접 전화를 했다. 태국현장 발령이었다.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우리나라의 건설사상 최초의 해외공사였다. 태국 고속도로 현장 내부에서 갈등이 고조되던 어느 날 저녁, 이명박은 사무실에서 밀린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명박이 밖을 내다보니 한국에서 온 인부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군용 단도를 들고 회사 집기를 부수고 있었다. 이명박은 금고를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들은 이명박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과 함께 들이닥친 직원들은 금고를 껴안고 넋이 나가 있는 이명박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방콕지사와 서울 본사에 알려졌다. “경리사원 이명박이 목숨을 걸고 혼자서 금고를 지켜냈다.” 말단사원의 무용담은 어느새 신화로 증폭되었고 서서히 현대건설의 작은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그 스스로도 “금고사건이 현대건설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의 진급은 빨랐다. 중기사업소 과장이 된 지 1년 만에 차장을 거쳐 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부장으로 진급한 6개월 후 이사가 되었다. 이때 이명박의 나이 만28세.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이 같은 고속승진은 샐러리맨의 기록으로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사가 된 이명박은 본사로 들어왔다. 1974년 1월, 정기인사에서 그는 또 전무로 승진했다. 이듬해에는 부사장에 올랐다. 현대건설 입사 10년 만에 일약 부사장에 오른 것이다. 그의 고속승진은 연공서열을 파괴한 파격이었다. 이명박의 고속승진은 이미 매스컴과 업계의 주요 뉴스였으며 샐러리맨들의 부러움 그 자체였다. “이 이사를 내가 언제 진급시켰어? 당신 스스로 진급한 거야. 세상이 그걸 모르고 찧고 까부는 거야.” 이명박의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정주영 회장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아마 정 회장은 그것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부사장에 대한 정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은 1992년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중동에서의 기상천외한 모험이 성공을 거듭하자 현대건설은 자긍심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정인영 사장이 퇴진하면서 경영층에 변동이 있어났다. 바스라 조선소 건설 공사를 놓고 맞섰던 두 형제의 갈등이 끝내 결별로 끝나고 만 것이다. 정인영 사장은 현대양행을 맡아 분가했다. 게다가 국내 담당 조성근 사장의 사표 제출 소문도 들려왔다. 퇴근 시간이 지난 어느 저녁 무렵, 정주영 회장은 광화문 사옥 회장실로 이명박 부사장을 호출했다. “이 부사장, 당신은 사람을 다룰 줄 아는 것 같아. 나를 위해서, 아니 현대건설을 위해 사장을 맡아 주게.” 승진 문제를 놓고 당사자인 이명박과 정 회장이 이처럼 의논해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결국 며칠 후인 1977년 정초 이사회에서 이명박은 현대건설 국내 담당 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바로 그 해, 현대그룹은 처음으로 국내 정상의 기업으로 올라섰다. 당시 삼성그룹은 한국 재계의 움직일 수 없는 정상이었다. 그러나 중동 건설 붐은 재계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1992년 1월 4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공식적으로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언론보도대로 이때까지만 해도 정 회장은 감독만 하고 주연은 안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대국민약속은 얼마 후 번복되고 말았다. 감독만 하겠다던 그가 직접 주연으로 뛰겠다고 나선 이유에 대해 많은 설이 난무했다. 그중에서 제일 유력한 설은 정 회장의 돈을 보고 부나방처럼 몰려들었던 정객들의 ‘부추김’이 제일 큰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윽고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의 결정을 요구했다. 이 무렵 정 회장의 정계 진출 못지않게 이명박 회장의 14대 총선 출마설도 기정사실 인양 떠돌고 있었다. 기업주와 전문 경영인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새삼 느껴졌다. 결단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정 회장은 “12월 말까지 결정을 내려달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 말은 회사를 함께 떠나자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1992년 1월 3일 이명박 회장은 현대그룹을 떠났다. 이명박 회장이 현대를 떠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놀라워했다. 그러나 떠날 때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할 말을 줄이고 헤어졌다.


이명박은 현대를 그만두고 원래 1,2년 정도 유학을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2월 초순경, 당시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모 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에 전문경영인이 필요하다는 설득이었다. 1992년 3월 24일, 이명박은 제14대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현대를 떠난 지 2개월 만에 정치권에 들어와 거뜬히 금배지를 달게 된 것이다. 경북 영일ㆍ울릉에 출마한 형 이상득 의원도 당선되어 형제 의원이 탄생했다. 제14대 총선의 특징은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패배와 신생정당 국민당의 부상이었다. 특히 민자당은 3당 합당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패배해 13대에 이어 또다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다.


이명박은 1998년 8월,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와달라는 초청장을 받은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일보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명박은 ‘대한민국 50년의 50대 인물 경제분야 10인’ 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그 보도는 국회의원직을 그만두고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고 있던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미국에 간 이명박은 교민사회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렇지만 재충전을 위해 도미한 이상 근신하는 자세로 조용하게 지내려고 결심했다. 대학이 부여한 연구과제를 수행하거나 가끔 강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묵상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2001년 5월 9일, 이명박이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 분과위원장에 임명되었다는 보도가 뒤를 이었다. 다시 본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명박, 홍사덕 두 사람을 2002년 6월 제3대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감으로 일찌감치 압축해놓고 있었다. 전문경영인 출신인 이명박은 ‘검증된 최고경영자(CEO) 시장론’으로 대의원들을 파고든다는 전략을 세웠다. 반면에 홍 의원은 ‘정권교체를 가능케 할 경쟁력 있는 후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는 전략으로 맞섰다. 하지만 그는 결국 후보등록 마감시한인 낮 12시까지 후보등록을 하지 않았다. 이로써 6월 13일 행해질 서울시장 선거는 한나라당 이명박, 민주당 김민석 후보의 맞대결로 치러지게 됐다. 2002년 6월 13일 제3대 전국동시 지방선거일. 투표를 마친 이명박, 김민석 두 후보는 각각 승리를 장담하면서도 내심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유권자들은 젊은 김민석 후보보다는 중량감 있고 검증받은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다. 포항 후미진 달동네에서 태어나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서울시의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선거공약과 취임사를 통해 청계천 복원, 지역균형발전, 대중교통 중심의 교통체계 수립 등 서울을 리모델링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시장이 계획한 사업 중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는 청계천 복원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노후화로 인한 청계고가로 및 복개도로의 안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자연과 인간 중심의 친환경적인 도시공간을 조성하기 위하여 계획되었다. 또한 청계천 주변지역의 산업구조 개편과 도심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고자 했다. 2003년 7월 1일 청계 고가도로 철거 공사를 시작으로 청계천 복원공사는 2005년 9월 30일 완공되었다. 여론조사 결과 그의 지지도는 급상승하여 ‘청계천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신화는 없다.”라면서 노력을 강조하는 그는 차기 서울시장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며 대권도전에 대한 마지막 야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과연 그의 야망이 이루어질 것인지 뜨거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제4부  고건 VS 이명박


누가 경제를 살릴 것인가

고건 전 총리는 안정 속의 성장을 추구할 공산이 크다. 또한 국민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 역시 이런 부분이기 때문에 일순간에 자신의 스타일을 내팽개칠 확률은 아주 적다고 본다. 고 총리는 국가가 지속적인 성장동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요소가 빨리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래야 국내외 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나 경제가 활성화된다. 고건 전 총리는 그의 책에서 “사회적 에너지를 모으는 일에 주력할 것”을 천명하였다. 국민들이 기대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명박 시장은 매번 ‘우리나라 경제를 살릴 것 같은 지도자’ 중 1위로 떠오르고 있다. 2005년 6월 뉴스메이커의 조사에서도 ‘경제발전 적임자’ 항목에서 1위로 뽑혔다. 이명박 시장이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국내 굴지의 기업의 CEO 출신이라는 데 기인한다. 이 시장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강력한 성장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밀어붙일 공산이 크다. 일부의 비난에 직면하겠지만 눈을 질끈 감은 채 컴퓨터를 장착한 불도저를 타고 들들들 ‘중단 없는 전진’을 할 것이다. “제대로 된 리더가 있었다면 이미 2만 불을 넘어 3만 불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이 시장은 2005년 7월 중순 전국 50개 대학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 “뉴 리더스 대학생 캠프”에 참석, 이같이 말했다.


북한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면 고건 전 총리는 미국을 우리의 중요한 동맹국으로 생각하고 용미적인 정책을 펼 것으로 판단된다. 이럴 경우 참여정부가 추진해온 자주적 외교 노선은 일부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외교적 평화적 해결에 주력하되, 무조건 퍼주기 식의 해법은 지양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고건 특유의 ‘실용주의’ 접근방식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정을 중시하고, 주변국과 대화하며, 구체적인 실리를 챙겨가며 북한 문제를 풀어나가겠다는 고건 식 프로세스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시장의 북한에 대한 생각은, 주적 개념과 이념적 성향은 확실하게 정립하되 북핵문제 등은 국익과 실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인도적 지원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형적인 실리주의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장 역시 자주적 외교노선과 거리를 둘 것이다. 여러모로 볼 때 사실 그의 역사인식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원래 경영자들은 역사적 상황에 관심을 두지 역사 그 자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행정은 경영이다.”라고 할 만큼 경영적 마인드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대북관계에서는 그가 실리노선을 추구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장 누가 누가 잘했나

고건 전 시장이 펼친 사업들을 보면 전체적으로 떠들썩한 과시형 사업보다는 내부적인 개혁에 치중한 측면이 많다고 분석된다. 즉, 그는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잘 돼 있고, 부패가 사라지면 발전과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판단한 듯하다. 실제로 그의 판단은 적중하여 서울시는 많은 부분에서 환골탈태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는 그 특유의 조용하고 신속한 개혁, 내실 있는 시스템, 청렴과 조화가 투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요즘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대형 사업에 관한 메뉴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이명박 시장이 역점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들이다. 이 사업들의 성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시장은 여전히 대형 토목, 건설공사들을 선호한다. 그는 이런 사업들이 서울의 인프라를 바꾸고 SOC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아직도 서울은 하드웨어의 재구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본래 대형공사는 그 성패가 단숨에 판가름 난다. 성과도 즉시 나타난다. 앰플 처방과 같다. 이 시장이 해결사 같은 이미지를 주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서울은 이 시장에게 리모델링의 대상이었다.


리더십 유형

현재까지 드러난 고건 전 총리의 리더십 유형은 소극-긍정형으로 판단된다. 우선 그는 매사를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는다. 언제나 균형과 합의를 우선시한다.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법, 원칙, 상식의 3대원칙을 지켜와 ‘미스터 클린’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행정도 예술이다’라는 저서의 서문에서 강조했듯 “분산되기 쉬운 사회의 에너지를 하나로 결집”시키는 데 많은 관심을 쏟고 주력한다. 그의 추진력은 명사형이다. 치밀한 분석을 통해 신중하게 결정하지만 한번 결정된 일은 번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분석가들은 그의 리더십을 ‘유에서 질서를 만드는 지도자’라고 평가한다. 질서를 강조할 경우, 여론의 분열에 휩싸이지 않고 안정적 성장을 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의 지지도가 높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명박 시장의 리더십은 적극-긍정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언제나 문제가 생기면 정면대결을 벌인다. 일단 목표를 정하고 선언을 하며,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 그래서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지도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그의 리더십은 문제해결형이라 할 수 있다. 추진력의 측면에서도 그는 동사형이다. 치밀한 분석을 통해 결정을 내리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마침내 결과에 도달하면 그 일은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그 앞에는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쉬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동사형이다. 국제적 경쟁력에 대해서 이 시장은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부분은 고유의 강점이다.


누가 진정한 실용주의자인가

고건 전 총리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다산 정약용을 꼽는다. 그의 아호 ‘이렴(利廉)’도 다산의 ‘목민심서’ <율기(律紀)편>에서 찾아낸 말이다. ‘이렴’은 ‘청렴한 것이 이롭다.’는 뜻으로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청렴하게 지내는 것이 장기적으로 득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2의 황희 정승’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고건 전 총리가 다산의 실사구시를 흠모하는 까닭은 체질적으로 탁상공론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건 전 총리는 개발주도형의 실용주의 노선보다는 정책적 낭비를 줄이고 적재적소에 역량을 쏟아 부어 이익을 창출하는 내실형 실용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부실을 제거하고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면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slow and steady'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시장이 추구하는 실용주의는 전체적인 시스템의 개혁을 통해 동반성장을 유도하는 스타일보다는 리딩 그룹이 달려 나가면 나머지가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시장주도형’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깃발을 들고 전진할 때 후위 그룹들도 뒤따르게 된다. 이 시장이 벌이는 사업에는 언제나 관심이 집중되고 떠들썩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그가 벌이는 판이 너무 조용하게 진행된다면 그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민의 살림을 책임지는 공공기관의 경우, 최고책임자의 의사결정과정이 독단적이라면 문제가 크다. 국민은 결코 경영의 대상이 아니다. 만의 하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하여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해서도 안 된다. 이 점이 기업과 정부가 다른 점이다.


제5부  2007 가상 시나리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해 볼 때 고건 전 총리에 대한 지지도는 참여정부의 성적표와는 크게 상관없이 유지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지지도는 등락의 폭이 크지 않으며 세대별, 계층별, 지역별로 비교적 고른 편이다. 아울러 참여정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서도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이 계속된다면 더욱 반사적 이익을 취할 확률이 높다. 안정을 바라는 여망이 그를 중심으로 더욱 공고하게 결집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회복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는 특별히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을 위한 과도한 드라이브 정책에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안정 속의 착실한 성장을 선호할 확률이 높다. 다만 어떤 실효성 높은 정책과 공약을 들고 나올지가 관건인데 이는 결국 그의 몫이다.


반면 이명박 시장은 참여정부의 성적표가 낮으면 낮을수록 상대적 이득을 취할 것이다. 이는 야당 소속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속성으로 자세히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또한, 이 시장은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심리가 높아질수록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대기업의 CEO 출신이며 ‘성공신화’라 불릴 정도로 놀라운 경영성과를 이뤄냈다. 이 때문에 이 시장은 대권주자 중 가장 ‘경영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제회복 기대심리에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 시장은 ‘건설’이라는 이미지를 전환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글로벌 경제추세와 우리나라의 경제여건상 이제 ‘건설’이라는 깃발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첨단산업의 육성과 산업별 균형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정책개발이 시급하다.

출처 : 복음과 삶
글쓴이 : 코람데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