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공간/칼럼

하나남과의 만남

힐링&바이블센터 2006. 8. 17. 20:52


 

 

 
어느 병원에 심장병으로 입원한 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의 수술을 앞두고 주치의가 회진 차 그 환자를 
방문하였다. 
환자는 그 주치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심장 수술을 몇 번이나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러자 주치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환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움과 불안함에 떨며 
어떻게 중요한 심장 수술 경험이 한번도 없으면서 
수술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주치의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명문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사람의 인체에 대하여, 그리고 심장에 대하여, 전문적인 
의료지식이 많습니다. 
나는 의과대학을 다닐 적에도 언제나 우등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저에게 다 맡겨 주세요
.... 
이 말을 듣고 심장 수술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환자를 위한 수술은, 수준 높은 지식과 의욕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수 많은 실습과 임상경험으로 얻어진 
산지식이 의사의 몸에 배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영혼을 수술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랴!...) 
어느 누가 비행기 조종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고, 
조종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있다고, 
비행기를 실제로 조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다.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을 잘 배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몸에 배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연구소나 도서관에서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과 훈련장에서 양성 되어 지는 것이다. 
바울의 믿음은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증명되었다. 
욥의 믿음도 혹독하고 처절한 잿더미에서 빛을 발했다. 
다니엘의 믿음은 포로생활 속에서도 굴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촛불의 밝기는 어두울 때 증명된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유라굴로 광풍가운데서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말씀연구소 직원이 아니다. 
성경도서관 사서가 아니다. 
우리는 강한 용사이며 필요하다면 주와 복음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제자들이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실재이다. 
인공위성은 지구 주위를 돌며 갖가지 촬영을 하여 온갖 
정보를 보내온다. 
그러나 인공위성은 한번도 지구와 충돌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요즈음, 
은혜와 영의 세계 주위를 열심히 돌기만 하는 성도들이 
늘고 있어 속상하다. 
실제로 주님과 충돌은 거의 없다. 
영의 실재와도 무관하다. 
그냥 어제 믿던 대로, 어제 하던 대로 
기도하고, 교회 가고, 사역하고, 설교하고, 선교하고, 
찬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문제는 충돌의 경험이다. 
주님과의 만남이다. 
보혜사 성령님의 실제적인 내주하심이다.
의학 지식이나 비행 조종에 관한 지식이 전문가 수준이라 
해도 실제로 수술의 경험이나 비행의 경험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고 
보혈의 능력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혈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는 경험이 중요하다. 
배고플 때 밥에 대하여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굶주림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 
밥을 먹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거룩한 충돌이 있어야 한다. 
큰 대야에 물이 가득 있어도 먹물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온통 시커먼 물로 순식간에 변한다. 
그렇다. 
주님의 보혈 한 방울이면 되고 주님의 사랑 한 컵을 
마심으로 족하다. 
그러면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이 밝아지고 편해지고 쉼을 
얻게 되고 안식에 들어가는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신앙은 관념이 아닌 경험을 통해 몸에 배어야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제자는 지식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성령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 
성령의 임재가 몸에 배고 
날마다 성령님의 임재와 충돌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이대로 죽어도 좋은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풍랑 속에서도 평안하고, 
잃을 것도 없는 궁핍과 허리가 꺾이는 고통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자족할 수 있다. 
조엘( Joel )을 보라.
(생후 20개월에 40톤 트럭과의 교통사고로 온몸이 숯덩이가 
되는 최악의 전신화상으로 어린 시절 비명과 고통으로 살며 
26년 동안 50여 차례나 수술하고 
결국 믿음으로 승리한 조엘 ... 규장 출판,조엘 참고) 
송명희 자매를 보라.. 
지식이 필요하지만 
오순절을 통하지 않은 지식은 오히려 우리를 평생 인공위성 
신자 되게 할 수 있다. 
목회도 사역도 마찬가지다. 
사역의 사이즈나 유명세가 영력은 아니다. 
영력은 '하나님과 얼마나 자주 충돌하는가?', 결정되는 
영향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의 충돌 없이도, 
얼마든지 목회도 할 수 있고 사역도 할 수 있고 선행도 
가능하고 은혜도 끼칠 수 있고 봉사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어야 거룩한 충돌을 사모할 터인데 말이다. 
하나님과 충돌한 적이 언제로 기억되는가?
문제는,주님과 충돌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과 충돌
하든지 교회와 충돌하든지 목회자와 충돌하게 되어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도의 시간에 주님과 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과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주님을 만지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혈루 증 걸린 여인은 주님을 만졌고 
다른 사람들은 주님 가까이에서 주님을 부대끼며 밀치기만 
하였다. 
그러나 병 고침 받은 사람은 예수님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을 만진 혈루 증 걸린 여인 한 사람뿐이었다. 
만져야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과 충돌해야 나는 죽고 그 분께서 사시게 된다. 
생각하거나 지식만으로 안 된다. 
임재가 중요하다.
기독교는 명상의 종교나 수양의 종교가 아니라 임재의 
종교이다. 
하나님과의 충돌, 성령님의 실재, 보혈의 마심은, 
실로 엄청난 일을 경험하게 한다. 
펑펑 울게 하고, 차디 차게 굳은 심장은 펄펄 뛰게 하고, 
세포들이 춤을 추게 하고, 가라앉던 엔 돌핀들을 솟아나게 
하고 우울하던 가슴은 시원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만 들어도, 기절하게 한다. 
이것이 그분과 1:1의 충돌이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억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억지로 주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사랑 없이 평생을 부부가 함께 산다고 생각해 보라. 
사명 없이 평생을 목회 한다고 생각해 보라. 
오늘 우리의 위기는 
문제(고난)가 많은 것이 아니라 주님과 아무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벌써,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인공위성과 같은 신자이며 목회자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히 주님을 섬겼으나 늘 답답했습니다.
많이 알고 소유했으나 언제나 목말랐습니다.
이룬 것은 많은 것 같은데 드릴 것은 적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일이 주님이 아닌데, 열심히 신앙은 아닌데, 착함이 선이 아닌데..
무수히 속으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충돌하기 원합니다.
주 보혈을 원 없이 마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랑으로 밤새도록 울기 원합니다.
마른 뼈 같았던 저의 삼령과 삶에 그리고 사역에 생기를 불어 
주소서.
사기가 생기로 변하기 원합니다.
주님..
이 땅에 인공위성 신자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억지로 주를 믿거나 따르는 사람들이 적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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