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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일조에 대한 모든 것

힐링&바이블센터 2006. 8. 1. 15:39

십 일 조


 

목차(원하시는 항목 클릭하세요)

서론

제1장 십일조의 역사

1.모세시대 이전의 십일조 역사

2.모세시대 이후의 십일조 역사

제2장 십일조의 분류

1.제1의 십일조

2.제2의 십일조

3.제3의 십일조

4.십일조외의 헌금

제3장 십일조의 의미

1.헌금에 대한 주님의 교훈

2.율법은 누가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법인가?

3.십일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제4장 십일조는 성물이다

제5장 그릇된 헌금자세

제6장 어떻게 십일조를 바칠 것인가?

1.십일조의 기준
*참고문헌


서론

-그것으로 실험하여 사실을 입증하라-

성경/말라기 3 : 7 - 12


세상에는 두 가지 어려운 일이 있다. 첫째는 돈을 바르게 버는 일이요, 둘째는 돈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이다.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인가? 대개 경험상으로 보면 후자가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돈을 번 사람들이 수 없이 많지만, 그 돈을 값있고 보람있게 사용하는 사람은 별로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향락과 자기의 자랑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돈을 버는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스의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부자가 그 재산을 자만하여도 어떻게 쓰느냐가 판명되기 전까지는 그를 칭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돈 버는데는 총명하고 용감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헌금생활을 하지 못하고 인색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은 것 같다. IS(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 금이 증시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신8:13,14)고 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없었으면 어찌 재물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시8:18, 시 127:1,2) 바울은 고전4:7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딤전6:6-10 에서도 돈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렸도다" 이렇게 돈을 모아 부자가 되면 그만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모으되 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철저하게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일찍이 예수님도 우리에게 물질에 대하여 권면하신 적이 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리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보물을 땅에 쌓는다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 현세의 일에만 물질을 사용함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헌금이나 빈민과 병자를 위한 구제등을 의미한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 마음도 하늘에 있고 보물을 땅에 쌓으면 마음도 땅에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물질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과의 물질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물론 자기가 열심히 일하면 물질의 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화가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헌금에 대한 바른 정신 곧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제1장 십일조의 역사

성경 기록에 의하면 IS 백성의 율법이 레위기에 법제화 되기 훨씬 이전 시대부터 십일조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또는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세속 역사 및 성경 역사에 있어서 10이라는 숫자가 사용된 수많은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두 개의 두드러진 사례를 찾아보자.


1. 모세시대 이전의 십일조 역사

1) 시리아 및 아랍어 역본의 히브리서 7장에 의하면 아브람은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드린다. 그러나 문맥에서 볼 수 있는 원래의 의미는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노획한 노략물의 10분의 1이다. (창14;20, 히7:2, 6)

2) 야곱은 벧엘에서 환상을 본 후에 자기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서약한다. (창29:22)

이러한 사례들은 모세의 십일조 제도가 수립되기 이전에 고대에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십일조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그러나 이교 민족들, 즉 로마인들, 카르타고인들, 아라비아인들 가운데서도 전체 소유 또는 노획물, 징발한 재산, 상업적 이익으로부터의 10분의 1을 거룩한 일과 그와 유사한 일을 위하여, 또한 국가를 위하여 드린 무수한 사례들이 발견된다. 이렇게 이방 민족들도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러면 이와 같은 이방인의 십일조 규범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이것은 이미 아담 때부터 하나님께서 가르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도록 그 한계선을 그어 주셨으나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바 믿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잡신을 섬기므로 온전한 십일조의 본질을 왜곡하며 무너뜨린 것이다.

3)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헌물 제사하는 성경상 최초의 기록이다.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신지라"(창4:4-5) 고 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가인의 제물이 배척된 이유를 십일조와 결부시키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제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 칼타고 사람으로 엄격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 초대교부, 변증론을 비롯한 많은 신학적 저서가 있으며 라틴신학의 원조)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물리치신 이유는 가인이 그 헌물을 공정하게 분할하지 않고 바친 것이라고 말했다. 신약성경 히11:4 에 보면 "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헬라어 원문성경을 보면 예물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다. (예물: 단수-δωρον;복수-δωροι) 이것을 보면 가인이 정죄된 것은 예물의 정량을 채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아벨이 믿음으로 바쳤다는 것은 순종과 상관성을 가지며 순종이라는 것은 이미 하달된 명령이 건재해 있어야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는 것이라 성경이 말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이 두 사람에게 그들이 바쳐야 할 헌물의 정량이 지시되지 않았다면 또는 다소간에 각자의 소원대로 바칠 자유가 허용되었다면 가인에게서 허물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성경에는 가인이 범죄하였다고 규정해 놓았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 분명히 그들에게 헌물의 종류와 일정량을 엄밀히 명령하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레5:15, 27:30) 성경은 분명히 아벨의 제사는 가인과 비교할 때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히11:4) 테이어(Thayer)의 헬라어 사전에 의하면 "더 나은,,은 질적으로 우수할 뿐 아니라 또한 양적으로도 우수함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


2. 모세시대 이후의 십일조 역사

모세 때부터는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아 율법으로 제정하심으로 시작된다. 십일조에 관한 최초의 율법 제정은 모든 수확물과 가축의 10분의 1이 여호와께 속하며 그에게 드려져야만 한다는 선언이다. 율법에 제정된 십일조에 관한 법률을 자세히 이해하려면 다음의 성경을 참고하여 상고해야 할 것이다 (레27:30-33, 민19:21-28, 신12:5-14, 14:22, 26:12-15,말3:7-12)

제2장 십일조의 분류

십일조(Maaser;마아세르, 十一條, Tithes)의 뜻은 말 그대로 '십분의 일(1/10),이다. IS 사회에서 농산물이나 가축이나 전리품 등의 수입에서 1/10을 하나님께 바치는 종교적 의무이다. 우리는 앞서 모세 이전시대와 모세 이후시대로부터 법제화 된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왜 소득 또는 소산물의 1/10이라는 비율이 책정되었는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추정컨대 '모든 것, 혹은 '완전, 을 뜻하는 열(10)에서 '일부분, 혹은'대표'를 뜻하는 하나(1)을 바침으로써, 헌신과 복종의 의미를 포함하기 위함인 듯하다. 모세 율법에 나타난 여러 규례들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은 십일조의 규례를 3단계로 분류하였다.


1. 제1의 십일조(민18:21-24)

“내가 IS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IS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IS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IS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을 대하여 말하기를 IS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제1의 십일조는 매년 토지 소산이나 가축이나 기타 수입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이다. 이것은 토지의 분깃없이 오직 성막을 돌보는 일에만 헌신된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되었다. 한편, 레위인들은 이때 받은 소득의 1/10을 다시금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이처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하여”바치는 십일조를 ‘제1의 십일조’라고 불렀다.


2. 제2의 십일조(신14:23-27)

제2의 십일조는 제1의 십일조를 바치고 남은 것 9/10중에서 다시금 1/10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규례이다. 이것은 민족 절기 때에 감사의 축제용으로 주로 사용되었고, 그 성격상‘축제 십일조’(Festival Tithe)라고도 부른다.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경상비에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분명한 언급은 없으나 성전의 화로나 부젓가락, 제단등이 낡고 더러워 쓸 수 없는 경우에는 제2의 십일조로 그런 기구들을 구입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3. 제3의 십일조(신14:28-29, 26:12-13)

매 7년 주기의 안식년을 기준으로 하여, 제3년과 6년에는 둘째 십일조의 비용을 축제용으로 사용치 않고, 성(城) 중의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데 사용토록 규정한 십일조 규례이다. 따라서 제3의 십일조는 따로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둘째 십일조와 내용상으로 같은 것으로서, 다만 그 쓰이는 용도만 다르게 규정한 십일조일 뿐이다. 곧 ‘이웃 구제용’십일조이다. 그러나 역사가 요셉푸스(Josephus)는 다르게 해석했다. 첫째 십일조는 - 레위인을 위해, 둘째 십일조는 - 절기를 위해, 셋째 십일조는 - 레위인 중 궁핍한 자나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Antiquities 4권)

4. 십일조 외의 헌금

히브리인은 십일조 이외에는 다양한 형태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즉, 그들은 곡식과 과일은 물론 양털과 같은 다양한 소득의 처음 것을 당연히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바쳤으며 이를 ‘큰 예물’이라 불렀다.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Mishna)에 따르면 그것은 소득의 1/40∼1/60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율법은 전체 소득에서 먼저 큰 예물 (1/40∼1/60)을 제하고 그 가운데서 다시 제1의 십일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제한 가운데서 다시 제2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때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등 여러 가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별도의 예물을 바쳤으며 성막 건축 등 특별한 사업을 위해서도 헌금을 드렸다.


제3장 십일조의 의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율법을 통해서 본 십일조의 본질은 모든 소산물의 1/10이 아니라, 2/10라는 사실을 바르게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은 용도의 차이를 구별한 것뿐인데, 본래는 2/10을 드려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 규정은 다른 헌물을 제외한 것이다. 안식일 준수의 명령이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1/7의 요구라고 한다면, 십일조 준수의 명령은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1/10의 요구이다. 하지만 이같은 요구는 나머지의 시간과 재물은 인간의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요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중의 일부분만을 대표로 요구하심으로써, 단순히 시간과 재물만이 아니라 인간의 헌신과 감사와 순종을 받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은 단지 규정된 재물만을 형식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바쳐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채, 밭작물의 조그마한 소득까지도 십일조를 바친다고 자랑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보여준다.(마23:23, 눅11:42) 그런즉 십일조는 무엇보다 만물의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신앙고백 위에서 드려져야 한다. 즉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자신은 단지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인식하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할 때 십일조는 단지 표면적인 1/10의 헌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 고백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일조의 정신인 것이다.

1. 헌금에 대한 주님의 교훈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땅위에 재물 쌓는 것을 경고하시기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0) 땅위에 보물을 쌓아두면 도적이 구멍을 뚫고 들어온다. “구멍을 뚫는다”는 뜻은 팔레스틴에 있는 집들의 담은 대개 돌담이거나 아니면 구운 진흙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도적이 얄팍한 흙을 파고 들어오는 경우를 설명한 것이다. 성도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내세에 들어가 썩지 않는 보물을 받으니 복되고 보물보다 귀한 마음이 세상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 가 있으니 더욱 복된 것이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22 절의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는 설명이다. 여기서“재리의 유혹”은 흠정역(KJV) 영어성경에서는 “재리의 속임수”-the deceitfulness of riches;부를 얻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여 상대방을 속이는 것-로 번역되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재물의 속임수에 넘어가 장탄식을 한 사람들의 수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그래서 다윗 왕도 권고하기를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 (置心:Do not set your heart on them)치 말지어다”(시62:10)라고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IS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7-29) 영어성경(KJV)에는 ‘여러 배’가 ‘백배’(a hundredfold)로 번역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 하시고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교훈하셨다.(눅12장)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마23:23절에 잘 나타나 있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바치는데 집뜰의 채소의 극히 적은 수입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리는 종교적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면서 이것도 저것도 행하여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혹 어떤 목회자나 성도들은 신약시대의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므로 반드시 구약 율법인 십일조 규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요 십일조나 그밖에 어떤 율법 조문을 지키므로 구원얻는 것이 아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행위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은 우리가 율법 행위보다 더 온전한 경우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2. 율법은 누가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법인가?

제사 제도는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미 개혁되었지만, 그외 우리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율례는 아직까지 아니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유효한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정신은 나와 내 재산이 모두 내 것인데 그 중에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선사한다는 식의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나의 소유는 본래 하나님의 것으로 내 맘대로 할 것이 못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으니 내 것같이 쓰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욕심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줄도 모르고 바칠줄도 모르는 인간이 되기 쉽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담스러운 짐을 지우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최저선을 그어주심으로 물질적 탐심에서 우리를 해방하셔서 우리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방침에서 나온 하나님의 생각이요, 계산법이다.

3. 십일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수입의 십분의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IS백성은 제1의 십일조, 제2,3의 십일조 외에도 절기 때에 성전에 올라 갈 때마다 예물(gifts)이나 제물(offering)을 가지고 갔다.(신12:5-28) IS 백성들의 경우 절기는 종교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노는 것을 뜻했다. 각가지 절기를 통해 단합과 동시에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강화시켜 나갔는데 속죄일 같은 때는 (레23:2, 24) 금식과 참회도 하였다. 축제일은 대개 그 지방 성소를 중심으로 하여 즐겼으나 거국적인 3대 절기에는 건강한 남자들은 모두 성전에 참여하여야만 했다.(출23:14, 34:23) “너희 중 모든 남자들은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서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신16:16,17)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소, 양 가난한 자들의 경우 비둘기나 곡분(밀가루 종류)을 바칠 수 있었다. IS 백성들은 십일조 외에 제물(오늘의 주일에 해당)이나 예물(오늘의 특별헌금에 해당)을 드렸다. IS의 3대 큰 절기는 유월절(Passover, 출23:5-8, 민28:17-25), 오순절(Pentecost, 출23:16, 34:22, 민28:26-31,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이라고도 함), 그리고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 레23:24-36, 신16:13-17,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함) 그외에 소절기로 부림절(에9:21-28), 수전절(요14:22), 나무 드리는 절기(느10:34, 13:31), 그외에 일식과 관련된 절기로는 안식일(출20:11, 31:17), 월삭(New Moon, 민28:11-15), 나팔절(레23:24, 25, 민29:1-6), 안식년(레25:4-6), 희년(레25:8-13)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절기에 성소나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고 각기 힘대로 제물을 드렸다. 십일조와 제물과 예물 외에도 서원제물(신12:26), 세금(마17:25, 22:17), 그리고 특별건축 헌금(출35:20-29, 출36:3-17)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굶거나 가난한 백성이 되지 아니 하였다. 오히려 그 자손이 복을 받아 세계의 부국이 되었다. 지금도 도리어 미국 은행가의 유대계인들이 은행 잔고를 잠그면 세계 역사가 정지될 만큼 세계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IS 민족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왕조들이 망하게 된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흉년이나 이기심에서 십일조를 내는데 인색하여 성전봉사의 전권을 맡은 레위인에게 생활의 위협이 오게 되자 레위인이 그 본직인 성전 봉사의 직을 버리고 딴 길로 가므로 성전이 황폐하고 백성들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는 제사가 제대로 실천되지 아니하였을 경우와 악한 왕이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인 레위인을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말라는(신12:19)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성전 제사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왕이 위에 올라 허물어진 성전을 정돈하고 쫓겨났거나 타직에 봉사하고 있는 레위인을 다시 불러 그 본직에 세우고 백성들에게 명하여 십분의 일을 바쳐 그들의 생활보장을 튼튼히 해주고 그들을 존경하고 성전 제사를 존귀하게 하였을 때 그 나라는 튼튼하였고 그 백성들은 형통한 복을 받았던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경은 다음과 같다. (대하30:20-26, 31:2-21) (느10:32-39, 12:44-47, 13:4-22)

IS인의 경우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그들의 직분을 존귀히 여겨 성전봉사에 충성하게 될 때에 나라가 흥하였으니 성전과 레위인의 안전보장 곧 그 나라의 튼튼한 국방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십일조는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다. 죽었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와 비교할 때 그 기준이 너무 높다고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미조리주 마운트 워싱턴 교회에서 목사님이 어느 주일에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설교 도중 교회의 직분자 한 분이 벌떡 일어나서 항의하기를 “십일조는 신약교회에서 명하지도 않았고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 교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십일조는 각자의 소견대로 할 것이지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하였다. 목사님은 조용히 예배를 마친 뒤 긴급 당회를 소집하여 그 분을 제명하였다. 그 분을 제명하였더니 그의 동조자 90여명이 빠져나가 교회를 하나 세웠다. 그러나 5년이 경과되지 못해 교회 건물은 자동차 창고로 변했고 교인들은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본 교회는 그 말썽많던 이가 나간 뒤 성령의 크신 축복으로 전례없이 물질적인 복을 받아 대지를 새로 구입하여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였다. 각 교회마다 물질적인 축복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소심한 분들이 회개하여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지키면 교회가 함께 복을 받을 수 있다.

제4장 십일조는 성물이다.

마태복음 22:15절 이하에 보면 가이사에게 세(稅)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시험하던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십일조는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물(私物)이 아니라 성물(聖物)임을 명심해야 한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다.(레27:30) 또 누구든지 성물을 범하였을 경우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려야하고 범한 성물의 오분의 일(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贖)한즉 사함을 얻으리라고 하였다.(레5:5,16)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던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오늘날 여성들의 의상들이 너무 많이 변해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인데 복식(服飾)전문가들은 그것을 No Three S라고 한다. 첫째는- 계절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No Season. 계절이 변화함에 따라 겨울에는 겨울 옷을 입어야 하고 여름에는 여름 옷을 입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은 점차 계절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부유층에서는 에어컨이 잘 되어있기 때문에 구태여 여름철에 여름 옷을 입을 필요가 없게 되고, 보온시설이 잘되어 있는 문화혜택을 입고 살기 때문에 엄동설한에도 구태여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둘째는- 옷의 일정한 스타일(Style)이 없다는 것이다. 옷은 꼭 이래야 한다는 전통적인 개념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옷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No Style, 이것이 미래의 옷의 형태라고 한다. 셋째는- 옷을 보고 성(性)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옷은 반드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여성들은 남자들이나 입었던 바지를 입어도 흉이 아니고 남자들도 장발을 하고 다니니 성별을 구별할 수 없어 No Sex 시대가 왔다고 한다. 사람의 복장은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옷입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복장이 계절감각이나 스타일, 성(性)의 구별도 없이 입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복잡다난한 세상사에 시달리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복잡하고 뒤엉킨 마음이 교회에도 침투하여 종교 혼합주의를 지향하여 각 종교의 개성과 특성을 무시하는 위험스러운 종교통합 운동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런 것에 오염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것인 성물(聖物)과 나의 것인 사물(私物)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것도 내 것,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 가정도 가장의 것과 아내의 것이 있고, 형제지간도 각자의 소유물이 구별되어 있는데 하나님에게 속한 재물과 나에게 속한 재물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불경(不敬)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엔젤(C.Roy Angel)박사의 『황금사과의 은배』라는 저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존은 훌륭한 청년으로 어느 교회 주일학교 책임자였다. 한번도 주일날 교회에 결석한 적이 없었고, 교회 봉사도 뛰어나게 열심이었고, 십일조도 잘 바쳐 교회 중의 몇 안되는 기둥 중의 한사람이었다. 사업이 번창하자 사업규모도 확장되었다. 그동안 십일조도 많이 불어나서 교인들중 최고액 십일조 성도가 되었다. 4년째 접어들면서 여섯 개의 지점망을 구축하고 십일조도 한 주일에 100불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십일조 액수가 더 올라가지 아니했고, 또 존은 주일학교 부장도 사업이 분주해서 할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수요일 예배도 더러 빠졌고 주일 아침 예배도 결석이 잦았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 존의 직장에 심방을 갔다. 존은 주말이면 타지방의 지점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결석했다고 변명하였다. 그의 수입은 계속 늘어갔으나 십일조는 100불선에 머물러 있었다. 그후 다시 목사님께서 존의 사무실로 심방을 갔다. 그리고 그에게 “존군 퍽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출석도, 봉사도 흥미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잘하던 십일조도 제대로 내지 않으니 걱정입니다.”하고 말했더니 존 군이 대답하기를 “목사님, 저의 십일조는 너무 거액입니다. 일주일에 100불이면 주의 사업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의 확장으로 인하여 결석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던 목사님께서는 “존! 같이 기도합시다.”하고 둘이서 무릎을 꿇고 목사님께서 기도를 드렸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존에게 너무 크신 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사업을 너무 번창하게 해주셨고 너무 성공케 해 주셨습니다. 존군의 십일조는 너무 엄청나서 주님께 바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시는 주여! 존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의 나라 사업을 위해서도 존군의 점포 몇 개만 몽땅 불태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군의 사업의 일부를 해체해 주셔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시간도 낼 수 있게 해 주시고 수입도 십일조를 낼 수 있을 만큼만 줄이셔서 이전에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충성스럽던 그 옛날의 존군으로 되돌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더 계속 되려는데 존군이 목사님의 기도를 가로막고 철저히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기도였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새 사람이 되겠노라고 서원까지 하였다. 존은 되돌아 왔다. 옛날의 존으로 돌아와 주일학교 부장도, 봉사생활도 잘 감당하였고 십일조도 어김없이 바쳤다. 이제까지 교역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주일을 잘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고 수입의 십일조 잘내는 사람이 불행해진 경우는 보지 못했다. 십일조는 성물이요, 주의 것이다. 성도가 그 생활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다. 빚더미 위에 앉아 있어도 십일조는 주의 것이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성도의 십일조가 1백만원, 1천만원, 1억원이 넘어선다고 할지라도 1/10은 여전히 주의 것이다.

*빚보다 더 우선순위는 십일조다.

미국의 실업가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는 일찍이 서점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1887년에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그이 사업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10만 달러의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을 팔아 이미 YMCA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십일조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헌금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었을 때나 하고, 먼저 빚부터 갚아야 되지 않겠는가?” 인간적으로 본다면 지당하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하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이지. 나는 지금도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으려고 하는 걸세.” 그는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먼저 드린 그는 결국 3년 후 맨소래담 회사를 창립하고, 이전에 받았던 축복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는 주님의 일에 앞장서는 인생을 살면서, 수입의 구(9/10)를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헌금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이 더 먼저라는 사실을 깨닫고 행하는 자는 반드시 성경대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서 난생 부른 하나님

참존화장품의 김광석 회장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신앙인이 되면서 삶이 완전히 바뀐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운명이었다. 성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종로에 피보약국을 경영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유명인이 되었다. 약국은 날로 번창하였고, 약을 팔아 번 돈으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도봉산 기슭에 절을 짓는 일이었다. 그의 집안은 어머니를 비롯해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피보약국이 유명해지면서 전국의 약사들이 줄을 지어 방문하였다. 전국의 약사들이 방문한 것은 직접 제조해 팔고 있는 약을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약사들의 간청에 못이겨 전국 60군데에 약을 제조해 조달했다.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무허가 제약으로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린 것이다. 79년 ‘잘 나가던 약사’에서 ‘도망자’로 변신한 그는 전국 절을 찾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했다. 6개월을 피해다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양산 통도사의 냄새나는 작은 방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텅빈 방안에 빚바랜 신문 한 장만이 그를 반겼다. 다름아닌 6개월전 자신의 기사가 실려있는 신문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신기했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고 울분이 솟구쳐서 신문을 움켜쥐고 울었다. 한참 동안 울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술에서 하나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러보는 ‘하나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웠다. 왜 하필 그곳을 찾았으며 그 방에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이 있었을까? 그날 그는 눈물 끝에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도 끝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행운을 안게 된 것이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자수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매일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사업도 구상하게 되었다. 아무도 생각 못했던 기초전문화장품회사인 ‘참존’이었다. 기도 중에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것이 화장품 업계에 신화가 생긴 것이다. “저는 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일조의 역사죠.” 사업가가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 모두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십일조는 그에게 놀라운 축복의 간증이 되었다. 십일조 후에는 두배의 경제적 축복이 쏟아졌다. 그래서 김회장은 만나는 사람마다 ‘십일조 축복론’을 강의한다. 매주 월요일이면 그의 비서실은 단체, 개척교회 등 20여 군데나 넘는 곳에 후원금을 보내는 일로 분주하다. 이일은 벌써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선교사업이다. 서울 청담동에 자리잡은 참존화장품은 ‘믿음의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창업 15년만에 화장품업계에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참존화장품은 매주 월요일이면 기도회와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 믿음을 더하게 하시고 전적으로 순종하게 하시며 교만은 그 모양이라도 생각하게 마시고 겸손하게 하소서.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는 또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고백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가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축복이 내려온다는 사실입니다. 부자가 되길 원하시면 하늘 나라에 저금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웨슬리는 그 때 돈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3단계로 나누어서 그 문제를 논했다. 첫째-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돈을 벌도록 하시오. 그 농부는 옆 사람을 툭툭 치면서“저 분은 속에 무엇이 있는 사람이야, 아주 경탄할 만한 설교야!”라고 말했다. 둘째- 할 수 있는 만큼 모두 저금하시오. 그 농부는 아주 흥분해서“아주 훌륭한 말이로구나!”라고 했다. 웨슬리는 돈을 절약하지 않고 낭비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 농부는 손을 비비면서 ‘그런 것은 젊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벌고 저축하는 것으로 구원이 그의 집에 왔다고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남에게 주시오. 그것이 하늘나라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오. 이 말을 듣던 농부는 부르짖기를 “오! 여보, 그는 전부 망쳤소.”라고 했다.

제5장 그릇된 헌금자세

헌금에 대한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 영혼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헌금에 대한 그릇된 기준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릇된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 그릇된 자세를 고쳐야 한다.

1)억지헌금

억지로 마지못해 내는 헌금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눈 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엡6:6,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충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후8:7) 성도들 중에는 펌프성도가 있고 옹달샘 성도가 있다고 한다. 펌프성도는 지하수는 풍성하지만 항상 펌프질을 하듯 자극을 주고 권해야 헌금하는 성도들이다. 펌프질을 하지 않으면 한번 주고는 다시 낼 줄 모른다. 그러나 옹달샘 성도는 누구의 간섭이나 자극이 없어도 항상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에 길손이 앉아 떠마실 뿐 아니라 누구나 할 것없이 이런 샘에 둘러앉아 마시고 쉬기를 좋아한다. 이런 성도는 강권할 겨를도 없이 항상 단 마음(with good)으로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므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2)기분헌금

기분이 내키는 대로 헌금하는 자들이다. 사전에 준비하여 드리는 계획성이 전혀없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고 되는대로 헌금하는 자들이다.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 있을 때에는 보다 많은 헌금을 하다가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처럼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것을 속이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전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분헌금 성도는 인색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대부분의 경우 겸손한 마음으로 앉아서 성경의 교훈 앞에 자기의 헌금 생활에 대하여 조용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이다.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기도 드리는 중에 성령이 주시는 감동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기분대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일 수 있다.

3)말 많은 헌금

교회 안에 부자가 몇 명 있으므로 교회 살림이나 빚더미를 감당했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은 헌금을 안해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예산은 모두 충당이 되었으므로 나는 헌금을 안해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금은 개개인에게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바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 각자에게 따르는 것이다. 바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몫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의 운영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낌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 재정 문제에 관하여 불평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말 많은 사람은 언제나 헌금 생활에 인색한 분들인 경우가 많다.

4)찌꺼기 헌금

저희 집에서는 가끔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면 식사는 시작된다. 식사시간만 되면 고양이는 어느새 냄새를 맡고 ‘야옹 야옹 밥좀 주세요’하면서 우리 집을 방문한다. 혹시나 구운 생선이 올라 올 때면 대충 먹고 고양이를 주자고 한다. 우리 집의 고양이 밥은 나 아니면 신애가 챙긴다. 생선 찌꺼기를 모아 밥과 함께 비벼서 접시에 담아 갖다 준다. 이런 찌꺼기는 대부분 고양이, 개, 돼지 밥으로 갖다 준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짐승을 먼저 주는 법은 없다. 좋은 음식을 주는 경우도 없다. 1년 내내 찌꺼기를 준다. 고양이나 개 팔자는 상팔자라고 말들 하지만 찌꺼기를 먹는 팔자가 무슨 상팔자이겠는가? 이처럼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수입이 생기면 승용차 유지비, 아파트 관리비, 자녀 교육비, 세금, 부대비, 외상값, 할부값, 겟돈 등 이것저것을 제외시켜 놓고 더 이상 용도가 없으면 교회 헌금을 생각하는 성도들이 흔하다. 다 쓰고 남은 찌꺼기 중에 일부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 ‘고양이 밥’주듯이, ‘개밥’주듯이 바치는 헌금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리가 없다. 사실상 그런 헌금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했고,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했다.(잠3:9-10) 수입이 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그의 교회와 사업을 생각하는 정신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5)눈치 헌금

꼭 필요한 사업이나 계획을 의논할 때에는 이런 소리가 종종 들린다. “나도 누구만큼은 내겠다.”순간적으로 들을 때에는 반가운 소리인 것 같으나 알고보면 이 역시 그릇된 헌금 자세다. 각자가 반드시 자기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낼 것이요, 다른 사람이 헌금에다가 자기 헌금의 표준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요한을 보면서 예수께 여짜오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19-22)

타인의 태도에 따라 나의 기준을 맞출 필요는 없다. 타인들이야 어떻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드리면 된다. 다른 사람을 보고 헌금하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망하였다. 바울사도는 마케도니아 성도들의 헌금 정신을 높이 칭찬하였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하였고,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힘대로 할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으며,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듯 하나님의 뜻을 좇아 헌금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축복하기를 헌금 생활에 풍성한 것 같이 은혜도 풍성할 것을 기도하였다. 바른 헌금생활은 바른 신앙으로 인도되고 풍성한 은혜가 언제나 임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신학자 부시넬(Horace Bushnell)은 성도들이 헌금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이 죄로 멸망하지 않으며, 구주가 필요치 않다는 것.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 “가인과 같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여 남의 영혼에 대하여 책임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의 말은 재능과 재물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 가서 회계(會計)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6장 어떻게 십일조를 바칠 것인가?

십일조는 매월 (월급의 경우) 또는 주일마다 (사업하는 경우) 지정된 십일조 봉투에 넣되 반드시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여 내어야 성경적인 자세이다. 구약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리거나 제물을 드릴 때에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누구의 것인지 똑똑히 안 것 같고 신약에도 예수님께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칭찬하셨다. 특별한 경우가 있을 때에는 별문제이지만, 가능한 한 유기명으로 하여 담임 목회자가 알아야 한다. 담임 목회자가 알아야 만이 헌금한 성도를 위해 복을 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는 무기명으로 할 경우를 가르친 곳도 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것이다. 이것은 “구제의 경우”에 속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고나서 자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예물(헌물)은 유기명으로 하되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1. 십일조의 기준

구약의 율법에서 십일조의 기준은 소득의 2/10에 해당된다.

-내가 IS의 십일조(the tithes:십일조들을)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민18:21)

-모든 것의 십일조 중 (from all your tithes:ahems 것의 십일조 중에서)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민18:28-(히)미콜 마세로테켐:너희의 모든 십일조로부터)

-너희의 십일조(your tithes:너희의 십일조)와 (신12:6, 26:12)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In tithes and offerings)이라(말3:8)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이득의 십일조를 바칠 것인가?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레27:3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14;22)

-> 히브리어 원어 :
아쉘 테아셀 - 너는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

에트 콜 테부아트 - 모든 산출의 (민18:28절 참고)

잘에카 - 너희 종자의

하요체 - 나오는

핫사데 솨나 솨나 - 매년 토지에서

(NKJV 번역: You shall truly tithe all the increase of your grain that the field produces year by year)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말3:10)

(NKJV 번역:Bring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 히브리어 원어 :
하비우 - 너희는 가져오라

에트 콜 - 의 모든 것을

함마아세르 - 그 십일조

엘 벨트 - 의 집으로

하오차르 - 창고

우히 - 그것이 있게 하라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IS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대하31:5)

(NKJV번역:....... and they brought in abundantly the tithe of everything)

-> 히브리어 원어 :
웨키프로츠 하다바르 - 그리고 그 명한 것을 선포하자

히레부 베네 이스라엘 - IS의 많은 자손은

웨콜 테부아트 - 그리고 밭의 모든 생산물

우마사르 하콜 - 그리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라롭 - 대부분의

헤비우 - 가져왔다


하나님의 명령은 부분적인 것이 없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모든 소산물, 모든 소득에서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십일조를 넘어서”의 저자인 조누가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p103)에서 그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모든’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대하 31:5절의‘모든 것의 십일조’는 문맥을 살펴보면 그 구절의 ‘모든 것’이 모든 소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모든 것의 십일조가 돈(화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다. 조누가는 눅11:52절을 인용하면서 십일조를 주장하는 목사들을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율법사’라고 비난했다. 그의 원색적인 비난은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레27:31절을 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바로 말씀의 해석은 “원천적으로는 땅의 소산물 중 십분 일 그 자체가 여호와의 성물이다. 그러나 형편상 그 소산물 대신 돈으로 대신하려는 경우에는 그 소산물의 산정 가격에다 오분 일 가격에 해당하는 액수를 덧붙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레6:5, 27:13 참고) 위의 말씀은 소산물을 돈으로 환산하여 드린다면 도리어 20%을 더해 드려야 한다. 이것은 물품을 매매했기 때문에 부당이득을 취한 만큼 하나님 앞에 더 드려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함이 바르다 하겠다. 조누가는 레27:30-33절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1/10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하였지‘모든’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구절이 아니라고 하면서, 바벨론 포로 이후에 가축의 십일조는 언급되지 않고 토지 소산의 십일조만 언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모든’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고 고지식한 주장을 강하게 펴고 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10은 될지언정‘모든’소득의 1/10은 아닌 것이다라고 하면서 어떤 웃지 못할 사례를 들고 있다. 『어떤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먼 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에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사 먹었다. 구두 밑창이 떨어져 구둣방에 가서 수리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강의를 가기 위해 치러진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강의를 마치고 강의료 50만원을 받았다. 자, 이제 강의료에 대한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비행기 삯을 강의료에서 빼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그 다음 들어간 경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 모든 비용들이 50만원을 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 50만원에 대한 십일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다. 우리가 돈을 들고 와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더군다나 돈을 바치면서 그 대가로 복을 기대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신다.”고 하면서 십일조가‘음식’에 국한된 이유를 그의 저서‘십일조를 넘어서 (p37)에서 예를 들고 있는데 풀을 뜯는 소가 웃을 일이다. 따라서 회사원의 십일조의 기준은 “총수령액”에서 1/10을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이다. 세금이나 의료보험비, 교육세 등 여러 기타 세금들을 제외하고 드린다면 이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의 우선순위는 하나님 제일 중심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공기와 물과 환경을 누가 주셨는가? 가장 중요한 생명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의무가 시대가 변했다고해서 의무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존속하는 이상은 이런 의무는 영원한 것이다. 조누가처럼 율법의 시대가 끝났느니 십일조 시대가 지나갔으니 하는 망언을 일삼는 거짓 목사들을 지구를 떠나게 해야 한다. 이런 거짓 목사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워지며 하나님 섬기기를 집안의 개나 고양이보다 못하게 섬기고 있지는 않는가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이시다. 다만 오실 메시야, 오신 메시야, 다시 오실 메시야 중심으로 드려졌던 제사의 제도가 예배중심으로 개혁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야 대신에 짐승의 피를 대신 속죄제로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 오신 이후로 그가 대신하여 영원한 속죄제물,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그의 명령을 준행할 때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대신 제물이 되셨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다 면제되었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스스로 해야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해야 함이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율법이나 계명도 의롭고 선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7:1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 오셨는가? 율법이 지나갔거나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이 물음에 답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심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마5:17-20)

*하나님과의 계산

세계적인 치약 상표가 된 콜게이트사의 사장 콜게이트(William Colgate, 1783-1857)는 영국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어린시절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비참하였다. 그는 중병 병자인 아버지와 폐병 환자인 어머니 밑에서 살 길이 막막하여, 제 힘으로 돈을 벌어보겠노라고 어린 소년의 몸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어린 콜케이트가 결심을 하고 떠나는 그에게 누워있는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네가 버는 돈의 십분의 일은 반드시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배삯도 없이 미국으로 떠난 콜케이트는 배표를 검사하는 선원에게 발각되어 어려움을 당했으나 선장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미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비누제조 회사에 취직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며 열심과 성실로 일을 하여 곧 지배인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작은 비누 제조회사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평생 잊지않고 실천하였는데, “하나님과의 계산”이라는 장부를 만들어서 수익금의 십분 일을 장부에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그의 수익은 날로 늘어났고 회사는 점점 커져 치약과 화장품까지 생산하게 되었다. 그중 치약회사는 그의 이름을 상표로 붙인 “콜케이트 치약”은 세계적인 상표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십분 일을 바쳤고, 그 다음에는 십분 오를 드렸으며, 나중에는 아예 수익금 전액을 하나님 사업에 바쳤다고 한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콜케이트는 이런 말을 즐겨 대답했다. “저의 성공 비결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아 온 십일조 생활에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은 항상 구별하여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고 나머지 십의 구는 경영에 투자했습니다. 한 때, 하루의 수입이 네 사람이 겨우 옮길만한 무게의 큰 금덩이였을 때에도 저는 십일조 바치기를 주저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업하는 경영자들의 십일조 기준

사업하는 경영자들은 십일조를 어떤 기준으로 정해야 하는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계산에 의존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계산에 의존하다 보니 지극히 작은 부대비용까지 모든 소득에서 공제하여 인색한 십일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한 온전한 십일조 곧 모든 소출의 십일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 첫째 - 계산하는 방법이 정직해야 한다. 둘째 -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모든 소출이란, 총매출에서 제조원가(제조업의 경우)만을 매입으로 공제한 소득이어야 한다. 그 소득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비용 곧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요, 믿음으로 드리는 십일조이며, 이것이 하나님 제일중심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비용이란, 날마다 주시는 공기, 비 햇빛 등 가장 비싼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이 없다면 우리 노동댓가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용(십일조)을 가장 먼저 소득에서 구별해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 계산의 실례를 들어보자.

①총매출이 1천만원이다.

②제조원가는 4백만원이다.

③총소득은 6백만원이다.

④총소득의 십일조는 6십만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용이다.

⑤십일조를 공제한 총소득은 5백4십만원이다.

⑥십일조를 제외한 총소득에서 인건비, 광열용수비, 임대료, 세금, 기타 부대비용 등을 계산해야 할 것이다. 단, 주유소나 자동차의 경우는 정부에서 세금이 정해지는 것은 원가로 계산해야하는 것도 있다.

어떤 거짓 선생의 말에 의해, 십일조는
①유대인의 잔재니
②율법시대의 소산물이니
③십일조의 시대는 지나갔느니
④율법은 폐기됐느니
⑤십일조는 돈으로 드리지 않고 음식으로만 드려야 되느니
⑥록펠러와 카네기는 부정한 돈을 받쳤으니
⑦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 관계가 없느니
⑧율법에서 해방된 사람을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느니 하면서 성경을 억지 해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는 이런 거짓 선생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을 왜곡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거짓되고 부패한 자들이다. 친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경고를 잊지말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우리에게 목숨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은혜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모든 영광과 존귀한 생명을 포기하고 버리신 사랑의 주님을 생각한다면 십일조 아니 십의 구라 할지라도 무슨 멍에가 되겠으며, 짐이 되겠는가?

잠시 성령(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봄으로 십일조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정리해 보자.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하노니 직장에 다니는 자나 국가의 녹을 먹는 자가 그 받은 월급중 총액에서 십일조를 나에게 드리는 것이 바로 온전한 십일조인 것처럼, 사업을 하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다. 내가 이미 말하였으되 매출과 매입에서 순수익을 드리는 것이 아니요 전체적인 소득에서 나에게 믿음으로 드리는 자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니라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늘 문을 열고 나를 시험하는 자니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답이니라.”

*십일조와 헌물은 우리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누가 12장에 기록된 “부자영감”에 대한 교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 영감의 비유를 기록케하신 목적을 발견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물질을 탐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인색한 자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물론 이 세상에서 부의 축적을 위해 선하게 노력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 비유는 이 세상의 부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거기에만 몰두된 상태 즉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혼돈된 영적 무지의 상태에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 때문에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상실해버린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또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대화에서도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케 하신다. 하루는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을 던졌다. 부자 관원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는 자의 모습을 일러준다. 먼저 부자 관원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교훈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관원의‘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인간의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역설하신다. 부자 관원은 계명을 지켰다고 했지만, 과연 하나님께 대하여는 계명을 지켰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게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근심하고 돌아감으로써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부자 관원은 외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아 율법을 준수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부자 관원의 마음을 이미 읽은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시험해 본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와 헌금은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율법적으로 드리는 것은 기본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이 두 사람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상고해야 할 것이다. 물론 돈으로 영생 얻는다는 잘못된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십일조와 헌금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결국 부자 관원처럼 그의 본심이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드려질 때만이 하늘에 보화가 보장된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십일조가 그렇게 무거운 짐인가, 멍에인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는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섬김,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몸, 우리의 재능, 우리의 사랑 등에 대한 원초적이며, 선행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총명한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창조의 원리, 우리를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자비, 구속의 신비,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성품을 부여받은 것, 천국의 언약과 계시의 소망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모든 선한 은사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느끼고 있다. 풍성한 식탁과 넘치는 잔과 우리의 질병을 치유해 주는 약과 우리의 거처에서 들을 수 있는 기쁨과 건강의 소리, 아무도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는 안정감 등은 모든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모든 간접적인 것들 -기회, 기술, 판단, 친구들, 영향력 등-은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위대한 후원자인 하나님의 종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잔을 들고 있는 것들이지 잔을 채워주는 것들은 아니다. 주님은 우물곁에 서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기쁘게 할 때 그들의 잔을 가득히 채워 주신다. 당신은 이 부유함을 갖고 있는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는 당신에게 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어 주는 분은 주님이시며, 당신에게 지혜롭고, 이해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이와같은 은총이 주어질 때 우리는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제공해 주시는 주님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순종의 제단에 사랑의 산제사, 가장 쾌활하고, 가장 고상하며, 가장 선한 마음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주님

어느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항상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님의 사업을 위해 바쳤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관계로 빌렸던 건물을 1년 이내에 비워 주어야만 했다. 그는 여섯달 동안이나 다른 건물을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그는 얼마간의 부지만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담보로 하여 은행이 건물을 내어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부지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결과 철도 변에 있는 꽤 쓸모있는 유용한 땅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땅의 구입 대금으로 3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에게는 총3만 달러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1만 달러는 바로 주님의 사업을 하는데 쓰기로 작정된 금액이었다. 그는 2만 달러에 철도 변의 부지를 구입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3만 달러를 지불해서라도 그 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나서 성경을 펼쳤더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펼쳐졌다. “너의 모든 재산의 십일조를 드려라. 그리하면 하늘 문을 열어 네가 축복을 쏟아부어 주리라” 그는 생각했다. “드디어 문제가 해결됐다. 주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님의 것 곧 십일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그는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1만 달러를 가져다 써라. 그 돈은 너를 위해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철도 변의 땅 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 땅을 당신에게 2만 달러에 팔겠습니다.”그리하여 결국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받으시게 되었고, 그 사업가는 자신의 몫으로 공장을 다시 경영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사업을 날로 번창해 나갔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독자 이삭을 얻었다. 1백세에 독자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 그후 약15-20년이 흘렀을까. 이삭은 건장한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아브라함에게 들렸다. “아브라함아! 네 독자 이삭을 바쳐라” 히브리서11:19 절을 보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십일조와 헌물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비롯된다.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저 하늘에 소망을 심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이다. 십일조와 헌물의 정신은 물질의 탐욕을 조절하기 위한 하나님의 좋으신 방법이다. 결국 십일조와 헌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16:1-2 절에서 이런 말로 부탁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서 조누가는 “이를 얻은 대로”란 무슨 뜻인가?(p140)에서‘있는대로’드리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신약에서 십일조를 강조한 곳이 어디 있느냐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 해석을 대조해 보았다.


-> 헬라원어 분해성경

카타 미안 삽바투 - 주간의 첫째날에

헤카스토스 휘몬 - 너희 각자가

파르 헤아우트 - 스스로에 의해서

티데트 데사우리존 - 비축하여 두라

호 티 에안 유오도타이 - 혹 그가 번영하여(얻은 것) 무엇이든지

히나 메 - ∼하지 않도록

호탄 엘도 토네 - 내가 갈 그 때면 언제나

로게이아이 기논타이 - 헌금들이 이루어지지


KJV(KNJV)

매주 첫날에 너희 각자가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 따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는 모금(헌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

고전16:1 절에서‘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바울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명하였는가. 갈6:5-10 절에 언급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심고 거두는 법칙』을 강조한 것이다. 이 말씀은 또 다시 고후9장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는 말씀에서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율법 이전이요 이상이다. 십일조 생활은 축복의 결과로써 감사함으로 드려야 한다. 십일조 생활은 축복의 결과만이 아니라 축복의 원인이니 의당히 드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하라고 명하셨다.(마23:23, 눅11:42) 우리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가장 합당한 자세는?

①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드려야 한다.

②사랑과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

③미리 준비하여 드려야 한다.

④힘을 다해 드려야 한다.

⑤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지 말고 자원함으로 드려야 한다.

⑥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⑦섬기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고후8, 9장을 자주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와 헌금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①십일조는 구약의 명령이며 지금도 그 명령은 계속 유효하기 때문이다.

②십일조는 믿음의 행위의 거룩한 부분이다.

③십일조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다.

④십일조는 몸된 교회 곧 하나님 사업에 절대 필요한 기금이다.

⑤십일조는 이 세상에 대한 탐심을 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⑥십일조는 하늘에 쌓는 보물의 거룩한 부분이다.

⑦십일조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행하는 것이다.

물질과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몫을 돌려 드려라. 십일조를 훔치면 전 재산이 부패하게 된다- (G.Herbert)

-참고문헌-

①그랜드 종합주석, 2권, 3권, 11권, 15권 (성서교재간행사, 1991)

②기독교인 생활백과사전 중권 (정원문화사, 1984)

③기독교 문장대백과사전 6권, 13권, 19권, 22권 (성서연구사, 1994)

④주제별 설교대사전, 4권 (아가페, 1984)

⑤크로스 종합주석 2권, 3권, 13권, 15권, 18권 (포도원, 1999)

⑥기독교대백과사전, 10권 (기독교문사, 1995)

⑦구약 원어분해성경, 3권, 7권, 13권 (로고스, 1995)

⑧신약 원어분해성경, 4권 (로고스, 1995)

⑨조누가, 십일조를 넘어서 (베틀북, 2000)

⑩국민일보, 종교면 (2000, 3.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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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행복한 예수의 사람들
글쓴이 : 문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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