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설교 자료실

[스크랩] 주해에서 설교까지

힐링&바이블센터 2006. 8. 1. 15:34

주해에서 설교까지

 

 

 

1. 성경 본문을 온 몸으로 들으라

김지찬 교수(구약신학)

1. 성경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주체

일부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이 마치 능동적인 인식 주체인 해석자가 해석을 해야 비로소 살아나는 수동적 객체인양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능동적인 인식의 주체인 우리가 (해석자가)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순전히 수동적인 물건이 아니다.

성경은 교회를 불러내시고, 창조하시며, 먹이시고, 믿음의 공동체로 형성하셔서 오늘날 까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서 만드시는 창조의 말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을 통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믿음과 복종을 요구하시고 계신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구속력을 갖는 법관이 해석하는 미합중국의 헌법 같은, 법률 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인간 영혼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분의 책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우리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의 실재가 아니라 현재의 실재로 선포될 때, 성경 본문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성경 본문이 선포될 때 그 부름을 조용히 들음으로써 선포된 본문에 의해 자신이 해석되도록 맡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객체인 본문을 주체의 범주에 따라 분석하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본문이 우리를 분석하고 해석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본문에 의해 설교자 자신의 죄와 허물과 추함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경험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볼 때에 성경은 단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오늘도 교회를 불러내고, 교회를 창조하며, 교회를 먹이시고, 믿음의 공동체로 만드셔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서 만드시는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2. 신앙의 수납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금도 성경 본문을 통해 계시하신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시하실 때 우리가 취해야할 적합한 방법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수납이다. 계시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신앙의 수납 (implicit reception of faith) 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계시에 대해 반응을 보일 때 연구하고 사고할 필요성이나 역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와 사고는 계시를 비판하는 위에서 행해져서는 아니 되며, 계시를 분명히 인식하는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연구와 사고는 신앙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 이성이 전체 피조물 세계를 장악하는데 최고의 도구이긴 하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순종의 도구 (instrument for servitude) 일 뿐이다.

3. 본문에 귀를 기울이라

그렇다면 설교자는 자신의 해석 도구들 (이성 포함) 을 가지고 성경 본문을 해석한다고 설치기에 앞서 "무조건적 신앙의 수납" 의 자세로 먼저 성경 본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설교하기 전에 반드시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설교자가 가능한 한 많은 설교 자료를 위한 재료를 얻기 위해서 성경 본문을 듣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말씀을 듣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익숙지 않다. 설교자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설교자는 늘 말하는데 익숙하기에 듣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성경 본문을 볼 때에도 본문에서 듣고 싶은 말을 자신이 먼저 건네고, 그리고 건넨 말이 튕겨져 나오기가 무섭게 그 말을 받아 챙기는 습관이 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듣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4. 아니, 온 몸으로 들으라

지금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는 먼저 성경 본문의 말씀을 단지 들어야 한다. 그저 몇 번 읽고, 아는 문법으로 해석을 하고, 설교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전체로 듣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경 본문을 몸 전체로 들을 수 있는 것일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5-6)

아침마다 우리의 귀를 여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거역지도 아니하고 뒤로 물러나지도 아니하며 살아가다 보면 등에 채찍질을 당하며, 수염이 뽑히며,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온몸으로 성경을 듣는 한 비결이 아닐까? 사랑하는 후배 원우들이여, 온몸으로 성경 본문을 듣는 훈련을 가져보지 않으시려는가?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종의 고난을 통해 성경 본문을 눈으로 듣고, 가슴으로 듣고, 배로도 들어보지 않으시려는가?

 


2. 심도 있는 주석 작업에 몸을 던지라.


김지찬 교수(구약신학)

1.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가 뭐길래

벧세메스로 돌아오는 여호와의 궤의 이야기 (삼상 6:10-16) 는 목사들의 단골 설교 본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주인공은 거의 늘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였다. 그 전형적 설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어떤 소인가? 첫째,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해 택함 받은 소이다. 둘째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사명의 멍에를 멘 소이다. 셋째 새끼 뗀 소임에도 뒤돌아 보지 않고 사명을 감당한 소이다. 넷째, 두 마리의 소는 서로 보조를 맞춘 소이다. 다섯째,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소이다. 여섯째, 목적지까지 잘 도달한 소이다. 일곱째, 희생의 제물이 된 소이다. 사명의 멍에를 메고 제 갈 길을 다 가고 그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으니, 이 어찌 우리 주님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희생을 예표함이 아니겠는가?"

이런 설교는 겉으로 보면 소위 은혜스러운 설교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선택된 소로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새끼에 대한 사랑의 정을 끊고, 서로 보조를 맞추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목적지까지 잘 도착한 후에, 스스로 희생을 하기로 작정하였는가?" 라는 의문은 지울 수가 없다.

2. 알레고리칼 설교: 환각적 자유

만일 이런 해석이 옳다면 본문은 성도들의 "선택, 사명, 세상 향락과의 단절,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제, 성경 중심의 삶, 인내, 죽음의 희생" 등의 깊은 영적 진리를 보여주는 알레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사무엘서 본문은 "속뜻을 감추고 다른 사물을 내세워 그것으로 하여금 감추어진 속뜻을 말하게 하는" 알레고리가 아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은 그리스도나 교인의 삶과 운명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알레고리적 상징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사무엘서 본문을 주해해 보면 돌아오는 분은 암소가 아니라 "여호와"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삼상 6: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들이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에 그리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심각한 주석 작업 없이도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알레고리칼 해석의 환각적 자유(intoxicating freedom) 때문이다. 알레고리칼 해석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히브리어를 뒤적이며 문법적 해석을 할 필요도 없고, 역사책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역사적 해석을 할 필요도 없고, 구약과 성경 전체의 큰 흐름을 훑는 신학적 해석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본문 안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의 단서를 가지고 행간을 읽으며, 기독교 진리 시스템 안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면 된다.

위 설교의 경우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에 초점을 맞추고, "선택, 사명, 세상 향락과의 단절,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제, 성경 중심의 삶, 인내, 죽음의 희생" 같은 기독교 교리와 연결시키며 설교를 전개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이런 알레고리칼한 본문 해석 과정에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나 추후의 검증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본문을 택하든 정통 기독교 교리 안에서 움직이기에, 설교자 스스로도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쉬우면서도 안전한 알레고리칼 해석의 환각적 자유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3. 주석 없는 설교

그러다 보니 "주석 없는 설교" 가 한국 강단을 메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알레고리칼한 설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한국 강단의 설교가 "주석 없는 설교" 로 채워지고 있음은 강해 설교자들 조차도 주석이 오히려 설교를 망친다는 이야기를 강해 설교자들 사이에 더 공공연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물론 상당수의 주석이 설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 메마른 학적 내용들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 없는 주석"도 문제지만, "주석 없는 설교"는 더 큰 문제이다. "설교 없는 주석"은 소수의 목회자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면, "주석 없는 설교"는 다수의 교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주석 없는 설교를 하다보니 설교자들은 주로 본문에 대한 개인적 묵상에 근거하여 설교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설교자가 본문을 정한 후 처음부터 주석을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개인적 묵상만 한 채 주석을 등한히 하게 되면, 자칫 주관적 생각에 빠질 위험이 크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는 설교를 할 때 개인적 아이디어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 아이디어는 체크되어야 하고, 비옥하게 되어야 하고, 교정되어야 하고, 깊이가 있어야 한다." (B.W. Anderson, "The Problem and Promise of Commentary," Int 36, 342-43.)는 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설교자들은 상당수가 개인적 아이디어를 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별히 강해 설교를 잘한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이들의 설교 조차도 때로는 성경을 권위의 근거로 삼아 개인적 아이디어를 전하는 세련된 형태의 "종교적 담론"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 주석 : 성경만이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런 모습은 종교 개혁의 전통을 많이 떠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루터의 말을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들보다 더 학식 있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성경만이 통치하도록 (solam scripturam regnare), 또 성경은 내 정신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을 통해 해석되지 아니하고, 그 자체와 성경의 영을 통해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Weimarer Ausgabe 7, 98, 40ff.)

성경만이 통치하도록, 성경이 내 정신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을 통해 해석되지 아니하고, 그 자체와 성경의 영을 통해 이해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종교 개혁의 정신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자신의 정신 (개인적 아이디어) 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만을 그 자체와 성경의 영을 통해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설교 본문으로 택한 하나님의 말씀을 심도 있게 주석하는 것이다. 본문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본문을 온 몸으로 듣게 되는 것이며, 해석자인 우리가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본문에 의해 우리가 해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야 말로 성경을 성경 자체와 성경의 영에 따라 해석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부여잡고 주석을 해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때 주석의 과정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지금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후배들이 이런 비전 가운데서 심도 있는 주석 작업에 몸을 던지는 계절이 오는 날, 하나님의 나라도 그 만큼 가까워지리라 기대해 본다.



3. 회중의 내적 시간을 도적질하라.

김지찬 교수(구약신학)

지루한 설교 시간

설교에 대한 웹스터의 정의 가운데 하나는 "거만하거나 지루한 방식으로 권고하는 행위" 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종종 설교를 통해 복음이 생동감 있게 선포되지 못하고, 늘 같은 방식의 구성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상투어 등으로 인해 "거만하고 지루한 방식으로 권고하는 행위" 로 비쳐졌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설교의 경우에는 30 분 밖에 안되는 설교 시간이 내적인 시간 (inner time) 으로 무한정 긴 기간으로 느끼게 된다.

반면에 흥미진진한 영화의 경우에는 무려 2-3 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에도 불과하고 내적인 시간으로는 불과 몇 10 분 지난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극장이나 영화관의 출구를 나오면서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는가 라고 외쳐본 사람들은 내적인 시간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종종 흥미있는 설교는 영화나 연극처럼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가 라고 느낄 정도로 내적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게 한다.

시간의 중요성

그렇다면 설교 시간에 회중들에게 지루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중들이 시계를 쳐다보지 않을 만큼 강력한 흡인력으로 청중의 내적 시간을 도적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관적 체험으로서의 내적 시간은 손목 시계와는 맞지 않는다.

설교가 행해질 때는 언제나, 비록 모든 시계의 시각을 일치시켰다할지라도, 청중의 수만큼 많은 내적 시계들이 다른 속도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예배 후의 약속 때문에 예배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자들은 설교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질 수 있다. 내적 시간은 실제의 객관적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게 하려면, 설교를 시간적으로 적절히 조직하여 회중들은 시계를 쳐다볼 겨를이 없이 실감나고 흥미 있게 설교 시간이 지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하는 자들은 사상과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청중의 내적 시간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동안 전통적인 설교는 성경 본문의 메시지인 사상이나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3대지 형식의 강연식 설교이기에 청중의 내적 시간을 고려하지 않다 보니 지루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설교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체험케 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흥미 진진한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의 탄탄한 구성과 극적인 반전에 의해 내적인 시간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객관적인 연대기적 시간 (chronological time) 마저도 없어진다.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보면서 스크린 위에 우리의 과거가 되살아나며,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던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개안"의 체험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교회의 예배가 바로 이렇게 되어야,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예배는 구원의 스토리의 재상영이기 때문이다. 설교 시간에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로 우리 자신이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먼 과거 역사가 바로 "지금" (now)-카이로스-으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 가족 중 가장 나이 어린 아이가 "왜 이 밤이 다른 모든 밤과는 달라요" 라고 물으면, 과거 시제로가 아니라 역사적 현재 시제로 답을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노예이다." 유월절의 사건은 과거의 유대인 조상들이 경험한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오늘의 세대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대로 드려지는 절기와 예배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크로노스의 시간과 내적인 시간을 꿰뚫고 들어오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임을 알 수가 있다.

결국 설교는 하나님의 시간이 연대기적 (크로노스) 시간과 내적인 시간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서 카이로스적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구속사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하고 흥분함으로서, 연대기적 시간과 내적 시간을 초월하도록 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이다.

내러티브 시간의 적절한 사용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스토리 형식의 내러티브 (narrative time)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영화나 연극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연대기적 시간이나 내부 시간 은 모두 영화나 연극의 내러티브 시간의 힘에 의해 초월되고 변형될 수 있음을 안다.

이것은 설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시간도 벽 시계에 의해 계량이 가능하면서도, 아무도 벽시계를 처다 보지 않을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영화 극작가와 감독처럼, 회중들이 내적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설교의 형식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작가나 감독이 시청자의 내적 시간을 빼앗는 방법은 "모호함을 담은 모순의 해결 과정" 으로 플롯을 구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극작가는 기본적인 모순 (혹은 긴장) 으로 드라마를 시작하여 이 모순 (혹은 긴장) 이 해결되는 과정으로 드라마를 끌고 간다. 해결되어야 하는 모순을 등장시킴으로 시청자로 하여금 텔레비젼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도 해결을 요구하는 모순, 설교학적인 긴장 (homiletical bind) 으로 설교를 시작하고, 이런 모순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해결해 주는 과정으로 설교를 끌고 가야 한다. "가려움" 에서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 으로 이동하는 설교 (sermons that moved from itch to scratch)를 회중들이 잘 듣는다는 사실은 실증이 되고 있다. 이런 설교는 "들음의 논리" 를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는 회중들이 듣던지 말던지 복음을 "선포" 하면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듣는 회중들이 어떻게 하면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고민하면서 설교를 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예배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의 침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내러티브 시간을 잘 조직한다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회중의 변화나, 카이로스적 사건의 발생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에 성령을 의지하고 엎드려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4. 성령님을 의지하라.

김지찬 교수(구약신학)

1. 성령의 조명의 필요성

필자는 총신원보의 "주해에서 설교까지" 라는 특집 기사에서 3 회에 걸쳐, 진정한 설교자들에게 요청되는 세 가지 덕목을 제시하였다. 첫째 성경 본문을 온 몸으로 들을 것, 둘째 심도 있는 주석 작업에 몸을 던질 것, 셋째 청중의 내적 시간을 도적질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작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해에서 설교까지" 의 긴 과정은 한 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면 소기의 효과를 거둘 수가 없다. 아무리 명쾌하게 성경 본문의 음성을 듣고, 심도 있게 주석하여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이끌어 낸 후에, 청중의 내적 시간을 빼앗는 고도의 기술로 설교를 하였다고 해도, "성령의 감동의 역사"가 없다면 결코 청중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4) 고 하신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의 결핍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정확히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음에도 청중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은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에 역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리겐과 어거스틴 같은 초대 교부들은 물론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조명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은 초대 교회부터 강조되어온 해석의 중요한 원리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20 세기 중반까지의 비평학자들은 성령의 조명을 아예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비평주의 안에서조차도 칼 바르트 같은 학자들에 의해 성령의 조명이 다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실제로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죄인이 성경에 대해 동정적 듣기란 불가능하다. 성령에 의해 마음이 열리고 방향이 조정된 신자만이 성경을 동정적으로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굳이 연구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일부 인사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듣는 이들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성경 본문을 온몸으로 듣고, 심도 있는 주석을 하고, 청중의 내적 시간을 도적질하는 기술을 발휘해야 하는가? 차라리 그 시간에 기도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심지어 일부 목회자들은 신학생들에게 헬라어 히브리어 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그러기에 헬라어 히브리어를 가지고 분석하는 방식으로는 목회 성공하기 어렵다면서, 그 시간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교회가 부흥했다는 간증을 자랑스럽게 신학연구에 몰두해야할 신학교 채플에까지 와서 늘어놓는 것을 예사로 보게 된다. 신학생들의 입장에서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다수의 학생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위로가 되면서 묘한 흥분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인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설교 말씀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연구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마치 성령님으로부터 기도 시간에 직접 받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직통파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런 방법이 더 영적이고 더 은혜스럽다는 주장을 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은 단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종교 개혁 시대에도 이런 주장이 있었다.

3 성령을 털도 안 뽑고 잡아먹는 자들

루터가 1521 년 5 월부터 10 개월간 발트부르그 성에 은신하는 동안 빗텐베르그에는 토마스 뮌쩌 (Thomas M nzer)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 설치기 시작하였다. 이들 카리스마적 성령파들은 개인적 (사적) 계시 (private revealtions)를 받았음을 주장하면서 성경 말씀의 연구를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종교 개혁자 루터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루터는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사적 계시는 유효할 수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하였다. 루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을 "성령을 털도 안 뽑고 잡아먹는 자들" 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렇다면 종교 개혁자들이 이렇게 한마디로 혹평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교직자 집단 위에만 머물거나 열광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직접 경험 가운데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공통된 생각 때문이었다. 성령은 성경을 가지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 하시며, 성경을 떠나서 성령이 역사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특별히 성령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 가운데 역사 한다는 것이 종교 개혁자들의 신념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중세 시대의 카톨릭 신학자들이 전통적 해석과 성경의 4 중 의미를 무기로, 성경을 교회의 교리의 시녀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만 해석되어야 하지, 교부들이나 카톨릭 교리에 의해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문자적 의미만이 성경의 참다운 의미라는 주장을 크게 외치기 시작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 가운데 주로 역사 한다고 본 것이다.

4 성령은 문자적 의미 가운데 역사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파헤쳐 내기 위해, 원어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원어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종교 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관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 가운데 역사 한다는 사실을 1500 년간의 교회 역사에서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심도 있게 주석 하는 것은 성령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 가운데 역사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주석을 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들으면서 성령의 조명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설교를 하기 전에 설교자가 먼저 본문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설교자는 가능한 한 명백하게 설교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를 명백하게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교우들은 변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를 전달하면서 성령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다른 일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나, 강대상에 올라가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 결과, 하나님께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한 설교자의 평생에서 기껏해야 서너번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 늘 이런 것을 기대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들이 이렇게 늘 성령님을 의지하여 주해에서 설교까지의 설교자의 길을 걸어나간다면 한국 교회의 앞날은 그리 어둡지 않으리라. 사랑하는 후배들이 진정한 말씀의 종으로 사역할 그 날, 그리스도의 왕국이 임하는 꿈을 꾸어보는 것은 결코 필자의 백일몽은 아니리라.

출처 : † 세계제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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