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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감의 정신분석적이해^^

힐링&바이블센터 2006. 7. 31. 22:14

- 공감의 정신분석적 이해

실제 임상 현장에서 심리치료와 상담을 생업으로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직업이 얼마나 인간 삶의 실존을 드러내는 장(場)인지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

심리치료와 상담 과정은 원칙적으로 과학적인 기반 위에서 인간적인 만남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이 문제는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심리치료의 타당성과 효율성, 그리고 신뢰도를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치유적 개입의 기본 조건처럼 받아들여 지면서도 그 정의가 모호한 기본개념들을 임상장면과 연결하여 정리하고 이것을 인간발달 과정에서 과학적 접근으로 치밀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그러한 기본개념중 하나가 공감이다.

정의

공감은 한 사람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과 부분적이고 잠정적으로 동일시하고(identify), 동시에 그로부터 거리를 지킬 수 있으며, 그러면서이 두 위치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공감은 흔히 동감(sympathy)이나 따뜻함과 같은 뜻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을 능가하는 복합적 능력이다.

또한 공감은 동일시와 구별되며 동일시도 매우 복잡한 개념이므로 정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공감 과정에서 분석가는 일시적으로나마 내담자의 <자기표상>뿐 아니라 <대상표상>편에서 생각하고 느끼면서 스스로 비슷한경험 차원으로 들어가지만,다시 거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내담자의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 간의 관계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된 공감은 깊은 경청의 한 방법이 되며 내담자에게 새로운 삶의 경험을 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공감의 효율성

Freud는 여러 글에서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공감 없이는 내담자의 무의식적 감정, 사고, 소망 등을 이해하여 무의식적 의미 종합에 이를 수 없으며 공감을 통해서라야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영의 내적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정신분석에서는 이 주제에 관한 연구들 (예를 들면, Kohut 1959, Schafer 1959, Greenson 1960)이 활발해 졌는데, 치료적 개입으로써 공감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예를 들면, 자아심리학자 H. Hartmann (1964)은 공감이 비학문적인 것으로, 임상실제에서는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C. Brenner(1968)는 공감을 자유연상을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무의식적 의미맥락을 현재 생활과 연결지으면서 작업하는 분석적 개입의하위 개념으로 본다.

또한 자기심리학 쪽의 F. Basch(1983) 같은 학자는 기본적으로 공감을 통하여 전이현상이 심화될 수 있고 해석이 효율적일 수 있다는입장을 주장한다.

A. Ornstein(1974)은 공감 자체가 변화의 힘을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 날도 정신분석가가 공감적이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현존을 인정하는 정신분석학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깊이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어떤 한 사람을 안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한계가 있는 지를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또한 이러한 공감력을 타당성 있게 잴 수 있는 정확한 범주와 도구가 아직도 충분히 연구되지 않아 정신분석가 훈련생을 선발하는 데에도 실제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공감의 발달

정신분석적 발달 이론에서는 "body-self"라든가 "body-empathy" (T.S. Jacobs 1973)와 같은 개념을 통하여 모든 정신적 추상적 기능도 신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최근 국제 학술회의 보고(1995)에 의하면 New York의 정신분석가 Beatrice Beebe는 어머니와 아이의 상호작용(Face to Face interaction)을 필름으로 찍는 등 25년간에 걸친 많은 연구자료를 제시하였다.

이렇게 엄마와 아기의 상호 관계를 직접적으로 살핀 연구에 따르면, 아기는 3개월이 지나면 1초도 안되는 시간에
엄마의 얼굴 표정을 읽고 즉시 자기 얼굴을 엄마의 표정에 맞추려(matching) 한다.

신생아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은 인간의 사회적 역능감(competency)의 잠재력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발달 이론가들은 공감의 원천을 공생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보지만, 그것은 나르시스적 공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D.H. Buie(1981)는 아이가 자기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비교적 관계 없이 상대방(주로 엄마)의 정동을 알 수 있으려면 대개14-18개월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미 1940년대부터 M. Mahler 등 정신분석가들이 신생아와 아동 발달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정동의 상호조율(mutual attunement)에 관한 경험 연구는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다고 볼 수 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른이 아이의 기질이나 정동, 소망 등을 이해하고 맞추어 줄 뿐만 아니라 아이도 어른의 기분이나 정동에 자신을 맞춘다.

아이들은 대상 상실이나 사랑을 받지 못할 거라는 위협이 클 때 (그것이 비록 아주 주관적인 성격을 띌 지라도)
자신의 공감력과 공감에 대한 요구를 과도하게 발달시키거나 나르시스적인 철회 또는 거대 환상을 강화하면서 자기 방어를 하게 된다.

생후 초기에 양육자들이 맡은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는 아이가 쾌적한 상호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하고 성장하며 자기표현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어른이 좋은 인간적 환경이 되는 것이다.

쾌적한 상호관계는 꼭 상대방을 다 알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정동의 상호 조율같은 현상도 무엇을 구체적으로 꼬치꼬치 인지적으로 많이 알아가는 작업이 아니고 상호간에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전인적 통감이 일게 하는 과정이다.

현대 역학 연구에서 초기 장애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초기 장애에서는 정동 내지 충동 조절의 어려움, 심리 신체 장애(psychosomatic disorder), 나르시스적 성격 장애, 경선적 장애 등등이 있다.

이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심리내적 현실에서는 원초적으로 왜곡된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이 발견되고 있다.

아주 특기할 사실은 이들이 그들의 고뇌를 비언어적이고 일차과정적인 방법으로 소통하는 것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Spitz(1965)에 의하면 신생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균형, 안정, 긴장, 리듬 등의 사실을 운동감각적(coenesthetic)으로지각한다.

G. Benedetti(1983)는 치료자가 정신병자와 치료적 접촉을 하려면 환자가 치료자에게 유발시키는 신체감각을
치료자 스스로가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현대의 유능한 치료자는 양질의 퇴행을 통해 심화된 공감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감장애

공감장애가 치료 현장에서 일어나는 경우를 간단히 살펴보면,
치료자가 잠정적인 동일시 대신에 너무 강하게 내담자와 동일시할 때 일어나는데, 이때 치료자는 거리감을 잃고 자신의 갈등이나 문제를 내담자와 동일시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해소하려 하는 과오를 범할 수있다.
치료자가 내담자와 너무 약하게 동일시할 때 생기는데, 이때는 인지적으로 지적으로 내담자의 문제를 잘 이해하지만 마음속 깊은 참여를 피하기 때문에 치료자의 해석이 이론적이 되거나 얕게 되며, 내담자의 통찰도 그것에 걸맞게 피상적이 된다.
치료자가 내담자와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너무 경직되게 내담자의 자기표상 혹은 대상표상의 한 편에서만 작업을 할 때 일어난다. 이 경우 내담자의 인간관계에 대한 조망이 어려워져서 내담자의 경직된 신경증적 경향이 더 강화될 수 있다
치료자 자신의 내담자에 대한 무의식적 전이현상을 모르고 지나칠 때 치료자가 공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치료자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퇴행에 대해서 불안을 느낄 때, 또 전적으로 퇴행 능력이 부족할 때 공감장애가 생긴다.
공감장애는 내담자의 방어 때문에 심하게 일어날 수 있다. 내담자가 치료자를 불신하거나 시기를 느낄 때, 혹은 자기가치 감정에 불안을 느낄 때. 그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해받지 않으려고 애 쓸 수 있다.
옳고 정확한 해석도 통찰로 이끌기 보다는 공격적으로 시기심과 저항을 일으켜면서 배제된다.

예를 들면, 나르시스적인 성격 장애의 내담자는 자신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전지전능에 대한 환상 때문에 분석가가 자기에 대하여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있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리고 경계선적 장애를 가진 내담자는 이해받고자 모든 노력을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 이 노력의 결과가 나오면 친밀한 관계가 위협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하게 된다.

내적인 위협 때문에 진정한 이해를 피해야 되는 내담자의 어려운 상황은 공감을 극적으로 어렵게 하고 치료자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깊은 사례연구와 인간발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치료자의 공감 내용은 어디까지나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얻어지고 또 내담자를 통해서 확인된다.

치료자는 언제나 자기의 공감 현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일을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은 남이 없다면 자신을 인식할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인식한다고 해도 자기 이해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공감이라는개념은 아이러니하게 여겨지겠지만 각 개인이 서로 분리된 존재이며 그래서 더더욱 남을 필요로 하며 서로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일심동체에 대한 동경을 안고 인간 실존의 현실을 버티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하기도 한다.

완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음을 치료현장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출처 : 서사대 기독학생회 카페
글쓴이 : 이송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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