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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서적이혼과 교훈-상담

힐링&바이블센터 2006. 7. 31. 22:10
 

이혼의 성서적 교훈과 상담                      

                                                      나동광(경성대 교수)


들어가는 말


지난 9월 27일 통계청이 발표한 ‘99년 인구동태 통계 결과’ 에서 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의 조(組)이혼율은 2.5로 나타났다. 이것은 90년 조이혼율이 1.1, 94년 1.4, 97년 2.0에 비해 이혼은 계속해서 증가 추세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매일 994쌍이 결혼하는데 반하여 323쌍이 이혼하고 있으며 15년 이상 동거해 온 이혼 비율도 90년 11.9%에서 99년 25.9%로 증가했다.

본 연구는 이혼에 관한 성서적 교훈을 이해하고 이혼 전후에 제기되는 문제를 상담학적 차원에서 풀어 감으로서 나날이 증가하는 이혼 상담에 도움을 주려고 한다


Ⅰ. 이혼의 성서적 교훈


1. 구약시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혼인이란 두 남녀가 결합하여 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는 일종의 계약으로 일생동안 그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인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계약을 파기하려는 자는 법적 승인을 얻기 위한 문서를 남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혼증서였다.

이혼증서의 내용은 “보라, 그대는 어느 누구와 결혼하여도 자유니라.”라고 쓰거나 혹은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다.” 등등의 글귀가 쓰여진 혼인계약의 파기를 분명히 담고 있다. 이러한 혼인 계약의 파기에 관한 율법이 구약성서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먼저 신명기 24장 1-4절은 구약시대 이혼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로 남자들이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당연히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명기 성구(Deuteronomic Passage)는 오늘날에 있어서 비단 남자들에게만이 아닌 여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될 때 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만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 무엇인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행실이 나쁜 어떤 사건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1) 그러한 수치된  행실 문제로 가정의 평화와 기쁨을 찾지 못할 때 차라리 계약을 파기하는 이혼증서를 써서 보내줌으로써 쌍방의 구속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각기 독신으로 보내거나 재혼할 수 있는 법적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J.C. Wenger는 “하나님이 이혼을 묵인하고 계시거나 그것을 만들어 내거나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오직 그가 하시는 일은 재혼 후 또 다시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라고 말했다.2) 이혼은 웽거의 말대로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신은 이혼을 묵인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신이 하는 일은 재혼을 금지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혼 묵인설과 상치되는 말라기 2장 13-16절은 이혼의 묵인이 아닌 이혼의 증오를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혼은 하나님이 원하시거나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분열이 아닌 일치요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창조 질서이다. 그러나 최초 인간의 원죄 이후 창조 질서는 무너지고 죄의 속성이 인간과 인간사회 속에 나타났다. 성폭행과 수치되는 일, 가정불화 등으로 한 몸을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났고 차라리 불협화음 속에 사느니 혼자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특별히 구약시대 이후 이혼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말라기의 메시지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혼은 어쩔 수 없이 허용되지만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되는 경우까지 제멋대로 궤사를 행했던 것이다.

신명기에 의하면 이혼 절대불가의 금지조항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처녀가 아니라는 이혼사유를 들어 남편이 소를 제기하고 처녀임이 증명될 때 이혼은 불허한다(신 22:13-19). 둘째, 혼인 전에 처녀성을 빼앗기게 되어 결혼이 강요된 경우 절대로 이혼할 수 없다(신 22:28-29). 이것은 가부장적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이혼법규이었지만 잘 지켜지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혼소송권은 물론 이혼증서를 쓰는 권리가 남자에게만 대체로 주어졌기 때문에 여자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이혼하려고 할 때 종교재판소에 나가 그가 주장하는 이유나 근거를 작성하여 자기의 아내에게 반드시 주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3)

이혼을 미워하고 이혼을 금지한 판례도 있지만 또한 이혼을 강요한 율법도 있다.

엘람 자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제사장 에스라에게 고한 말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은 기혼자들은 비록 그들 사이에 자녀가 있더라도 이혼해야 된다는 것이다(스 10:3). 이방인과의 결혼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된 혼인 계약은 취소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세워 율법대로 행해야 된다는 그의 말은 당연한 것으로 해석된다.4)

결국 에스라는 그 말대로 행하기를 공적으로 맹세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 앞 광장에서 이혼할 것을 선포하였다(스 10:10-11). 이 선포는 단지 이혼을 허락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이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적 명령으로 만일 실행치 않으면 엄한 처벌을 면치 못하는 구속력을 갖는 것이다. 이 법령을 집행하기 위해 족장을 중심으로 한 실행위원회가 구성되고 3개월 동안 조사하여 명단을 색출하고 재판상에 기록된 이혼 건수는 113건이 되었다. 이 집단 이혼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등 신분에 구분 없이 실행된 것으로 제사장 17명 레위인 10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므술람과 같이 이혼을 반대하던 자들도 결국 자기 아내를 보내야만 했다(스 10:15-44).

위와 같은 에스라의 이혼 법령과 이혼 법령에 따른 집단 이혼 사태를 통한 구약적 교훈은 종교적인 갈등을 겪는 부부가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가정을 유지할 수 없거나, 가정보다 소명을 택해야만 할 때 이혼의 불가피성이 인정될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혼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합당할 때 그 길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명령적 이혼의 관점에서 볼 때 Helmut Thielicke가 말하는 목사들의 이혼 문제는 재고해야 될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이혼에 있어서 목사가 법적으로 무고한 쪽일 경우라도 목사는 반드시 그 직무를 그만두어야 하고 또 그만두도록 촉구해야 마땅하다.5) 그는 공적인 직책을 가진 목사의 이혼이라는 외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고려한 나머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는 종교적인 차원의 가능성을 완전 도외시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혼한 목사가 목회의 존엄성을 위해 그 직무를 버릴 수도 있다면 목회에의 거룩한 부름에 가정을 떠나 양떼를 돌보는 사역에 헌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이혼에 대한 교훈은 첫째, 하나님은 이혼의 반복적인 실행을 미워하시고 둘째, 수치스런 일로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경우 이혼증서를 써주고 셋째, 종교상의 사유로 이혼이 불가피할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택해야 한다.


2. 신약시대

유대 사회에서 이혼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남자에게만 있었고 여자는 남자의 처분을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제도하에서 Hillel 학파에서는 아내가 요리를 할 줄 모르거나, 집안에서 너무 큰 소리로 말하거나, 남편이 보기에 매력이 없어질 때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보수적인 Shammai 학파에서는 간음을 이혼의 유일한 사유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아내의 부정이 드러나지 않는 한 누구도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6)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매우 엄격했던 것 같다. 복음서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먼저 마가복음 10장 2-12절은 이혼법과 관계된 예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이혼의 합법성에 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서 먼저 이혼법이 나오게 된 구약의 배경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한 예수의 답변은 형식적인 법률의 문제를 뛰어넘어 보다 근본적인 창조의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 질서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창조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법에 의존하는 가족 관계는 이미 창조주의 근본 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사랑과 은총의 기독교에 손상을 수반한다.7) 그런데 동등한 인격체로서 둘이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남녀 평등의 질서가 인간의 완악함(Sklerokardia)으로 깨어지고 이혼법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이혼법과 관련된 창조의 원리에 대한 예수의 교훈은 구체적으로 그를 시험하던 바리새인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가부장적인 특정한 사회 종교 체제하에서 제멋대로 범할 수 있는 독단의 가능성을 경고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음식을 태운 일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로 장가드는 유대사회의 이혼 풍습은 결혼의 존재론마저 위협 당하는 것으로 마땅히 지적 받아야 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아내 즉 여성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유대 남자들의 오류를 바로 잡아 주신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 12절은 다른 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비유대전통의 요소가 들어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남성주도의 유대 전통과는 다르게 여성 쪽에서 주도적으로 이혼할 수 있는 희랍 로마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8) 살로메는 자기 남편인 코스토바루스에게 이혼증서를 써 보냈는데 그것은 유대 율법에 어긋난 행위이다. “유대 율법은 오직 남편만이 이혼증서를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나라의 율법을 어겼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했다.9) 결국 남성 중심이든 여성 중심이든 어느 일방적인 행위는 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질서에 어긋난 것임을 마가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원래 마가의 본문에 이혼한다의 말로 쓰여진 헬라어 ‘apolyo’ (απολυω)의 어근은 ‘놓아주다’, ‘가게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수동태로 쓰일 때 ‘자유로워진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이혼은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인데 실제 유대 사회에서 행해진 이혼증서에는 해방증도 물론 포함되지만 가부장 사회 안에서의 추방서에 해당되기도 했다.10) 따라서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했던 여자는 결혼에 대한 아무 발언권도 없이 집밖으로 쫓겨났고 그 법이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팔 백년 이상 내려왔던 것이다.

Roger Crook은 마가복음 10장 11-12절을 예수가 재혼을 위한 이혼을 금지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의 교훈은 이혼과 재혼에 관한 일반적인 조건을 세웠다기 보다는 이혼에 관한 특정한 사례로 이해한다.11) 크룩이 마가의 본문과 관련하여 재혼불가의 문제보다 이혼사유에 초점을 맞추어 주장한 것은 의미 있는 발견이나 재혼을 위한 이혼 금지를 예수의 명령으로 해석할 때 창조 질서의 근본적인 원리를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지나치게 특수화시킴으로 본래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마가에는 특별하게 이혼을 허락하거나 금지하는 이혼사유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오직 지나친 이혼 남용에 대한 준엄한 명령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교훈은 이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전적으로 배격하고 있는가? 여기서 마태는 예외적인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마 5:31-32; 19:9).

다른 복음서에는 보이지 않는 이혼사유로 배우자의 부정 즉, 음행(πορνεία)을 포함시킨 것은 우리의 관심사이다. 여기서 ‘포르네이아’(porneia)는 히브리어 ‘자나’(zanah) 곧 ‘간음’에 해당되는 말로 모든 종류의 부정(unchastity)을 뜻한다. 배우자의 부정은 둘이 한 몸 된 관계에서 이탈한 행위인 까닭에 그녀로 하여금 자유롭게 떠나가도록 놔두는 이혼이 허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질서는 깨뜨려서는 안되겠지만 이미 발생하였을 때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아마 마태의 예외규정을 적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당위론은 지나친 율법주의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는 유대인의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무죄 석방시킨 예수의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마태에 기록된 이혼에 대한 예수의 교훈은 어디까지나 여성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for every cause, 마 19:3) 자기의 아내를 가정에서 축출하는 유대 남성들의 완악한 행위에 대한 엄격한 경고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교훈이 원칙론적인데 반하여 바울의 이혼에 대한 교훈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입각하여 영적 일치에 대한 목회적인 관심을 구체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살던 당시 역시 이혼에 대한 충고를 할 만큼 이혼문제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며 그의 목회적 관심은 그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도록 격려하는 서신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된다고 강조했다(롬 7:1-3).

혼인법규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법은 구속력을 가지며 최고의 법은 사형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그 율법 아래서는 영생할 수 없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법과 유대법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롬6:14)을 강조하면서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혼인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의의 열매를 맺도록 권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혼인법과 관련시킨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배우자가 죽으면 다른 배우자는 그 순간부터 배우자가 지켜야 할 의무조항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며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도 간음죄가 적용되지 않는 자유인임을 바울은 선포한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자의 죽음 즉 사별만이 다른 배우자가 자유할 수 있는 예외조항이라고 바울은 단정하고 있는가?

Alfred Edersheim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은 죽음 또는 이혼증서 그 두 가지 중의 하나만으로 로마서 7:2-3의 기록대로 여자가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주장한다.12)


유대 사회에서 이혼증서의 효력은 배우자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결과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둘 다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혼은 배우자와의 이별이라고 하기보다는 죽음이라고 간주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한쪽 배우자가 죽고 다른 쪽 배우자가 묶인 법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사별의 일종이다. 비록 얽히고 섞인 복잡한 감정과 윤리적인 문제가 남아있지만 이혼은 혼인에 대한 죽음이요 상대편과의 영원한 절교임이 분명하다. 모세가 허락한 이혼증서는 바로 그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Alfred Edersheim이 로마서 7장과 관련하여 놓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바울은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롬7:6).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우리의 옛 제도와 법들로부터 더 이상 정죄함을 받지 않아도 될 분명한 이유는 ‘생명의 법’ 이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롬8:1-2). 결국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죽음과 이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어진다고 볼 수 있다.

로마서와 함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바울 서신은 고린도전서이다. 바울은 여자들이 득세하는 고린도 교회에 남자의 권위를 세워 평등의 질서를 잡아주는 가운데 특별히 고린도전서 7장에서 이혼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복음서에서 사용된 ‘apolyo’라는 이혼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갈라놓다’라는 의미의 ‘chorizo’와 ‘떠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aphiémi’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거와 이혼을 내포하는 말들이다.13) 바울의 가르침은 종말론에 기초하여 혼인한 자들에게는 혼인한 상태로, 어떤 이유로든지 혼자 있는 자들은 독신 상태로 지내는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주께 속한 자유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소명에 충실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독신자들이 혼인한 자들보다 더 주의 일을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장점을 강조하면서도 결혼이나 재혼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 할 수 있는 각자의 권한에 맡긴다. 또한 혼인한 경우에 갈라서지 않도록 하되 갈라서는 일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전7:11). 특별히 종교상의 사유로 이혼하는 경우 갈라서는 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고전 7:15).

그리스도인들은 갈라설 수도 있지만 화평과 화해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은 ‘화평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살도록 끌어내셨기 때문에 서로 다투며 사는 것보다는 갈라서기를 원하는 다른 일방의 배우자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갈라서기 원하는 배우자의 의사 존중은 물론 그대로 살기 원하는 배우자의 의사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갈라서는 과정이나 그 후라도 악한 감정이나 다툼이 아닌 화평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은 바울의 선교적 관심과 목회적 배려에 기초하여 이혼을 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Ⅱ. 이혼전 상담


결혼이 없으면 이혼은 발생될 수 없으며 혼인의 관계를 포기해야만 하는 위기상황에 직면하지 않는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은 동등한 인격체의 만남으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려 들거나 파괴적인 행동을 취할 때 결혼 관계의 위기를 만난다. 그것은 결혼 전에 갖고 있던 문제나 자원, 기대와 희망 뿐 아니라 결혼 생활의 상호작용에 의해 한 쌍의 동질성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제각기 부모를 떠나 서로 다른 욕구를 가지고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임하지만 상호간의 욕구가 만족되지 못할 때 좌절감을 맛보며 그것은 거절이나 분노, 공격 등의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며 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미완성을 채우려는 욕망이 다른 일방과 정면으로 충돌하므로 갈등이 생긴다. 어린 시절 욕구불만의 신경증적 요소들은 표면적인 갈등을 부채질하고 자신의 신경증적 불완전성을 상대방의 불완전함에 가중시켜 둘 사이의 간격은 멀어지고 고통과 적개심만이 존재하는 위기의 늪으로 빠져들어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Gerald Caplan은 어떤 사람이든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위기 상황에 직면한다고 한다.14) 비록 평상시의 작은 문제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좌절되거나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 긴장이 고조되면서 위기가 발생된다. 그 위기는 일반적으로 단계적 위기와 우발적 위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전자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성장과정 속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며 후자는 뜻밖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질병이나 애인의 죽음, 지위의 상실, 이혼, 임신, 수술, 알코올이나 마약중독, 경제파산, 전쟁이나 천재지변, 기타 감당하지 못할 사건을 들 수 있다. 단계적 위기의 경험이든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든지 그러한 사건들은 위험한 상황을 조성하며 개인적인 위기로 발전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생기고 그것이 해결책이 없는 반복의 형태로 나타날 때 내적인 불안과 기능의 혼란, 죄책감 등에 사로잡힌다. 그때 사람들은 예비해 두었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 신체적 정신적 질환을 유발하기도 한다.15) 특별히 이혼전 부부 갈등에서 오는 위기문제가 미해결된 채로 흘러갈 때 생의 의욕마저 상실될는지 모를 위험한 지경에 빠져들어 간다.

그러므로 결혼의 위기는 동등한 인격체로 만나는 나와 너(I & Thou)의 관계가 상호간에 이루어지지 않아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로 계속 나아갈 때 발생되는 것이다.

결혼 생활의 위기에 처한 자들과의 상담은 이혼전 상담에 속한다. 그것은 부부간의 갈등 문제를 취급하는 결혼관계 상담에서 시작하여 이혼 바로 직전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위기상담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주로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 자들과의 상담이다.

결혼 위기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위기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자는 그 위기를 전환점으로 하여 그의 마음 상태가 더 나을 수도 있고 좋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며 좋지 못한 방법으로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16) 그때 상담자는 위기의 문제가 건설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당사자의 잠재적인 대처 능력을 발휘시킴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상담은 어떤 위기 상황에 놓여있든지 인간의 미래의 발전이 달려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현명한 선택을 용이하도록 하게 하는 목적을 가진다.17) 결혼관계를 유지해야 되느냐? 아니면 포기해야 되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위기에 처한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과 특수한 환경이 일치할 수 있는 의미 있고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18)

상담자는 내담자가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내담자 중심의 접근(Client - Centered Approach)을 통해 삶의 문제를 극복하고 개인적인 성장을 가져다주는 촉매가 된다.19) 그러나 상담의 실제에 있어서 상담자가 수동적이고 비지시적인 모양으로 진실성이 결여되어 끌려갈 때 내담자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상담자는 갈등과 불안 속에 있는 자를 도와서 양자택일의 가능성을 신중히 검토하고 그가 선택한 이후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게 하고 가능한 객관적인 태도로 보다 현명한 결심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내담자의 자기표현(Self-Expression)은 때때로 애매 모호한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20)

그렇다고 해서 내담자의 기대나 요구를 외면하고 상담자 자신의 상담 이론과 철학에 맞추어서는 안 된다. 효과적인 상담은 그 목표가 내담자의 환경과 요구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가능하다..21) 자아인식(Self-Awareness)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궁극적 목표가 중요하지만 결국 그 궁극적 목표인 자아실현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세분화된 목표에 내담자의 동의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혼전 상담에서 내담자의 요구에 대한 상담자의 역할은 결혼 생활의 위기에 처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근본적인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여 결혼을 구제하도록 돕는 과정과 오히려 형식적인 결혼 관계로 상대방의 인격에 파탄을 계속적으로 가져오는 경우 차라리 이혼을 돕는 과정을 병행하여 상담을 진행시켜야 된다. 인격과 인격과의 재결합이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주되 그렇지 못할 때는 언제라도 이혼을 위해 앞장서야 될 위치에 상담자는 놓여있다. 결혼의 관계회복이든 해소든지 간에 서로에 대한 파괴적인 영향력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차후를 위해 좀더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준비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모든 종류의 상담과 마찬가지로 이혼전 상담 역시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며 내담자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래포(rapport)가 형성되어 진행된다. 래포는 효과적인 상담분위기를 조성하는 근본적인 조건으로 상담자가 내담자를 존엄한 인격체로 수용하므로서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최초의 접촉에서 뿐 아니라 상담과정 전반에 걸쳐 지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관계형성을 위해 던지는 말 가운데 “왜 이곳에 찾아왔습니까?” 혹은 “나에게 당신의 문제를 얘기하십시오.” “무엇을 도와줄까요?”라는 대화의 시작은 사무적인 표현들로서 상담의 창을 열어놓을 수 없을는지 모른다. 또한 상담과정에서 내담자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모두 이해합니다.” 혹은 “그것은 당신의 잘못입니다.”라고 말하거나 듣고 난 후에도 “이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충고와 명령이 포함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표현들은 대화가 중단되거나 피상적인 상담으로 끝날 수 있다. 위와 같은 상투적이거나 사무적인 표현보다 차라리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떤 문제든지 이곳에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래요.” “그래요, 그것에 관해 좀더 자세하게 얘기해줄 수 있겠어요?”라는 표현으로 상담자가 진실로 내담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상호 신뢰관계 속에 부담 없는 대화가 오고갈 수 있다.

대화가 단절되거나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없는 상담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대화를 질식시키는 방해요인을 피하고 자유로운 의사전달이 촉진되도록 내담자의 말에 적극적인 경청(Active Listening)으로 임하여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포근한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22) 전달자의 포근함과 적극적 관심은 듣고 받아들이는 자(recipient)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효과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전달은 언제 어디서나 치료적이기 때문이다.23) 설령, 내담자가 자유롭게 표현하므로 얻어지는 분명한 느낌, 그 자체가 치료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상담관계를 이룩하는데 촉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상담자는 내담자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감정이입 혹은 공감(empathy)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감정이입은 내담자의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의사 전달하는 상담자의 능력으로 심리적 이해를 내포하는 인지적 요인 뿐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 일어나는 정서적인 요인까지 포함한다.24) 그것은 듣고 이해하고 전달하는 상담진행의 전 과정이다.

Maier는 상담과정을 8단계로 나누어 좀더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1. 상황의 관찰 2. 관찰의 순서와 평가 3. 간섭 없는 발달단계의 예측 4. 간섭 있는 발달단계의 예측 5. 임시적 가설과 그 대안의 형성 6. 목적 있는 간섭 7. 간섭 후의 새로운 변화 파악 8. 이전의 평가에 대한 재평가와 새로운 가설의 형성25)

진단을 중요시 여기는 Maier는 내담자의 관찰을 통한 연구과정과 평가과정 그리고 목적 있는 개입을 통한 치료과정으로 상담과정을 세분화시켜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지나친 도식과 행동주의적인 측면에 입각하여 행해진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으나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통한 행동의 변화를 추구하므로 내담자를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발전적이고 성장할 수 있는 상담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상담자는 단지 이해한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내담자의 문제상황을 예리하게 진단하고 상담목표를 달성해 나갈 수 있는 전 과정에 세심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찰하고 평가할 것인가? 결혼의 위기에 처한 자들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해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물론 내담자 개개인의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과 심리적 요인에 맞추어 상담을 전개해야 되겠지만 대체로 이혼전 상담에서는 이혼하려는 내담자의 감정적인 처리보다 위기를 맞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스스로 위기문제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상담이 진행된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칼을 들고 가서 죽이겠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시원할 것입니다.”라는 분노와 슬픔 원한의 불안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일에 머무르는 수준의 대화가 아닌 위기 앞에서 담대한 마음과 태도를 지닐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담자가 이혼전 상담과정에서 내담자를 돕기 위해 관찰하고 평가해야 될 사항을 든다면 다음과 같다.

1) 이혼하려는 이유

2) 이혼 감정 속에 숨겨진 사랑의 유무

3) 결혼에 대한 그릇된 자세

4) 결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

5) 책임성의 문제


Ⅲ. 이혼 진행중의 상담


이혼 진행중의 상담은 이혼을 결심하고 법률적인 관계 해소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는 내담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상담이다. 이혼하려는 부부들은 협의 혹은 재판상 이혼을 통해 법적 절차를  밟을지 모르며 그 과정에서 상담이 필요하거나 상담을 통해 그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인식할지도 모른다. 

이혼전 상담에서는 대체로 문제의 원인을 밝혀 결혼 관계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지만 이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와 이혼을 굳게 결심한 자들의 경우 이혼은 불가피할는지 모른다.  상담자에게 아무리 훌륭한 상담 프로그램과 조언이 있더라도 내담자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수용이 없을 때 상담자는 법적인 이혼절차를 이미 밟고 있는 그들을 돕기 위해 차라리 다음 단계의 상담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혼 진행중의 상담은 이혼하려고 하는 당사자들이 각자의 권리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법률상담소를 찾거나 재산이나 자녀들의 양육문제를 토의하며 법적인 절차를 알아볼 만큼 재결합이 희박한 시기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조절이 가능한 부부갈등에서 의사소통이 교착된 심각한 갈등단계로 넘어간 상태를 인식한 상담자는 당사자들이 결혼을 해소하는 가정법원을 찾기 전 일시적인 별거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재결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이혼후에 바로 찾아오는 정서적 불안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부부로 하여금 일정기간동안 별거를 시도하는 시험별거(trial separation)로 상호동의에 의하거나 어느 일방에 의해 이루어지며 서로 사랑을 알아보는 기회이기도하다. 그러나 별거를 거부하고 결혼생활을 청산하려고 할 때 이혼과정을 도우며 이혼직후에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담자 스스로 인식하고 대처하도록 협력해야 될 것이다. 비록 내담자가 내린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상담자의 기능은 이혼후의 상담까지 계속되도록 해야 옳을 것이다.


Ⅳ. 이혼후 상담


이혼후 상담내용은 이혼 당사자의 육체적 정신적인 문제, 자녀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이혼전의 문제보다 이혼후에 상담해야 될 내용의 복잡성을 뒷받침해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이혼 당사자들 자신의 문제만 복잡할 뿐 아니라 그 외 자녀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인간관계의 문제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혼은 불행한 결혼의 굴레에서 해방을 가져다주지만 이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이혼후 이혼 당사자에게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이혼외상’(Divorce Trauma)이다. 이혼외상은 이혼으로 인하여 영향을 입는 심리적 상처이다. 이것은 이혼이란 법이 제기될 때부터 시작되어 별거기간 그리고 이혼할 때까지 계속된다. William J. Goode에 의하면 충격이나 불안은 별거하는 순간 가장 심각한 상태이며 이혼서류를 작성할 때 담담한 표정을 짓고 이혼판결이 내려질 때 그 감정은 사라진다.26) 그는 별거가 이혼외상의 최고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부부가 함께 살다가 어느 날 헤어지는 날이 왔다고 서로가 인식할 때 영향을 입는 상처이다. 그러나 이혼외상은 제각기 문화적인 차이가 있으며 어떤 형태의 별거나 이혼하려는 사건들에 따라 달라지며 이혼 후에도 오랫동안 잠재적으로 뒤따라 올 수 있는 고통이다. 동양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실’한 상태가 ‘허’한 상태로 간다고 할 수 있다. 즉, 표면적으로 상처 입은 것이 안으로 곪는다는 표현이 적절한 말일 것이다. 안으로 생기는 상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렵고 말한다고 해도 거북스러운 이혼 후유증인 이혼외상은 계속해서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할 감정적 반응들을 포함한다.27) 서른 한 살의 ‘차’라고 불리우는 여인은 결혼생활 5년 만에 이혼을 하고 말았다. 이혼의 원인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유는 서구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사회에 이미 뿌리깊게 내려온 전통적인 문제다. 조상제사를 지내는 장손집안에 들어가 자손을 기다리는 가시방석에 스스로 앉아있는 고통보다는 차라리 이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차’여인에게 있어서 이혼후 그녀가 갈 곳은 거의 없었다. 아직 전통의 규범에서 크게 개혁되지 않은 거리를 활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한 ‘차’여인은 결국 두문불출, 한마디 말할 상대도 없이 두달 동안 벽만 바라보게 되었다.

대체로 이혼후에 찾아오는 감정적 반응은 절망이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차’여인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혼이 희망이라고 이혼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감에 휩싸여 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결혼을 통한 행복의 추구가 무너져내려 잃어버린 감정만이 뒤덮인 절망감을 이혼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다.

이혼후에 찾아올 수 있는 또 다른 반응은 적개심이다. 이혼의 경험은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혼란된 감정을 유발시키고 사랑의 능력을 감소시킬는지 모른다. 충동적인 노여운 감정이 우정을 유지하려는 인간관계를 깨뜨릴 수 있고 반감이나 적대감정을 나타낼 수 있다.

이혼후에 찾아올 수 있는 세 번째 정서적 반응은 죄의식이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는 다른 차원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결혼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시키지 못하고 파탄을 일으킨 원인을 상대방에게서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만 돌려 깊은 죄의식에 빠질 수 있다. 이혼의 원인을 위에서 본 ‘차’여인처럼 자신에게 돌리는 책임은 보다 성숙한 이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지만 그것에 매달려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있을 때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차’여인은 사실상 깊은 죄의식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혼전의 사건들이나 시부모에 대한 반감 등에 대한 죄의식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조금만 인내했더라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꼬리를 물고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다.

넷째로, 이혼후에 나타나는 반응은 육체적인 문제이다. 비규칙적인 식사와 자기학대는 몸무게가 감소되거나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신경성으로 인해 몸의 각 기관에 이상이 올는지 모른다. 호흡이 곤란하고 위장 속에 구역질나는 듯한 허약체질의 육체적 징후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28) 이혼전 결혼생활에서 즐기던 성생활을 하지 못하는 문제도 육체적 징후로 나타난다.

다섯째로, 이혼후에 나타나는 반응은 사회적인 관계에서 찾아오는 자신의 문제이다. 친척이나 친구 혹은 직장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identity)에 대한 갈등이 일어난다. 이혼전 아내나 남편을 통해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관계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은 자신의 정체위기를 경험하게 만든다. 이러한 정체위기의 문제는 이혼후에 나타나는 변화 중 가장 큰 변화이다. 그 변화는 물론 자기 주변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 변화한다. 이혼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속에서는 스스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여섯째로, 이혼후에 나타나는 문제 중에 자녀문제가 있을는지 모른다. 이혼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질 때 어린아이들은 정서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아버지나 어머니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따라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편부, 편모 밑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이들의 문제는 비록 매일같이 가정불화를 일으키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약하다 하더라도 이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현실이다.

위에서 본 여섯 가지 반응 외에 경제적인 문제와 같은 실제 눈앞에 닥치는 문제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문제들이 나타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혼 당사자들간의 개인적인 차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상담자는 이혼후에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인 반응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내담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절망에서 희망을, 적대적인 감정에서 사랑을 죄의식에서 해방을, 자기학대나 자폐증에서 자기 정체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상담목표를 세우는 일은 이혼후 상담자가 해야 될 가장 크고 우선적인 과제이다.

먼저 절망에 빠진 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위해 상담자는 이혼전이나 이혼후나 변함없는 우정과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혼은 믿고 의지하던 배우자와의 결별에서 비롯되고 그 결별이 절망을 낳는다. 인간은 자신이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절망을 느낀다. 바로 그때 같은 입장에 서서 말해주는 친구가 필요하며 그 친구가 상담자가 될 수 있다.

둘째,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에게 자기 자신의 책임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상담자가 해야 될 역할중의 하나이다. 부부가 헤어진 후 각각 상대방을 전적으로 어느 한쪽이 잘못이라고 적개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정서나 자녀들의 정서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내담자의 감정을 풀어놓게 하는 일은 좋으나 아울러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자신의 책임이 전혀 없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상담자는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고한 경우를 억지로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상담자의 옳지 못한 태도이다.

셋째, 죄의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에게 해방을 주기 위해 상담자는 불필요한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앞에서 ‘차’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한 죄의식을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정신적 고통으로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이혼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의식을 가질는지 모른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회개하고 자숙하는 일은 좋으나 죄의 종노릇하는 죄의식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정신적 고통이다.

넷째, 자기학대나 자폐증에서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상담자는 유도해야한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두문불출하여 외부와의 단절상태로 가는 이혼자는 자신을 더욱 학대할지 모른다. 이혼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숨기려고 할 때 인간관계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상담자는 자꾸만 폐쇄적인 자세의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개방을 할 수 있는 동질의 집단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권할 수 있으며 자기정체감을 가질 수 있는 상담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인간관계들을 개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혼전 상담에서 본 연구는 결혼관계의 위기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이혼직전의 위기를 극복하여 결혼관계를 계속하려는 방향과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상담형태였다. 그러나 이혼전의 상황과 이혼후의 상황은 다르다. 이혼후에 위기문제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으나 두 사람사의 문제가 이제는 한사람 자신의 문제로 남아 있어 또 다른 차원에서의 상담이 요청되고 있다.

먼저 이혼으로 움츠러져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성장을 구가할 수 있도록 돕는 성장상담(Growth Counseling)을 생각해 볼 수 있다.29) 이혼후 상담은 각자가 느끼는 고통을 이기고 그 고통을 통해 보다 나은 인생을 준비하기 위한 성장의 기회를 삼도록 도와준다. 이혼자들이 겪었던 부부갈등이나 절망의 경험은 새로운 출발의 밑거름이 되며 삶의 위기를 성장 지향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혼을 통해 많은 문제와 고통도 따르지만 새로운 성장자원과 가능성도 발생한다. 어느 한쪽과의 절교는 다른 쪽과 만남의 시작이다.

그러나 성장촉진 기술이나 성장작업(growth work)을 통해 다른 사람이 아직 펼쳐보지 못한 능력과 가능성을 구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장상담은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전체적인 맥락에서 큰 도움이 되어도 실제로 이혼직후 자기 감정조차 제어하기 힘든 자들에게 있어서 성장이란 말은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것 같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말이 이혼자들의 귀에 들려질 수 있는 상담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슴에 와 닿는 구체적인 상담이 아니면 안 된다. 내담자와 공감되지 않는 상담은 상담이라고 보기 어렵다. 본 연구에서는 여기서 감히 홀로서기 상담을 제안하고자 한다. 갈라서는 일에 구애받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바울의 교훈을 기초로 이혼자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담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홀로서기란 독립된 개체의 생명운동으로 떨어져 나가는 과정의 몸부림이다. 이혼은 둘이 함께 살다가 각각 하나로 남는 것이며 그때 자동적으로 홀로서기 문제가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혼자다. 한 아기가 엄마의 탯줄을 누군가의 도움을 입어 끊을 때 비로소 한 생명체로 출현하며 성장 후에는 부모로부터 독립된 성인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죽음이나 이혼을 통해 결국 혼자 남는 삶의 과정 전체가 홀로서기를 필요로 한다. 소년소녀 가장이나 성인 독신남녀 노인들에게 이르기까지 홀로서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속에 제기되는 문제들은 홀로서기 상담과 직결된다.

이혼을 한 후 제일먼저 튀어나오는 내담자의 목소리는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만 합니까?” 혹은 절망의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해 훌쩍훌쩍 흐느끼는 동시에 홀로서기 위한 상담의 필요성을 상담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홀로서기 상담전화를 개설한 후 홀로서기라는 말이 좋아서 상담을 한 내담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보아도 홀로서기 문제는 이혼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상담이다. 홀로서기 상담은 무엇보다도 먼저 한 개인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홀로 서려고 할 때 도움을 주며, 둘째, 이혼자를 포함하여 혼자 있다는 고독감에 사로잡힌 모든 이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는 상담이다. 셋째, 홀로서기 상담은 어떤 일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며, 넷째, 독립된 각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상담이다. 다섯째, 홀로서기 상담은 죄의식이나 적개심 혹은 타인에게 미칠 상처를 없애고, 여섯째, 죽어버린 인간관계를 묻어놓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준다.

홀로서기 상담방법은 홀로서기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상담자와 내담자 상호 공감대를 비교적 쉽게 형성하는 가운데 전화나 개인 면접, 홀로서기 집단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같은 입장의 이혼이나 사별을 통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사전달 자체가 치료적이다. 두달 동안 벽만 바라보고 있던 ‘차’여인은 동질의 홀로서기 집단에 나오면서부터 말문이 열리고 두 번째 모임에서부터 활짝 웃을 수 있는 명랑한 분위기가 되었다. 같은 아픔을 겪은 독신자들이 부부중심의 사회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30)


나오는 말


현대 사회 구석구석에서 이혼은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기독 상담자는 성서적 교훈에 기초하여 이혼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성서속의 한 부분만 고집하지말고 구약과 신약 전반에 흐르는 시대적 배경과 말씀을 종합하여 내담자의 요구시점에서 적용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무조건적으로 이혼을 반대할 수 없는 상담자는 이혼문제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혼전 상담에서는 가능한 결혼관계회복을 위한 상담목표를 세우고 개선하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일단 이혼할 수밖에 없는 경우 이혼을 진정으로 원하는 자에게 있어서 이혼은 최대의 자유라고 보아야 될 것 같다. 이혼으로 인하여 입은 상처를 최소한 줄이고 과거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홀로서기가 필요하며 어떤 일에도 대처할 수 있는 적응력을 갖도록 도와주는 홀로서기 상담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부중심의 이 사회가 홀로 서려고 몸부림치는 독신자들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고통은 더욱더 증가할 것이다.

인간은 남녀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누구나 창조된 세계 안에서 살도록 허락되었다. 결혼은 남녀평등의 창조적 질서 안에서의 결합이며 어느 일방의 인격을 짓밟을 때 그 결합은 언제나 깨어질 가능성이 있다. 선택의 과정에서 실수를 잘하는 인간은 어떤 사람이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좌절될 때 갈등이 생기고 생의 의욕마저 상실될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빠져들어 간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개체가 고통을 당할 때 비록 그가 한 마리의 양과 같이 울타리 경계를 뛰어 넘어가다가 가시에 찔렸다 하더라도 그도 우리 공동체의 일원인 이상 목자의 심정으로 그가 다시 상처를 싸매고 푸른 초장에 뛰어 놀 수 있도록 격려해야만 될 것 같다. 이혼상담은 이혼으로 아픔을 당하는 한 지체를 또 다른 지체가 함께 아파하는 유기적인 공동체 안에서 수용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새 출발의 변화를 추구하는 학습과정인 것이다.

출처 : 서사대 기독학생회 카페
글쓴이 : 이송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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