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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죄책감 상처 그리고 용서^^

힐링&바이블센터 2006. 7. 31. 22:06
 

죄책감, 상처 그리고 용서

이재훈 Ph. D.(한국심리치료연구소)

한국목회상담협회 제11차 학술대회 (2005)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삶에서 그는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상대로 싸움과 살인을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모두 일시적이며, 결국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자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 용서 -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는 용서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증오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용서를 베풀 기회를 준 사람으로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너무나 훌륭한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러한 생각의 힘만으로 또는 선한 의지의 힘만으로 용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용서란 우리가 아무리 힘들게 노력한다고 해도 마음먹기에 따라 즉 의지를 가지고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해온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 안에는 용서를 가능케 하거나 불가능케 하는 복합적인 정신적 모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용서란 용서의 능력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정신분석학이 용서의 능력의 형성과정과 또 그 능력의 회복과정을 이해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정신분석학 내에서 발달해온 통찰들을, 특히 현대 정신분석학적 사고를 대표하는 클라인, 페어베언, 위니캇 그리고 코헛의 대상관계 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론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임상자료의 일부를 제시하고자 한다.

I. 대상관계 이론에서 본 용서의 능력

  

멜라니 클라인과 용서의 능력


  클라인의 이론 체계에서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를 받아들이거나 용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당연히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발달과정에서의 중요한 성취물이다. 그녀는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라는 개념을 통해서 건강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건강과 병리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기준임을 밝혔다. 그녀가 말하는 편집-분열적 자리의 주된 특징은 대상에 대해 배려하거나 관심을 가질 수 없는, 따라서 자신의 공격성에 의해 대상이 입은 손상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발달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가책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이런 개인들은 박해불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의해 발생한 실제적인 또는 환상적인 경미한 잘못에 대해서도 매우 악의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 보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개인들의 삶에는 용서란 없고 단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법칙만이 존재한다.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용서를 하거나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불안과 대상관계의 성질 그리고 방어기제의 특성이라는 세 가지 요인 때문으로 설명된다. 첫째 이 시기에 유아의 자아는 죽음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멸절에 대한 공포로 인해 박해불안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박해불안의 상황 하에서는 생존에 대한 절박한 관심 때문에 대상의 운명이나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 시기의 대상관계는 부분대상과의 관계로서, 유아는 대상을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이용하고 착취할 뿐 대상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과 배려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유아는 자신이 대상에게 어떠한 손상을 입힌다고 해도 그 결과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으며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셋째 이 시기의 유아의 자아는 투사적 동일시, 부인, 분열 등의 원시적 기제들을 사용함으로써 내부 및 외부의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관계를 맺기보다는 마음대로 왜곡하는데, 그 결과 대상의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모두 유아의 초기 자아가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이라는 두 가지 정신적인 세력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에 속한다. 초기 자아는 죽음 본능에서 오는 세력과 생명 본능에서 오는 세력을 각각 대상에게 투사함으로써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을 만들어내고, 이 둘을 분열시켜놓는데, 이로 인해 자아 또한 분열되게 된다.

호의적인 상황에서 자아는 차츰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와 동시에 대상 또한 부분 대상에서 전체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 전체 대상의 출현은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이는 다시금 자신의 공격성과 그것의 결과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는데, 그 결과 불안의 성질이 박해 불안에서 우울 불안으로 바뀌게 된다. 우울 불안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안위에 대한 염려로 채워지는 불안이다. 그와 동시에 자아는 원시적 방어기제의 사용을 포기하고 보다 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된다.

  클라인은 이러한 핵심적인 발달이 생후 4개월에서 6개월경에 발생한다고 보고, 이를 우울적 자리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아는 최초로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신이 그토록 무자비하게 공격했던 대상이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었음을 인식하면서, 대상이 입은 손상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데, 그와 동시에 초기 형태의 초자아가 지닌 가혹성으로 인해 죄책감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그 결과 편집-분열적 자리로의 퇴행이나 조적 기제(manic defense: 대상에 대한 평가절하, 심리적 고통에 대한 전능적 부인 그리고 승리감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복합적 방어기제)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피에 안주할 경우, 편집증이나 양극성 우울증과 같은 병리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유아의 자아가 현실 대상의 도움으로 좋은 내적 대상을 형성하고, 그 결과 초자아의 가혹성을 완화시킴으로써 우울적 자리의 고통을 직면하고 애도할 수 있다면, 드디어 회복충동의 출현과 함께 상처 입은 대상을 온전한 회복시키고, 병리적 성질의 초기 죄책감이 상처 입은 대상을 고쳐주고 치유하고 책임지고자 하는 성숙한 죄책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달적 자리에서 개인은 진정으로 대상과 자신을 용납하고, 진정으로 건강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고,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클라인에 따르면, 용서와 관련해서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째 부류는 아예 용서받을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편집-분열적 자리에 속한 사람들이고, 둘째 부류는 용서를 갈구하지만 결코 용서받는 기쁨과 해방을 누리지 못한 채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초기 우울적 자리에 고착된 사람들이며, 셋째 부류는 죄책감을 느끼되 그것에 압도되지 아니하고 그것을 창조적인 충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우울적 자리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클라인에게 있어서 심리치료의 목적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죄책감을 보다 성숙한 형태의 죄책감으로 발달하도록 도움으로써 마침내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치료자는 환자의 불안을 완화시키고, 좋은 내적 대상의 형성을 도우며, 원시적 방어기제를 포기하고 성숙한 방어기제를 발달시키도록 환자를 돕는 과제를 갖는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석이라고 보았다. 환자의 불안과 그 불안의 근저에 있는 환상을 해석해줄 때 환자는 압도적인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을 그토록 깊이 이해해주는 치료자를 좋은 내적 대상으로 내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좋은 내적 대상은 다시금 불안을 감소시키고 나아가 원시적 방어기제 대신에 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클라인의 이론 체계에서 용서의 능력은 결국 한 개인의 내면세계 안에 형성된 좋은 내적 대상의 힘에 달려있다. 좋은 내적 대상이 충분히 확립될 때에만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나뉘어 있는 부분 대상관계의 상태를 벗어나 전체 대상관계 안으로 진입할 수 있고, 그럴 때에만 대상에 대한 관심의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고, 투사적 동일시 같은 원시적 정신기제를 보다 성숙한 공감능력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투사적 동일시는 가장 원시적인 정신기제로서 부분 대상관계 상태에서 진행되는 정신의 상호작용 방식이다. 여기에서 자아의 부분들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대상에게 투사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투사된 부분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상을 점유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자아와 대상의 경계는 붕괴되고, 마구 대상을 침범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이것은 대상관계를 파괴시키고 나아가 용서의 기반을 붕괴시킨다. 자아와 대상 간에 구분이 무너지고 혼동이 발생한다면, 용서의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용서란 진정한 의미에서 대상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사적 동일시는 폭력적이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의 본질은 투사적 동일시이다. 여기에서 나와 너의 다름은 존중되지 않는다. “너는 내가 생각하는 너일 뿐이며, 당연히 나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너를 파괴시킬 것이다”라는 논리가 지배한다. 이러한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서 용서란 가능하지 않다.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투사적 동일시는 발달할 수 있고, 그럴 때 그것은 공감능력이 된다. 공감에서 자아는 잠시 동안 대상의 입장에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대상을 이해할 수 있지만, 결코 대상을 지배하거나 조종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의 모습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 있다.

  그러므로 치료자는 치료과정에서 환자의 투사적 동일시를 반복해서 지적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공감능력으로 변화시키는 과제를 갖는데, 이 또한 근본적인 의미에서 용서받고 용서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는 과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클라인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방해물로서 시기심의 작용을 꼽았다. 이는 대상이 내게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이 지닌 좋음 그 자체가 내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과도한 시기심에 노출된 유아에게 있어서 엄마의 젖가슴은 자신이 갖지 못한 좋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용납되거나 용서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고갈되거나 오염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도한 시기심은 대상과의 좋은 경험을 파괴하기 때문에 좋은 내적 대상의 형성을 방해하며, 결과적으로 용서능력의 발달과정을 가로막는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시기하는 모든 대상들로부터 외면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피한 채로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용서받을 것도 없고 용서할 것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들이 나보다 좋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고 또 그들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클라인에 따르면, 최초의 발달과정에서 유아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바로 엄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시기심을 극복하고 좋은 내적 대상을 건설하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치료자가 환자와의 치료과정에서 담당해야 할 근원적 과제이다. 유아는 엄마의 젖가슴을 시기하여 환상 속에서 그것을 파괴하지만 현실의 젖가슴은 그 파괴를 견디고 계속해서 좋을 젖가슴으로 남기 때문에 유아는 시기심을 극복하고 좋은 젖가슴을 내사할 수 있는 것처럼, 환자는 치료자의 좋음을 시기하여 치료자를 공격하고 파괴하지만, 치료자가 그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좋은 대상으로 살아남아서 그러한 사실을 해석해주기 때문에 마침내 좋은 내적 대상의 형성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클라인의 이론을 용서의 맥락에서 풀어본다면, 유아는 먼저 자신의 공격을 용서해주는 엄마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용서의 능력을 발달시키며, 환자 또한 자신의 공격을 용서해주는 치료자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용서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먼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자신을 잘못을 모르는 채 또는 방어한 채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이웃을 먼저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용서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과연 용서가 되는가? 물론 그것은 어렵다. 용서란 대상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요, 상호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란 만남이요, 사건이요, 의사소통이요, 은총이지, 의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클라인에 의하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를 공격하는 대상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으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리고 그처럼 우리를 공격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는 있다. 대상이 이러한 공감능력을 만나고 경험하게 될 때, 그의 투사적 동일시는 차츰 공감능력으로 발달할 수 있게 되고, 대상에 대한 공격 충동의 죄책감으로 발달하고, 그 죄책감이 마침내 용서의 능력으로 발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로널드 페어베언과 용서의 능력   

   

  페어베언은 분열성 인격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용서의 역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켜주었다. 분열성 인격은 자아가 약해서 모든 대상관계로부터 도피하고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며 특히 대상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거나 대상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특징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얼핏 보기에는 용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최초의 대상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과 자신의 사랑이 그 대상에 의해 수용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분노와 거절의 역동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페어베언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본래 온전한 단일체로 구성된 것이지만, 대상과의 관계 경험에서 불가피하게 분열이 발생한다. 그는 인간의 자아는 처음부터 대상을 추구하고 대상에게 사랑을 받고 또 자신의 사랑을 대상에게 주고 싶어 하는 중심적인 욕구를 갖고 있는데, 이러한 욕구가 좌절될 때 즉 초기에 유아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상처가 발생하고 그 상처와 함께 분열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사랑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고, 자신의 사랑이 대상을 파괴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며, 따라서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철수한다.

  이런 점에서 분열성 인격은 편집적 인격과는 대조적으로 대상을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보다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나쁘다고 믿는 분열성 인격은 현실에서의 좋은 대상으로부터는 철수하면서, 내면의 나쁜 대상과는 애착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간은 대상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좋은 대상과 관계를 맺지 못할 경우 나쁜 대상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쁜 대상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이 부정적 치료반응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대상을 용서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가라는 구분은, 페어베언의 이론 안에서 자기 이미지와 대상 이미지가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또 상호교환적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보다는 자기와 대상 모두가 용납될 수 없고 용서될 수 없다는 믿음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점에서 분열성 인격의 용서할 수 없는 무능력은 편집적 인격의 그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것으로 보인다.

  나쁜 경험으로 인해 자아가 심하게 분열될 때, 자아는 나쁨의 요소를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가 나쁜 부모에 의해 심한 학대를 받을 경우, 아이는 자기가 나쁘기 때문에 부모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부모의 나쁨을 스스로 떠맡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대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페어베언은 이를 도덕적 방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방어로 인해 죄책감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이 갖는 죄책감이나 도덕적 나쁨의 느낌은 대상이 지닌 나쁨의 느낌보다 이차적인 것이다. 죄책감은 자아가,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내적 대상인 초자아와 갖는 관계 그리고 나쁜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내적 대상들과의 관계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긴장의 산물로 보인다. 따라서 죄책감은 나쁜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방어로 볼 수 있다.”(성격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 204-205,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3)

  그러므로 페어베언의 체계에서 죄책감은 더 이상 일차적인 정서도 아니요, 용서에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지 못한다. 치료과정에서 죄책감의 해석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근원적인 문제의 치료에로 인도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실수라는 것이다. 오히려 죄책감에 대한 섣부른 해석은 죄책감에 의해 방어되고 있는 더 많은 나쁜 대상을 불러냄으로써 더욱 완고한 억압을 불러오게 되고, 그 결과 부정적 치료반응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죄책감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아니라 내재화된 나쁜 대상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을 어떻게 해소하고 그러한 나쁜 대상을 어떻게 몰아낼 것이냐에 있다. 그리고 나쁜 내적 대상을 몰아낼 수 있는 힘은 대상의 인격 안에 자리잡고 있는 좋음의 요소라고 보았다. 환자가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정말로 좋은 대상을 경험할 때에만, 그는 비로소 나쁜 내적 대상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을 풀고 그 대상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치료자의 인격적인 좋음의 요소, 그것만이 자신과 대상을 거부하고 나쁜 내적 대상들에게 사로잡혀 있는 분열성 개인들을 해방시키고 자신과 대상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도널드 위니캇과 용서의 능력


  위니캇은 용서의 능력이 일차적으로 공격성의 발달과 죄책감의 변천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페어베언과는 달리, 공격성을 일차적 요소로 보았다는 점에서 클라인과 같은 견해를 가졌으나, 클라인과는 달리 공격성을 죽음 본능의 표현이 아니라 생명 본능의 표현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유아는 대상을 이유 없이 파괴하고자 하는 무자비한 공격 충동을 느끼는데, 최초의 대상인 엄마는 아이의 공격에 대해 보복하지 않음으로써 아이가 공격 충동을 억압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 통합시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최초의 시기에 아이가 자신의 공격성을 철저히 억압한다면, 아이는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는데, 그때 아이는 자기주장 대신에 엄마의 눈치를 보고 환경의 요구에 순응하고 동조하는 거짓자기를 발달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분열되고 억압된 공격성은 발달하지 못한 원시적 형태로 무의식 안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한 요소가 분출될 때에는 매우 무차별적인 파괴의 모습을 보인다.

  엄마가 자신의 공격성에 대해 보복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견뎌주는 호의적인 상황에서 아이는 차츰 자신의 공격성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이 손상을 입힌 엄마를 회복시키기 위한 화해의 제스쳐를 하게 된다. 만약 엄마가 이 제스쳐를 받아들이고 아이를 용서해준다면, 아이는 자신의 죄책감이 아주 나쁜 것이 아니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형성하게 되며, 그 결과 그 죄책감은 감당되어질 수 있는 것이 되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아이의 죄책감 발달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아이의 이유 없는 공격행동에 대해 보복하지 않고 견뎌줌으로써 아이가 자신의 공격 충동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초의 죄책감 경험에 따른 아이의 화해의 제스쳐를 받아주고 아이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위니캇은 이런 두 요소를 제공해주는 엄마의 기능을 대상 엄마와 환경 엄마로 불렀고, 아이는 이 두 엄마의 경험을 통합하는 것을 통해서 죄책감을 관심의 능력으로 발달시킨다고 보았다. 위니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아가 엄마를 소비하면 그녀를 잃게 될 것이므로 유아는 불안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 불안은 환경 엄마에 의해 수정된다. 아이가 환경 엄마에게 공헌하고 베풀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점 확신하게 될 때, 그 확신은 유아로 하여금 불안을 감당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감당되는 불안은 그 성질이 바뀌어 죄책감이 된다. 본능적 욕동이 대상을 무자비하게 사용하고 난 후에 죄책감이 생긴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환경 엄마에 대한 공헌에 의해 감당되고 달래진다.”(성숙과정과 촉진적 환경, 6장)

  그러나 만약 아이가 자신의 공격성을 수용해주는 충분히 좋은 대상 엄마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공격성을 분열시켜 억압할 것이며 따라서 소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될 것이고, 또는 아이의 공격을 용서해주고 화해의 제스쳐를 용납해줌으로써 아이가 느끼는 최초의 죄책감을 완화시켜주는 충분히 좋은 환경 엄마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억압할 것이며 따라서 우울증이나 반사회적 행동의 원인이 되는 무의식적 죄책감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한 개인이 무의식적 죄책감을 갖게 될 경우, 그는 자신의 잘못도 타인의 잘못도 용서할 수 없게 된다. 용서는 그에게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적 죄책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용서에로 들어가는 모든 정서적인 통로는 철저히 차단되고 만다. 또는 자신은 나쁘고 따라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무의식적인 죄책감 때문에 끊임없이 나쁜 짓을 하고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위니캇에게 있어서 건강한 죄책감은 곧 모든 도덕성의 기초가 되는 관심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는 죄책감이 성숙할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죄책감으로 부를 것이 아니라 관심의 능력으로 불러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죄책감을 인간의 발달과 성숙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으나 지속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관심의 능력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 동안에만 가치있는 것으로 보았다. 누군가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그의 죄책감을 수용해주고 용서해주는 대상을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런 환자와의 치료과정에서 치료적 관건은 치료자가 환자의 죄책감을 수용해주고 용서해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누군가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그의 죄책감이 깊이 억압되어 무의식적 죄책감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런 환자 또한 보복의 감정없이 그의 공격성을 견뎌주고 용서해주는 치료자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의 억압된 죄책감을 수정할 수 있다.

  한편, 위니캇은 공격성이 더욱 철저하게 억압되고 분열되어 아무런 죄책감의 능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현실에 피상적으로 적응하고 동조하면서 살아가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 이들을 거짓자기 인격으로 분류했는데, 그는 이들이야 말로 가장 용서받기 힘든 사람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자신의 공격성의 요소를 상실하는 것과 함께 참자기의 요소들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진정한 삶을 포기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개인들은 정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죄책감도 느끼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또 용서를 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들의 죄책감은 세뇌된 것에 불과하고 이들의 용서는 진정성을 갖지 못한 흉내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위니캇의 관점에서 볼 때, 이처럼 거짓된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값싸고 감상적인 용서를 주고받는 사람들이야 말로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야 말로 위선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한 채 이웃의 눈에 있는 티끌을 꺼내고자 달려드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에게서 정의로운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싸구려 용서를 사고파는 거짓자기 인격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진정한 용서의 능력을 형성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할 것인가?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 거짓자기를 버리고 참자기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

  사실 이러한 물음은 위니캇의 모든 치료이론을 관통하는 중심적인 주제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안아주기(holding), 반영해주기(mirroring), 공격성을 견뎌주기(surviving)라는 세 가지 요소를 제안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초점적인 요소로 공격성을 견뎌주기를 꼽았다. 치료상황에서 치료자는 이런 환자가 제시하는 싸구려 용서에 공모할 것이 아니라 그의 거짓된 평화를 깨뜨릴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치료자 자신의 건강한 공격성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즉 환자의 공격성에 대해 증오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그 증오가 사랑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절제된 공격성의 능력 또는 위니캇의 용어로 “증오할 수 있는 능력 (capacity to hate)이야 말로 환자의 거짓자기를 깨뜨리고 참된 공격성-죄책감-용서의 능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요소라는 것이다.


하인즈 코헛과 용서의 능력


  코헛의 이론체계 안에서 용서의 능력은 건강한 자기의 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건강한 자기란 이상과 포부를 지니고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창조적이고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기를 말하는데, 이러한 자기야 말로 자신과 타자의 약함과 수치와 허물을 용납할 수 있으며, 인생의 한계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강한 자기를 형성하지 못한 개인은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들과 대상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채 자신도 타인도 그리고 삶도 용서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다고 보았다.

  코헛은 건강한 자기를 형성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로서 이상화 대상과의 관계 경험과 유아의 과대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아주는 반영 대상과의 관계 경험이라는 두 가지를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반영 대상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유아는 자신이 가치있고 위대한 존재로 인정받고 찬사받는 경험을 통해서 견고한 자긍심과 자존감을 형성할 수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만 타인을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서 용서받을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유아가 엄마로부터 충분히 반영받지 못한다면, 유아의 자기는 무기력감, 무가치감 그리고 수치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러한 취약한 자기의 상태를 방어하기 위해 과대적이고 과시적이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병리적인 자기애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지 못한 자기애적 개인은 아주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처를 준 타인들을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또한 이런 개인은 작은 일에도 격노 반응을 하는데, 이는 자기가 응집력을 갖지 못함으로 해서 쉽게 해체되기 때문이다.

코헛은 클라인이나 위니캇과는 달리 그리고 페어베언과 마찬가지로, 공격성을 일차적인 요소로 보지 않고, 좌절에 따른 이차적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공격성 대신 자기주장성이 일차적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욕구가 좌절될 때 자기는 격노하게 되는데, 이러한 격노는 곧 자기가 해체되는 데 따른 결과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공격성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죄책감 역시 일차적인 정서가 아니라 보다 근저의 일차적인 정서인 무력감, 무가치감 그리고 수치감을 감추기 위한 이차적인 정서요 방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죄책감 배후에는 항상 자기의 상처가 숨어 있으며, 죄책감은 사실상 이러한 상처를 감추기 위한 방어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코헛은 용서의 문제를 죄책감의 해결과 관련짓기보다는 자기의 상처와 관련짓는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곧 자기의 상처가 치유되는 데서 얻어지는 산물이다. 심하게 상처 입은 자기는 아직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용서받을 수 있는 힘도 없다. 그 상처로부터 치유 받고 그래서 자기에 대한 몰두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때에만 그는 타인과의 진정한 대상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상호인정과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용서의 삶을 살 수 있다.

코헛은 프로이드 시대의 중심적인 문제가 죄책감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중심적인 문제는 무력감과 수치감이라고 하면서 소위 갈등에 시달리는 죄책감 인간(guilty man) 대 무기력감과 수치감에 시달리는 비극적 인간(tragic man)이라는 명제를 부각시켰다. 그의 관점에서 이 두 종류의 인간은 사실상 모두 상처 입은 자기를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그 상처의 정도 차이가 있다. 갈등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개인은 비교적 경미한 자기의 상처를 지닌 사람이요, 자아와 초자아 그리고 원본능이라는 삼중구조를 어느 정도 형성한 사람인데 반해서, 무기력감과 수치감에 시달리는 비극적인 인간은 훨씬 더 심각한 자기의 상처를 지닌 사람이요, 삼중구조는커녕 온전한 자기감을 형성하는데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코헛의 사고는 결코 용서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다만 진정한 용서의 삶을 위해서는 죄책감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저의 상처 입은 자기를 치유하는 문제에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모아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자기를 치유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공감을 바탕으로 인정해주고 긍정해주는 반영적 자기대상의 역할을 수행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죄책감, 상처 그리고 용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요 대상관계 이론가들은 나름대로 용서의 문제를 중심적인 주제로 다루었다. 용서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공격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뉘고 있다. 공격성을 죽음 본능의 표현으로 보든 아니면 생명 본능의 표현으로 보든, 그것을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요소로 보는 클라인과 위니캇은 죄책감을 용서의 능력을 형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죄책감은 그것 자체로서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클라인은 이 죄책감이 초기 형태에 고착될 경우 우울증 병리의 중심 요소가 된다고 보았고, 위니캇은 이 죄책감이 억압되어 무의식적 죄책감이 될 경우 역시 우울증 병리나 반사회적 병리를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죄책감이 건강한 창조적 충동과 관심의 능력으로 발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그러나 클라인과 위니캇 모두는 결코 죄책감에게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죄책감이 진정한 가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종의 과도기적 가치만을 갖는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 페어베언과 코헛은 공격성을 좌절 경험에 따른 이차적인 요소라고 보았고, 두 사람 모두 죄책감을 비록 불가피한 것이기는 하나 건강한 인격으로 발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책감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방어이며, 따라서 치료과정에서 죄책감에 초점을 두고 그러한 죄책감을 일으키는 갈등에 대한 해석에 매달리는 한, 근본적인 치료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페어베언은 죄책감을 내재화된 나쁜 대상에 대한 방어로 보고, 상처 입은 자아가 대상의 나쁨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허약하고 무력하다는 느낌대신 강하다는 느낌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보았고, 코헛은 죄책감을 보다 근저의 상처 입은 자기와 그러한 자기가 느끼는 정서인 무력감과 무가치감 그리고 수치감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 두 사람은 용서의 능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죄책감을 필수적인 요소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은 환자나 치료자의 관심을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두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꼭 죄책감을 거쳐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서의 배후에 있는 자아 또는 자기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만 그러한 능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건강한 죄책감이 존재하는가? 클라인은 그렇게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니캇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클라인이 말하는 성숙한 형태의 죄책감은 더 이상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있는 사랑이요 관심의 능력이다. 페어베언과 코헛에게 있어서 건강한 죄책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죄책감이란 상처의 징표요 그러한 상처를 감추고 있는 방어이다.

  결론적으로, 대상관계 이론가들은 공통적으로 병리의 핵심에는 죄책감보다 더 깊은 요소가 있으며, 그와 같은 깊은 요소에 초점을 맞출 때에만 온전한 치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죄책감의 해소를 통해서가 아니라 보다 깊은 자기의 상처에 대한 치유를 통해서만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용서의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클라인은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 개념을 통해서 페어베언은 분열성 상태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위니캇은 거짓자기 병리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그리고 코헛은 자기애적 병리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들 대상관계 이론가들의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죄책감과 상처와 용서의 능력 사이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심화시켜주었음이 분명하다. 


II. 임상자료를 통해 대상관계 이론을 바라보기


  필자는 앞의 이론적 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담담했던 임상사례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사례는 대상관계 이론들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제시된 이론들이 일부가 임상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위의 이론들에 현장감을 보태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가능한 한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을 줄이기 위해 치료 중에 환자 자신이 보고했던 꿈 내용(환자 자신이 기록한 것임)을 그대로 제시하면서 약간의 주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진행해보겠다.

환자는 30대 초반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미혼 여성으로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과 모든 것이 진짜 같지 않으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 이 환자는 처음부터 분열성 성격병리라는 진단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들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진단상의 복잡성은 거의 없었다. 치료는 약 2년간 계속되었고 치료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초기 자료의 일부만이 제시되고 있다.


6월 14일

가족들(엄마, 아빠, 오빠)이 외국으로 떠난 상태에서 나중에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감. 홀로 미국에 도착했는데 가족들이 반겨주지도 않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거울이 보이고 슬픈 감정.


(이 꿈은 이 환자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립되고 철수되어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분열성 개인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꿈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거울이 보이고 슬픈 감정을 느꼈다는 부분이 앞으로 전개될 많은 내용을 암시하는 것으로 사료됨)


6월 18일

내가 사라지고 내부에서 소리 외침이 들림. “내가 없어,” “내가 안보여,” “넌 이제 똑같아”하는 소리. 아무리 소리쳐도 모르고 친구들 鬼의 농락으로 죽음. 이 친구들이 나이든 내 모습 같기도 하고 꿈에서 깨어 기록할 때 엄마라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됨. 난 가까이 가서 엄마에게 외치는데 사람들은 끝말을 따라 알아듣는 듯 했는데, 누가(鬼) 날 죽게 했어, 뭐 귀신 등의 소리. 그러나 보이지 않음.


(환자의 초기 상처의 성질을 보여주는 꿈으로 간주됨. 엄마가 반영해주지 못함으로 인해 환자의 어린 자기가 생생한 존재감을 획득하지 못한 채 환상속의 이미지들이 힘을 얻지 못하고 죽어갔던 상황을 보여준다고 사료됨. “내가 보니 내가 보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진정한 나로 존재한다”라는 경험과 “내가 보니 내가 보이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순응하고 모방하는 거짓된 나이다”를 대비시킨 위니캇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6월 19일

중간에 교통사고를 목격하는데 차 3대가 있고, 차속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곧 이어서 차 2대가 서로 반대편으로 스치고 지나감. 한쪽에는 내가 타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얼굴은 아님. 반대편 차는 영화배우 김지미가 타고 있는데 엄마라는 느낌이 듬(무표정, 사고를 낸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표정의 동요가 전혀 없음.)


(처음에는 교통사고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고 나중에 가서야 이것이 동생의 교통사고와 관련된 죄책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됨. 계속해서 반응해주지 않는 엄마의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환자의 무감정은 나쁜 엄마에 대한 방어이고 환자의 죄책감 또한 이러한 엄마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무력감과 수치감에 대한 방어일 수 있다고 여겨짐.)


6월 26일

친구 000의 엄마가 사실은 친엄마가 아니라고 함. 설마하며 계속 의심하였는데 진짜라고 받아들여짐. 친구와 성격이 많이 닮았고, 걱정하고 잘해주는데 어떻게 친엄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함.

(이 꿈은 분열성 개인이 세상과 현실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엄마에 대한 좌절과 분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런 엄마에 대해서 아이는 무의식에서 자기 엄마는 친엄마가 아닐 거라는 상상을 발달시키게 된다.)


6월 30일

밤에 폭이 넓은 찻길에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전기선이 굵다. 근데 어떻게 하다가 전기선을 찻길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져갔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끊어질 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괜찮아” 하는 사람들의 말소리. 그때 커다란 버스가 지나갔고, 굵던 전깃줄 잘뚝 끊어져버림. 전깃줄에 전류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 버스 기사가 화내지 않을까? 괜찮겠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버스가 길옆에 한참 멈춰서 있음. 사람들이 감전이 됐나봐, 두려움, 죄책감.


(이 꿈은 엄청난 사건과 관련된 두려움과 죄책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간주됨. 환자는 이 꿈에 대한 연상과정에서 자신이 여섯 살 때 교통사고로 죽은 동생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음. 당시에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이 시골 친척 집에 갔다가 신작로에서 트럭에 치어 죽었고, 그 뉴스를 환자 혼자 텔레비젼을 보다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으며, 그 일로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그때 내심 자신이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라는 절실한 후회감을 느꼈다고 회상을 하였음. 그리고 이 사실은 거의 25년 동안 완벽하게 망각되었다고 하였음. 환자는 당시에 동생에 대해 느꼈던 질투심을 기억해냈고 동생의 죽음이 동생이 죽기를 바랐던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과 죄책감을 연결시키면서 눈물을 흘렸다.)


7월 9일

커다란 동굴이 보이고 앞은 견고히 가로막혀 있다. 어떤 스파이, 모험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동굴 입구가 아귀가 딱 맞게 닫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문을 쉽게 찾아내지 못하지만 나는 그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 오빠 같기도 하고 어떤 남자 같기도 하고, 뭔가 중요한 물건(붉은색 같다)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동굴에 들어가자 커다란 공간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뭔가 회담을 열고 있는 듯 했다. 그 와중에 그 중요한 물건을 뺏고 빼앗기며 꿈을 깨었다.


(문이 닫혀 있는 동굴은 분열성 인격의 닫힌 내면세계를 나타내는 듯 했고, 동굴 입구를 발견하고 내부에 커다란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환자의 폐쇄된 내면세계가 차츰 열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오빠 또는 어떤 남자가 가지고 있는 붉고 중요한 것은 환자가 어린 시절에 박탈당했다고 여겨지는 핵심 자아의 한 요소, 즉 삶에 대한 열정이나 감정, 생생한 자기감 또는 자기주장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이를 되찾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7월 18일

아이가 사람이 아니고 강아지라고 하고, 가족들이 강아지를 죽이려고 함. 나도 수동적으로 동조하고 있음. 안방 벽에 피가 묻어 있고, 괴로워하면서 쉽게 죽지 않는 아이한테 쫓겨 다님(아이 손이 문에 끼기도 하고). 가족들이 아이가 죽었다고 하는데 아이는 죽지 않고 나를 쫓아다님. 불쌍함. 아기의 감촉 등 생생하게 느껴지고, 왜 사랑하는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가. 아빠는 아기를 예뻐했는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 아이가 저항하지 않고 편안히 죽었으면 하는 마음. 울면서 잠에서 깨었는데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눈물이 계속 흐르고 아침에 너무 기운이 빠지고 졸음이 와서 무기력해짐. 지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이 꿈 역시 초기 대상관계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됨. 환자는 오랜 동안 깊이 억압되어 있던 거절 받고 살해당했다는 유아기의 느낌을 되찾아 재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이런 경험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철저히 억압되었고, 그 결과 부모와 가족 그리고 현실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닫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용서할 수 없었던 부모와 가족을 그리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것 같다.)


8월 13일

누군가에게 3명이 쫓기게 되었는데, 1명이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나도 화장실에 따라 들어갔는데 먼저 들어왔던 1명이 사라지고 없었다. 화장실의 기분 나쁜 느낌. 어디에 갔을까 궁금해 하던 찰나에 한쪽 벽이 밀려들어가고- 그 안에는 너무나도 큰 공간의 동굴이 나타났다. 펑뚤린 느낌과 와-하는 감탄. 이렇게 큰 공간이 숨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고, 멀리서 보이는 한쪽 편에 한 남자가 팔을 들고 서 있었다. 긴 머리에 빨간 옷을 머리에 두르고 커다란 지팡이를 지켜든 채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수인가? 난 또 왜 이런 종교적인 꿈을 꾸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중간에 기억은 없다. 후에 그는 예수는 아니었고, 예수와 비슷한 어떤 선지자였다.


(이 꿈은 앞에서 시작된 폐쇄된 내면세계가 보다 적극적으로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7월 9일 꿈에서 나타났던 빨갛고 중요한 어떤 것이 빨간 옷으로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정열, 공격성 그리고 남성성의 요소와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8월 30일

꿈1

성당 사람들과(오빠가 보임) 여름에 지방 어디로 놀러갔는데 우리가 묵을 시골집 뒤편을 가보니 트럭이 한 대 있었고, 조약돌 비슷한 하얀 벌판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차가 조절이 안 되어 굴러 내려가고 있었고, 멈춰야 되는데 하는 생각. 밧줄로 묶어서 잡아보려고 시도함.


꿈2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상대 사람이 죽은 줄만 알고 같이 타고 있던 일행이 두려워서 숨어 다님. 가슴조리며 숨어 있는데, 어떤 콘도 같은 데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다보니 그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됨. 이제 돌아가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 안도감.


(이날 꾼 두 개의 꿈은 모두 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환자의 죄책감을 표현하는 듯하다. 꿈에 등장한 오빠는 동생을 나타내는 듯했고, 조약돌 비슷한 하얀 벌판은 동생이 트럭에 치어 죽은 신작로의 모습과 같다고 회상했다. 꿈1은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죄책감이 억압에서 풀려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다시 억압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꿈2는 이제는 죄책감을 내려놓고 동생에 대한 증오와 동생을 증오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9월 4일

불이 남. 안방에 조그만 불씨가 갑자기 활활 타오름. 꺼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갑자기 괜찮을 거야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안심이 됨. 끄지 않은 게 잘했다는 생각이 문뜩 듬.


(이 꿈은 붉은 것-붉은 옷-불꽃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습은 위니캇의 이론에 비추어본다면 상실했던 공격성의 회복을 의미할 수 있다. 이제는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공격성은 더 이상 억압되어야 하는 죄책감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과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으로 통합될 수 있다.)


논의

앞에서 제시한 환자의 꿈을 면밀히 살펴보면, 두 가지 중심적인 주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죄책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력감 또는 죽었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전자는 오이디푸스 시기에 발생한 동생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후자는 그보다 훨씬 더 초기의 대상관계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환자의 근원적인 상처는 생애 초기에 충분히 좋은 돌봄을 특히 충분한 반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자기의 상처이다. 그리고 그녀가 오이디푸스 시기에 경쟁 대상이었던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경험했던 죄책감은 일차적인 자기의 상처를 방어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이 사례는 한 개인이 용서의 능력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이차적 방어인 죄책감의 문제와 함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인 자기의 상처를 치유받는 일이 필요하다는 대상관계 이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문헌

멜라니 클라인, 한나 시걸 지음, 이재훈 옮김(한국심리치료연구소 1999)

성격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 로널드 페어베언 지음, 이재훈 옮김(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3)

울타리와 공간, 데이비스 & 월브릿지 공저, 이재훈 옮김(한국심리치료연구소 1997)

하인즈 코헛과 자기심리학, 앨런 시걸 지음, 권명수 옮김(한국심리치

출처 : 서사대 기독학생회 카페
글쓴이 : 이송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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