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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앙과 순종의 모범자 노아(99)

힐링&바이블센터 2006. 5. 6. 14:52
신앙과 순종의 모범자 노아(99)

본문; 창5:28-29, 창6:5- 22

오늘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의 방주를 지은 노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 '위안' 또는 '휴식' '안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9대 손으로(눅3:36) 셋의 자손인 라멕이 182세에 낳았습니다.(창5:28-29)
셈, 함, 야벳의 아비(부친)이며 노아는 당세의 완전한 사람이며 의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창6:8-10) 하나님께서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를 선지자로 삼아 1백20년 동안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노아는 600세 되던 해 둘째 달에 방주에 들어갔고, 그 이후 40주야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창7:1-24, 창8:1-17)
601 세 되던 해 정월1일, 지면에서 물이 걷히고, 7주 후인 2월27일에는 그들이 마른 땅에 내려섰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인간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셨습니다.(창9:8-17) 홍수이후 노아는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로 살던 중 순간의 방심으로 술을 마시고 취함으로써 자녀들에게 추태를 보인 약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살고, 950 세를 향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창9:28-29)
성경에 가르치기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當世)에 완전한 자라"(창6:9)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였습니다. 이러한 노아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노아의 가문(家門)
우리가 이제 노아의 가문과 아브라함의 가문을 비교할 때 조금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런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다릅니다. 경건한 조상들 밑에 태어난 믿음의 가정의 아들입니다. 노아의 증조부는 유명한 믿음의 사람 에녹이었습니다. 에녹은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또 그의 나이 252세 때에(창5:21과 25절을 비교해 보라) 손자 라멕을 보았습니다. 에녹이 승천할 때 손자 라멕의 연령은 113세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와 라멕은 에녹이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에녹의 감화로 친히 자라난 아들과 손자였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러한 므두셀라는 노아의 할아버지였고 또 그러한 라멕은 그의 아버지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노아는 얼마나 경건한 가정의 아들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5: 29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安慰)하리라"(창5:29)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의 탄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고로이 일하며 고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때문이라고 그는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탄식에서 그의 슬픔이 무엇이었던 가를 상상케 됩니다. 우리 인생들은 다 범죄한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 되었다고 그는 탄식하며 슬퍼했던 것임을 봅니다. 이러한 탄식, 그러한 슬픔이야말로 곧 그의 믿음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의 길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죄값이라고 생각하는 그 양심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라멕이 그러한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났다면 그것을 가리켜 참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라멕은 그저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저주받은 인간들이라도 장차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을 받을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지은 그의 아들 노아의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아들의 이름을 작명(作名)함에 있어서 그 아버지의 믿음과 소망이 그 아들의 이름에 표현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이름에서 그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 5장 29절을 읽어보십시오. "라멕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노아라는 히브리말의 원 뜻은 안식(安息)과 위로(慰勞)란 말입니다. 라멕은 참 안식과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면서 그 아들을 통하여 참 안식과 위로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예표(豫表)로 보아 좋습니다. 이러한 그 아버지의 믿음은 노아에게도 깊은 감화를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말라기2:15 참고)

2. 노아 시대의 환경
노아 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창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했음을 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셋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아벨의 거룩한 계대(繼代)를 이어줘야 할 셋의 후손들도 가인의 무리와 연합하여 어떻게 부패해진 것을 위의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렇게 가인의 후손도 셋의 후손도 다 같이 타락하게 됐습니다.
창세기6장5,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하셨는데 이처럼 노아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요, 사람의 마음이 악하여 하나님을 탄식케 하여 근심케 한 시대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악함과 세상의 죄악은 하나님을 그처럼 슬프게 했고 탄식케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과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때는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말씀에 창세기 1장에서 7번이나 나옵니다.(1:4, 10, 18, 21, 25, 31)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죄악이란 이처럼 흉악한 것입니다. 노아 시대는 그러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암흑한 때이기에 노아는 하늘의 별같이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탄식케 하는 그러한 시대에 오직 노아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시대를 슬퍼하시며 탄식하심이 사실이었으나 의인 노아,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는 지극히 기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으셨습니다. 억만 인이 죄악을 범한다 할지라도 오직 죄악을 이기며 의를 행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우리는 노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참고: 예레미야5:1) 그러면 노아는 어떻게 그처럼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오직 창세기6장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가 그처럼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큰 믿음을 지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구원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불의의 물결이 홍수같이 밀려드는 그런 때에 홀로 그것을 거스려 경건히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을 감당했습니다. 그것이 결코 노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습니다. 노아가 마침내 심판을 이기고 구원을 얻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큰 믿음을 지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노아의 그 승리의 생애를 기록하려 할 때에 먼저 기록한 말씀은 창세기6장8절에 "그러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하신 그 말씀이었습니다.(엡2:8 참고)
성경은 노아의 생애를 기록하기에 앞서 그가 어떻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던가를 먼저 기록한 것을 우리는 주의 깊이 읽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의 경건한 신앙과 생애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습니다. 혹 우리에게 좋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할 것입니다.

3.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노아
노아가 어떻게 그처럼 의인이 되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겠는가. 그 비결은 오직 하나, 히브리 기자는 그것을 가리켜 '노아의 믿음'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힘은 위대합니다. 믿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보게도 하고 허물 많은 자를 불러 완전한 자가 되게도 하며 하나님과 멀리 떠난 자를 불러 동행하는 자가 되게도 합니다. 믿음의 최후 완성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데 노아의 증조부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불러 승천케 하셨고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 가족과 더불어 방주(方舟)에 들어가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면 노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겠는가. 히브리11:7절은 그의 믿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 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이제 이 말씀에서 노아의 믿음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
그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警告)하심을 받아..." 이렇게 히브리의 기자는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경고]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말은 그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참 믿음도 없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고 사도 바울은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가. 그렇다면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약의 사도 베드로는 큰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눅5:4,5절에 보면,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특별한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곧 말씀에 의지하여 움직인 사람이었음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같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 이 말씀은 흉용(洶湧)한 바다에서 바야흐로 파선지경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 떨고 있는 선원들에게 외친 그의 말입니다. 사도바울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고 환난 중에 건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것이 참 믿음이요 큰 믿음인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고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참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2)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는 믿음
히브리 기자는 노아를 가리켜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한 일을 꼭 보는 것인양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 중의 하나입니다. 고후5: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세상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홍수의 징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홍수가 나기까지 즉 창세기 6장에 이르기까지는 비(雨)라는 말도 또한 홍수란 말도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평화로운 날들이 매일 계속됐을 것입니다. 홍수에 대한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홍수의 경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의 경고를 꼭 그대로 믿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그것을, 꼭 그대로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보이는 현실, 매일 경험하는 세상일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내세(來世)의 일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사람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못 믿습니다. 보이는 육신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영혼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임을 믿는 믿음입니다.(고후4:18) 노아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것을 위해서 보이는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3) 노아의 믿음은 실행이 따른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매일 매일 방주를 짓는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참 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믿음은 반드시 그 행위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거기에 여러 신앙위인들의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 아벨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믿음은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동으로 그 믿음이 표현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행동으로 나타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노아의 믿음은 방주를 예비하는 일로 그 믿음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고요히 머리 숙여 우리의 믿음이 지금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4) 희생(犧牲)이 있는 믿음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그의 희생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 봅시다. 물질의 희생, 시간의 희생, 노력의 희생만이 아니라 많은 수욕도 참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겠는가. 참 믿음이란 언제나 희생이 따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벨에게는 순교의 피가 따랐고, 아브라함에게는 모든 친척과 본토(本土)와 재산을 버리는 희생이 따랐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역시 우리도 고요히 묵상해 보아야 할 일일 것입니다. 내 믿음은 무엇을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5) 자기의 가정을 구원한 믿음
"그는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고 히브리 기자는 말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은 믿음이란 개별적이란 점입니다. 믿는 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도 따라서 구원 얻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들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깊이 배워야 하는 진리의 하나는 곧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입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잘 믿으니 그 후손들이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기생 라합이 잘 믿으니 그 가정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가버나움의 가나안 여자의 간절한 믿음은 그 딸의 병을 고쳤고 백부장의 믿음은 그 종을 고쳤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부모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잘 믿으면 불신앙의 자녀들도 돌아옵니다. 어머니의 기도 못잊어 돌아오는 탕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우리의 가정을 구원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언제까지나 나 홀로 믿는 짝 믿음은 크게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고전7:14)
6)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한 믿음
히브리 11:7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했습니다. 여기서 "이로 말미암아"하는 말은 그가 방주를 예비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함으로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그가 방주를 지을 때 그것을 짓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이 방주에 들어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 있도록 이처럼 큰 방주를 짓노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죽으리라"고도 했을 것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실제 방주를 짓는 생활로써 증거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믿음인가. 이로써 그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노아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노아는 의인이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한 것은 행위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말합니다. 당시 죄악이 관영하던 세상 속에서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비웃든지 간에 그것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믿음 안에 의인된 우리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움이 있도록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말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면 영적 죽음이 됩니다. 노아는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경건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2. 노아는 순종의 시범자였습니다. 1백20년을 하루같이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청명한 하늘을 보면서 방주를 준비하고 식량을 비축하는 일은 분명 주위의 비웃음과 조롱으로 인해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를 인내와 믿음으로 수행한 순종의 인물이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순종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노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7:5)
3. 노아는 신앙의 시범자입니다. 일시적으로 믿는 믿음의 고백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온 세상이 타락할 때 자기 가족만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주변 사람이나 당시의 상황이나 여건이 노아의 신앙을 흔들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신앙이었습니다. (벧후2:5)
4. 노아가 술에 취해 수치를 드러낸 사건은 제아무리 훌륭한 인격자라도 자칫 방심하면 실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5.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예언하신 홍수는 120년 뒤에 실현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조건 죄에 대한 보응을 실행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과 기회를 주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
6. 노아의 방주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 지상 명령인 복음 전파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1-12)
7. 하나님은 전 인류를 홍수로 징계하실 때에도 당신의 구속사 자체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아와 그 가족을 남겨두어 인간 구원의 역사를 지속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남은 자 사상의 원형을 발견합니다.(스9:8)
8. 노아는 믿음의 후사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지, 정, 의의 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노아가 얻은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의 예표였습니다. 내게 노아의 믿음의 피가 흐르고 있는가를 생각해봅시다. 나는 과연 올바르고 흠이 없는 크리스천인가? 나의 가족은 내가 노아라고 하면 협조할까?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9. 하나님은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은 항상 의인들을 축복하십니다.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해 냈습니다. 방주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형이며,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돌보심을 알 수 있습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믿음과 순종의 사람 노아를 본받아 살기 원합니다. 지금 저와 저희 가족 그리고 교회와 국가에 일어나는 고난과 문제들을 영적인 눈으로 분별하게 하소서. 이 모든 일들이 주님의 선한 계획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옵소서. 이 땅에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시옵소서. 크리스천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서 이 땅이 주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장소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교육목표
0 노아의 신앙을 본받자.
0 오늘날 구원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자.
0 노아의 방주와 홍수 심판을 통해 얻은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하자.

2. 말씀: 순종하기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 순종해야 한다거나,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순종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창 6:22; 7:5 참조). 오늘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했던 노아에 대하여 살펴보고, 홍수의 심판과 노아의 방주를 통해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1) 노아 시대의 죄악상
노아 시대는 한마디로 죄악이 가득찬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였고(창 6:2 참조), 영적으로도 타락해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과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시며 한탄하실 정도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타락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도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7∼39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죄악 된 모습을 통해 이 세상의 마지막 때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은혜를 입은 노아
하나님께서는 당시 범죄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기로 계획하셨지만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온 세상 사람들이 죄악 된 삶을 살았지만,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 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대에 완전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노아가 ‘당세에 완전한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6:9 참조). 이는 노아가 죄가 하나도 없이 완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고 충분했다는 뜻으로,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음을 나타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덕적으로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 힘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 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항상 말씀과 기도 안에서 정직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셋째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아가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노아와 같이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힘써야겠습니다.
3) 방주를 지은 노아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 계획을 노아에게 알리시고, 그에 대한 준비로서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창 6:13, 14 참조).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는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경험이나 의지대로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시하신 양식(樣式)1)을 따라 방주를 지었던 것입니다(창 6:14∼16, 22 참조).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 자신의 이론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고후 10:5 참조).
둘째로, 노아는 방주를 짓는 동안 인내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노아와 같이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노아는 방주를 짓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기까지는 12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물질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방주를 짓는 일에 몸과 시간과 물질을 아까워하지 않고 전적으로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노아의 방주와 홍수 심판이 주는 교훈
첫째로, 하나님께서 방주를 직접 인도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성도들도 천국 갈 때까지 하나님의 성령께서 직접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방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어떤 홍수를 만나더라도 천국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홍수와 같은 시련을 당할 때 노아와 같이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위로’와 ‘평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홍수의 심판을 받아 아우성을 치며 죽어갈 때에도 방주 안에서 평안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과 역경이 오히려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 안에 들어온 사람은 죄악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 안에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문을 닫아 주신 것처럼, 우리가 구원의 방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들어오면 세상의 홍수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상의 문을 닫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은 구원의 방주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마음의 문은 세상을 향해 열어 놓고 있으면 세상의 홍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상의 홍수를 바라보지 말고 기도의 창문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배 위쪽에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홍수를 이기기 위해서는 홍수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늘로 향한 기도의 창문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방주 속에 먹을 것이 있었듯이(창 6:21 참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풍성한 생명의 양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요 4:32; 6:55; 10:10 참조). 세상이 모두 심판의 홍수 속에 잠겨 먹을 것이 없을 때 방주 안에는 먹고 마실 충분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동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홍수는 우리를 정결하게 씻기 위해 다가오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홍수가 지나가고 나면 오염된 대기가 깨끗해지고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도 다 깨끗하게 씻겨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과 환난의 홍수를 허락하신 것은 우리를 더욱 정결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을 깨닫고 모든 죄를 회개함으로 더욱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묵상 및 토의
0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 해보세요
0 나는 노아의 어떤 면을 닮고 싶은지 이야기 해보세요.
0 노아 시대의 상황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공통점을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0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 안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과 친척과 이웃이 누구인지 이야기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합심으로 기도합시다.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4. 찬송: (253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1.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참 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참 험하니 우리 몸에 매여있는 그 더러운 죄 짐을 하나 없이 벗어놓고 힘써서 들어갑시다
2. 이 세상의 많은 사람 큰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갈지라도 멸망길로 끝나니 세상 헛된 부귀 영화 모두 내어버리고 주의 말씀 순종하여 그 생명길로 갑시다
3. 구원의 문 열렸으니 주의 공로 힘입어 주저말고 들어가서 생명길로 갑시다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후렴]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길 갑시다

5. 성경연구:
1) 홍수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창 7:13; 벧전 3:20)
2) 누가 방주의 문을 닫아 주었습니까? (창 7:16)
3) 노아는 어떤 자세로 방주를 지었습니까?
4) 오늘날 구원의 방주는 누구일까요?

예화포커스(1- 50권)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가정, 감사, 건강, 교회,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본서를 통해 목회자들은 은혜로운 설교를 하게 되고, 성도들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새사람이 되어 늘 샘물같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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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태완 목사님 설교 예화 자료집(언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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