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영성훈련

[스크랩] 예배, 그 영광

힐링&바이블센터 2006. 5. 6. 12:58
 
진정한  예배..    영광의..                        룻 헤프린의 [글로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예수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주님은 우물 곁에 한 여인과 함께 앉아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많은 질문을 하였고 주님은 그녀에게 가장 큰 계시를 주셨습니다.

왜 이것이 가장 큰 계시라고 말할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만약 당신이 영광 안에 거하길 원한다면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예배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부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여인이 받은 이 계시가 오늘날 전 세계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성령님으로 인하여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항상 우리 자신을 예배자라고 생각해 왔을 수도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모임이나 집회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배”에 참석은 했으나 전혀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게시판에,"일요 예배 아침11시."라고 붙여 있습니다.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은 가지고 있으나 "예배"를 빠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우리는 이 모든 형식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매우 적은 수의 성도만이 진정한 예배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또는 육적 좌절감을 없애도록 도와줍니다.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의 완전함을 가져다 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차원을 끌어 올리고 계십니다.진정한 예배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사모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전엔 성령님께서 찬양에 관한 메시지를 말씀하셨습니다.찬양은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찬양은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수단입니다.우리는 노래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하므로 그의 궁전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찬양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일단 우리가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지 못한적이 많았습니다.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거나 예배의 흐름을 바꿔서 헌금시간을 갖거나 광고를 하거나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그곳에 닿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허락을 받기위한 모든 절차를 거칩니다. 드디어 허락이 떨어지면 입구의 아름다움을 흠모하며 백악관안으로 차를 타고 들어갑니다. 조금 지나면 대통령의 집무실로 안내가 되어지고 조금 돌아본 후에, “이제 됐다. 이제 집에가자. 그저 어떻게 생겼나 보고싶었을 뿐이야,”하고 말합니다. 백악관까지 와서 대통령을 만나는 기회도 저버리고 그저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지만 임재가운데로 들어가고 나면, “참 좋다. 이젠 가자. 다음에 또 뵈요,”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왜 임재가운데로 들어가기 원하나요? 모든 영광과 위엄의 왕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 특정한 장소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들”이 지어집니다. 그것은 좋은 일 입니다. 저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구별되어지고 봉헌되어진 장소인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우리 집과 연결되어있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 전에 우리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었고 그 곳에도 영광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주님만을 위해 준비된 장소에서 예배드리기 원합니다.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심령은 어느 장소 어느 때이든간에 주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주님과 만날 수도 있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매우 적은 시간을 주님의 임재가운데 거합니다. “우리는 열방을 위해 기도합니다. 또 우리는 주의 종들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프로그램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우리는 동네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 그분만을 위해서는 우리는 시간이 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끝이 없는 영원의 시간동안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찬양(PRAISE)하고 예배(WORSHIP)하고 사랑(ADORE)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일들을 시작합시다.
예루살렘 입성 당시에 나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나는 찬양과 예배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겉옷을 벗어 길게 펴서 주님께서 그 위를 지나가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베어 흔들어댔습니다. 모든 사람은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하며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나는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작은 나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내 바로 앞을 지나갈때까지 나귀는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멈췄습니다. 왕 중의 왕이시며 주 중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그 나귀 위에 앉아 계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바라보시며, “사랑한다, 룻,”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해요, 주님,”하고 대답할 때,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려내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어대거나 “호산나!”하며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며 엎드려 예배드렸습니다. 실제적으로는 내 주위에 많은 회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들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계속 그들의 나뭇가지를 흔들고 계속해서 “호산나!”하면서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실 때 영원의 모든 사랑이 내 영혼에 부어졌습니다. 이 순간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주님의 엄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의 왕 되심을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습니다. 엄위하심과 와되심을 알고 인정하며 엎드려 예배드렸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분주한 길 한 가운데서든지, 음식점에서든지,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 중에서도 주님과 단둘의 시간을 갖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당신과 주님과 단둘만의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복잡한 상황속에서도 나를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 주님과의 단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년 전, 우리 교회의 한 형제가 회중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이 회중은 열방의 모든 나라로부터 찬양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과연 그가 보좌로 나아갈 자리가 있을까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 보좌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보좌로 나아갔을 때에 그는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주변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주님뿐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미래의 그러한 회중으로서 주님 앞에 있다면 어떠할까요? 우리가 드리는 진정한 예배때와 같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지만 그들이 그 곳에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 홀로 주님과 주의 보좌 앞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게 예배가 얼마나 쉬운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오순절파 모임에서 흔히 “시온의 순간(HIGH MOMENTS IN ZION)”이라고 불리우는 체험을 했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임하는 예배를 종종 드렸습니다. 그러한 예배 후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재현시켜야 하는지 알고싶어 했지만 확실히 몰랐습니다.
나는 레이디 에스터가 후원한 런던의 로얄 알버트 홀에서 열릴 집회를 준비하며 영국을 돌며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교회에서 찬양과 예배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나중에 저에게 오셔서, “한가지가 걱정됩니다, 룻 자매님. 이러한 체험을 어떻게 재현시키죠?”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러한 경험이 많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모든 찬양 인도자들은 이러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매우 성공적이었어. 그 찬양에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했어. 영광이 임했구나! 다음에도 이런 예배를 또 드릴 수 있을까?” 특정한 찬양 위에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했었기 때문에 찬양 인도자는 똑같은 찬양을 다시 불러보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이 찬양곡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이러한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영광은 그의 임재 안에만 있습니다(THE GLORY IS IN HIS PRESENCE). 영광은 그의 임재입니다. 매우 축복받은 예배를 드리고 나면 목사님들은 똑같은 방법과 순서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지만 전과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배를 위한 그의 방식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찬양을 하던간에 우리가 주님의 방식을 따른다면 이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매번의 예배때마다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첫번째 비밀은 경배가 찬양과 어떻게 다른가 입니다. 내가 주님을 찬양할 때, 찬양을 하려는 의지를 드릴 것입니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갈 때 내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려고 의지를 드립니다. 그러나 경배는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배의 영이 집회 가운데 임하여야만 하며 당신 위에 임할때야만 경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복잡하지 않은 찬양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영적인 것은 단순합니다(Spiritual things are easy). 당신의 생각이 가사에 집중이 되어있을 때 당신은 생각하기에 매우 바쁘고 그로 인하여 영이 들림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기름부음이 증가 될 때 우리의 영이 찬양을 통해 들림을 받길 원합니다.

매우 간단한 후렴부분을 사용해 보십시오. 가사에 대한 아름다움과 개념 등의 복잡한 생각에서 떠나십시오. 그리고 가사가 많은 부분은 싱어들이 부르게 하십시오. 그리고 회중이 단순함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사랑함으로 예배 안에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도록 합십시오.
OHP는 가사를 모르는 처음 온 사람들에게 매우 도움이 됩니다. 만약 회중에게 OHP 가사가 계속 필요하다면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찬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쉬운 찬양을 할 때 예배의 영이 임할 것입니다.

이전의 어떤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아름다운 찬양과 경배 노래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의 영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해 보십시오.
나는 예배의 영이 내 어깨에 떨어지고 내 영 깊숙히 운행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러할 때 아무도 나에게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빠른 찬양을 한다 하더라도 내 영은 잠잠해 지고 그곳엔 나와 주님뿐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지요.
찬양 인도자가 기름부음이 증가되고 예배의 영이 임했음을 인식하면 재빨리 단순한 경배의 찬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다른 찬양보다 가사가 적은 것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경배할 때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자들은 자녀에 대해서, 가사일에 대하여 남편과 끝도 없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나 친밀한 순간에는 말이 필요 없어지죠. 마음 속에 몇마디 빼고는요.
이제 더 이상 가계부에 대해서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가사일에 대해서 또는 아이들 학교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로가 함께 있음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할 때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찬양으로 섬길 때에는(The ministry of praise) 예배 가운데 기름부음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경배로 섬길 때에는(The ministry of worship) 영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찬양은 예배의 기름부음을 가져오고, 예배는 영광의 기름부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들어갈때까지 찬양하듯, 주님의 영광을 원한다면 영광이 오기까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예배가 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깊은 예배를 원한다면 산 정상 에 오를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산 위의 4분의 1도 채 못가서 “이젠 예배 찬양(A worship song)을 부르자,”하고 말하며 찬양합니다. 우리의 입은 노래하고 있으나 과연 우리의 마음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배를 드릴 상황에 들어가기도 전에 예배하고자 합니다. 다른 때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매우 빨리 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울기 시작하고 깊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위엄과 왕되심을 느끼게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과 함께 옵니다. 과거에는 찬양에 있어서 경배는 매우 적은 부분만을 차지하였습니다. 부흥이 임할수록 찬양은 적게 경배는 더 많이 드리는 변화가 역사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 자원하는 노래(SPONTANEUOS SONG)를 부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사가 있는 가사를 사용하느 것이 더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치료하시며, 구원하시며, 침례를 주십니다. 주님은 위로하시며 보호하시며, 공급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배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아닌 주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Who He is, Not What He does). 우리가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려 할 때 침묵이 오랫동안 흐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동사가 포함 된 이전에 부르던 찬양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주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주의 임재 가운데로 되돌아 갑니다.

 

주님 자신을 예배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립니다. 만약 당신의 남편과의 관계가 돈을 벌어 오거나, 쓰레기를 치우는 역할만을 하거나 운전기사의 역할로써 끝난다면 이는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많은 부부관계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기초한 “동사”관계 입니다.
반면 많은 남편들도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요리를 잘하고, 집 청소도 잘하고, 아이들도 잘 키웁니다.” 당신이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가 당신을 위해 요리를 했습니까? 당신의 집을 청소했습니까? 아니면 아이들을 돌보았습니까? 그녀를 사랑하게 만든 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어…그녀의 파란 눈이었어요.” 그녀가 아직도 파란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어…그녀의 미소였어요.” 그녀가 아직도 그러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잊으셨나요?
“그녀의 성격에 있어서 뭔가 매력적이고 놀라운 것들이 있었어요.”
부인들 역시 남편과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들을 잊게 됩니다.
“아, 그가 서 있느 모습에 뭐가가 있었어요. 그의 강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것이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남편에 대해 생각했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는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가, 남편도 그녀가 어떠한 것을 하는가에만 생각이 기울어집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놀라우심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 신자들은 “주님,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시간이 조금 흐르면, “주께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를 성령님으로 채우셨고 내가 아플 때 치료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분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세금을 내야할 때 주님이 필요해요, 주께서 내게 돈을 주시거든요,” 그러나 주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찬양은 동사적 표현이 주입니다. 주님 자신이 누구신가에 대해 잊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한채 주님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면 오히려 주님을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더 큰 사랑과 예배의 관계와 예배의 관계를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천사들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구속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자신의 어떠하심 때문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알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지 그들이 구원을 받거나 치료를 받았다거나 성령으로 충만해졌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찬양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단지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는 누구이셨고 누구이시며 누구이실 것인가에 대해 알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의 거룩한 산에서 거룩하심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의 뜻은 우리가 그 어떤 것 보다도 예배자가 되길 원하여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면 당신과 제가 아버지의 마음에 반응하는 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예배하지 않고는 하루도 그저 지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은사 운동에 있어서 개신교로부터 온 사람들은 찬양에 있어서는 탁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강력한 예배자는 아닙니다. 구교도 신자들은 경배를 어떻게 드리는 지는 알지만 탁월한 찬양자들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것을 배우고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함께 엄청난 힘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가져오는 것은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주님의 영광이 온 땅을 덮는 것 입니다. 영광은 눈이 내리는 것 같이 임할 것입니다. 찬양자들은 예배의 영이 임할 때까지 찬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자들은 영광이 임할 때까지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 안에 영광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로 교회의 예배 가운데나 우리 가정에 영광을 이끌수도 있으며 사회와 도시 가운데에도 영광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먼저 소리 높여 찬양을 하고 우리의 목소리로 예배할 때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목소리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콤하게 순복하는 것을 배워갑니다.

내가 버지니아의 겨울 캠프 집회에서 오전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나의 어머니가 일어나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때의 부흥에 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길 마지막 때의 부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 이후 교회가 본 어떤 부흥보다도 거대한 부흥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강력하지 않습니까?
아주사 거리나 1948년에 임했던 부흥보다 더 클 것입니다. 오순절의 역사 보다도 더 클 것입니다. 오순절은 첫번째 열매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추수를 위한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부흥의 시작 곧, 하나님의 날의 시작에 와 있다고 믿습니다. 부흥으로 들어가는 길은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입니다(The that way to enter into that revival is through praise and worship).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지에 대하여 씌어진 책은 없었습니다. “오른 쪽으로 가다 왼쪽으로 가세요. 그리고 나서 직진하세요.”라는 방법으로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셩령 안에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어봤다면, 만약 우리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에 있어서 익숙해 지고 또한 편안하고 인정됨을 느낀다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주님의 숲
글쓴이 : 주님의 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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