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관상의 의미
관상이란 사랑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기다리는 것이며 만나는 것으로, 일치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관상의 항구적 상태는 천국의 삶이며, 이 세상에서는 짧게 경험된다. 따라서 짧은 관상적 삶의 풍요와 심화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관상가의 삶이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일치/합일”은 그리스도인의 초월적 욕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성령의 본질적인 성격이 일치 또는 합일이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의 합일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영과 한영의 합일을 이루시는 영이다. 따라서 특별한 수행자에게, 특별한 경험이나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이 되어야 한다. 합일 또는 일치란 무아(無我)의 상태나 무욕(無慾), 마음의 청명(淸明), 또는 신비적 황홀경과 같은 세속적 명상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합일의 일치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며, 완전한 자유이다. 관상의 가장 깊은 신비는 천국에서의 자아와 동일한 상태에 대한 표현이며, 무아지경의 혼의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혼의식이 그 특징적 모습이다(참고 : 혼의 환전에 대하여).
2.관상의 어원
관상을 말하는 라틴어 “contemplatio"는 헬라어 "테오리아(theoria)"를 번역한 말이다. 헬라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할 때 “그노시스(gnosis)”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da'ath를 번역한 것으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였는데,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지식을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4년)와 같은 희랍교부들은 그노시스라는 단어 대신에 테오리아(theoria, 관상)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테오리아는 신 플라톤 학파의 철학용어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지혜로운 이의 최상의 지적 활동인 “진리의 직관”이며, 이 직관적 인식에 의한 관상생활(bios theoretikos)로 행복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클레멘스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한 테오리아”로 말했듯이, 교부들은 “테오리아”라는 용어에 종교적 의미를 첨가하여 “사랑에 의해서 얻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라는 의미로 “테오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테오리아가 라틴어 “contemplatio"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따라서 관상을 신 플라톤 학파의 테오리아의 의미만으로 본다면, 동양의 선 수행이나 요가수행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도 있어서, 오늘날은 관상을 선이나 요가수행과 같은 차원으로 보면서 종교간 대화의 한 공통분모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관상수행이 현대에 들어와서 부각된 이유는 서구에 동양의 선과 요가가 알려지고 유행하기 시작한 것에도 그 원인이 있다. 현대적 관상가인 토마스 머튼(1915-1968)역시 종교간 대화의 한 통로로 관상과 선, 요가를 같은 차원의 수행이나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테오리아”적 수행이나 초월이 제 종교나 수행에 일반적이지만, 기독교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 관상은 언제나 십자가와 성령에 의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성령의 한영의 합일로 인하여 경험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관상이며, 경험적 실현이란 성령의 한영의 합일로 체험되는 하나님과 일치 또는 합일이다. 따라서 외적 수행법이나 관상상태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선과 요가와 일치하는 면이 있으나, 관상의 가장 깊은 신비적 실제인 “천국 그대로, 천국에서와 같은”의 의미로 볼 때, 제 종교의 수행은 기독교 관상의 그림자이다.
3.관상의 종류
인간의 능동성과 수동성에 따라 관상을 “습득적 관상(또는 수득적 관상)”과 “주입적 관상(또는 주부적 관상)”으로 나누기도 한다. 주부적 관상은 기도하는 이의 노력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습득적 관상은 기도하는 사람의 노력과 은총의 도움으로 경험되는 관상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관상은 주부적 관상만 있다. 그것은 기독교 관상은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득적 과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관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며, 그 과정역시 성령의 인도이다. 때론 수득적 과정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부적 관상이 경험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필요와 요청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러나 이런 관상체험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종결이 될 수 없고, 계속 이은 수득적 관상의 초청이기도 하다.
- 오네시모수도원 http://www.hiabbey.net/abbey_beg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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