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목회 자료실

[스크랩] 성결운동과 한국교회의 초기 대부흥

힐링&바이블센터 2010. 8. 15. 18:02

성결운동과 한국교회의 초기 대부흥

박  명  수(서울신대 교회사 교수,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서론
I. 한국의 대부흥운동의 배경  
II. 순회부흥사들의 한국방문
III. 선교사들과 대부흥운동
IV. 한국인 부흥사들과 1907년 한국의 오순절
결론
ABSTRACT


서론

많은 사람들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간주한다. 대부흥 이전에 한국인들은 정치,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한국인들은 일본, 중국, 러시아 같은 외국세력에 의해서 고통을 받았다. 한국인들에게는 기독교와 그 배경이 되는 미국은 믿을만한 대체세력이었다. 사회적으로 한국인들은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 공헌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대부흥 이전에는 기독교 입교의 동기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보다는 정치, 사회적인 요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흥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인들은 예수를 그들의 대속주로 고백했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따라서 대부흥은 한국교회의 신앙을 복음적인 신앙으로 전환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선교사들은 이 대부흥을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렀다. 즉 마가의 오순절 다락방 사건이 교회의 진정한 시작이듯이 1907년의 대부흥은 한국교회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이다.

1907년의 대부흥은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박사(Dr. R. A. Hardie)에 의해서 시작된 부흥운동 시리즈의 클라이막스이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함흥, 송도, 제물포, 서울로 이어졌고, 이 부흥운동의 주역은 하디박사였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의 클라이막스는 1907년 한국인 전도자 길선주에 의해서 주도된 1907년 평양의 대부흥이다. 따라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수년간에 걸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결과이다. 이 대부흥운동은 1910년의 백만구령운동으로 이어진다. 이 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놀랍게 성장했고, 그 결과로 자립을 이루는 교회가 많아졌다. 많은 선교사들은 이 대부흥을 현대선교의 역사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

한국교회사가들 역시 1907년 대부흥을 한국교회사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몇몇 교회사가들은 이 대부흥을 한국교회의 비정치화의 과정에서 생긴 현상으로 평가한다. 대부흥이 일어난 20세기 초는 한국사에 있어서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다. 여러 열강들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기회를 노렸고, 한국인들은 민족의 독립을 지키려고 했다. 초기 한국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가담되어 있었다. 일부 교회사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정치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여 비정치화작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대부흥운동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즉 독립운동에 가담하므로서 선교가 장애를 입을까 두려워서 비정치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흥운동의 결과로 교회가 비정치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흥이 의도적인 비정치화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부흥운동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이지 인위적인 조작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부 교회사가들 가운데에서는 교회사에 대한 지나친 정치/사회적인 해석은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시킬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앤더슨(Robert Anderson)은 오순절운동이 사회 하류계층의 사회적 박탈감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막스주의적인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이런 앤더슨의 이론은 제 2차세계대전이후에 왜 중산층의 사람들이 오순절운동에 참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교회사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석은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종교의 역사여야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 운동의 종교적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본 논문에서 필자가 주장하려는 논지는 이 대부흥운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수 많은 성결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에는 웨슬리안 성결운동이나 케직사경회와 같은 수 많은 부흥회들이 있었다. 이 부흥운동은 근본적으로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운동타잎의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의 중심 주제는 죄의 회개, 성결한 삶, 복음전도등이었고, 이것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이런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부흥이 한국에도 일어나기를 원했다. 수 많은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한국을 방문했으며,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을 한국에 소개했다. 한국의 부흥운동은 이런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부흥사들은 이 대부흥운동을 국제적인 현상으로서 설명했다. 남감리교의 저다인선교사는 당시 세계적인 부흥운동에 대해서 잘알고 있었다. 1905년 4월 [코리아 미션 필드]에 "웨일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놀라운 역사는 이미 영국과 호주에서 나타났고, 미국에서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앵글로 색손 계통의 신자들이 동일한 영적인 신경센타(common spiritual nerve center)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신경조직을 따라서 한쪽에서 나타난 하늘의 놀라운 능력은 인류 전체에게 놀라운 흥분과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저다인은 이어서 "한국의 대각성이 영국과 미국의 대각성과 동시대에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선교사들은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이 한국에도 반복되기를 원했다.

1906년 9월에 뉴욕의 장로교 목사인 죤스톤박사(Dr. Howard A. Johnston)가 웨일즈와 인도의 카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대 부흥운동을 보고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에게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세계적인 부흥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집회후에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한국교회의 성령충만에 대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1907년 대부흥은 바로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한국의 부흥의 소식은 곧 바로 전세계에 퍼졌다. 1907년 6월 [세계선교평론]지는 아프리카의 부흥을 언급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이와 비슷한 대부흥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어떤 특정한 인종이나 지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표징의 하나이다. 인도, 중국, 한국, 아프리카, 웨일즈, 미국등지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된다."

대 부흥운동의 국제적인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자는 초기 선교사들의 배경, 한국을 방문한 외국 부흥사들의 이야기, 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다. 특별히 지금까지 1907년의 대 부흥운동에 관한 연구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동양선교회에 관한 자료들을 첨가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대한 필자의 평가를 내릴 것이다.

I. 한국의 대부흥운동의 배경

한국 기독교는 19세기말 미국 부흥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당시 미국의 가장 유명한 부흥사는 무디이다. 무디의 메시지는 3R로 요약된다: "죄로 인한 부패(Ruin by sin),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Redemtion by Christ),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Ghost)." 또한 그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무디의 강조 때문에 19세기말에 세계선교운동은 큰 힘을 얻었다. 여기에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나오게 되었다. 무디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은 케직성결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무디는 케직사경회를 미국에 소개했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이런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고 있었다.

20세기의 부흥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디의 부흥운동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성결운동이다. 19세기말의 성결운동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칼빈주의적인 케직사경회로 나뉘어진다. 1867년 미국 뉴지지에서 시작된 성결증진을 위한 캠프집회연합회에 뿌리를 둔 19세기말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마음의 정결로 설명되는 성결론을 강조했다. 웨슬리안들은 이런 마음의 정결은 십자가의 보혈과 성령세례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운동은 곧 바로 감리교와 다른 교파들까지도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오순절운동을 만들었다. 구세군은 바로 이런 성결운동의 산물이다.

1870년대 미국의 성결운동가였던 스미쓰부인(Mrs. Hannah W. Smith)의 영국사역에 뿌리를 둔 케직사경회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승리하는 삶을 강조했다. 영국 복음주의의 센터역할을 한 케직사경회는 칼빈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결운동을 이끌어 갔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무디는 케직사경회를 미국에 소개했으며, 미국은 1913년부터 정기적으로 케직집회를 가졌다. 중국내지선교회의 허드슨 테일러는 케직사경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한국 개신교선교의 개척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셀라였다. 이 두사람은 1885년 4월 부활절에 함께 인천에 발을 디뎠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성결파인 구세군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열정적인 신앙형태를 좋아했기 때문에 "고함지르는 감리교도"라는 별명을 가졌다. 원래 독일개혁파신자였던 아펜셀라는 감리교의 집회에서 중생을 경험하고, 감리교인이 되었다. 왜 칼빈주의자가 감리교인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아펜셀라는 "나는 장로교에서는 할렐루야를 외칠수가 없었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성결부흥운동 타입의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릴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첫 번째로 일어난 가장 큰 부흥운동은 1904-5년 사이에 일어난 웨일즈의 부흥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은 웨일즈 장로교(정식명칭은 칼빈주의감리교회)의 젊은 신학도인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이다. 로버츠는 약 10년 가량을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는데 1904년 봄에 그 자신이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가졌다. 로버츠는 이런 경험을 한 후에 10만명을 전도하겠다는 비젼을 가지고 방방곡곡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후에 로버츠는 수 많은 집회를 인도했다. 그리고 그의 부흥운동은 현대 오순절운동에도, 한국의 대부흥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로버츠는 영적인 축복을 위한 네가지 욧점을 말했다. 첫째 지금까지 회개하지 아니한 과거의 죄가있다면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 둘째 우리 마음 속에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셋째 우리 자신을 성령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하며, 행해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주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웨일즈장로교회는 19세기 말 부터 인도 카시아(Khasia)지방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웨일즈 부흥의 이야기는 카시아 지방으로 퍼졌고, 카시아의 사람들은 웨일즈의 부흥이 인도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1905년 초 인도 장로교 총회가 모였을 때 이 소식이 전해졌고, 총회가 끝난 다음에 각 노회 단위로 부흥집회를 사모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여기에 붙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퍼졌고, 전체 교인들이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봄에 여러 노회들이 다시 모여 회무를 보다가 은혜가 내려 회무를 중단하고, 금요일, 토요일, 주일까지 기도와 찬양에 힘썼다. 특히 주일 예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참석하여, 자리가 협소하여 밖에 서있게 되었다. 이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종일 집회에 참석하였다.

특별히 이 집회에서 젊은 여자의 간증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원래 말주변이 없었던 이 여인은 간증을 망설였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침묵은 곧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불순종이라고 생각하여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 보잘 것 없는 여인의 간증은 그날 모인 2000여명의 신자들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었고, 카시아 지방에는 놀라운 전도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들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헌신과 봉사와 전도에 힘썼다.

19세기의 미국에서 감리교회는 어떤 교파들 보다 더욱 부흥회적이었다. 20세기 초의 한국교회의 대부흥도 하디나 저다인 같은 감리교선교사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아울러서 우리는 한국을 책임지고 있던 초기의 감리교 감독들도 거의가 성결/부흥회 타잎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감리교회의 감독들은 워런(H. W. Warren, 1887), 굳셀(D. A. Goodsell, 1891), 말라류(W. F. Mallalieu, 1892), 포스터(R. S. Foster, 1893), 나인드(W. X. Ninde), 조이스(I. W. Joyce, 1896-97), 크랜톤(Earl Cranton, 1899), 무어(D. H. Moore, 1901-4), 해리스(M. C. Harris, 1905-1916)등이다. 이 감독들 가운데 굳설, 말라류, 조이스, 무어는 1901년 시카고에서 열린 성결총회(General Holiness Association)의 발기인으로 서명했다. 이 모임은 성결부흥사들의 친교와 성결운동이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이 모임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신학적 입장이 표명되었다.

드루신학교의 총장을 지낸 포스터 감독은 가장 중요한 성결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성결운동을 감리교 내에서 확산시키고자 노력했고, 성결론에 관한 책들을 여러권 저술하였다. 그중에 [기독자의 정결](Christian Purity)는 아직도 성결운동 가운데 고전으로 불리우고 있다. 말라류 역시 [구원: 중생과 성결의 조건들](Salvation, or The Condition of Regeneration and Sactification)과 같은 성결서적과 부흥운동을 위한 가이드 북인 [부흥운동의 이유와 방법](The Why and How Revivals)을 냵다. 또한 말라류는 수 많은 성결서적들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조이스 역시 성결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동양선교회의 창시자인 카우만이 선교사를 지망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성결교회는 바로 이 동양선교회의 산물이다.

해리스 역시 성결 부흥사였는데 그는 1874년 부터 일본 하코다테에 처음 발을 내 딪은 선교사였다. 그후 해리스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일본인 선교를 위한 감리사로 임명되었다. 1904년 해리스는 한국과 일본 감리교를 위한 선교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해리스가 미국에 있을 동안인 1888년부터 1889년에 그는 태평얀 연안의 일본인을 위해서 큰 부흥을 일으켰다. 이때 사사오 데쓰사브로와 몇몇 일본인들이 "마음의 정결"을 경험했다. 이 일본인들은 후에 일본 성결운동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고, 또한 한국성결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해리스는 한국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한국과 일본을 책임지는 감리교감독이었다.

이상에서 보는 것 처럼 한국교회는 성결부흥운동의 배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운동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런 배경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것이다.


II. 순회부흥사들의 한국방문

대부흥운동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많은 외국 선교사들과 부흥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에서 일하는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게 영적인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대부흥은 1903년 여름 원산의 조그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남감리회의 여선교사 메리 화이트(Mary Cutler White)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화이트는 중국에서 일하는 선교사로서 휴양차 원산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화이트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제안하였고, 하디를 강사로 세웠다. 이 집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역에 성령의 능력이 결핍되었음을 인식하고,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였다.

이 일이 지난지 얼마 안되어 원산에는 세계적인 부흥사이며, 스칸디나비안선교회의 창립자인 프란손(F. Franson)목사가 방문하였다. 프란손은 원래 무디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별히 그의 부흥회인도 방법을 따랐다. 또한 프란손은 중국내지선교회의 창립자인 허드슨 테일러와 기독교연합선교회를 만든 심프슨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테일러와 심프슨은 다같이 성결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다. 프란손은 상해에서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 버크월(H. O. T. Burkwall)을 만났는데 그의 주선으로 원산에 와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이미 원산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란손은 1903년 10월 원산에 도착하였으며, 이미 붙은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프란손은 일주일 동안 원산에 머물렀으며, 이곳의 장로교회에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회가 연합해서 집회를 가졌다.

하디는 프란손이 자신에게 어떻게 전도집회를 인도하는가를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란손이 가르쳐 준 것은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었다. 프란손은 하디에게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라고 권고했다. 특별히 하디에게 인상 깊은 것은 프란손이 집회의 마무리에 큰 소리로 "아버지여!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할 것입니다. 당신은 해야만 합니다"(Father! Thou canst do it, Thou wilt do it, Thou shalt do it)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 기도는 집회를 압도하였다. 하디는 이제 막 부흥운동이 시작되려는 싯점에서 하나님께서 적절히 프란손을 보내주셨다고 믿었다. 그뒤에 하디는 자신의 교회에서 프란손의 스타일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이때부터 하디는 한국 전역에 부흥의 불길을 붙이게 되었다.

1904년 5월 몇몇 일본 부흥전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일본 기독교연맹의 이름으로 러일 전쟁중에 한국과 일본 기독교인들이 서로 협조하기 위해서 왔다. 이들은 일본 감리교목사 혼다(후에 감리교 감독)와 동양선교회의 나까다 주지, 그리고 재한 일본인 선교를 위해 파송받은 기하라 세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웨슬리안으로 성결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이 중에 특별히 나까다는 미국의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일본의 무디라고 불리웠다. 나까다는 서울, 송도, 평양, 선천, 수원, 공주등 한국 전역을 다니면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나까다는 한국교회에 재림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성결의 복음은 별로 강조되고 있지 않았다. 나까다는 특별히 성결을 강조하였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기꺼이 이것을 받아 들였다. 나까다의 집회의 결과로 몇 명의 한국인들이 동양선교회가 동경에 세운 성서학원에 입학하였고, 그 결과 오늘의 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또 다른 방문은 뉴욕의 장로교목사 존스톤 박사(Dr. Howard Agnew Johnston)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존스톤은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세계적인 부흥운동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영국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보고자 그곳을 방문하고, 이어서 역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인도 카시아 지방을 방문했다. 그후 중국을 거쳐서 1906년 9월 장로교선교사들이 연례회의를 하고 있을 때 서울에 왔다. 서울에서 존스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한국에도 같은 부흥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후 그는 평양에 가서 장로교인들을 향하여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였다. 이 집회에서 존스톤은 누가 새로운 부흥운동의 주역이 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때 손을 들고 "저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바로 1907년 부흥운동의 주역이 된 길선주였다. 그 후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신자들은 한국교회의 대부흥을 위해서 기도했다.

1907년은 대 부흥운동의 클라이막스였다. 1907년 1월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났으며, 이 부흥에서 부터 전국적으로 놀라운 불길이 번져나갔다. 이와 비슷한 때에 카나다 장로교 해외선교부 맥케이 박사(Dr. R. P. Mackay)는 아시아 순방을 계획하였고, 만주에서 일하던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고우포스(Jonathan Gorforth)가 맥케이를 동반하게 되었다. 고우포스 역시 허드슨 테일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심프슨과 고든(A. J. Gordon)의 성결과 신유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봄 매케이와 고우포스 일행은 한국의 8곳의 중요한 선교지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보았다. 특별히 고우포스는 이 부흥을 중국에 가서 전했다. 이것으로 인해서 중국의 만주와 기타 여러곳에서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스콧틀랜드 장로교선교사인 웹스터(James Webster)는 고우포스의 부흥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오래된 것이었다. 우리는 우선 한국교회를 휩쓸었던 부흥운동에 대해서 들었다. 이 부흥운동 때문에 그 은자의 나라에 기독교가 급격히 발전했으며, 개종자가 놀랍게 늘어나고, 자립하는 교회가 많아지며, 학교와 대학의 숫자가 증가되고, 멀지않아 몇 년아래 모든 교회가 자립하게 될것이다."

고우포스는 한국의 대부흥을 전세계에 전한 사람이다. 그는 [성령이 한국을 휩 쓸 ?]라는 1907년 대부흥에 관한 팜플렛을 냵다. 그는 한국의 부흥을 모방하여 중국에서 대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며, 카나다에 가서도 같은 방식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고우포스는 카나다 장로교회의 총회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총회의 대표들은 고우포스의 설교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맥케이박사는 "나는 그런 유익을 가지고 모국에 돌아온 다른 선교사를 알지 못한다"고 찬사를 보냈다. 고우포스는 케직성결대회에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미국 케직성결대회의 지도자인 트럼불(Charles Trumble)은 고우포스를 프린스톤에서 열린 그의 집회(Victorius Life Conference)에 초청하여 한국과 만주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 간증하도록 했다. 한국의 대부흥은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성결한 생활이라는 케직집회의 내용과 매우 유사했다.

1907년 5월 또 다른 성결그룹이 서울에 도착했다. 세사람의 동양선교회 소속 선교사와 이 선교회가 세운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두사람이 한국에 와서 성결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복음전도관(후에 성결교회가 됨)을 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보다 깊은 영적 생활과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영적인 생활의 깊이는 먼저 성령이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마 3: 12) 죽정이를 태우고(죽정이를 단지 모아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깊은 죄악의 쓴 뿌리를 뽑고, 잘못된 습관의 둥지를 틀고 있는 가지를 자르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오직 이렇게 할 때 만이 영적 생활은 항구적으로 깊어질 것이다."

또 다른 성결전도자 그레고리 맨틀(Gregory Mantle)이 1907년 9월 한국을 방문했다. 맨틀은 영국 런던에서 활동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지도자로서 영국의 성결단체인 스타 홀 선교회(Star Hall Mission)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동양선교회에서 한국에 최초로 파송한 선교사인 존 토마스(John Thomas)는 이 스타 홀 선교회 출신이었다. 맨틀은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 일본, 한국 등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와서 감리교 선교사인 존스(Herber Jones)의 통역으로 전국을 다니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또한 그는 한국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 제 3회 연례 총회에서 오전과 오후 경건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연합공의회의 공식 기관지인 [코리아 미션 필드]는 "그의 설교는 깊은 영적인 감화를 갖고 있으며, 또한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원 높은 삶을 살며, 주의 사역을 위해 보다 깊은 헌신을 하도록 호소했다. 확실히 맨틀씨가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낮은 차원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낮은 기준과 낮은 이상을 전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을 울리는 말씀들로 인해 많은 유익이 있었다.

1908년 9월 한국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 제 4차 연례 총회에서는 성서연구를 위한 주강사로서 일본성결운동의 지도자인 벅스톤(Barclay F. Buxton)을 초청하였다. 벅스톤은 성공회 소속으로 일본에 온 영국선교사로서 영국의 여러 성결단체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벅스톤은 일본성결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벅스톤은 일본전도대를 조직하여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사사오 데스사브로 같은 일본성결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은 이 벅스톤 밑에서 공부하였다. 벅스톤은 한국에 와서 한국인들이 열렬히 마음의 순결과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는 것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았다. 이런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위하여 선교사들은 벅스톤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는 대로 1907년을 전후해서 수 많은 순회 부흥사들이 한국을 다녀 갔으며, 이들은 한국인들에게 성령 충만과 성결한 삶을 가르쳤다. 따라서 1907년 대부흥운동은 이런 세계적인 성결 부흥운동과의 관계아래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III. 선교사들과 대부흥운동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카나다 출신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목사이다. 하디는 원래 토론토의 의학도로 구성된 YMCA에 의해서 8년간의 계약을 맺고 한국으로 파송된 독립선교사였다. 처음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일했으나 1892년 부터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고 진료소를 세워 전도와 의료사업을 병행했다. 그러던 중 계약 기간이 만료될 때 마침 남감리교 선교부에서 의료선교사의 자리를 제안해 1898년 부터는 남감리회 소속으로 바꾸어 선교를 계속했다. 하디는 원산에서 1909년까지 일했다.

한국교회의 대 부흥운동은 1903년에 시작되었다. 하디는 원산에서 최선을 다하며 의술을 베풀며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디는 그 원인이 성령의 능력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하디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마치 악령의 세력들이 연합하여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것 같았다. 뿐만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확신도, 이미 이루어 놓았다고 생각했던 사업도 파괴하려고 덤벼들었다. 내가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나의 사역에 결과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내 자신 속에 있는 장애물들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점점 더 뚜렷하게 영적인 능력의 결핍을 인식할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이 실패에 대한 충분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능으로도 아니요, 힘으로도 아니요,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디는 1903년 여름에 원산에서 선교사들의 사경회를 인도했고,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성령 충만을 경험했으며, 마음 속에 평화와 기쁨을 맛 보았다. 이후부터 그의 사역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디는 여러해 동안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죄를 자각하고, 회개하고, 새로운 열매를 맺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하디는 그의 사역과 관련하여 이런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열매를 보지 못했다. 하디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았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은 별로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디가 자신이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자신의 원산교회 회중들에게 수치와 고뇌에 찬 얼굴로 자신의 교만, 닫힌 마음, 신앙의 부족을 고백할 때 원산교회의 회중들은 처음으로 죄를 자복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실적으로 보게 되었다. 하디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세 주간 동안 그들은 하디의 생활 속에서 진정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한 생생한 교훈과 "자신의 백성을 모든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되었다. 하디는 이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이 경험 후에 하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프란손 박사를 원산에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 하디는 프란손으로부터 부흥회를 인도하는 법을 배웠다. 이후부터 하디는 순회 부흥사가 되어 1907년의 대부흥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프란손이 떠난후 하디는 곧바로 자기의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집회에 대한 하디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이 집회의 전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은 이미 죄를 뉘우치고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던 사람들의 선례를 따랐다. 집회 도중 두 세 차례 신자들의 죄책감이 너무 심하여 설교를 계속할 수 없었다. - - - 모든 간증들은 그들이 이전에는 종교를 개인적으로 경험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 - - 성령의 죄를 자각하게 하는 역사에 따라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느꼈고,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 - - 죄를 다루는 이들의 놀라운 방법은 내가 아는 한 오용되지 않았다. - - - 이것은 성령이 참으로 내주하시는 사람마다 순종해야할 방법이다.

또 다른 남감리회 선교사인 저다인(J. L. Jerdine)도 하디의 뒤를 따라 부흥회를 인도했다. 저다인은 하디와 함께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원산에서 일하며,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다. 저다인은 1906년 1월에 함흥의 카나다 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저다인은 "조용하고, 신사적인 방법으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성경의 직접적인 인용이 많았다. 죄를 회개케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서 더욱 놀랍고도 묘사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들이 있다. 그것은 사죄의 확신, 온전한 순종에서 오는 행복, 하나님에 대한 찬양, 성령의 세례이다." 함흥장로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카나다 선교사는 감리교선교사의 부흥집회의 결과를 보고 매우 놀랐다. "오늘 오히려 우리는 장로교의 신앙과 감리교의 기쁨(Presbyterian faith and Methodist joy)으로 충만한 우리 교회를 보면서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휴 밀러 형제와 함께 '당신은 감리교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흥운동을 통해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서로 협력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저다인은 또한 목포에 있는 남장로교 선교사 프레스톤(J. F. Preston)으로 부터 초청을 받아서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그 결과도 놀라왔다.

저다인은 단지 부흥사였을 뿐만이 아니라 부흥운동에 대한 관찰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을 앵글로 색손족에 의해서 영국 웨일즈에서 시작한 전세계적인 부흥운동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웨일즈에서 시작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거룩한 은혜와 능력은 이미 영국,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경험되어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앵글로 색손족이 공통적인 신경조직센타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신경조직을 따라서 하늘의 능력이 한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나서 다음에 전체 민족으로 번지고 있다." 저다인은 이어서 한국에서의 부흥은 다른 아시아 지역의 부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은 동양의 상황에 맞는 부흥운동이 나타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제공할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국적인 부흥이 이웃 나라들의 사역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1903년부터 원산에서는 매해 여름 8월에 소규모의 기도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주로 여선교사들이 참여했는데 그 명단은 힌즈(Annie Hinds, 후에 침례교선교사 펜익(M. C. Fenwick)의 부인이 됨), 캐롤(Arrena Carroll, 후에 콜리어(C. T. Collyer) 부인), 노울스(Mary Knowles, 후에로스(J. B. Ross) 부인), 하운셀(Josephine Hounshell, 후에 남장로교선교사 매큐첸(L. McCutchen) 부인) 그리고 매컬리 (L. H. McCully, 카나다 장로교)등이다. 매컬리를 제외히고는 모두 남감리교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후에 남편을 따라서 교파를 옮겼다. 이들 가운데 힌즈는 고든의 성서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성결과 전천년설을 강조했다. 노울스는 조지아주 인디아나 스프링에서 열린 성결집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성결파였으며, 종종 자신의 성결체험을 강증하기도 하며, 동시에 성결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 여성들은 1903년이래 원산 기도모임의 주요멤버였으며, 영적인 각성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다. 이 모임에 관해서 한 보고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기도회는 매우 유익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에는 결코 볼수 없었던 밝음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보게 해 주셨다. 우리의 죄를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모든 참석자들의 한가지 소원은 죄악의 두려움을 알고,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보시는 것 처럼 그렇게 분명히 죄를 인식하고, 그래서 우리가 부름받은 그 부름에 합당한 사역을 하도록 더욱 잘 준비하는 것이다."

원산에 이어서 송도도 중요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송도는 남감리교회의 선교구역이었다. 송도 부흥의 시작은 1904년 2월과 3월에 하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하디가 떠난 뒤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크램(W. G. Cram) 선교사가 계속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크램은 1898년 웨슬리안 성결계통의 애즈베리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설교는 신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중생과 성령의 증거를 강조했다. 크램은 철저하게 전통적인 부흥운동(old time revival)을 반복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사람들을 강단에 초청하여 죄를 자복하게 하고, 신앙의 결단을 하게하는 제단초청(altar call)도 번번히 행했다. 그램은 복음의 핵심은 죄에서 용서받는 사죄의 은총과 부패한 마음에서 정결케 되는 성결의 은총이라고 주장하며, 이 은총을 체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부흥운동이라고 보았다: "나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분명하게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 부흥집회를 갖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결과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갈급한 백성들 속에서 그의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능력(His saving and cleansing power)을 계속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크램의 말 가운데서 전형적인 웨슬리안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1904년 3월 하디는 서울로 올라와서 남감리회 무스(J. R. Moose)선교사가 책임을 지고 있던 잣골교회에서 부흥집회를 계속했다. 서울의 대부분의 남감리교인들과 다른 신자들이 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집회에서 "죄에 대한 참회가 너무 분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치를 무릎쓰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였으며, 훔친 물건들은 배상하였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처음으로 죄가 무엇이며, 용서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 - - 이 집회는 성령이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진정한 죄의 자각과 구원의 확신을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머리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마음은 성령의 정결케 하는 능력을 알지 못한채 그냥 옛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무스 부부는 성결운동가였다. 무스목사는 종종 자신은 성결을 가르치는 데에는 부인보다 낫지만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데에는 부인이 더욱 낫다고 말했다. 또한 무스는 부흥운동의 효용성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에게 있어서 선교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영적인 생활을 심화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한 번 이루어지면 수백, 수천의 이방인들이 교회에 몰려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부흥회이며, 이 부흥회 안에 영적 성장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가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회이며, 한국의 모든 사역자들은 이전의 어떤 때 보다 열심히 기도하여 다가 오는 설날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며, 그래서 이것이 한국 오순절의 진정한 시작(the real beginning of Korea's Pentecost)이 되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한국에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한 1905년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여러교파의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니까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부흥운동 가운데서 발전한 것이다. 이 모임의 주요한 목적은 한국교회에 진정한 부흥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해서 이 모임은 매해 기도달력을 만들어서 배포하였는데 매해 정초는 한국의 오순절을 위한 특별 기도일이었다.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은 이 기도달력을 따라서 열심히 기도했다. 1907년의 한국교회의 오순절은 바로 이 기도의 응답이다.


IV. 한국인 부흥사들과 1907년 한국의 오순절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은 처음에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한국인들의 손으로 넘어왔다. 아마도 대부흥운동의 첫 번째 한국인 부흥사는 정춘수일 것이다. 정춘수는 양반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느나 너무 악명이 높아서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고, 그래서 서울 주변에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원산으로 도망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기독교인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정춘수는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 집 주인의 전도로 그는 성경을 읽게 되었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남감리회 의료선교사 로스박사(Ross)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그러던 중 정춘수는 하디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진정으로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정춘수는 1906년부터 남감리교의 본처전도사(local preacher)가 되었다. 저다인은 1907년의 사역보고서에서 정춘수와 몇몇 한국인 사역자들이 부흥회를 효과적으로 인도한다고 평가했다.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사역에 있어서 한국인 교역자들이 점점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들은 선교사들이 인도하는 부흥회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 부흥회를 인도하는 방법들을 배웠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적인 삶이 매우 깊고, 열심있는 기도와 헌신적인 사역 때문에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부흥사는 길선주이다. 그는 특별히 1907년이후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교회의 대부흥은 1907년 정초에 평양에서 일어났고, 길선주가 여기에서 주역이었다. 하디와 존스톤이 1906년에 평양을 방문해서 이미 일어나고 있던 부흥운동에 대해서 소개했다.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은 이곳에서도 원산이나, 영국 웨일즈에서와 같은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 만큼 성령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선교사들은 정초에 특별기도주간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의 결정사항이기도 했다. 기도회가 끝나고, 1907년 1월 6일 부터 겨울사경회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사경회가 시작되기 전날 밤, 평양의 모든 장로교인들이 장대현교회에서 모여 특별집회를 가졌다. 이때 모인 숫자는 약 1500명이었다.

그러나 이 집회는 생동감이 없었고,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지 않았다. 예배당의 지붕은 놋쇠로 뒤 덮혀있는 것 같았으며, 모든 사람들은 답답해 있었다. 이 집회의 강사는 길선주장로였다. 그는 이 교회의 장로요, 뛰어난 설교가요, 얼마있지 않으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장로교회 최초로 목사가 될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길선주장로를 바라 보았다. 길선주는 강단으로 나와서 설교를 하는 대신 "나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

이렇게 길선주가 자백을 하자마자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무거운 장벽은 무너지고 성령이 놀라웁게 역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선주의 뒤를 이어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저녁 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길선주는 이렇게 은혜의 시간이 진행되는 동안에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성령이 오셨네"와 같은 찬송을 인도하면서 계속 부흥의 열기를 북돋웠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정익로장로는 길선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처음부터 그것은 길선주목사의 얼굴이 아니었다. 길목사는 한 때 소경이었고, 지금도 부분적으로 소경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을 갖춘 얼굴이요, 순결과 거룩으로 불 타오르는 얼굴이다. 그것은 더 이상 길선주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와 자복을 외쳤다. --- 여기에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었다. --- 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죄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 잡았다. 어떻게 하면 이 죄의식을 떨쳐 버리고 여기에서 탈출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도망쳐 나갔으나 전 보다 더 강한 갈등과 수심에 찬 얼굴로 돌아왔다. 길선주목사는 더욱 영감에 차서 세례 요한과 같이 청중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다. --- 우리는 신비스럽고 두려운 힘을 느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또 한 번의 기도의 물결이 전체 회중을 뒤 덮었다.

죄를 고백하고, 남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그것을 배상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성령이 임재했고, 놀라운 하나님의 평화를 맛 보았다.

매우 감명깊은 모습이 길선주목사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길선주목사는 밧줄로 자신을 묶었다. 이 밧줄은 우리를 얽어매는 죄악의 힘을 표현한다. "그는 밧줄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으나 밧줄이 너무 단단해서 빠져 나올수 없었다. 하지만 길선주목사가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자 밧줄은 풀리고 결국 그는 빠져 나오게 되었다. 그는 '할렐루야! 나는 자유다'고 말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죄에서 해방되는 가를 설명해 준다. 죄의 고백후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 기쁨은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결코 꿈도 꾸어 보지 못했던 기쁨이다. 부흥집회에는 이런 희열이 존재했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대부흥은 숭실대학으로 연결되었다. 이 학교 학생들이 장대현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역사는 1907년 봄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학교교사들이 모두 모여서 개학시에 학생들이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봄 학기가 시작되자 학생들의 마음 속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은혜의 불길이 퍼져서 학교당국은 첫주간을 정규 교과과정을 중단하고 성경공부와 기도회로 보냈다. 그리고 저녁시간은 전교생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모든 학생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몸부림 치며 엎드려 회개의 기도를 했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의 머리와 손으로 마루를 쳤다. 문자 그대로 악마가 그들을 집어 삼킬 것 같았다. 그들은 고뇌 가운데 몸부림 쳤다. --- 죄의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것은 마치 지옥을 열어 놓은 것 같았다. 살인, 간통, 그리고 방화, 술 주정, 절도, 강도, 거짓말에서부터 증오, 멸시, 시기에 이르는 온 갖 불결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역겨운 일들인가? 어떤 인간적인 권력도 이런 것들을 밖으로 들어내어 고백하게 할 수 없다. 많은 한국인들도 그들이 들은 것에 대하여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봄학기의 시작에 평양의 장로교신학교 학생들은 이미 놀라운 간증거리를 가지고 학교에 돌아왔다. "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자 마자, 그들은 서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 장차 한국교회의 목사가 될 이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 죄악을 태우는 성령의 불을 경험했다." 평양신학교의 첫 주간 역시 부흥회 주간이었다.

평양의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서울의 신자들도 과거 몇 년동안 진정한 부흥을 위하여 기도했다. "진정으로 가난한 마음과 갈급한 심령은 하나님 자녀의 특징이다. 마음의 정결과 성령 충만은 그들의 기도제목이다." 이런 가운데 평양의 부흥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고, 서울의 교회에서 대표들이 평양에 와서 길선주를 강사로 초청하였다. "그의 설교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 충만했다. 그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빠르고 신속했으며, 날센 검보다 더 날카로왔다. --- 사람들은 엎드려 죄로 인해 괴로워 했다. --- 교회의 지도자들 조차도 자신들이 지은 가증할 만한 죄 때문에 괴로워 했다. 훔친 돈과 물건들은 주인들에게 돌려 주었다. --- 이와 비슷한 일들이 길선주 목사가 인도한 많은 교회에서 나타났다."

거의 15년동안 성서 번역과 저술활동에 종사했던 이창직도 이 부흥회 소식을 들었다. 이창직은 한국인들은 원래 과장하는 습관이 있고, 또 그것들을 종종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창직도 길선주목사의 집회에 참석하여 단번에 무릎을 꿇고 길선주목사에게 나아가 안수 기도를 요청했다. 그는 길선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를 자세히 보았고, 그와 같은 방에 있기도 하였다. 그는 온 밤을 세워가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 다음에 하루에 3, 4번 설교를 했다. 그는 사람들 손에 이끌리어 여기 저기로 옮겨 다녔으나 결코 피곤해 하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죽음을 이긴 예언자의 말씀 같았다. 아무도 그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우리는 1908년 겨울 성결전도자들에 의한 또 다른 부흥이야기를 갖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복음전도관(성결교회의 전신)은 1907년 5월 시작되었는데 정빈, 김상준, 이장하등이 초기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열렬한 성결파 부흥사들이었다. 그들은 북을 치며 노방에서 전도를 하는 동시에 그들을 전도관으로 초청하여 능력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의 집회는 서울의 여러교회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많은 선교사들과 한국신자들이 복음전도관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그들의 죄를 자백하고 중생과 성결의 체험을 하였다. 이 부흥회는 서울의 여러 교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에서도 연동교회 신자들이 전도관에 와서 큰 은혜를 받았다.

이 성결부흥사들의 소식은 널리 퍼져서 많은 교회들이 이들을 초청하여 사경회와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카우만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 그들은 서울의 가장 큰 교회의 하나에 초청을 받아서 특별집회를 인도했다. 이 교회를 책임맡고 있는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복음전도관은 위대한 축복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생생한 간증으로 무장한 사역자들을 풍성히 갖고 있으며, 이들을 인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난 주 1주일 동안 계속된 특별집회의 마지막 날에 많은 신자들이 오순절 날에 경험했던 것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글을 쓰는 동안에 그들은 서울의 또 다른 큰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밤마다 그들은 매우 분명하게 성서적인 성결을 직선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기에 함께 역사하고 있다.


결론

20세기 초에 전세계적으로 수 많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4년의 웨일즈 부흥, 1905년의 인도 카시아 부흥, 1906년의 미국 아주사 거리의 부흥, 1907년의 평양의 부흥, 1908년의 중국 호난성 부흥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19세기의 성결부흥운동에 뿌리를 둔 20세기 초의 부흥사들은 전세계를 다니며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이런 세계적인 부흥운동 가운데 많은 부흥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한국에도 같은 부흥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한국신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크게 고무되어 한국에도 같은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한국에 대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한국의 대부흥운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성결부흥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도 이런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한국을 책임지고 있던 대부분의 감리교 감독들은 성결운동의 지지자들이었다. 나까다와 카우만 같은 성결파들도 한국을 방문하여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1907년과 1908년 각각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연례집회의 강사로 초청받았던 맨틀과 벅스톤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중요한 지도자들이다. 대부분의 장로교선교사들도 무디나 고든, 그리고 피어슨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거의가 다 케직성결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03년 원산을 방문하였던 프란손, 1907년 평양을 방문하였던 고우포스도 다같이 케직성결운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대부흥운동의 주요한 특징은 죄의 자각, 회개, 배상, 그리스도의 보혈, 마음의 청결, 성령의 능력과 충만,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순종한 결과인 평화와 기쁨등 전형적인 성결-부흥운동의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의 성결과 성령의 능력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마음의 성결에는 죄의 확신, 회개, 배상, 마음의 청결, 전도등을 포함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에는 전도와 사역을 위한 영적인 힘을 말할수 있다.

이 대부흥운동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케직성결운동의 영향을 다같이 받고 있다. 대부흥운동의 주창자라고 말할 수 있는 하디, 저다인, 크램등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다. 이들은 대부흥운동이 웨슬리안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마음의 정결이라는 전형적인 웨슬리안의 멧시지였다. 감리교선교사인 노블부인은 이 대부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슬프게도 대부분의 한국신자들이 머리의 회개(head conversion)는 이루었으나 마음의 회개(heart conversion)은 이루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마음의 회개를 이루었고, 이것을 이룬 사람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자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 계통의 부흥사들을 제외하고는 부패성의 제거나, 이차적인 은총으로서의 성결을 분명하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것들은 보다 급진적인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웨슬리안이나 케직 다같이 전도를 위한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세계복음주의 운동에서 성령세례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다. 웨슬리안에게 있어서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의 이차적인 은총인 성결과 동의어이다. 여기에 비하여 케직계통에게는 성령세례는 주로 봉사를 위한 능력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순절파에게는 성령세례는 방언을 일차적인 증거로 하는 성령체험을 말한다. 또한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성령세례는 유아세례시나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성령세례를 말할 때에 이런 마지막의 경우로 이것을 사용한 경우는 없다. 이 당시의 부흥사들은 성령세례에 대한 특별한 정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신앙생활의 성숙을 위하여 성령세례가 필수적인 것이며, 이것은 성결과 능력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ABSTRACT

"The Korea Pentecost": A Study on the Great Revival of 1903-1910
in Relationship with Contemporary Worldwide Holiness Revival Movements

Myung Soo Park, Ph. D.
Professor of Church History,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mspark@stu.ac.kr

My thesis in this paper is that the Revival of the 1907 was the result of world-wide holiness revival movements of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Early twentieth century revivalists travelled and ignited revivals around world. In this context, many revivalists visited Korea, told of worldwide revival movements, and encouraged such revivals in Korea. Many missionaries and native leaders of Korea were influenced by these international revivalists and prayed that God might work in the hearts of the Korean people. As a result of these prayers, the Great Revivals began.

The Pioneers of Korea mission, Underwood and Apenzellar had been under the influence of holiness revival movements. Most Methodist bishops in charge of the Korea mission field maintained the Wesleyan Holiness position. Many Wesleyan Holiness revivalists such as Nakada and Cowman conducted revival meetings from 1904 to 1907. Mantle and Buxton, guest lecturers of 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during annual meetings of 1907 and 1908, were definitely Wesleyan Holiness revivalists.

Most Presbyterian missionaries went to the mission field under the influence of D. L. Moody, A. T. Pierson, A. J. Gordon and others, who had a strong relationship with the Keswick holiness convention. Franson, who visited Wonsan in 1903, and Gorforth, who visited Pyengyang in 1907, had worked with Keswick holiness preachers.

The main characteristics of the Great Revival were typically holiness-revivalistic ones: conviction of sin, repentance, restitution, the blood of Christ, the cleansing of the heart, the power, or fullness or baptism of the Holy Spirit, peace and joy as the result of surrender to Christ and evangelism. We can summarize these characteristics into two categories: holiness of heart and power of the Holy Spirit. The revivals emphasized the conviction of sin, repentance, restitution, and the cleansing of the heart, which can be categorized as holiness messages. Also the revivalists stressed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for evangelism and ministry.

출처 : 사무엘의 사역마당
글쓴이 : samuelp 원글보기
메모 :

'사역 공간 > 목회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평양 대부흥운동  (0) 2010.08.15
[스크랩] 평양 대부흥 운동  (0) 2010.08.15
성령의 성화 사역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  (0) 2009.01.24
크리스마스 감동 글  (0) 2008.12.27
성탄의 의미  (0) 2008.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