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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양 대부흥 운동

힐링&바이블센터 2010. 8. 15. 18:07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중)]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기사입력 : 2005.05.12, 17:53

역사적 사건에도 간혹 시공을 ‘패러디’하여 표현할 때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한국교회 ‘오순절 사건’으로 부르는 것이다. 더하여 그 운동의 중심지인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또한 평양 중에서도 부흥의 진원지였던 장대현교회를 ‘마가의 다락방’으로 부르는 것도 좋은 예이다. 비록 기독교의 역사 이해가 유일회성을 근간으로 하고 하나님이 주재하는 역사에서 같은 사건이 절대로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진다 해도 이 ‘유비’는 절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의 시작을 오순절 성령강림의 공동체 체험에서 비롯하였다고 자주 일컫듯 한국교회사의 진정한 원형은 이 부흥회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 선교시대 각 선교지에서 이룩한 선교 성과는 서구 기독교의 표층인 근대문명의 확대로 추산되었다. 선교사들은 효과적인 선교방법으로 대개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고 선교 대상자들에게는 더 나은 문명의 시혜가 주어졌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혹은 공동체적 차원으로 신앙고백이 이루어지고 기독교회가 하나둘 조직되어 나갔다. 이는 한국의 초대교회에도 예외가 없었고 극동의 선교지 중국 일본은 물론 그밖의 여러 선교지에서 공통으로 보여지는 근대 선교모형이다. 이러한 선교구도는 때로 큰 성과를 거두어 교세 확장을 보이고 기독교 문화의 확산에도 기여하였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는 민족적 요구,곧 국권 상실 위기라는 절대 절명의 ‘컨텍스트’에서 기독교가 민족을 구할 현실적 방도라는 기대감으로 민족교회의 외형이 일찍부터 갖추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외형적 전파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기독교는 하나의 ‘문명’이요,‘이데올로기’에 그칠 소지가 다분하였다.

1903년 원산 선교사부흥회를 시작으로 한국 초대교회에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회개운동을 통한 성령강림의 체험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미남감리회 한국 주재 선교사였던 하디(R A Hardie)는 “성신이 나에게 충만하신 심증을 가지고 나의 부끄러움과 교만과 포악과 불신을 자복하니 회중은 죄의식과 회개의 체험을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순전한 신앙으로 내가 성신의 은사를 받았음을 알려주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하디의 자복과 회중의 회개운동은 그대로 평양에 전해졌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는 더욱 강력한 성령 강림의 체험과 회개의 은총으로 충만하였다. 여기에 참석했던 정익로 장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털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그랬다. 평양대부흥운동은 그 이후 한국교회사에 나타나는 여러 부흥회 즉,1920∼30년대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의 부흥회,혹은 광복 후나 6?25전쟁기,심지어 1960∼70년대의 대중집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강력한 회개운동이 수반되어 있었다. 이는 한국의 첫 성령강림의 사건은 그것이 개인적 경건에 가깝다 하더라도 높은 도덕률과 회개운동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특징을 의미한다. 참으로 건강한 신앙공동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1907년이 없는 한국 초대교회는 그 생명력을 얻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 1907년이 말 그대로 몰역사적이고,‘엑스타시스’의 신비적 체험에만 머물렀다면 한국교회사의 원형이나 출발점이 되기 어렵다. 성령의 체험과 통회와 회개가 교차되는,그것도 대규모 공동체의 동일한 체험 확산은 신선하고 지속적인 한국교회 힘의 원천이 된다. 한국교회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닌 해를 짚어내라면 한국교회사가 대다수는 1907년을 꼽을 것이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가져온 곳: [아름다운 삶]  글쓴이: sams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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