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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양 대부흥운동

힐링&바이블센터 2010. 8. 15. 18:07
평양 부흥 당시 세계적 물결의 하나
박명수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박명수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4년의 웨일즈 부흥, 1905 년의 인도 카시아 부흥, 1906년의 미국 아주사 거리의 부흥, 1907년 평양의 부흥, 1908년 중국 호난성 부흥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1907년 6월 <세계선교평론지>는 아프리카 부흥을 언급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이와 비슷한 대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고 쓰여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어떤 특정한 인종이나 지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표징의 하나이다. 인도, 중국, 한국, 아프리카, 웨일즈, 미국 등지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된다.”
19세기의 성결부흥운동 에 뿌리를 둔 20세기 초의 부흥사들은 전 세계를 다니며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이런 세계적인 부흥운동 가운데 많은 부흥사들이 한 국을 방문하였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한국에도 같은 부흥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한국 신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크게 고무되어 한국에도 같은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그 결과로 한국의 대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刊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14호’(2001)
논문 <성결운동과 한국교회의 초기 대부흥>에서 발췌

미래한국  2002-06-24 오후 9:55:00  
대부흥운동의 진행과정
1903년 원산기도회
1904년 개성·평양·서울·제물포 사경회
1905년 개성·원산 신년사 경회, 장감 연합사경회,상동교회 청년 구국기도회
1906년 평양선교사 사경회, 서울 북장고교 신년 사경회, 이화·배재학당 신년부흥회, 목포 부흥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신학교, 숭실중·대학교, 숭덕여학교,
평양여자 고등학교 등의 부흥회
1907년 전국적인 부흥운동 (개성·선천·서울
광주·의주·대구·제물포)
1909년‘백만 인을 그리스도께’: 백만인 구령운동 확산
1908~1910 중국교회 대부흥운동(장사성, 호성난)
대부흥운동의 사회적 영향
이 부흥운동의 효과는 매우 훌륭했다. 수천 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 보려고 문의했고,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쟁이, 살인, 도박, 광신적 유학자들, 수천 명의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 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것은 모두 다 지나가고 말았다.  
-1908. 북감리교 선교사 해리스 M. C. Harris.

대부흥운동은 조선사회의 무너진 사회와 윤리를 재정립하는데 기여했다. 사람들은 비로소 축첩, 노비 소유의 죄악을 깨닫게 되었고 사당을 헐고, 첩과 소실을 정리, 노비를 해방시켰다. 남에게 물질적으로 해를 끼친 경우에는 그들을 직접 찾아가 변상 해 주었다.
선교사들은 ‘절제 및 사회개혁’ 원칙을 제시, 주일 성수, 금주, 금연, 결혼, 노름 및 마작, 노예와 인신매매를 금지 했고 조혼, 교육, 청결, 흡연 등의 주제로 집회를 열어 한국인들을 교육시켰다. 선교사 저딘(Gerdine)은 이 부흥의 역사를 가리켜 ‘ 민족 각성운동(the national awakening)’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동양선교회 선교지인 <전보>(1909년 1월 )에는 ‘놀라운 변화’라는 제목 아래 기독교가 한국 여성들을 변화시킨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는 한국남성 들에게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도박, 음주, 구타, 아내와 싸움 등 잘못된 죄악들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남편 은 아내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며, 바느질을 잘 할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기 시작한다.”
축첩제도, 조혼, 부모에 의한 정략 결혼을 금지했다. 누구의 딸이거나,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등으로 불리던 여인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흥운동은 학교의 증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에게 신앙과 도덕교육을 시켜줄 것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을 에드워드 밀러는 <코리아 미션 필드>에서 ‘배움에 대한 갈망’(Hungry to Lean)으로 표현했 다.
1906년 6월에 208개의 학교가 이듬해 같은 달에 344개로 160개나 늘었으며, 학생 수도 3,456명이 7,504명으로 늘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의 경우 1907년 11월 현재 신입생 255명을 받아 전체 367명으로 늘어났으며 이것은 전년의 160명과 비교할 때 압도적으로 늘어난 숫자이다.
당시 생겨난 교육기관들은 운동회, 연설회, 토론회를 적극적으로 장려, 자주·자립정신에 입각해 민 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이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3·1 독립운동이 촉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 에 되돌아간 양심적인 돈
원산에서 열린 첫 부흥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윤승근은 과거 20년 전 주전소(鑄錢所)에서 일하면 서 4만 달러에 달하는 임금을 초과하여 받은 죄가 생각났다. 그는 바로 나를 찾아와 4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건네주면서 그것을 탁 지부에 되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돈이야말로 ‘한국 정부에 되돌아간 가장 양심적인 돈’일 것이다.
1904년 하디의 선교보고서

부흥운동 기간 평양 지역 학교의 증가
                   &nb sp;           1902 1905 1907
학         교        수 35    62   106
교                    사 35    64   121
학                    생 592 1,802 2,583
자립하는 학교수             30    60   106
자료:Annual Report, PCUSA(1907)
미래한국  2002-06-24 오후 9:49:00  
출처 : 사무엘의 사역마당
글쓴이 : samuel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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