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예수의 성령론적 구원론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0:15

새 시대를 위한 구원론: 예수의 성령론적 구원론
    

 

김영봉(협성대, 신약신학)


 

 

1.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여러 가지의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론일 것이다. "예수 믿어 구원 받으라"는 것이 그 동안 교회가 외쳐 온 메시지의 중심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얻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구원"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독론이 달라지고, 인간론과 윤리론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
   사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도 그 핵심은 구원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가톨릭 교회가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강조하였던 반면, 루터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였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i)이라는 구호는 단순히 구원론적인 논쟁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신학과 실천의 모든 분야에 파급 효과를 끼쳤다. 루터의 구원론은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재편하도록 요구했고, 가톨릭 교회는 그것을 거부하고 루터를 파문시켰다. 이로써 개신교회가 시작이 되었다. 결국, 신구교의 나뉨은 구원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구원론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느냐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의 모든 분야에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조차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필자가 SMU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신학대학원 학생회에서 스리랑카의 한 스님을 모셔서, 불교에 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스님은 불교의 구원론을 말하기에 앞서서, 청중들에게 "여러분이 받았다는 구원이라는 것이 뭡니까?"라고 물었다. 그 질문이 떨어진 후, 한 동안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겨우 한 사람이 일어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데, 그는 구원을 설명하기는커녕, 자신이 구원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음을 횡설수설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필자도 그 당시, 그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때, 필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이라는 말을 가장 자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충격적으로 확인하였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너무 귀에 익도록 들어 왔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것에 대하여 당연히 알고 있으려니 전제를 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요구받을 때, 우리는 자주 당황하게 된다. 분명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의 한 저자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 3:15)고 했는데, 적어도 구원에 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혹은 구원에 대하여 안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알고보면, 그들의 이해가 너무 편협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오직 죽은 후에만 유효하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의 일관된 주장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다. 성서는 구원을 현재의 경험으로 이해를 한다. 미래에나 있을 어떤 변화를 기대하면서 이를 악물고 현실을 버티는 것은 성서가 말하는 구원론과 다르다. 물론, 구원이라는 것은 미래에 완성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천당 가는 것"으로서의 구원론은 성서의 구원론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구원을 예수의 보혈에 연결시킴으로써 "대속"(代贖)으로 이해를 한다. 물론, 예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증언은 신약성서 안에서도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학은 이러한 대속적 구원론에 주로 의존하면서, 구원을 속죄와 연결시켜 설명해 왔다. 이러한 구원론은 죄책감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데 있어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구원론에 있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2천년 전의 한 청년의 죽음이 나의 죄에 대한 대속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대속적 구원론이 한국 교회에 너무나도 편만해 있기 때문에, 이 구원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이 논리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좀처럼 어렵다. 교권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구원의 신비라고 말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보혈의 공로를 외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큰 의문부호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전통적 구원론이, 우리가 "구원자"라고 부르는 예수의 사상에는 얼마나 합하는가? 아니, 예수의 선포와 사상의 빛에서 볼 때,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필자는 이러한 질문이 구원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가 구원에 대하여 무엇을 말했는지를 살펴 보려 한다. 그럼으로써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혹은 구원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얼마나 타당한지를 검토해 볼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검토는 새로운 시대를 앞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의 메시지를 좀 더 설득력있고 포괄적인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2. 예수는 죽으러 왔는가?--예수의 목적

   앞에서도 말했지만, 개신교의 구원론은 대속적 구원론에 근거해 있다. 대속적 구원론으로 볼 때, 예수는 죽으러 왔다. 예수의 삶의 목적은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어야만,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 대속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다른 활동은 의미가 없었다. 오직 죽음만이 의미가 있었으며, 그 죽음을 통하여 죄 많은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위 "대속의 말씀"은 그 동안의 신학사에 있어서 다른 말씀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막 10:45).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의 진정한 말씀으로 여겨져 왔는데, 예수의 진정한 말씀으로 보다는, 대속적 구원론에 대한 근거 구절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이러한 식의 표현은 바울의 편지에서 수 없이 발견할 수 있다. 예수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해결되고,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과연, 이 진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만일, 예수가 죽으러 왔고, 죽음으로써 구원을 완성한 것이라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여러 가지의 질문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에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예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초대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이라고 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써 구원이 완성이 되었다면, 부활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바울은 어떤 근거에서 부활이 없다면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했는가? 또 다른 질문은,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예수가 죽기 전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시켜 믿게 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불완전했는가? 그들이 받은 구원과 십자가를 믿고 얻는 구원은 다른가?
   결국, 대속적 구원론에 근거하여 문제를 풀다 보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죽음으로써만 구원자가 되며, 따라서 그는 죽으러 왔다는 주장은 이런 점에서 신학적으로 문제(theologically problematic)가 된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문제(historically problematic)가 된다. 앞에서 인용한 대속의 말씀을 제외한다면, 예수가 죽으러 왔다는 증언을 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요한복음 안에 대속적 구원론을 의미하는 말씀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역사적 말씀이라기보다는,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죽으러 왔다는 것은 복음서의 역사적 증언에 일치하지 않는다. 대속적 말씀도 예수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해석한 말씀이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주신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목적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예수는 무엇을 하러 왔는가? 우선,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원"이라는 말을 예수가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직 한 번, 삭개오에게 한 말씀(눅 19:9)에서만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예수의 어휘가 아니라 누가의 어휘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를 구원자라고 부르고, 그가 행한 사역을 "구원의 사역"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의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대 교회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예수의 사상을 찾기 위해서 "구원"이라는 단어에 얽매인다면, 오도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구원"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을 위해서 그의 공생애를 헌신했는가? 공생애 동안에 그가 추구했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대해여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아주 명쾌하게 요약해서 대답을 해 준다. 예수의 공생애의 모든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회개와 믿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마 4:17//막 1:15).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전승들을 옳게 파악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요약한 것이 옳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누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선포를 소개하고 있지만(눅 4:16-21), 그 이후의 내용을 읽어보면, 그도 역시 예수의 선포를 하나님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죽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죽음을 목적으로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다. 그는 이러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실천하였으며, 그러한 그의 삶이 당시의 유대인 권력자들의 반감과 적의를 사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생긴 하나의 사건이었고, 예수는 그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그러한 해석의 결과가 앞에서 인용한 대속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확인하는바, 대속의 말씀은 예수의 삶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예수의 "죽음 해석"이다. 그것이 설사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근거하여 예수가 죽으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3. 하나님 나라의 의미

   그렇다면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중적인 차원에서, 천국은 내세의 공간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상태를 가리킨다는 오해가 있어 왔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할 만한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마태가 사용하고 있는 "천국"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렸던 유대인들의 습관을 반영한다.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천국"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의미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따라서 이 두 용어는 동의어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표현은 거의 없고,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표현이 압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예, 마 5:20)는 표현이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도 역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간다는 뜻이지, 저 우주 한 가운데 있는 어떤 공간으로 간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을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역사의 현장에 뚫고 들어오는 어떤 실체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물론, 복음서 안에도 죽어서 가는 내세의 천국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예, 마 5:12). 하지만 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현상을 가리킨다.
   이미 오래 전에, 독일의 신약학자인 구스타프 달만(Gustaf Dalman)은 예수의 말씀들의 갈릴리 아람어적 배경을 연구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나라"를 의미하는         의 배후에는     라는 아람어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사용한 말이 바로 이 "말쿠트"였는데, 갈릴리 아람어에서 이 말은 "영역"이나 "백성"을 의미하기보다는 "다스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달만의 이 발견 이후, 예수 연구가들은                    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번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 혹은 "하나님의 통치"라고 번역을 해 왔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예수의 말씀은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공간이, 마치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듯이, 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 다스림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예고했고, 그 동안 준비해 왔던, 그런 종말론적인 다스림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후 인간의 세계를 끊임없이 다스려 왔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9-11).

여기서 말하는 "장차"는 언제인가? 유대 종말론에서는 이 "장차"를 종말로 이해를 하였다. 그리하여 종말론적인 구원의 사건이 시작될 때, 하나님의 특별한 다스림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였다. 지금이 종말의 때이며,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백성들을 강한 팔로 다스리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다스림 아래로 들어 올 것을 요청하였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 다스림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천국의 삶이 죽고 나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의 유대 종말론자들과 예수가 달랐던, 매우 주목할만한 차이점이었다. 당시의 유대 종말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고, 그 나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 나라는 가시적인 형태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눅 17:21) 현존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구원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예수가 생각한 구원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구원의 삶이란 그러한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삶에로 사람들을 초청하여 들였다. 이것이 그의 사역의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굳이 죽지 않아도 구원은 가능했다. 죽음을 당하기 이전에도 그는 온전한 의미에서 구원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다.

4. 하나님 나라와 성령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질문을 약간 바꾸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예수는 어떻게 확신하고 그런 선포를 했는가? 혹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시작되었다고 믿으라는 말인가?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였다(마 16:1-4//막 8:11-13). 하나님의 다스림을 어떤 가시적인 표적을 통하여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종말론적인 다스림을 시작하셨는가?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된 어떤 동기가 있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우리는 예수께서 발설한 한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비난하고 중상 모략하는 적대자들에게 대답하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눅 11:20).

지금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이 말씀이 예수께서 실제로 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누가는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의도하는 바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의 질문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수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 종말론적인 통치를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슬쩍 보여 주신다. 즉, 하나님은 지금 성령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구원을 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은 지금 성령을 통하여 귀신을 내어 쫓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다스림을 펼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라는 말은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가 세례 요한과의 연대를 끊고 자신만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치유 능력의 폭발로 보는 견해를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다가올 진노에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던 예수가,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의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그것이 종말론적인 성령의 역사로 인식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종말의 때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 주셨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종말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에게 성령을 부어 줌으로써 카리스마적 사역을 시작할 것이라는 예언이 유대교에 많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저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일찍이,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종말론적인 성령의 귀환"을 믿고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즉, 당시의 유대인들은 최후의 예언자들 이후에 하나님의 성령은 더 이상 활동하기를 멈추었으며, 이 성령은 종말의 때에 귀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말이다. 만일에 이 믿음을 예수가 알고 있었다면, 자신에게서 성령이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활동하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믿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 성령이 자신을 종말론적인 구원 활동의 초점으로 삼았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그로 하여금 세례 요한과의 연대를 중단하고, 자신의 특별한 사역을 출발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자신은 스스로를 카리스마적 인물로 인식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출발점으로 하여, 이제 하나님의 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의 현존을 선포하였고, 그 현존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요청하였다. 이것이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였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하나의 말씀을 밝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말씀이다. 모든 죄, 심지어는 인자를 거역하는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씀(마 12:31-32//막 3:28-29//눅 12:10)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이 되어 왔다. 이것도 역시 예수의 진정한 말씀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용서받을 수 없느냐는 데 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한 그 동안의 해석을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심하게 오해되어 왔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위의 논의의 빛에서 보면, 이 말씀의 의미가 비로소 밝혀진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성령을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 성령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 준 마지막 은혜의 선물이므로,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된다는 뜻이다. 성령과 더불어 사는 것이 구원이라면, 성령을 거부하는 것은 구원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가 스스로를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인식을 하였고, 사람들을 성령과 더불어 사는 삶 속으로 인도하여 들이려 했다면, 왜 복음서 안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그렇게 드물게 나타나느냐는 데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 기이한 현상을 해결해 보기 위해서 노력한 학자들이 몇 사람 있다.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필자는 이 현상을 기독론의 상승의 결과로 본다. 즉,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쓸 때, 이미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인식이 꽤 높이 상승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신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되었고, 고백되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이 보여 주듯이, 예수는 이미 하나님과 성령과 함께 동등한 신적 위치를 부여받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를 단순히 "성령자"(Spirit-person)로 그리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들이 전승되고 저작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 억압되었을 것이다. 지금 복음서 안에 담겨져 있는, 성령에 관한 전승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생존한 얼마 안 되는 자료들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예수에게 있어서 성령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에 충분하다. 즉, 후대 전승자들과 복음서 저자들이 성령에 대한 전승들을 제외시키려고 했지만, 그 전승은 이미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 주는 것이 요한복음의 성령론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의 공생애 동안 성령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3장 5절에서 성령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예수 자신의 사역에 대한 말씀은 아니다. 공생애 동안에 예수는 신적인 인물로서,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다. 성령이 역사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가 들려 올림을 받은 후,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의 사역을 계속해 나가는 분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                , 14:16)다. 이 말은 예수도 역시 보혜사라는 뜻이다. 예수와 성령은 보혜사라는 똑 같은 역할을 하는 두 인격이다. 예수가 먼저 와서 활동을 하고, 성령은 예수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둘은 절대로 합쳐질 수 없다.
   요한복음은 이렇듯, 신적인 존재인 예수와 성령을 완전히 분리해 놓고, 예수가 성령 충만하여 활동했다는 전승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은 예수를 완전한 신적 존재로 승격을 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요한복음은 예수 전승으로부터 성령이 억압되는 과정의 끝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후대의 삼위일체의 교리를 위한 기초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러한 기초에 의하여, 고대 교회가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정한 후,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예수"를 상상하지 않았다. 예수는 성령과 구별된 성자 하나님으로 인식을 하였다. 기독론이 높아진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됨으로써 성령론적인 기독론과 구원론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결국, 예수를 성령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초대 교회의 경향이 고대 교회로 이어졌고, 그 결과 오늘의 우리의 구원론이 성령론적인 차원을 잃어버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는 성령을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을 선포했고, 그 스스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활동을 함으로써,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보여 주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과 만나는 것을 가리키며, 구원의 삶이란 하나님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전승 과정에서 "성령의 삶"으로서의 구원 이해가 점차 사라지고, "대속"으로서의 구원 이해가 지배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구원의 의미가 매우 편협하게 축소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구원론을 대속론으로 이해를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공헌이다. 유대인들은 본래 죄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예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캐어 물었고, 그 결과, 십자가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선교를 하는 데에는 좋은 효과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원론은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이방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누가복음 저자는 대속적 구원론을 억압하고 성령론적 구원론을 회복시키려는 작업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성서 저자들의 대부분은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로 인하여 성서적 구원론은 대속적 구원론으로 고정되었고, 그 결과 교회는 오늘까지 그 구원론에 매어 있는 것이다. 대속적 구원론이 유대적으로 이해된 "하나의 해석"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구원론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속적 구원론에 의해서 그늘에 가려졌던 성령론적 구원론을 회복해서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를 숙고해 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5. 회개: 구원에 이르는 길

   예수에게 있어서 구원이 성령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면,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이 종말론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면, 이러한 성령의 활동 속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복음서 저자들은 가장 먼저 "회개하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사역에 대하여 인간이 취해야 하는 최초의 행동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그 동안 구원을 대속으로만 이해를 해 왔기 때문에, 회개라는 개념도 그런 맥락에서 설명되어 왔다. 회개란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이해가 되어 왔다. 사실, "회개"(悔改)라는 우리 번역도 그런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배경이 되는         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이 단어는 원래     라는 전치사와 "마음"을 의미하는     가 합쳐진 단어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는 "마음을 돌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의 회개와 거의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다. 회개를 이렇게 이해를 하고 보면, 성령의 활동을 보고 첫 번째 해야 하는 일이 "마음을 돌이켜 죄를 뉘우치는 것"이라는 뜻인데, 두 가지의 사건이 서로 뚜렷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같지 않다. 뭔가 오해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히브리어적인 배경을 보면, 문제는 해결된다. "메타노이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인데, 이것은 본래 "원점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행동"을 가리킨다. 자신이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서,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가 회개할 것을 요청할 때, 바로 이런 의미를 의도했다는 것은 의심에 여지가 없다. 회개를 요청했던 예수는 구체적으로 죄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 혹은 삶의 양식 전체를 관심하고 있었다. 그가 요청한 것은 단순히 어떤 죄에 대하여 뉘우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삶의 방향을 수정하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삶의 양식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온 그 동안의 삶의 방향과 양식의 어떤 것이었으며, 예수께서는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바꾸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그 동안 하나님 없이 혹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삶은 그 자체가 멸망이요, 죽음이었다. 소위 의롭다고 자처하던 사람들이나 죄인 취급을 받고 살던 사람들이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을 등지고 혹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집의"라는 소유격이 부분적 소유격(partitive genetive)이냐 설명적 소유격(explicative genetive)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수의 의견은 후자다. 즉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집 가운데서 일부 잃어버린 양"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 즉 잃어버린 양"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마치 양이 목자를 등지고 곁길로 감으로써 잃어버리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등지고 감으로써 잃어버린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다스리기 시작했음을 선포하면서, 잃어버린 양들을 다시 모으기 위해서 나섰다. 따라서 각자 자신의 고집대로 흩어져 유리하던 양들은 예수의 선포를 듣고,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서 목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것이 회개요, 회개가 가져다 주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었다.
   회개를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대속적 구원론에서 생각하던 회개보다 훨씬 큰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오심을 통하여 요구되는 새로운 양식의 삶으로 들어오라는 요청이다. 과거의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라는 요청이다. 주목할 것은 마가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고 요약하고 있지만, 마태는 "회개하라"는 요청으로 끝나고 있다(4:17)는 점이다. 마가는 회개라는 개념을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보완하기를 원했지만, 마태가 보기에는 회개라는 개념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마가는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회개라는 의미가 주는 셈어적인 의미를 충분히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개념을 첨가했다. 하지만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회개라는 개념의 셈어적인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부연하지 않았다. 회개라는 개념만으로도 예수께서 요청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새롭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삶의 방향과 양식을 바꾸어 그 활동 안으로 뛰어 듦으로써,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러한 삶을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은 회개였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었다. 현존하는 성령께 자신을 열고 그 활동에 자신을 내어 던지는 것을 통하여 그는 구원의 삶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죄에 대한 용서는 이미 그 이전에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 주면서, 그 이전까지의 모든 죄를 무상으로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예수께서는 그 용서를 선포하셨다. 이제 과거의 모든 잘못을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으니, 돌아서서 하나님의 영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것이 예수의 선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선포는 복음이었다. 그렇게 크게만 느껴졌던 죄의 문제가 무상으로 용서되었다는 것도 기쁜 소식이요, 이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다스림을 시작하셨다는 사실도 기쁜 소식이었다. 이제 요청되는 것은 그 복음을 믿고, 돌아서서 그러한 새로운 삶의 양식 속으로 뛰어 드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복음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요청하였다. 그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다. 회개해야 구원받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회개하고 그 성령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었다. 그러므로 회개는 곧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행동이다. 대속적 구원론에서 말하듯이,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의 은혜는 이미 주어졌다. 누구에게든지 "선행적으로" 주어졌다. 이제 그러한 새로운 구원의 현실에 응답하여 자신의 삶을 고치는가에 따라서 그 구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그것과 무관해 질 수도 있다.
   예수의 이 복음을 당시의 종교인들은 "값싼 것"을 여겼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부당하게 보였고, 회개로써 성령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너무 쉽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복음을 거부하였다. 예수의 설교의 전제와 내용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구원에 이르기를 고집하였다. 반면, 기존의 종교의 틀 속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에 환호하였다. 그냥 두었다면, 평생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무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도 기쁜 소식이었고, 더 이상 문자에 묶이는 삶이 아니라 성령과의 자유로운 삶 속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도 기쁜 소식이었다. 그래서 소위 "땅의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에 환호하였고, 그들이 환호하면 할수록, 종교인들은 예수를 더욱 더 거부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결국 잃어버린 자로서 그냥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들이 죄인 취급을 하던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격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가는 회개라는 개념을 믿음을 보충하려 하였다. 이것은 이방인 독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개라는 개념이 좁게 이해하고 있는 우리의 독자들에게도 역시 마가의 방법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회개의 개념을 보완하는 것으로서 믿음이란 성령의 현존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행동을 가리킨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서 우리의 삶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성령의 현존을 믿고, 그의 인도하심에 인생을 맡기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행동이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 자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 병자가 예수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믿고 그에게 자신을 맡겼다는 뜻이다. 이렇게 맡김으로써 그는 성령에 의하여 병을 치료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결코 자기최면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 가면 내가 치료될 수 있을거야"라는 믿음이 자기최면적인 힘을 발휘하여 병을 낫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예수 안에서 활동하는 성령께 자신을 맡겼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에게 있어서 믿음은 성령께 대한 전인격적인 맡김의 행위다. 그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다. 한 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 중에서 계속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행동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믿음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가 교리적으로 배웠던 믿음과는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특히 대속적인 구원론에서 믿음이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이지적(理智的) 행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행동은 한 순간으로 완성된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믿음은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한, 그는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그런 이지적 행동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한 순간 완성되는 것도,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속되는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성숙시켜 가야 할 대상이다. 믿음이란 한 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명멸성(明滅性)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믿음이 강해질 수도 있고, 믿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 믿음이 강하다는 말은 성령과의 교제가 밀도있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요,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지만, 전폭적인 신뢰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믿음이란 이렇게 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번 믿었다고 해서 안심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믿음을 키워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믿음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은 대속적 구원론에서는 조건적인 말이다. 예수를 믿어야, 즉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성령론적 구원론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은 조건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구원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선포가 참되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인 다스림을 시작하셨다는 선포를 믿는 것이요,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삶 자체를 가리킨다. 구원에 이르기 위한 길은 회개다. 하나님의 영이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새로운 현실에 맞게 삶의 방향과 양식을 수정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믿음은 그렇게 수정한 후에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6. 새로운 구원론을 위하여: 예수의 성령론적 구원론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에게 있어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다. 요약한다면, 예수의 선포에서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이며, 복음의 핵심은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인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인간은 누구나 회개해야 한다. 그 회개란 과거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에 맞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전환으로써 우리는 성령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질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더욱 인격적으로 맡기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믿음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열어놓은 새롭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구원이란 한 순간에 얻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계속되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의 "성령론적 구원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 동안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천당 구원론"이나 "대속적 구원론"의 그늘에 가려서,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천당 구원론이나 대속적인 구원론은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구원론들이 예수가 우리에게 제공해준 폭 넓은 구원론의 폭을 너무 좁혀 놓았다는 데 있다. 구원론이 이렇게 좁게 정의되었기 때문에, 기독론과 교회론과 윤리론도 역시 그에 따라서 재편됨으로써 편협해지는 오류를 범해 왔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선포했던 성령론적인 구원론을 회복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신학을 재편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동안 편협한 구원론 때문에 빚어졌던 온갖 잘못들을 극복하고, 좀 더 포괄적인 구원론 위에서 올바른 신앙 생활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짓고 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럼 예수는 뭐냐?"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성령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예수를 증발시켜 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염려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성령에 대한 언급들을 최소화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염려를 할 필요는 없다. 성령론적 구원론을 말하더라도 예수는 여전히 구원자로서의 의미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성령의 역사를 처음으로 시작시킨 분이다. 그는 또한 성령의 충만한 삶을 스스로 실천해 보임으로써 구원의 삶을 보여 주셨다. 이 지점에서 "예수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그는 아직도 대속적인 구원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원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삶을 실제로 실천해 보여 주셨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나타나는가를 실제 삶을 통해서 보여 주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 후,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롬 8:9).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성령의 사역은 결코 그 자신만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론적인 구원론에서 볼 때, 예수는 증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폭 넓은 의미로서 구원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2천년 전 한 순간에 구원을 완성하고 끝난 분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사역을 행하고 있다. 그가 남긴 지상 사역은 이러한 구원 사역의 출발점이며, 그 삶의 자취는 오늘날 구원받은 자들이 따라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상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그러헌 구원의 삶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예수의 지상 사역은 다만 죽음을 위한 서곡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구원론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그는 왜 죽었으며, 그 죽음은 구원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또 다른 논문의 주제가 될만큼 예민하고도 복잡한 문제이므로,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겠다. 다만,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가 믿고 가르치고 살았던 성령론적인 구원의 삶이 결정체처럼 표현된 것이라는 말만을 하고 싶다. 그 동안 교회는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한 대속물이라는 점에만 매달려 왔는데, 이 죽음을 우리 편에서 보지 말고 예수 편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예수 편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가 살아온 성령론적인 구원의 삶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따라서 십자가는 대속의 효과로서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성령론적인 구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저렇게도 철저하게 성령론적인 구원의 삶을 살으셨던 예수께 감동해야 하며, 우리도 그렇게 살려는 결의를 새롭게 다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의 여지를 무릎쓰고 요약한 말에 불과하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문을 통하여 심도있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성령과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따로 논의를 해야 할텐데, 필자는 이 생각의 일부를 <예수의 영성>에서 표현한 바 있다.
   21세기는 영의 시대가 될 전망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도의 문명 발전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더욱 영적인 갈망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비 영적 운동가들이 속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는 초대 교회가 보여 주었던 "영의 종교"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는 "대속의 종교" 혹은 "책의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으로써 영의 종교로서 가지고 있던 그 생명력과 변혁성과 초월성을 잃어버린 채,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 종교가 되어 버렸다. 21세기의 강한 영적 욕구를 바른 방식으로 채워 주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이 제기되는 도전들에 대하여 창조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의 종교로 탈바꿈을 해야 한다. 이러한 탈바꿈을 위해서 먼저 우리의 구원론을 성령론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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