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구원의 근원-설교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0:17

구원의 근원

 

 



주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
본문: 엡 2:8

 구원과 신앙의 문제에서는 구원의 근원, 구원의 수단, 구원의 시간, 구원의 목적으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은 구원의 근원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아주 중요한 구원의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물,’ 이 세 마디 말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특히 ‘은혜를 인하여’와 ‘하나님의 선물,’ 이 두 마디 말은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 되심을 설명하는 용어들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주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가 되겠습니다.
성서는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법을 완전히 지켜 그 공로의 대가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첫째 방법은 ‘자력구원’이 되겠고, 둘째 방법은 ‘타력구원’이 되겠습니다. 자력구원은 ‘자기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고, 타력구원은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자력구원은 전적으로 자기의 노력과 수련으로 남의 도움없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고, 타력구원은 자기 노력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자력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오르막길에 있고, 타력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는 내리막길에 있습니다.
어느 길에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자력구원 입니까, 아니면, 타력구원 입니까?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종교들은 자력종교에 해당됩니다. 오르막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력종교에 해당됩니다. 내리막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자력과 타력을 단순 비교한다면, 자력이 타력보다 훨씬 더 매력이 있어 보이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타력에 의해서 조종이 되기보다는 자력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자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타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능력 있고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원은 자력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자력이란 말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구원에 있어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이신 데, 인간은 불완전하고 거룩치 못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특징은 ‘거룩하다’ 또는 ‘완전하다’에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특징은 ‘부족하다’ 또는 ‘죄인이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노력 없이도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데에 비해서, 인간은 절대로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과 같은 완전성과 거룩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성이 피조물에게 요구하는 자력점수는 언제나 백 점 만점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결코 그렇게 높은 점수에 도달할 재간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일찍부터 인간의 자기 노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하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 꾸중을 일삼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언제나 감싸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찾아 백방으로 노력했을 때 그분이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푸근한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그분을 마음으로 영접할 때에 그분이 만나집니다. 어려운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쉬운 하나님의 방법으로 만나집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부족한 노력과 자구책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이고 완전한 구원의 길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시한 구원의 길은 아주 쉽고 값이 없고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완전한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 그분을 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으로 찾아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력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계시록 13장에 성도를 괴롭히고 미혹하는 두 짐승이 등장합니다. 첫째 짐승은 사탄에게 조종되는 권력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둘째 짐승은 사탄에게 조종되는 종교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첫째 짐승은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박해자의 상징이고, 둘째 짐승은 이단사설을 강요하는 종교가의 상징입니다. 첫째 짐승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총칼로서 성도를 위협합니다. 둘째 짐승을 거짓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거짓선지자는 거룩한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성도를 미혹합니다.
지난 수천 년간 신앙인들은 외부로부터 물리적인 박해와 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아 왔습니다. 이 물리적인 박해는 언제나 적그리스도의 세력에서 비롯되었고, 이단의 도전은 언제나 거짓선지자의 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의 메시지는 언제나 두 가지 주제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승리자이시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자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의 반석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의 산성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의 깃발이시다.’가 주제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자가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누리는 권세가 제한적이며, 장차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아무라도 권세를 가질 수 없습니다(롬 13:1). 세상에서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영원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권세를 빼앗아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둘째,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가 주제였습니다. 거짓선지자의 무리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아무리 권세 있고 지혜가 많아도 하나님의 권세와 지혜에 비교될 수 없는 부족하고 거짓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인간의 가르침은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수를 666으로 표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숫자는 ‘헛되다, 헛되다, 헛되다.’  또는 ‘부족하다, 부족하다, 부족하다.’ 또는 ‘망하였도다, 망하였도다, 망하였도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수는 777로 표기합니다. 이 숫자는 소위 상투스(sanctus)라 부르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거룩하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은 부족합니다. 그리고 부족하기 때문에 남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수는 888로 표기합니다. 인간을 구원하고도 ‘남는다,’ 또는 ‘넘친다’는 뜻을 가진 숫자입니다. 필요를 채우고도 남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가진 세력이 그들의 것이 아니며, 그들의 가진 권세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의 세력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거룩을 가장한 거짓 교리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의 무리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마지막 날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조차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과 유황과 연기로 타는 불 못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종교나 철학으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만이 죄인이 의지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아래 서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구원의 수단
주제: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본문: 롬 10:9-13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혹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라는 말을 자주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때에 ‘구원’ 혹은 ‘의롭다 하심’의 기초가 되는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모두가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믿음의 종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종류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하는 믿음’, ‘순종의 믿음’, ‘은사의 믿음’, 그리고 ‘교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먼저 ‘구원하는 믿음’은 마음으로 뜨겁게 믿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머리로서 냉철하게 믿어지는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에 동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믿어지는 믿음은 주관적 신앙이고, 머리로서 냉철하게 믿어지는 믿음은 객관적 신앙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주관적 신앙과 객관적 신앙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하는 믿음’은 초신자의 구원에 필요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드리는 감성적인 신앙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로 믿고 받아드리는 이성적인 신앙에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주정적인 신앙에 더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는 양적인 성장에 비해서 질적인 성장이 크게 미흡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신앙, 머리로서 냉철하게 믿는 객관적인 신앙에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무엇을 얼마큼 어느 선까지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믿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할 건전한 ‘교리의 믿음’과 어떻게 구분 지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로마서 10장 9절의 말씀은 정확한 해답을 주는 것 같아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구원의 조건은 입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머리로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생명의 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성으로 창조와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성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심을”(롬 4:17)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나 사라가 신체적으로 너무 늙어서 자손을 가질 수 없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죽었던 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에게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은 이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성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롬 4:18-22절).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믿음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롬 4:24) 것이라고 말합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제자들이 다른 여러 나라의 말로 말할 때에 이를 기이히 여겨 몰려든 군중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모든 사도들을 대표하여 행한 설교의 내용은 ‘예수 다시 사셨다’는 엄청난 선포였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바로 이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이 신앙 위에 의심없이 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점입니다.
둘째, ‘순종의 믿음’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나 그 결과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다운 아름다운 생활을 말합니다.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순종의 믿음 또는 성화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신앙인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할 성화의 믿음입니다.
셋째, ‘은사의 믿음’은 성령께서 특정인에게 특별사역을 위해서 주시는 남을 위한 믿음입니다(고전 12:9; 13:2). 은사란 그 특성상 구원에 관계없이 성령께서 필요하다고 인정하실 때에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신앙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은 아닙니다.
넷째, ‘교리의 믿음’은 앞에서 언급한 ‘구원하는 믿음’ 속에 있는 머리로서 냉철하게 이루어지는 ‘동의의 믿음’을 좀더 구체화시킨 믿음의 내용을 말합니다. 이 ‘동의의 믿음’은 ‘신앙의 내용’ 또는 ‘신앙고백의 내용’ 또는 ‘지식의 믿음’을 말합니다. 건전한 기독교 교리가 여기에 속합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와 같은 신앙고백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데 ‘교리의 믿음’은 구원을 받는데 영향을 주기보다는 구원받은 사람이 이단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는데 크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 믿음은 신앙인에게 오히려 올무에 걸리게 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구원받는데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인 내용이 아닌 것까지 본질로 착각함으로써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단이기주의에 빠뜨리고 남을 쉽게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교만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단에 빠져드는 이유도 ‘교리의 믿음’에 치우친 때문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나누는 분리대이고, ‘순종의 믿음’은 알곡의 등급을 매기는 저울이고, ‘은사의 믿음’은 그릇의 크기를 재는 잣대이고 ‘교리의 믿음’은 울타리와 같은 것입니다. 울타리가 너무 넓으면 들어와서는 안될 사람들까지 들어오게 되고, 울타리가 너무 좁으면 들어가야 할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리의 믿음’이 가질 수 있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구원에 본질이 되는 부분은 통일시키고, 본질이 아닌 부분은 자유로이 믿게 하며,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한다는 대원칙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는 유일한 수단이오, 통로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하는 믿음’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첫째,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에서 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의 말씀에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열심히 읽고, 예배 때마다 열심히 출석해야 합니다.
둘째,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생깁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고 했습니다.
셋째, ‘구원하는 믿음’은 마음으로 뜨겁게 예수를 영접할 때에 생깁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서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넷째,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할 때에 생깁니다. 남녀가 혼인식 때에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서 바울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또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고, 예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살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고 구원을 받는 길뿐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 접어드는 유일한 통로는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생존을 위한 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갈등과 불안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선물을 받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구원하는 믿음 소유하시고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구원의 시간
주제: 침례는 구원의 표다
본문: 벧전 3:21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 즉 구원받는 시간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경 말씀을 몇 곳 읽어드리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의 말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사도행전 2장 38절의 말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사도행전 22장 16절의 말씀,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갈라디아서 3장 27절의 말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베드로전서 3장 21절의 말씀,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상의 말씀들은 침례나 세례가 구원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얻는다.’ 또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말씀들을 토대로 ‘침례나 세례를 받는 시간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 또는 죄사함이 선포되는 시간이 일치된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쯤에서 분명하게 기억하실 것은 침례나 세례가 구원을 받는 원천이거나 수단이 아니라 시간이란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 또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성례는 구원을 받는 근원도 수단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례가 구원의 시간과 관련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정식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행하는 예식 가운데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예식이 성만찬입니다. 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성례를 받아야 주어집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책이 있습니다. 집사도 있고, 권사도 있고, 장로도 있고, 목사도 있습니다. 이러한 직책은 성례를 받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직책을 뽑는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도 성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교회 공동체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 학습을 받고 있는 예비회원이기 때문에 투표권도 없고 피선거권도 없습니다. 학습이 끝나는 대로 침례나 세례를 받고 정식회원이 됩니다. 그 때에 비로소 투표권이 주어지고 피선거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나라와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고, 또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낙원을 말합니다.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교회와 낙원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될 약속과 인침과 보증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며, 단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맛보고 경험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낙원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온전하게 경험하는 곳이긴 하지만, 낙원에 있는 성도들이 아직 부활하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태어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한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례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서 시작이 되고 맛보아 집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교인의 자격이 주어지는 성례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침례나 세례식은 그리스도와 신자가 혼인을 서약하는 시간입니다. 결혼하는 커플이 혼인서약을 하듯이 성례를 받는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매우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물론 결혼을 준비하는 남녀가 혼인을 결정하기까지에는 많은 만남과 사귐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간들 즉 남녀가 서로 사랑했던 시간들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부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연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혼례식을 마친 후에는 당당한 부부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례나 세례식도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시간들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고, 그에게 평생을 맡기기로 결단한 다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혹은 세 명이든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분명히 생명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름도 없고, 생년월일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인구 조사 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임산부의 몸에서 양수를 터뜨리고 나와야 비로소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침례나 세례식은 학습교인이 정식교인이 되는 시간이며,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시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신자가 침례나 세례를 받기 전에 받는 학습교육이나 사랑하는 남녀가 혼인식을 하기 전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나 출산 전 태아의 성장과정이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씨뿌림이 없이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처럼 결실이 있기까지의 성장과정은 매우 중요하며, 성장과정이 있음으로 결국 결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장과정보다는 결실을 보고 기뻐하고 만족해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믿음을 갖게 된 날짜보다는 침례나 세례식 날짜를 쉽게 기억하게 되는데 잊어버리더라도 증서가 남아 있어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결혼한 부부는 처음 만나 사귈 때의 일을 기념하기보다는 결혼한 날짜를 기념일로 지킵니다. 사람마다 출생일을 기억했다가 생일잔치를 하기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생일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결혼 기념일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날짜를 기념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침례나 세례를 받은 날짜를 기억하든지 못하든지, 그 날을 구원받은 날짜로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성례는 우리의 구원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고, 또 중요한 기독교 예식입니다.
성례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구원이 침례나 세례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보혈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치료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죄인의 상태를 편두통환자로 생각해 봅시다. 이 환자는 자기의 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투통약을 먹으면 곧 바로 편두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그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국에 나가 투통약을 삽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이제 곧 낫겠지? 약을 샀으니 말이야.” 이 환자의 편두통이 그의 믿음 때문에 사라집니까? 아니지요. 적어도 물과 함께 손에 있는 약을 먹기까지는 말입니다. 이 약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믿음이나 성례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작용하는 바로 그 시간인 것입니다.
침례나 세례는 죄사함을 받고, 새로 거듭나며, 성령으로 새로워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시간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성례는 성령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며, 성화의 삶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례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예식이며, 죄와 싸우는 십자군에 입단하는 시간입니다.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지만 이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는 죄와 부단히 싸워야 합니다. 죄된 것을 부단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부단히 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성례가 갖는 의미와 축복들을 새롭게 인식하시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구원의 목적
주제: 선한 일을 위하여
본문: 엡 2:8-10

구원의 목적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죽은 나무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나무마다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어 모든 나무가 죽은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겨울 동안에는 죽은 나무와 살아있는 나무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살아 있는 나무와 죽어 있는 나무가 구별이 됩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봄에 싹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여름에는 풍성한 가지와 잎으로 열매를 만듭니다. 가을에는 싱싱하고 풍성한 열매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죽어 있는 나무는 계절에 관계없이 싹을 내지 않고 열매를 만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나무의 상태를 보고 그 나무가 산 나무인지 죽은 나무인지를 판가름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피로 인하여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기 때문에 선행의 싹이 없고 꽃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선행의 싹이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람의 신앙 상태를 보고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인지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인지를 판가름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활동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잠자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는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지만”(롬 10:9),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확신으로 믿음을 키워 가야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청산유수 같은 기도솜씨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뽐낼 수 있습니까? 많은 액수의 헌금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뽐낼 수 있습니까? 잦은 금식과 기도회의 참석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뽐낼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비유에서 예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책망하고 있습니다(눅 18:10-14). 바리새인들은 예복을 즐겨 입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즐기며,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세리나 죄인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0:45-47).
이와 같이 하나님은 행함이 없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믿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통해서 드리는 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의 믿음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신앙인의 삶 속에서 묻어나는 믿음이 나쁘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야고보서 2장 14-26절의 말씀입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 .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둘째, 봄이 나무에게 필요한 모든 계절은 아닙니다. 봄은 나무에게 필요한 출발점이고, 여름은 가을을 준비하는 성숙기이며, 가을은 열매를 맺는 결실기입니다. 따라서 나무에게 필요한 것은 봄의 생동과 여름의 풍성함과 가을의 열매입니다. 열매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닐지라도 봄과 여름은 가을에 맺히는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마가복음 4장 28절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봄에 피는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와 벚꽃, 매화와 라일락 등의 꽃은 아름답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중생 또는 거듭남의 체험은 얼었던 대지와 두껍고 딱딱한 외피를 뚫고 나오는 새싹과 더불어 죽은 것 같았던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와 벚나무, 매화와 라일락에서 눈부시게 피는 꽃의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봄 한철에 불과합니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서 봄의 감동은 식어져 버리고 잊혀져 버립니다. 봄에 느꼈던 감동이 여름에 찾아오는 신록의 풍성함에 압도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록의 풍성함도 여름 한철에 불과합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여름의 감동은 식어져 버리고 잊혀져 버립니다. 한 나무의 진가는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나무마다 다가올 찬 겨울을 맞기 위해서 몸의 수분을 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풍성했던 잎을 떨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잎이 떨어질수록 열매가 많은 나무는 사랑을 받게 되고 열매가 없는 나무는 초라한 모습으로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께서도 열매 없는 나무를 싫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길가에서 잎이 풍성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마 21:19).
셋째, 나무는 결국 그 열매를 보고 압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6-2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로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5절의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나쁜 열매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합니다. 나쁜 열매는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와 또 이와 비슷한 것들”이며,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 .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의 말씀에서도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다운 아름다운 삶을 위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인 다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불신자들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롬6:16) 고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의에게 종’ 또는 ‘하나님께 종’이란 말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와 성결의 생활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노력과 선행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주시고 있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계십니다. 구원과 함께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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