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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의 삶

힐링&바이블센터 2007. 4. 28. 20:09

 

* 엄마, 우리 엄마 *

 

프로이드의 어머니는 스무살이 안된 나이로,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데다 두번의 결혼경력이 있는 제이콥프로이드와 결혼한 강심장. 1856년 그렇게 프로이드는 태어난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이었던 남편과는 달리 그녀는 아름답고 유머와 재치로 넘치는 여인이었다고. 

특히 프로이드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는데 그도 <모친의 사랑은 성공을 향한 자신감과 확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라고 술회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그녀의 유대교의 가르침에는 끄떡마이싱이었다네.

고전에 심취했던 프로이드는 그에 기반한 클래식하고 아름다운 문장력으로 김나지움의 선생들의 마음을 쭉 빨아드렸단다.

 

 

* 삐딱한 대학생활 *

 

1873년 오스트리아 빈. 의대에 들어간 프로이드는 왕따를 당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이 첫인상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똘똘뭉친 다수에게 추방당하는 반대편의 선 자의 운명과 일생동안 친해지게 된 계기였다. 내 판단의 독립성은 그렇게 준비되었다."

의대생 시절, 그는 저명한 생리학자 에른스트 브뤼케의 생리학 실험실에서 일했다고.

프로이드가 평생 존경했다는 브뤼케는 인간을 물리학적 <에너지보존법칙>에 지배되는 역학체계로 보았다. 프로이드 이론의 다이나믹한 에너지인 추동이나 리비도 등도 이 이론의 산물.

 

 

* 영원한 탐구, 자기분석 *

 

<장 샤르트의 강의 모습>

 

1885년 신경병리학 강사가 되고,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쟝 샤르코 밑에서 히스테리와 최면에 대해

배운다. 프로이드는 일회적인 최면효과에 대해서는 찬성하진 않았지만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병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1886년 빈으로 돌아와 정신과 개업을 한 뒤 그 해 9월에 결혼하고 3남3녀를 두었다. 역쉬!

막내딸 Anna는 후에 정신분석 학자로서 대를 이어 충성한다.

프로이드는 부친사망 다음해인 1897년 부터 <자기분석>을 시작한다.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무의식>에서 해답을 찾았고 이 작업에 평생을 매달린다.

 

 

* 치료법의 개발과 책의 출판 *

 

1890년 그는 환자들에게 <최면암시>와 <카타르시스>기법을 통한 치료에 중심을 둔다.

1896년 그는 환자들에게 <자유연상법>을 쓰면서 <정신분석>이 태어났다.

이는 최면이나 카타르시스는 환자치료에 있어서 일회적이고 지속적이지는 못하다는 생각에 연유.

환자들이 자유롭게 쏟아내는 무의식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 정신분석치료의 중심내용이다.

1900년 출판된 [꿈의 해석]은 600부 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확고한 매니아들을 만들었고,

1901년 출판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반면, 1905년 출판된 [성 이론에 대한 세 논문]은 음란하고 사악하다는 이유로 조소와 야유를 받는다.

아기들에게도 성욕망이 있다거나 사회적이거나 반사회적인 모든 것은 성욕망에 기인한다고 하니 당시 사회분위기로서는 이론의 평가에 앞서 '수치심'을 떠올리게 했던 까닭. 그의 추종자 어네스트 존스도 환자에게 성생활을 물어본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쫓겨났다고.

 

 

* 전쟁과 말년의 열정 *

 

 

1차세계대전.  프로이드는 저축한 재산을 모두 잃고 딸 하나가 26세로 죽었다.

전쟁에 나간 아들에 대한 걱정.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그는 1920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음충동이론>을 내놓았다. 이것은 삶 충동에 반대되는 파괴욕망에 대한 이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박해를 가한 나치. 이들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런던으로 망명하고1939년 83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기분석>을 계속했다.

말년에 프로이드는 암 때문에 33회나 턱수술을 받는 등 극심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자신의 이론을 계속해서 다듬어갔고 우리가 현재 접하는 프로이드의 이론들은 대부분 이 최후의20년 동안 발전된 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