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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 생애

힐링&바이블센터 2007. 4. 28. 19:52
 
유럽에서 크림전쟁이 끝나던 해인 1856년 5월 6일, 지금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된 오스트리아의 프라이베르크 모라비아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마침 그 아이를 본 노파 하나가 아이의 어머니에게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아이는 유태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유태인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지나친 기대와 사랑을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다소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자기 분야에 몰두할 줄 알았다. 이윽고 그는 당시 유태인이라는 차별과 박해를 극복하고 20세기의 정신 세계를 지배했던 정신분석을 창시했는데, 그가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드이다.
네 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비엔나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하기까지 거의 한 평생을 살았다.
프로이드는 일곱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야곱 프로이드는 이미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년에 아내를 잃어 40세에 20세의 젊은 아말리아 나탄존과 결혼했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거의 함께 살지 않았다.
프로이드의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좁은 아파트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우수한 학생이었던 프로이드만은 늘 독방을 사용했고, 다른 식구들이 촛불을 사용할 때도 프로이드는 늘 기름 등잔을 켜 놓고 공부했다. 프로이드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이기도 했지만, 그의 젊은 어머니가 그가 태어난 직후 어느 노파가 프로이드를 보고 한 예언을 믿고 그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그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처럼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다른 나라의 고전들을 많이 읽었다. 특히 독일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며, 한때는 문학적인 재능으로 상을 받기도 했고,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태리어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프로이드는 어린 시절에는 위대한 장군이나 고급 관료가 되고 싶어했으나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반유태주의로 오스트리아의 지식 있는 유태인들은 의학과 법학을 제외한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 프로이드는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1873년 비엔나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1881년에 의사 자격을 얻었고, 졸업 후에는 15개월 동안 그 당시 유명한 심리학자인 브뤼케가 소장으로 있던 비엔나 대학의 생리학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 후 대뇌해부 학회에 가입해 성인과 태아의 뇌를 연구하기도 했다.
프로이드는 병원 의사로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연구소를 나와 개인 병원의 신경과 의사로 취직하였다. 유태인이라서 승진이 어려운데다가, 브로이어로부터 정기적으로 꾼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으며, 1882년에 만나 1886년에 결혼한 사랑하는 여인 마르타 베르나이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일대 전환기는 1885년에 찾아왔다. 프로이드의 생리학 스승인 브뤼케가 추천하여 여비와 장학금을 받아 그 해 가을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유학은 프로이드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유명한 신경 의학자인 쟝 샤르코와 함께 파리에서 수개월동안 공부하였다. 당시 샤르코는 최면 암시에 의해 히스테리 신경증의 증상을 유발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비록 뒤에 프로이드는 최면술을 치료 장면에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샤르코의 강의와 임상적인 실습에 깊은 흥미를 가졌다.
프로이드는 파리에서 유명한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체류하는 동안 신경학자에서 정신 병리학자로 전환하면서 정신 분석을 창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프로이드는 1886년 유태인인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하여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안나 프로이드는 뒤에 유명한 아동 정신 분석학자가 되었다. 그 무렵 프로이드는 비엔나의 유명한 외과 의사인 요셉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브로이어와의 만남은 프로이드가 정신 분석을 창안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브로이어는 환자가 자신의 불안과 그 징후를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제거하는 정화법을 발견한 사람이다. 프로이드와 브로이어는 1895년에 『히스테리 연구』라는 책을 함께 써서 출간하고 많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 책이 다른 학자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자 브로이어는 자기의 주장에 회의를 느꼈다. 그러다 프로이드가 히스테리의 주된 원인이 성욕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러, 그는 끝내 프로이드와 결별하였다.
다른 의사들의 비판이 잇따르자, 다음 해인 1896년에 비엔나 의사회에서 사퇴하면서까지 프로이드는 자신의 주장을 고수했다. 그 무렵 프로이드는 『히스테리 병인론』에서 정신 분석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890년과 1900년 사이는 프로이드에게 학문적으로 고독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 시기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프로이드는 혼자 정신 분석학 이론의 기초를 닦았으며, 그러한 노력들은 그의 가장 위대한 저서라고 평가되는 『꿈의 해석』(1900)에 잘 나타나 있다.
『꿈의 해석』은 겨우 209달러의 원고료를 받고 600부를 발간하였으나 정신 병리학회로부터 묵살되었다. 또한 '꿈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나 청강자는 겨우 세 명뿐이었다. 그러나 1901년부터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의료인들 사이에서 프로이드의 명성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비엔나 정신 분석학회를 창립했으며, 그 학회는 그를 숭배하는 헌신적인 학자들 집단에서만 개방되었어도 융, 아들러, 오토랭크와 같은 많은 정신 분석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프로이드와 정신 분석이 국제적으로 더욱 알려지게 된 것은 1909년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당시 미국 메사추세츠 주 클라크 대학의 총장이었던 스탠리 홀이 프로이드와 융을 초청해서 강연하게 하면서부터이다. 프로이드는 그 사건을 계기로 정신분석이 대중들 사이에서 특히 유명해졌으며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 분석을 의학 훈련의 중요한 과목으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프로이드에게 두 번째로 찾아온 또 하나의 전기는 1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 전쟁은 프로이드의 생애와 학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독일군을 상대로 한 임상 연구는 정신 병학의 다양성과 미묘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이 전쟁에 참전하였고, 반유태주의 사상이 고조됨에 따라 프로이드는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로이드는 암에 걸려 나머지 인생을 병마와 싸워야했다. 프로이드는 담배를 무척 좋아해서 하루에 스무 개비 이상의 쿠바 담배를 피웠다. 그래서인지 1922년 후두암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그 해에 처음으로 후두암 수술을 받았으며, 그 후 사망할 때까지 17년 동안에 무려 33회나 수술을 받았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하자 독일의 비밀 경찰들은 1932년에 유태인인 프로이드의 저서를 모두 불태웠다. 그 후 프로이드는 비밀 경찰의 끊임없는 표적이 되었다. 그러다 1938년 나치군이 오스트리아에 침입해 '국제 정신 분석 출판소'를 몰수하며 압박을 가하였으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외교 노력으로 그 해 6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병이 더욱 깊어져 수술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이듬해인 1939년 9월 23일 영국의 런던에서 그의 83해 동안의 천재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프로이드는 사망할 때까지 24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사망할 무렵 『정신 분석 개론』을 집필하고 있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