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
피터 드러커 지음 / 남상진 옮김
청림출판사 / 2006년 2월 / 214쪽 / 10,000원
▣ 저자 피터 드러커 (Peter F. Drucker)
2005년 11월 11일, 이 시대 경영학의 아버지이며 비즈니스맨의 영원한 스승인 피터 드러커 박사는 영면했다. ‘내 인생에 은퇴란 없다‘라고 말하던 노학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술가, 교수, 컨설턴트로서 자신의 일과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참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찍이 지식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이래 20여 권이 넘는 경영 관련 저서를 통해 미래의 조직과 사회의 변화된 모습, 그에 대한 전략과 비전을 제시했다. 그의 저서는 모두 2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경영의 교과서로 학교와 산업 현장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대표작으로 『프로페셔널의 조건』, 『변화 리더의 조건』, 『이노베이터의 조건』의 21세기 비전 시리즈와 『드러커 100년의 철학』, 『미래경영 미래를 읽는 힘』, 『실천하는 경영자』 등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나의 인생과 매니지먼트. 피터 드러커는 지식경영이라는 주제를 주로 다루면서 미래에 조직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예측을 해온 석학이다. 이 책은 일본경제신문의 연재기사인 '나의 이력서' 2005년 2월호에 실린 27회분의 기고문과 드러커 박사와 인터뷰한 마키노 기자의 해설로 구성된 자서전적 성격의 저서로, 어린 시절의 드러커부터 96세의 노학자 드러커까지 그가 연구한 것, 만났던 사람들, 영향을 받았던 사건 등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나치스 정권 시대의 신문기자 경험, 부인 도리스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 등 시대와 인간을 객관적으로 응시해 온 피터 드러커의 진솔하고 참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 목차
1. 기본은 문필가, 95세에도 현역
2. 제국의 도시 빈에서 태어나다
3.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
4. 프로이트와 악수하다
5. 배움의 기쁨을 알게 한 최고의 교사
6. 붉은 깃발 대오 선두에 서다
7. 도서관에서 이루어진 대학교육
8. 대공황 속에서 기자의 길을 걷다
9. 파시즘의 본질을 보게 된 히틀러의 취재
10. 나치스를 피해 독일을 탈출하다
11. 도리스와의 재회, 인생 최고의 순간
12. 대성황이었던 케인스의 강의
13. 대전 전야, 미국으로 이주하다
14. 프리랜서로의 첫 걸음을 떼다
15. 처녀작에 대한 처칠의 평가
16. 잡지 왕에게 배운 60일
17.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제너럴 모터스
18. 제너럴 모터스를 조사 연구하다
19. 특이한 경영자 엘프레드 슬론과 대면하다
20. 슬론의 구원
21. 분권제의 붐을 일으키다
22. ‘지식 노동자’를 평생의 주제로 삼다
23. 경영컨설턴트의 탄생
24. 매니지먼트를 강의하게 되다
25. ‘민영화’개념이 정책에 반영되다
26. 일본 회화와 최초의 방일
27. 내 인생에 은퇴란 없다
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
피터 드러커 지음 / 남상진 옮김
청림출판사 / 2006년 2월 / 214쪽 / 10,000원
저자 서문
문필가의 인생 자체가 주목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단지 저작물이 주목받을 뿐이다.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1927년에 그곳을 떠나왔다. 그 후 독일, 영국, 미국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무역상사의 견습사무원, 증권회사 직원, 펀드매니저로도 일했다. 또한 여러 영국 일간지의 미국 주재기자를 역임했고, 대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내 최초의 저작물은 1933년에 출판되었다. 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줄곧 저작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로 서른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논문과 기사를 발표했다. 이 책은 이런 나의 저작물 가운데 나의 인생에 관한 일들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1. 기본은 문필가, 95세에도 현역
2004년 11월 19일, 나는 아흔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제 나는 보청기 없이는 듣는 것도 어렵고 걷는 것조차 어렵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나는 비서 없이 일정관리를 언제나 스스로 해왔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 수첩은 앞으로 몇 개월 동안 해야 할 업무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대학교수 혹은 컨설턴트로 불리고, 때로는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나의 기본은 문필가이다.
드러커의 유머
로스엔젤레스에서 승용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인구 3만 4,000명 정도의 지방도시 클레어몬트. 이곳에 드러커 박사의 자택이 있다. 2004년 8월 하순 첫 번째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다. 그와 인터뷰를 하며 나는 별 생각 없이 “한가할 때는 무엇을 하며 지내세요?”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신중한 얼굴로 다시 질문했다. “한가한 때란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한가한 때란 말하자면… 그러니까…” “한가한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내 경우 일을 하지 않으면 많은 책을 읽지.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집중적으로 말이야.” 즉 늘 바쁘다는 말이었다.
한국과 드러커
드러커 박사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54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고문 자격으로 방한한 때였다. 또한 그는 1950~1960년대 뉴욕 대학에 재직하면서 한국의 젊은 관료들과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한편 드러커 박사는 최근 발표한 저서 『실천하는 경영자』를 통해 기업가 정신의 최고 실천국은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라고 밝혔다.
2. 제국의 도시 빈에서 태어나다
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909년 11월 19일 빈에서 태어났다. 당시 빈은 수백 년에 걸쳐 유럽에서 군림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인구 5,000만 명에 달하는 대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내가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 무렵에 부친인 아돌프는 “네가 다섯 살이 되기 전, 여름방학 때 가족들과 함께 아드리아해로 여행 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때 서둘러 여름휴가를 끝낸 것도 기억하니?”라고 질문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실은 그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단다. 나는 몇 년간의 휴가를 모아서 너희들과 실컷 여름휴가를 보낼 작정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황태자 암살 소식이 날아들었지. 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급히 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외국무역성의 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빈으로 돌아와야 했다.
드러커 박사의 집필 방법
드러커 박사는 우선 글의 전체상을 수기로 묘사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녹음한다. 테이프에 녹음한 것을 타자기를 이용해서 원고화하는 것은 보조원이 대신한다. 보조원이 타이핑을 끝내면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타자기를 이용하여 초고를 쓰는 작업이 시작된다. 초고와 두 번째 원고는 버리고 세 번째 원고로 최종 원고를 완성한다.
3.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전시 경제 운영을 맡은 주요 정부 고관 세 명 중 한 사람인 외국무역성 장관이 되었다. 외국무역성은 18세기에 설치된,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부서로 아버지는 공업생산을 지휘했다. 전쟁은 4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 제국은 10번 이상 거듭된 민족 간 분쟁으로 엉망이 되었고 공업화도 뒤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오스트리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그 동료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쟁 발발부터 전후까지 아버지의 일은 힘든 것이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온화하셨고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였다.
유머러스한 할머니
드러커 박사는 일가친척 중 할머니와 각별했다. 세계대전으로 제국이 붕괴하자 할머니는 부다페스트에 사는 맏딸을 만나기 위해서 여권과 비자가 필요했다. 당시에는 여권을 취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방관자의 시대』에 따르면, 할머니는 드러커 박사의 아버지 아돌프가 장관으로 있던 외국무역성으로 달려가서 아돌프에게는 비밀로 하고 부하직원에게 부탁해서 헝가리 등 주변국의 여권과 비자를 모두 취득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공복인 공무원을 사사로운 일에 쓰다니 말도 안 된다”며 화를 냈지만 할머니는 “공복은 국민을 섬기는 존재이며 나는 국민의 한 사람일세.”라며 반론을 펼쳤다고 한다.
4. 프로이트와 악수하다
나는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접할 수 있었다. 내게 그 경험은 실질적인 교육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가족이 함께 빈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같은 식탁에 합석한 다른 가족의 가장과 악수를 했다. 내가 악수를 했던 이는 정신분석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양친은 프로이트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부모님은 또한 오랫동안 일주일에 수차례씩 홈파티를 열었다. 우리 집을 자주 찾아오던 단골손님들 중에는 조지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와 같은 유명한 경제학자 외에도 전후에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된, ‘건국의 아버지’ 토마시 마사리크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드나들던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일어뿐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초대 체코대통령
드러커 박사가 인터뷰 중에 언급한 인사들 가운데 신문기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저명인도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하이에크의 은사이자 세계경제학계에서 군림한 오스트리아학파의 대표격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이다. 드러커 박사는 후일 뉴욕 대학에서 미제스와 동료가 되었으나 그래도 미제스에 관해서 친구처럼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미제스와 친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아돌프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5. 배움의 기쁨을 알게 한 최고의 교사
나는 1942년부터 대학교수로 일해 왔다. 내가 장기간 교단에 섰던 것은 가르침을 통해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배우길 원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도 평생 계속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배워왔는지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꼭 짚어봐야 할 시절은 바로 초등학교 때이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네 살 무렵이었는데 그 이후로 나는 책벌레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읽는 것은 잘 했지만 글씨 쓰는 것은 형편없었다. 그 때문에 4학년이 되던 여덟 살 때 시내에 있는 사립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분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스 엘자와 미스 조피 자매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받았으며 배우는 즐거움과 기쁨에 푹 빠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교사
단 일 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미스 엘자와 미스 조피에게로부터 배우는 일의 즐거움을 배운 드러커 박사는 인터뷰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르치는 쪽이 배우는 쪽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드러커 박사는 “유능한 교사는 많이 알고 있지만 위대한 교사는 아주 적다.”고 지적했다. “위대한 교사와 유능한 교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전제한 뒤에 “나는 위대한 교사가 아니라 유능한 교사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위대한 교사란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 학생들을 매료시켜버리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교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스 조피처럼 말이다.
6. 붉은 깃발 대오 선두에 서다
월반하여 입학한 김나지움은 라틴어를 중심으로 고전 교리를 가르치는 신학 예비학교였다. 라틴어 학교라고 불리던 그곳을 나는 8년간 다녔다. 그곳에서의 8년은 라틴어 동사의 불규칙변화 등을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어쨌든 나는 김나지움에서 수업 중에 책상 밑에 역사나 문학책을 숨겨서 읽으며 지냈다. 김나지움 시대에 내 인생의 크나큰 전기가 있었는데 열네 살이 되기 직전인 1923년 11월 11일, 사회주의청년단의 선두에 서서 붉은 깃발을 내걸고 가두행진을 한 것이다. 물론 내가 사회주의에 공명하여 데모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행진 도중 문득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들고 있던 붉은 깃발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떠맡기고 대열을 빠져나왔다.
뛰어난 인물들로 넘쳐나는 빈
김나지움에서 청년시대를 8년간 함께 보낸 동급생은 28명 정도였다. 그런데 그 28명 중 졸업 후에도 빈에 머문 사람은 네 명뿐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관해서 드러커 박사는 “실업률이 높고 격렬한 내란이 발발하던 빈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에 남은 것은 능력 없는 동급생들뿐이었다”고 설명한다. 해외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에서 명문대학 교수나 항공기 부품 설계자로 성공한 친구,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최대의 은행을 설립한 친구도 있었다. 열네 살 때 국외 탈출을 결심한 드러커 박사가 결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7. 도서관에서 이루어진 대학교육
빈의 김나지움에서는 따분한 수업에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가장 빠른 방법은 독일이나 영국에서 견습사원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나는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결국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1927년 독일로 이주하여 함부르크의 무역회사에서 견습직원이 되었다. 견습업무는 재미없었지만 함부르크에서 사는 동안 나는 모든 일에 충실했으며, 사무실 건너편에는 공립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독일어나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책을 닥치는 대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진짜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8. 대공황 속에서 기자의 길을 걷다
함부르크 무역회사에서 견습을 끝내고 1929년 1월에 제대로 된 일을 얻었다. 미국계 투자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의 증권분석가 일이었다. 분석 업무를 하면서 계량경제학 논문을 두 편 썼다. 그 중에 하나는 계속 급등하고 있던 뉴욕의 주식시장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 논문에서 뉴욕 주식시장이 ‘더더욱 상승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 몇 주 뒤인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은 역사적인 대폭락을 기록했다. 소위 ‘암흑의 목요일’이었다. 한편 ‘암흑의 목요일’로 인해 내가 몸담고 있던 미국계 투자은행도 파산하는 바람에 나는 실직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실직과 동시에 신문기자가 될 수 있었다. 입사 후 곧 해외뉴스와 경제뉴스 담당 편집자가 되었다.
‘암흑의 목요일’에 관한 신문기사
당시 드러커 박사는 미국계 투자은행의 뉴욕 본점에서 매주 보내오는 조사보고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고객에게 배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보고서를 신문용으로 고쳐 써서 ‘프랑크푸르트 게네럴 안차이거’를 포함한 지역신문에도 제공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언제나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은 일시적인 것이며 곧 시장은 상향조정될 것이다’라는 내용뿐이었다.”고 드러커는 회고했다.
9. 파시즘의 본질을 보게 된 히틀러의 취재
‘프랑크프루트 게네럴 안차이거’ 신문사에 입사한 2년 후인 1931년, 나는 세 명의 부편집장 중 한 명이 되었다. 뉴스는 로이터 통신 등 통신사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특집기사나 논설은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난 쉴 새가 없었다. 스스로 취재도 했다. 당시 현저히 대두되기 시작한 나치스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오른팔인 요제프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직접 인터뷰도 했다. 히틀러나 괴벨스가 연설에서 “우리들은 빵 가격의 인상도, 인하도, 고정화도 바라지 않는다. 나치스에 의한 가격을 요구한다.”고 외치면 농민들은 갈채를 보냈다. 이것은 파시즘의 본질을 정확히 나타낸 것이었다.
나치스와 매스컴
드러커 박사는 기자로서 정계나 산업계의 리더들을 만나면 나치스의 위험성에 관해서 몇 번이고 경고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시골 출신으로 출세한 인물이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을 저급한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우익 정당의 리더들은 누구도 그를 신중히 다루지 않았고, 만일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간단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또한 드러커는 “매스컴은 신중하게 히틀러를 다루지 않았다. 만일 히틀러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캠페인을 전개했었다면 나치스의 정권 장악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10. 나치스를 피해 독일을 탈출하다
프리드리히 슈탈에 관해서 쓴 책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1933년 1월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머물고 있었다. 19세기의 철학자인 슈탈은 ‘독일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렸지만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치스에 대한 일종의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고는 독일에서는 상당히 저명한 출판사에 보내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독일을 떠나면 출판 계획이 백지화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생겼기 때문에 독일을 떠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 탈출은 다른 모양으로 결정되었다.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수주일 후에 내가 일하고 있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나치스가 들어왔고, 소름끼치는 미래의 광경을 미리 본 듯한 느낌이 든 나는 곧바로 빈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유대인
드러커 박사는 프랑크푸르트 대학 법학부 조교를 하던 때에 슈탈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했다. 그 이유는 슈탈이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배경에서 보면 슈탈에 관해서 쓴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반나치스적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슈탈은 독일의 보수 본류인 프로이센적 정신을 체현하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17세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유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치스가 내건 반유대주의를 드러커 박사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빈에서도 주변에는 늘 유대인이 많았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친구였다는 것에 배경이 있는 듯하다.
11. 도리스와의 재회, 인생 최고의 순간
1933년,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고 그해 봄 런던 땅을 밟았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카데리 서커스 역에 있는, 영국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의 상행 방향에 타고 있었는데 하행 방향에서 낯익은 젊은 여성을 발견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시절에 알게 된, 후일 내 아내가 된 도리스였다. 서로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난 다 올라가서는 내려가는 쪽으로 바꿔 타고 그녀는 다 내려가서 올라가는 쪽으로 바꿔 탔다. 그렇게 하기를 네 번 정도 반복한 후에야 우리는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 때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활달한 도리스부인
아흔 살을 넘겼는데도 도리스 부인은 건강했으며, 말하는 것도 또렷하고 걸음걸이도 발랄해서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스포츠클럽에 다니며 테니스를 치고, 산악하이킹을 가는 등 정력적으로 몸을 움직여왔기 때문일 것이다. 도리스 부인은 건강적인 면뿐 아니라 일하는 면에서도 젊다. 그녀는 컴퓨터를 잘 사용한다. 내가 드러커 박사에게 팩스로 연락을 취하면 도리스 부인은 박사를 대신하여 내게 전자메일로 답장을 해 주기도 했다.
12. 대성황이었던 케인스의 강의
1934년에 들어서 겨우 직장을 얻게 된 프리트베르크사에서 나는 우수한 증권분석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은행계에서 계속 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3년간이나 그곳에서 일한 이유는 동료, 고객 등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도 갔다. ‘케인스 경제학’의 아버지,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 강의에는 언제나 수백 명의 청강생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케인스는 조지프 슘페터와 견주는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이다. 나는 그의 강의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 하지만 케인스 추종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케인스를 필두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상품의 움직임에만 주목하고 있는데 비해, 나는 인간이나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리스와의 사귐
드러커 박사에게 “오늘날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라고 질문하면 그는 주저함 없이 “1933년의 봄이네”라고 대답했다. 런던 지하철에 설치된, 영국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에서 후일 부인이 된 도리스와 재회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도리스 부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의 모친은 옛날부터 딸을 명문 금융재벌인 로스 차일드 가에 시집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커 박사와 사귀는 일에 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한편 드러커 박사의 어머니도 도리스와의 결혼에 반대했다.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의 결혼은 미국의 북부인과 남부인의 결혼과 같은 것이며, 게다가 도리스는 부유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드러커 박사 어머니의 바람은 영국의 부호인 서슨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13. 대전 전야, 미국으로 이주하다
스물일곱 살에 도리스와 결혼하여 런던 탈출을 선언했다. 그때 프리트베르크사는 결혼과 떠나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멋진 선물을 주었다. 호화 여객선을 타고 지중해를 출발해 뉴욕까지 가는 2주간의 신혼여행이었다. 첫 며칠을 보낸 베니스는 1937년 당시에는 관광객이 거의 보이지 않는 세계 최고의 로맨틱한 마을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신혼여행 중에도 제2차 세계대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군화소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다가오고 있는 와중의 런던은 빈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전쟁 전 분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침울했다. 나는 미래지향적인 뉴욕으로 와서야 비로소 ‘전쟁 전’과 결별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일본과의 접점
드러커 박사가 일본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런던에서 살던 시절이었다. 당시 런던 금융가에는 외국 금융기관의 이코노미스트로 구성된 클럽이 있었으며 소속 멤버는 매일 점심식사 모임을 열어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드러커 박사는 그곳에서 많은 일본인 은행가들을 만나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또 런던에서 일본과 접점을 가졌던 다른 하나는 일본 회화 작품이었다. 드러커 박사는 영국에서 최초로 열린 일본 회화전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일본 회화에 매료되었다. 당시 보스턴과 워싱턴에는 일본화 컬렉션이 있었기 때문에 드러커 박사는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였다.
14. 프리랜서로의 첫 걸음을 떼다
미국에서는 누구나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나는 우선 신문사를 목표로 삼았다. 나는 곧바로 ‘워싱턴 포스트’에 전화했고 해외면 담당 편집자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예고 없이 그를 방문했다. 예고 없이 방문한 지 불과 2시간 만에 선불 150달러와 계약서를 들고 그곳을 나섰다. 나는 곧바로 몇 주간 유럽으로 출장을 갔고 현지에서 6-7편의 기사를 보냈다. 나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성공했다면 잡지에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가 떠올랐다. 워싱턴에서 뉴욕행 열차로 이동 중 갑자기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실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필라델피아에서 도중하차했다. 물론, 사전 약속은 없었지만 이번에도 편집자가 면회에 응해 주었다. 그 후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줄곧 일하게 되었다.
불과 8분 걸린 미국비자 취득
드러커 박사는 미국 이주에 관하여 “인생 최대의 결단이었다.”고 말한다. 영국에서는 대불황의 한가운데서도 안정된 직업을 얻었고 친구들도 많이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보다도 더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던 미국으로의 이주는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드러커 박사가 결단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도리스 부인이 “실행하세요.”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결단한 후에는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런던의 미국대사관에서 비자취득을 위한 대기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드러커 박사는 “겨우 8분 만에 끝났다.”고 말한다.
15. 처녀작에 대한 처칠의 평가
1938년에 완성한 처녀작 『경제인의 종말』을 출간해 줄 출판사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 책은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를 지킨다고 하는 명확한 목적을 지닌 정치서적 성향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인의 종말』은 이듬해인 1939년 봄에 간행되었고, 곧 영국의 고급신문인 ‘런던 타임스’에 서평이 등장했다. 윈스턴 처칠이 서평을 썼는데, 서평 덕분이었는지 『경제인의 종말』은 영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경제인의 종말』을 주목한 거물은 처칠 이외도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타임’, ‘포춘’, ‘라이프’를 창간한 잡지왕 헨리 루스이다.
‘타임’, 헨리 루스와의 만남
드러커 박사는 ‘타임’에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루스도 드러커 박사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타임’의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했다. 영국 신문사와의 일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없어질 것이 뻔했고, 미국의 신문이나 잡지사에서의 프리랜서 일도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안정된 수입원을 얻기 위해서는 ‘타임’에 취직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되었다.”고 당시 자신의 심정을 술회하였다. 하지만 당시 ‘타임’ 편집부에서 힘을 갖고 있던 공산주의자가 거절하는 바람에 ‘타임’에 취직하는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16. 잡지왕에게 배운 60일
잡지왕 헨리 루스가 권유하긴 했지만 ‘타임’의 해외 뉴스 편집자가 되는 이야기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도 루스는 포기하기 않고 1년 후인 1904년, 내게 다시 연락해 주었다. ‘포춘’의 창간 10주년호 편집 작업이 늦어지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기한이 정해진 일이었으므로 이번에는 수락했다. 그로부터 2개월간 나는 루스와 함께 밤낮을 불문하고 일하며 마감일과 격투하는 날을 보냈다. 루스와 함께 일한 기간은 짧았다. 그렇지만 문필가로서 오랫동안 일해 온 중 가장 재미있고 자극적이며 연구에 도움이 된 기간이기도 했다.
17.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제너럴 모터스
1943년의 깊은 가을, 34세의 생일을 맞았을 때 자신을 제너럴 모터스의 홍보부장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GM의 부회장인 도널드슨 브라운씨를 대신하여 전화했다며 세계 최대 기업인 GM의 경영 방침이나 구조에 관해서 제3자의 눈으로 조사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 무렵 나의 미국 생활은 궤도에 올라 있었으나 유일하게 잘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대기업을 내부로부터 조사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 상황에서 GM으로부터 권유를 받은 것이다. 당시의 GM은 중흥의 아버지 앨프레드 슬론의 지휘 아래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사업부제나 분권제를 도입하는 등 근대적인 기업 경영을 시도하는 원조였다. 아무튼 18개월에 걸쳐 GM을 철저히 조사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경영 권위자로서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육군성의 컨설턴트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2개월 후 드러커 박사는 워싱턴으로 호출되었고, 전시 체제하의 정부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다. 거대한 관료기구의 수레바퀴로 일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았고 더구나 즐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 컨설턴트로서 정부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육군성의 컨설턴트로서 군수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경영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18. 제너럴 모터스를 조사 연구하다
GM의 컨설턴트로 초빙된 1943년 당시 ‘매니지먼트’를 주제로 한 서적이나 논문은 한심할 정도로 적었다. 나는 GM을 조사하는 일에 점점 열을 올리게 되었다. 때마침 1923년부터 최고경영책임자의 자리에 있던 앨프레드 슬론의 지휘 하에 GM은 자본가가 아닌 경영전문가가 운영하는 근대적인 조직으로 대전환 중이었다. 조사하는 18개월 동안 시보레나 캐딜락과 같은 모든 사업부와 미시시피강 동쪽에 있는 공장의 대부분을 방문했다. 매니지먼트의 연구 대상으로서 이보다 뛰어난 것은 없었다.
투자수익률의 충격
브라운 씨는 투자수익률을 발명했으며 더 정확히 말하면 최초로 투자수익률의 개념을 체계화한 사람이라고 드러커 박사는 말한다. 일본 기업이 매상이 아니라 투자수익률에 바탕을 둔 전략을 짜게 된 것이 1990년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브라운의 존재는 미국이 자본주의 국가로서 역사가 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놀라운 것은 뉴욕 주식시장이 역사적인 하락을 기록하고 대공황의 방아쇠를 당긴 1929년 시점에서 이미 드러커 박사 자신도 투자수익률 등에 관해서 배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19. 특이한 경영자 앨프레드 슬론과 대면하다
1944년 GM의 스타 앨프레드 슬론을 처음 만났을 때는 솔직히 좀 실망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가 어떻게 거대 조직 속에서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남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며, 경영자로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개인적인 감정을 경영에 이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이상할 정도로 철저했던 것이다. 슬론은 “직장에서 친구를 만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특정 사람을 편들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며, 스스로 후계자를 지명하면 “똑같은 인간이 뽑히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바람직하지 못한 경영자가 된다.”라며 후계자 선정에도 사심을 배제했다.
상냥한 미스터 GM
슬론은 회사에서 언제나 딱딱했으며 크게 웃는 일도 농담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생활에서는 전혀 달랐던 것 같다. 드러커 박사에 따르면 GM 초기에 슬론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동료들 사이에서 생활했지만 최고 경영자가 된 1920년 이후로는 사내에서 스스로를 ‘미스터 슬론’으로 부르게 했으며 동료나 부하를 부를 때도 ‘미스터’를 반드시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20. 슬론의 구원
제너럴 모터스의 조사를 마치고 그것을 『기업의 개념』으로 정리하여 간행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의 일이다. 그 책은 GM 경영진이나 출판사의 예상을 뒤엎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매니지먼트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낯설고, 또 학문으로서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학계에서 ‘수상한 친구’로 취급받게 되었다. 어느 서평에서는 ‘가격의 이론 등에 관해서 분석이 부족하다’라고 비판했고 조사 당사자인 GM에서도 호된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미스터 GM'인 앨프레드 슬론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나의 책을 화제로 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번은 『기업의 개념』에 대응하는 회의가 열려 내가 집중포화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변호해 주었다. 사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슬론과 오랫동안 교류하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고향 버몬트
GM의 컨설턴트를 하고 있을 무렵 드러커 박사는 미국 북동부의 버몬트에 자리한 베닝턴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도 교수직을 제안 받았는데 베닝턴을 선택한 이유로는 그곳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배우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직접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는 더 이상 좋은 환경은 없었던 것이다. 베닝턴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산업인의 미래』와 『기업의 개념』을 간행했으며 이들 두 책과 『경제인의 종말』은 초기 3부작으로 칭해지고 있다. 뉴욕시대에 태어난 장녀와 장남을 포함해서 버몬트에서 차녀, 삼녀가 태어나 6인 가족이 되었던 버몬트를 드러커는 ‘세계 최고의 고향으로 느껴지는 장소’라고 부른다.
21. 분권제의 붐을 일으키다
1946년 간행된 『기업의 개념』으로 인해 ‘분권제’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분권제란 실질적으로 일본이나 유럽의 사업부제와 같은 것이다. 이 책은 조사 당사자였던 GM에서는 거부당했지만 다른 대기업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포드자동차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그야말로 경영 조직을 GM식 분권제에 바탕을 둔 조직으로 재편성한 최초의 대기업이었다. 경영부진에 빠져있던 제너럴 일렉트릭(GE)도 1950년 GM식 분권제를 도입하였고, GE의 개혁은 다른 대기업이 배워야 할 모델이 되었으며 그 후 20여 년에 걸친 조직 개혁 붐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렇듯 분권제는 특가 상품처럼 취급되어 대기업은 물론 대학이나 교회 등도 분권제를 채용하게 되었다.
윌슨- 드러커법
“엘리사법의 골자는 윌슨과 내가 집필한 것입니다.” 엘리사법이란 1974년에 제정한 미국의 연방법인 종업원퇴직소득보장법인데, 드러커 박사가 경영학 분야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실적을 남겼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가 연금의 세계에 혁명을 가져다줄 정도의 프로젝트에 종사했다는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22. ‘지식노동자’를 평생의 주제로 삼다
GM을 조사하면서 가장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책임 있는 노동자가 운영하는 자치적인 공장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시이기 때문에 관리자가 부족했지만 노동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연대하여 품질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상황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책임 있는 노동자’라는 개념은 그 후 ‘지식 노동자’로 바뀌어 내 일생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연금기금사회주의
윌슨의 지도로 GM이 새로운 연금제도의 창설을 결정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 제도의 골격은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GM의 연금기금이 탄생하자 1년이 채 되지 않아 GM식 연금기금이 새롭게 8,000개나 발족했으며 기존의 연금기금도 모두 GM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순식간에 연금기금사회주의의 토대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누구나 연금기금사회주의를 의식하고 있다. 거대 연금이 투자한 기업에 압력을 가해 최고 경영자를 바꿔버리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은 기업통치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23. 경영컨설턴트의 탄생
1950년대 들어 GM 이외의 기업으로부터도 컨설턴트 업무가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대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즈로빅, IBM 등이 고객사였다. 이렇게 업무가 들어온 것은 GM식 분권제가 붐을 이룬 것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GE는 특별했다. ‘경영컨설턴트’의 탄생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GE에서 분권화 등의 조직 개혁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부사장인 헤럴드 스미디였는데, 그는 나를 GE로 불러들인 장본인이었다. 어떤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제안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부서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를 고민하다 나와 스미디가 함께 고안한 명칭이 ‘경영컨설턴트부’였다. 경영컨설턴트라는 말은 근대적인 경영컨설턴트업의 창시자인 마빈 바우어에 의해 세계적인 컨설팅회사로 성장한 맥킨지에 적용되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매니지먼트의 발명
드러커 박사는 “진짜 매니지먼트를 발명한 사람은 메리 파커 폴렛 혹은 앨빈 도트”라고 말한다. “매니지먼트라는 말에 현대적인 의미를 처음 부여한 것은 도트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빌렸을 뿐이다.” 그러나 박사는 GM, GE 등의 대기업을 상대로 십년 이상 계속해 온 컨설턴트로서의 경험을 살려서 『경영의 실제』를 집필했고 그 가운데서 매니지먼트의 체계화에 성공했던 것이다. 『경영의 실제』가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매니지먼트라는 말도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24. 매니지먼트를 강의하게 되다
제너럴 모터스의 조사를 계기로 컨설턴트로서 활약함과 동시에 대학교수로 강의도 하고 있었던 나는 1949년까지 7년간 일하고 있던 버몬트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계약했다. 콜롬비아를 방문했을 때 아이젠하워가 재정난을 이유로 최종 계약의 서명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작스런 실업으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지하철역을 향했을 때 그곳에서 뉴욕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낯익은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채용되어 뉴욕 대학에 매니지먼트를 창설하고 학부장으로 취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행운의 여신이 또다시 내 편이 되어준 것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 업무
드러커 박사는 커다란 조직의 관리자로 일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그에 대해 그는 “관리 업무는 재미없었고 나는 그것을 아주 싫어했다. 원래 대조직 속에서 일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25. '민영화‘ 개념이 정책에 반영되다
1960년대에 들어서 『결과를 위한 경영』, 『목표를 달성하는 경영자』, 『단절의 시대』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평가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내가 만들어 이 책들에서 사용한 ‘민영화’라는 조어가 영국 보수당의 기본 정책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후일 대처 정권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일본화 수업
드러커 박사는 62세가 되던 1971년에 LA근교에 있는 클레어몬트로 이사를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후 때문이었고, 다른 이유는 클레어몬트 대학 때문이었다. 드러커는 그 대학으로부터 ‘대학원에 매니지먼트학과를 창설하려는데 협력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그것을 매력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클레어몬트에서 일본화에 관해서 5년간 가르쳤는데 수업 중 유일한 교재였던 것은 그의 일본화 컬렉션이었다.
26. 일본 회화와 최초의 방일
처음으로 일본을 방일한 것은 1959년이었다. 하코네에서 열린 일본사무능률협회 주최 세미나에서 약 50명의 경영자를 상대로 강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세미나 중 ‘컴퓨터란 정보이며 정보에 따라 경영의 방법이나 사회의 기능도 변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참가자는 한결같이 공상과학적인 발상이라고 반응했다. 소니의 모리타 씨와 다테이시 전기의 다테이시 씨, 그리고 NEC의 고바야시 박사만이 예외였다. 한편 일본 방문을 흔쾌히 승낙했던 또 다른 이유로는 일본화를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나는 영국 최초의 일본 회화전이 열리고 있었던 때 그림을 보고는 금세 일본화에 매료되었고 그 후 줄곧 일본화 중독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모리타 아키오와의 만남
드러커와 가장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일본인 경영자는 소니의 공동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인 듯하다. 두 사람이 1953년에 뉴욕에서 첫 대면했다는 것은 드러커 박사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모리타와의 이야기 등을 생각하면 1960년대의 고도 경제성장기를 지탱한 일본의 경영자에게 다양한 조언을 제공한 서양인 중 한사람이 드러커 박사라는 점은 틀림없다.
27. 내 인생에 은퇴란 없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행복한 인생을 보내왔다고 생각한다. 네 자녀들 모두 건강하고 지금도 자주 찾아와 준다. 1970년대 이후는 무엇을 해왔는가? 이전과 똑같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2년에 한 번은 책을 내고 컨설턴트 일을 해왔으며 일본의 친구들과도 줄곧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주력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하나는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 있는 다수의 소규모 대학이 공동으로 기록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분권화, 목표 관리, 지식노동자, 민영화 이 모든 것은 내가 만든 조어이며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지도 모른다.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훈장 ‘자유의 메달’도 수상했다. 그러나 유명해지는 것만이 인생을 측정하는 잣대는 아니다. 제일 처음 밝혔듯이 내게 ‘은퇴’란 단어는 없다.
역사의 증인
인터넷 관련 주식의 급등 등으로 2000년 절정에 달한 기술주 거품, 거품이 붕괴한 후에는 엔론 사건 등 기업스캔들이 속출했다. 이에 대하여 드러커 박사는 “만일 엔론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매우 놀랐을 것이다. 거품의 발생과 붕괴를 몇 번이고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4회나 5회 정도 될 텐데, 붐이 지속된 후에는 반드시 스캔들이 뒤따른다. 이것은 경험에 따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반응을 보였다. “붐이 끝나면 기업도 성장 둔화는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경영자는 성장 둔화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분식회계를 통해 이익 성장이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결국 거품은 꺼지고 속임수는 드러나게 된다.” 한 세기 가까이 살면서 정치, 사회, 경제, 철학, 경영 등을 모으고 체험하고 세밀하게 관찰해 온 역사적 증인의 말이기에 더더욱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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