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감정을 이해하면 치유의 길이 보인다. 목회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악한 마음의 소유자가 선한 양심의 사람이 되고 술주정뱅이가 맑은 정신의 소유자로 변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이 희망과 용기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 등을 보는 것이 목회의 의미요 재미다. 목회자들의 탈진이 바로 이런 변화를 목도하지 못할 때 주로 발생한다는 점은 목회가 무엇이지를 잘 암시 해준다 하겠다. 따라서 우리 목화자들은 인간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갖은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 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도구요 길로서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한 서구 철학자의 명언이 금과옥조가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생각과 지식과 논리와 합리적 설득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지름길이요 확실한 방법이라 여겨왔고, 또 이를 실천했다.
그러나 지나간 한 세기 현대 심리학의 발전과 상담 및 심리 치료의 숱한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전통적 생각들이 대부분 이론과 생각인 경우가 많을 뿐 실제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임이 밝혀졌다. 사람을 강하게 움직이는 것은 생각보다는 느낌과 감정이며 법보다는 주먹이 언제나 실제 생활에서는 가깝고 감정이 상하면 아무리 합리적 사고가 그 반대를 외치더라도 마음은 그 상한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아니 사람들은 이런 진실을 확실히 알고 체험해 오고 있었다. 단지 합리와 사고를 중시하는 현대 문명의 틀이 이런 상식을 부인하거나 부정하도록 강요하고 있었을 뿐이다. 상담과 치유를 중심으로 한 목회가 한국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특히 ‘내적 치유’나 ‘상한 감정의 치유’ 등은 이제 목회상의 가장 흔한 주제어가 되었다. 그러나 왜 어째서 감정이 그렇게도 중요한 요목으로 등장하였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충분치 않은 듯 보인다. 그리고 이 이해는 보다 과학적이며 생리적인 이해가 덧붙여져야 한다.
감정의 생리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이게 하고 깨달음으로 생생하게 하는 일에 감정이 개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우리 인간의 뇌가 척추의 장 끝부분에 연결되어 있는 뇌간을 중심으로 한 ‘중심 핵’과 우리 뇌를 보호하는 뼈 밑에 가장 넓게 존재하며 흔히 뇌를 그릴 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대뇌’즉 신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던 중 이 대뇌 속 싶은 곳 중심 핵과 대뇌 사이에 그 기능과 구조가 따로 분별될 수 있는 기관이 존재한다는 학설이 지난 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대뇌의 가장 자라에 존재한다. 하여 명칭도 ‘변연계’라고 불리는 이 기관의 존재를 주장한 이는 미국의 신경 의학자 폴 매클린이고 이런 그의 이론을 ‘삽중 뇌이론(truune brain theory) 이라 한다 이제는 이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감정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 이론을 매우 중요하다. 변연계는 구피질로 이뤄졌으며 해마체, 편도체, 중격, 미상, 시상 시상하부 포함하고 현생 인류의 대뇌가 발달하기 전의 원시적 두뇌로 보이는 기관이다. 뇌의 중심 핵이 신체의 생리 작용과 생존에 필요한 원초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면 변연계는 이에 더하여 원시적인 기억 사고 감정 작용 등을 하는 초기 대뇌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 및 의지 작용에 관여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복숭아씨 모양이라 하여 ’편도체‘라 불리우는 기관이 바로 사람의 감정 작용에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기관이 망가지면 감정적 단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슬픈 얼굴을 보고도 그것이 무서운 일을 만나도 전혀 그 위험성이나 무서움을 모른다. 이 기관의 어느 한쪽을 자극하면 극도의 화를 내거나 다른 한쪽을 자극하면 극도의 공포심도 나타낸다고 알려지고 있다 더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편도체가 망가질 경우 사람들은 관계를 맺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까지도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약속 날짜를 무슨 요일에 잡을까 하는 일에 끝없이 저울질만 할뿐 어느 요일이라고 마음을 정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결국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단순한 계산이나 계획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 판단이 개입될 때 비로소 동기를 갖게 되고 일을 수행하는 추진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신경 의학자들은 감정이 단순히 마음의 어떤 상태 혹은 색조(tone)만이 아니라 사실은 원초적이고 중대한 판단의 형태임을 추론한다. 즉 감정이란 단순히 육신이나 마음이 어떤 색채를 띤 상태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떤 판단이나 사고 즉 생각의 한 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더욱이 이 판단은 단순히 ’4는 3보다 크다‘ 식의 내용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저것을 먹으면 배가 아프게 된다. ‘저 곳에 가면 곰을 만난다.’는 식의 생명 유지나 쾌 ․불쾌, 이익․손해 등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 한다. 또한 인간의 감각과 지각 및 사고 행동 작용은 단순히 뇌의 특정 구역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뇌의 여러 부분이 합동하고 연합하여 일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모든 감각 및 지각인지, ,판단, 행동 작용에 편도체를 통한 이러한 감정적 색채가 스며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기억이나 생각에는 우리가 알든 알지 못하든 어떤 감정적 색채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비 전술적 기억:감정 사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기억이다. 치매 환자에게서 우리는 그 극명한 진실을 보지 않는가. 자신의 이름도 잊고 사는 거리 이름도 잊는다. 더욱더 진행이 되면 자신의 식구도 못 알아보고 더 나아가면 심지어 세수하는 것 옷 입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과 옷 입는 것을 잊어버리는 데는 기억의 종류에서 차이가 난다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것을 두 종류의 기억으로 나눈다.
하나는 진술적 기억( declarative memory)이라 하여 말로 할 수 있는 기억이다. 이를테면 열쇠를 찾다가 ‘내 열쇠는 응접실 탁자 위에 놓여 있다.’라고 기억해내는 경우의 기억이다. 실재로 우리들이 망각한다고 걱정하는 대부분의 기억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에 비하여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기억이 있으니, 그것이 이른바 비 진술적 기억(non-declarative memory)이다. 이를테면 어려서 배운 자전거 타는 법 같은 것들은 매우 오랜 기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말로 해보라고 하면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만이라도 자전거 위에 앉게 되면 그 기억이 작동하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암묵적 기억’혹은‘무의식적 기억’ 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이 되어 있다가 언제라도 상기되어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많은 감정 작용이 이런 비 전술적 기억의 형태로 이뤄지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유명한 클라파렌드는(Edourd Claparede) 벌써 한 세기 전쯤에 사람의 기억이 다른 종류로 구별되는 것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그는 매일 방문해도 늘 자신의 이름을 물어 보는 기억상실증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2분의 간격만 있어도 그 이전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였다.
언제나 방문하면 이렇게 이름, 직업 등을 되묻고 악수를 하면서 하루의 진료가 시작되곤 했다. 어느 날 클라파렌드는 손가락 사이에 핀을 꼽고 이 환자를 방문했다. 되풀이되는 절차 후에 악수를 하는데 갑자기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손을 황급히 뺐다. 핀에 손을 찔렸기 때문이다. 다음날 다시 의사가 방문했을 때 모든 절차가 다시 되풀이되었다. 악수하는 차례가 되었는데 환자가 손을 내맬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파렌드가 왜 손을 내밀지 않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환자는“나도 모르겠어요”라고 답변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왜 손을 내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나 ‘악수하면 피에 질려 아프다’는 그 감정적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그의 마음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종류의 감정적 기억들이 이렇게 ‘암묵적’ 무의식적‘ 비 진술적’ 기억의 형태로 남아 우리의 삶을 엮어 가고 있다 특히 이런 감정적 무의식적 기억들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실제로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얼개들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알 수 없는 불안의 감정.이해가 되지 않는 분노의마음.혹은 이유 없이 슬프거나 기쁜 등의 일상적 생활 속의 감정들이 바로 우리가 모르는 감정적 기억들에서 연유함을 우리는 모르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술적 기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체라는 기관은 생후 만3년 정도 지나야 성숙되어 비로소‘기억’을 장기로 저장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점이요 이에 비해 편도체는 태어나면서 이미 감정 기능을 담당하는 정도로 발달하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오랜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아주 빨라도 네 살 내지 다섯 살 때의 기억인데 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감정적 기억은 젖먹이 때의 기억도 우리의 마음속에 저장되어 작동하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감정의 변화: 새로운 목회 과제 사람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의지 작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감정이기 때문에, 감정을 알아차리고 조절하며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곧 성공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등장하게 됐다. 이것은 편리와 속도 자동화와 효율의 극대를 이루는 물질 문명의 발달에 비하여 우리의 내적 생활의 황폐화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말이다. 따라서 목회는 ‘영혼에 대한 보살핌’으로 언제나 인간의 내적 세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지만 이제는 그 중에서도 특히 감정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화나 분노. 우울이나 불안, 죄책이나 절망 같은 부정적 감정에 대하여 보다 주의 깊게 배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도덕감이나. 영적 순수를 강조하는 우리 교회의 가르침과 연관하여 더욱 중요한 면모를 지닌다. 실제로 신앙생활은 감정에 대한 이해와 조절을 필요로 한다. 단지 생각과 개념으로만 통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때문에 종교는 절대적 의존의 ‘감정’ 이라고 말한 서구의 신학자 슐라이마허가 이해될 만하다 입으로는 구원이나 은총을 말하면서 내면으로는 분노나 화, 절망과 우울, 불안과 죄책의 감정을 맛보면서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의 원리들 목회가 이런 부정적 감정과 그런 폐해들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해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리에 대한 확인과 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 중요한 원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보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현장에서 작용하여 보기를 바란다. 첫째, 감정은 편재( 遍在)한다. 감정을 중시하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인간의 변화를 모색하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감정이 모든 인간의 심리 작용에 언제나 어디서나 스며들어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중립적인 일은 없다. 모든 것은 싫거나 좋다는 쾌․불쾌의 연속상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심지어는 아라비아 숫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선호도가 있을 수 있다 왠지3은 호감이 가나 4는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사람에 대한 인상도 마찬가지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선입 감정이 존재하는가! 둘째 감정은 일종의 판단이다. 감정은 단순히 쾌․불쾌 혹은 기쁨이나 슬픔 등 마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판단임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유 없이 우울하다고 느낄 때 그것은 단순히 슬픈 감정을 맛보고 있다는 현상일 아니라 나는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어떤 판단의 형태일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은 아직 명제화되지 못한 형태의 판단이요 직관적 선고라고도 볼 수 있다. 셋째 감정은 신체적 /생명적 상태,즉 에너지이다. 우리말의 ‘기가 막힌다’는 표현처럼 감정과 신체의 상태를 잘 묘사하는 말도 드물다. 기분이 꽉 막힌 감정은 곧 몸이 답답하고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듯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감정이 몸의 상태 곧 생존의 상태 혹은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를 말하는 것임을 웅변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존이나 존재가 힘 곧 에너지에 의존하여 이뤄진다고 볼 때 감정은 바로 이 에너지의 어떤 상태임을 상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 개재될 때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힘을 받게 되고 ‘정열 없이 이뤄진 어떤 위대한 일도 없다’는 말이 뜻을 갖는다. 이처럼 감정이 신체적 생명적 상태이기 때문에 감정과 몸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캔디스퍼트(Candace Pert)라는 미국의 신경 생리학자는 ‘감정도 생리를 담당하는 분자의 수준에서 조절된다’는 이론을 발표하여 신체와 감정이 극미의 세계에서 교류함을 증명했다. 예컨대 걷는 것이 효과적인 우울 퇴치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즉 운동 곧 신체적 운동이나 개입이 가능하듯 신체의 건강이나 상태를 위해 감정의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 지도 자명해진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우울한 사람의 면역체가 상당히 취약해짐이 널리 보고되고 있다 이는 결혼을 앞둔 사람이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넷째 감정은 심리적 에너지로 신체와 정신의 가교이다. 감정이 신체적 상태이고 생명의 에너지 형태를 담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원시적 사고요 판단임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감정이 심리 작용의 근원적 힘이 되는 신체적 에너지와 대뇌에 의한 종합적 정신적 사고를 이어주는 중간 상태를 가정 할 수 있다. 바로 이 역할을 감정이 담당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감정과 원시적 사고를 담당하는 변연계가 생리를 담당하는 뇌의 중심 핵과 제일 나중에 생성되는 대뇌의 중간에 자리한다는 해부학적 구조도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감정은 합리적 사고와 신체적 대사 사이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일종의 모듈 혹은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고 하면 매우 적합하다. 다섯째 감정은 의식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의 상태요 기억이다. 감정은 인간의 신체 및 심리 작용에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나의 상태요 과정이다. 이것을 의식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인식 대상으로 자각하게 된다. 이것은 언어화 이전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이요 바로 이렇게 인지되기 이전의 무의식적 암묵적 비언어적 감정은 우리의 인식적 조절 범위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해롭고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들 가령 분노나 우울 등이 우리의 삶에 해악을 가져오는 경우 이것들이 의식되지 않고 언어화되지 못할 때 그 폐해는 더 커진다. 이것은 감정이 의식의 통제 아래에 올 수 있고 훈련과 노력을 통하여 그 내용과 강도 및 운동성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여섯째 감정적 기억도 단서를 통해 상기된다. 일반 기억이 어떤 단서나 힌트를 통해 상기되듯이 감정적 기억도 마찬가지로 어떤 단서나 정황 등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 놀라는 것이 쉬운 예이다. 따라서 학대받은 어린이로 커서 어른이 된 사람이 권위자 앞에 설 때에 뜻 모를 분노나 불안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단서의 유사성이나 연관성에 유래한다. 그러므로 해악의 감정들을 다스리는 방법이나 처리 기술에 바로 이런 기본적 원리가 중요하다. 일곱째 감정도 하나의 단서로서 많은 기억의 바탕이 된다. 우울한 날은 우울한 기억들이 많이 떠오른다. 음악 교실에 들어가면 음악에 관한 기억들이 더욱 많이 떠오른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일반 기억들도 감정에 의존하여 저장되고 상기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감정 자체가 어떤 중요한 기억의 단서로서 활동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감정이 일종의 해석의 렌즈로서 작동함을 알 수 있다. 마치 붉은 안경을 끼면 세상이 붉게 보이듯 어떤 감정 아래 있으면 세계를 바로 그 감정의 색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노 분노는 단순히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세계를 분노라는 해석적 렌즈를 통하여 보게 하는 강력한 안경이나 굴절된 시각과도 같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부정적 감정이 가지는 폐해의 심각성이 있다. 감정의 치유를 위하여 가슴에 멍이 맺히고 불을 묻어 놓은 것 같은 우리 민족 특유의 울화병 감은 경우, 우리는 감정이 얼마나 힘이 세고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의 마음에 한(恨)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이를 응변한다. 이러한 감정들 특히 삶에 해와 악을 저질러 놓는 감정들의 치유에 이상의 원리들이 알려지는 지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가장 단순하고도 널리 쓰이되 또한 가장 효과가 없는 방식이 ‘억압’과‘ 억제’의 방법이다. 상한 감정을 부인하거나 방치하고 혹은 꾹꾹 누르고 참는 방식이다.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의 부정적 감정을 이렇게 치리한다. 그리고 그 억누른 감정의 반동으로 신체적 질환을 앓거나 마음앓이를 하면서 고통스런 삶을 보낸다.19세기말 20세기 초엽 히스테리가 ‘억압된 감정의 전환’으로 이해되면서 정신 분석이 탄생하게 된 연유는 널리 알려져 있다. 현대 상담과 심리 치료가 발달하면서 감정의 치유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때에 주 도덕적으로 먼저 떠오른 것이 일종의‘표현’요법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와서 인지적 요법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표현/정화 요법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고 쏟아냄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이 요법은 배우지 않아도 알고 행하는 것이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림으로 우리는 그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한다. 표현과 표출 방식은 의외로 쉽고도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글쓰기이다. 무례한 전화를 받을 때 맞대고 욕을 하거나 화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 때 전화기 옆 메모지에 자신의 감정이나. 그 감정을 나타내는 적절한 말을 낙서하듯 씀으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 이러한 임상을 통한 예는 수없이 많다. 미국 남 감리교대학교의 제임스 페넨베이커 교수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15분 내지 20분씩 5일 이상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이나 기억 혹은 살면서 괴로웠던 경험들을 일기처럼 쓰도록 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6개월 여의 생활을 조사해보니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면역 기능이 상승하여 건강해졌고 병원 방문이 줄었으며 직장 결근이 줄었고 신체적으로는 효소 활동 등이 증가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즉 단순히 종이 뒤에다가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해 보여준다. 일기라든가 혹은 자신의 아픈 감정을 토로하는 기도문, 나아가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자성적 자서전등이 얼마나 상한 감정들을 치유하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실제로 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것은 비단 글로 Trl만이 아니라 말하기를 통해서 이뤄짐은 두말할 나위 없다. 1990년대 미국 의학계를 뒤흔들었던 스탠퍼드 의대의 데이비드 쉬피겔 박사의 유방암 환자 실험은 매우 유용하다. 전이된 유방암 환자들을 일상적 의료만 받는 표준적 치료집단과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끼리 만나 자신들의 아픈 체험들을 이야기하는 실험 집단으로 나눴다. 5년 후 모든 환자들이 사망하고 이 두 집단 사이의 평균 투병기간을 비교하였더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아픔을 서로 나눈 그룹이 흥미로운 실험 결과가 나왔다. 결국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이 단순한 사실이 암세포의 공격을 18개월 이상 더 막아내는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합리적 사고요법 감정이 일차적으로 변연계를 통하여 일어나고 모든 경험에 덧씌워진다면 인간의 대뇌 그 중에서도 모든 정보를 총괄하여 종합, 기획, 실행 명령을 내리는 대뇌의 전두엽(이미 뒤 부분에 위치한 신 피질 영역)은 일차적 감정 작용을 인지하고 전체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나서 상대를 때리려 손이 올라가는 일치적 심리 작용이 일어 날 때 ‘아니 이러면 믿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더구나 이러면 법의 심판을 받을 수도 있지’ 하면서 손을 내리고 다른 방식으로 화를 처리하려는 사람은 바로 이 전두엽의 충고와 지시를 받는 사람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다만 신경적 용상 손이 올라가는 기제가 먼저 이뤄지고 전두엽의 지시는 신경회로 상 더 많은 연결 망을 필요로 하고 따라서 시간이 좀더 오래 걸리는 것뿐이다. 참을 인(忍)자 세 번 쓰면 살인도 피한다.‘는 말이 이런 기제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 사고 요법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한 인식이 전제된다. 즉 자기의 감정이 어떤 상태에 있음을 알아차림으로 이런 기제는 가능하다. 따라서 상대에 대한 공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상태 특히 자기의 감정적 내면의 상태에 다하여 공감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공감(自己共感)이 필요하다. 이런 연후에 그에 대한 합리적 사고나 합리적 제어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기도와 감정 부정적 감정이나 무의식적 감정적 기억으로 인한 아픔 등을 치유하는 일에 우리의 기도생활이 얼마나 큰 효응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다만 기도의 내용과 방식을 보다 감정의 원리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기도란 내면의 성찰이요 자신의 모든 느낌. 생각. 의지 적용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적 성찰과 고백을 통하여 가장 효율적인 내면의 인식 및 표현이 이뤄지는 것이다. 시편 기자들의 눈물어린 자신의 내면 고백이 얼마나 그들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였겠는가! 또한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고성으로 드리는 통성기도 만이 감정으로 정화하는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서 종이 위에 써서 드리는 기도도 더욱더 큰 자기 공감과 자기 인식에 이르는 지름길일 수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우리 교회 내에서도 퍼지기 시작하고 있는 짧은 어구의 반복 기도들, 예를 들어 ‘예수 기도’같은 기도들은 성급하고 조절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밀려올 때 제어하는 최상의 방식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영성생활에 더하여 기독교의 오랜 전통인 명상과 관상 기도 등도 바로 이런 내면적 치유의 목회를 위해 보화를 묻어 두고 우리더라 캐내어 활용하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지키기 요즘에 먹고 살만해져서 그런가? 생존의 문제에 급급했던 때는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파탄에 이르는 가정이 급증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잦다. 지난 2월에는 대구에서 지하철 참사가 있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한 남자가 지하철에 불을 지름으로 벌어진 참극이었다. 왜 이런 흉측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으나 근본을 따지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그렇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저급한 문화에 오염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무한 경쟁, 적자 생존의 경제 체제는 인생 낙오자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이들의 마음속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목회를 하면서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수많은 아내들, 남편들. 부모들. 아이들에게서 어떤 처방을 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쉼’과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제때 공급하고 있는가? ’마음 다스림‘을 구호로 유사종교 단체들이 번창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열등한 종교인가.?물론 아니다. 기독교인만큼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 뿌리에 와 닿은 종교도 없다. 마음을 다루는 기독교적 방법은 정말 아름답다. 이 글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마음 다스림의 예술을 증언하고자 한다.
두 가지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 속이다.”유네스코(UNESCO)헌장은 그와 같이 시작한다. 이 헌장은 두 가지 진실을 말한다. 하나는 인간은 ‘전쟁’이라는 외적 현실과 ‘마음’이라는 내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진실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 현실은 내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진실이다. 내적 현실이 외적 현실의 뿌리라는 것을 잠언의 은유가 잘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15:15b)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 자주 망각한다. 외적 현실의 문제를 내적 현실과는 연관성에서 보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삶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알콜 중독이라는 외적 현실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진정한 치유와 깊이 있는 소통은 불가능하다. 문제아동을 상담할 경우 그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외적 현실)만을 가지고 그를 훈계하려 든다면 그 상담이 성공할 확률은 정확하게 제로이다. 물론 외적 현실은 나름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그러나 외적 현실의 시스템을 운용하는 주체가 사람이고 보면 외적 현실의 시스템은 언제나 주체의 내적 현실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는 나름의 작동 체계를 갖고 있는 하나의 독립된 메커니즘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내적 현실에 따라 다르게 활용된다. 내적 현실이 성적 욕망으로 꽉 차 있는 사람들에게서 컴퓨터는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내적 현실이 거룩한 정서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그 정서를 풍요하게 하는 훌륭한 성소로 변형된다. 마음을 다스리는 삶의 예술을 습득하려면 내적 현실이 삶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내적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함께 그 실상을 명료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기슬을 습득하기 위해 내디뎌야 하는 첫 걸음이다.
마음과 영의 구별 내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긍정적인 경험과 부정적인 경험 두 가지이다. 인류는 그 동안 이 두 경험을 일컫기 위해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에 왔다. 영, 영혼 혼 마음. 의식. 무의식. 자아. 자기 전 의식. 잠재 의식.등 그리고 사람마다 함축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이 글에서는 ‘마음’과 ‘영’을 선택하여 ‘마음’은 내적 현실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영‘은 내적 현실에 대한 긍정적 경험과 관련시키고자 한다. 이제 내적 현실에 대한 두 경험 즉 마음과 영에 대한 경험을 구별해보자. 한 초등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성적표를 받아 왔는데 성적이 형편없었다. 아이의 엄마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내적 현실A) 너는 누굴 닮아 그러냐? 는 둥 ’학원 보내 줘 과외 시켜 줘 정말 안 해 준 게 없는데 성적이 이 모양이냐? 는 둥 할 말 못할 말을 아이에게 퍼붓는다. 아이는 유구무언이다. 전후사정 헤아리지 않고 닦달하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죄인이 된 느낌으로 자기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된 느낌으로 자기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저주한다. 엄마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열등감과 원망이 뒤섞이면서 눈물이 흐른다. 그러다가 잠이 든다. 그의 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맺혀 있다. 얼마 후 엄마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후회한다. 아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인기척에 아이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잠든 체 한다. 엄마가 아이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인다. ‘엄마가 너무 심했다. 엄마를 용서해 줄 수 없겠니?(내적 현실B) 아이의 마음속에는 쌓인 원망이 스르르 녹는다. 아이의 형편없는 성적에 대해 엄마가 경험한 내적 현실은 두 가지로 아주 대조적이다. 처음에는 화와 분노로 가득 찬 내적 현실을 경험하였고(A) 그 다음에는 후회와 연민으로 가득 찬 내적 현실을 경험하였다.(B)그리고 엄마의 내적 현실이 변함에 따라 아이가 경험하는 외적 현실 역시 지옥과 천당을 오고 갔다. 여기서 이런 물음으로 던져 보자. 엄마의 경우 분노로 가득 찬 내적 현실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며 연민으로 가득 찬 내적 현실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엄마의 내적 현실A'가 외부 상황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라면 ’내적 현실B'는 외부 상황과 무관하게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성적이 떨어졌다는 외적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그 상황과 관계없는 ‘내적 현실B가 저절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있다 그라면’내적 현실B'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러한 예로부터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결론은‘마음’이 삶의 상황으로부터 유래하는 내적 현실이라면 ‘영’은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저절로 형성된 아름다운 내적 현실의 뿌리/출처/근원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첫째 자신의 두 가지 내적 현실의 경험을 스스로 인지하라. 둘째 각각에 대해 스스로 이름을 붙여라(이 글의 경우 마음과 영) 이 둘을 분명하게 구별 하루 수 있도록 언제나 깨어 있어라. 마음의 형성 이제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앞에서 마음을 ‘삶의 상황으로부터 유래하는 내적 현실’이라 불렀다. 사람은 상장해 가면서 다양한 삶의 상황을 겪으면서 엄청난 양의 경험과 자극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경험과 자극의 양은 나아가 듦에 따라 폭발적으로 증폭된다. 그에 따라 마음도 점점 커진다. 마음이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갓난아이의 마음에 비해 어른의 마음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겁다. 그런데 마음은 본성상 부정적이다. 마음에 입력된 긍정적인 자극들은 의식의 표면에 머무르면서 쉽게 표출되고 발산되지만. 부정적으로 경험된 자극들은 계속 억압되면서 마음에 쌓이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오래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부정적인 요소들로 가득 채워지는데 이때 마음은 온갖 부정적인 기억과 상상과 생각들 어둡고 우울한 정서들로 가득 찬 불결한 창고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구성 요소를 지․정․의 세 가지 차원에서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 잡념 사념 관념들 그리고 어두운 기억과 혼란스러운 상상들이 어지럽게 난무한다. 한 번 왔다가 사라지는 생각들도 있지만 고착된 생각들도 있다 생각이 고착되는 까닭은 한 가지 반복할 때 생각은 덩어리진다. 선입견 고정관념 강박관념 따위가 그것이다. 덩어리진 생각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생각의 주체가 생각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덩어리가 생각의 주체인 인간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정서적인 차원에서 마음은 악성 감정과 상한 감정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염려 불안 두려움 절망 허무 공허 무의미 우울과 같은 실존적 감정으로부터 자아와 관련된 열등감 패배 의식 자기 비하 우월감 자기 도취 같은 감정 그리고 관계의 차원에서 발달하는 부러움 시샘 질투 미움 증오 분노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에 감정은 저장된 감정은 실로 다양하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 역시 외적 상황을 통해 형성된 것들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의지의 차원에서 마음은 교만, 오만, 자만, 고집, 완고함, 강퍅함, 뒤틀림. 자존심 등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에너지로 들끓고 있다. 지․정․의 세 차원에서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로 뒤범벅이 된 마음에 대해 예언자는 이렇게 묘사한다.“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미음이라(렘17:9)
이러한 생각의 덩어리 ,악성 감정, 완고함. 따위는 성장 과정을 통해 더욱 굳어지고 증폭되면서 마음을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점점 마음은 태산처럼 자라나 하나의 독자적인 권력(권세)이 되어 간다. 이제 한 개인의 마음은 인류의 모든 마음과 연대하면서 전인류적이며 우주적인 부정성의 덩어리로 발전한다. 그렇게 때문에 마음의 우주적인 부정성은 언제나 죄와 죽음 그리고 어둠의 권세와 관련된다. 마침내 마음은 사탄의 도구이며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며 사탄의 왕국이 되고 만다. 죄와 죽음과 어둠의 배후에 있는 우주적 권세에 대한 인격적 상징이 사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성의 전 인류적 연대 앞에서 죄와 음험한 권세 앞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죽기 전까지 거의 불가능해진다. 부정성의 인류적 연대 사탄의 우주적 권세와 연루된 마음을 도대체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인가? 핵심을 말하면 이렇다. 긍정성의 전인류적 연대 다시 말해 ‘영의 연대’를 형성하는 길이다. 이러한 ‘’영의 연대‘로 들어가는 길이요 문이신 예수그리스도와의 합일의 경지를 추구하는 길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 이 길을 걸어 가보자. 영으로서 영을 살라 영의 연대를 통한 마음의 다스림은 다음의 단계를 거친다. 첫째 영의 자각이다. 영의 자각이란 존재의 영적 차원에 대한 각성이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영(靈)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는 영을 ‘삶의 상황과 관계없이 저절로 형성된 아름다운 내적 현실의 근원/출처/뿌리’라고 규정 정해 보았다. 예를 들면 연민,측른지심,사랑,생명,진리.은혜,등 모든 긍정성과 관련된 사고 및 정서의 원천을 영이라 이름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우리는 상황이 변하지 않는데 자신이 변하는 경험을 한다. 어제는 너무 미워서 막 화를 냈던 사람인데 그 다음날 아침에는 갑자기 측은해 보인다. 그 사람에게 변한 것은 없다. 나의 내적 현실이 변했을 뿐이다. 화에서 측은지심으로 한 때는 불평과 원망을 갖게 했던 상황이 어떤 계기로 갑자기 고맙게 여겨진다. 상황이 변한 것은 없다. 역시 나의 내적 현실이 변했을 뿐이다. 불평에서 감사로 화를 내고 불평과 원망을 갖는 것은 삶의 상황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내적 현실 즉 마음의 작용이다. 그런데 사람이나 상황은 변한 것이 없는데 나의 마음은 전혀 다른 정서를 경험한다. 그 전혀 다른 정서의 출처는 어디인가.?즉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저절로 형성된 아름다운 내적 현실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을 바로 우리는 ’영‘이라 부르는 것이며 이러한 영적 차원에 대한 자각이 마음을 다스리는 고삐인 셈이다. 둘째 영의 차원에 삶의 입지를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영에 대한 자각을 여인이 자신의 배우자감을 발견한 것에 비유 할 수 있다면 영의 차원에 입지를 세우는 것은 그 배우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에 비유 할 수 있다. 사람의 거점/중심. 기반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친정집(마음)으로부터 시집(영)으로 이동 영의 영지(領地)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태도 없이는 결코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 마음의 층위에서는 결코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 그 층위를 벗어나야 한다 어둠과 씨름하는 것으로는 어둠을 물러가게 할 수 없다. 어둠을 이기는 것은 빛일 뿐이다.
셋째 영을 살아야 한다. 영을 자각하고 영의 차원에서 입지를 세우는 것은 이제 새로운 살림을 시작 한 것 일 뿐이다. 영을 살아야 한다. 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온갖 선하고 참되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정서들을 자유자재로 살아야 한다. 이른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일컬어지는 저 긍정성의 열매들이 삶의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야 한다. 그래야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으며 아니 그 자체가 마음을 다스린 표지가 된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집살이가 하루아침에 몸에 익겠는가? 귀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서 삼 년이요 말못하여 삼 년이요 석삼년을 살아야 시집살이에 익숙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영에 속한 온갖 아름답고 선하고 참된 본질들을 분별하며 그것들에 익숙해지며 그것들이 완전히 몸에 베게 하며 그것들을 온전히 살아 낼 때까지 최소한 시집살이 석삼년의 세월의 치열함이 필요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습관 마음의 준동 마음의 장난 마음의 폭력 마음의 권세에서 벗어 날수 없다.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 요약하면 ‘영으로서 영을 사는 것’이야말로 마음 다스림의 기본이다. 그 다음은 영으로서 영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영의 연대이다. 그러나 ‘영으로서 영을 사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과 영의 연대를 이룬다 할지라도 마음의 권세는 죄와 죽음과 어둠의 우주적 연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빈약한 영의 연대로는 번번이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적으로 각성되었다 가도 쉽사리 마음의 혼돈에 빠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각종 수행과 금욕과 명상 따위로 마음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착각 중의 착각일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개인적 수행의 실천은 개인적인 생애를 통해 형성된 마음의 세력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에 뿌리 내린 부정성의 전인류적 연대와 사탄의 우주적 권세를 깨트리기는 언제나 역부족이다. 마음의 우주적 연대가 깨지지 않으면 개인적인 수행을 통한 마음 다스리기는 언제나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무언가 엄청난 것이 필요하다 마음의 권세와 전인류적 연대를 능가하는 엄청난 영의 연대가 필요하며 그로부터 방출되는 우주적 긍정성의 무한한 주입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예수그리스도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을 통해 작용하는 죄와 죽음과 어둠의 권세를 깨트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사탄을 중심으로 한 부정성의 우주적 연대를 깨트린 우주적 사건이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영적 자각을 갖고 가장 완벽하게 영의 본질을 살았던 사람이 가장 흉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가장 비참한 죽음의 모습으로 처형당한 곳이다. 그을 죄인으로 정죄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를 죽였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를 패배시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렇다 유대 지도자들은 마음의 연대를 이루어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해 정죄의 칼날을 들이댔던 것이다. 마음의 우주적 권세를 깨트리신 예수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처형하고 패배시키고 있는 동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마음의 연대에 연루되어 있었던 그들 자신이 정죄받고 있었고 그들 자신이 처형 받고 있었으며 그들 자신이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아 그리스도에게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무심 (無心)이었던 것이다! 무심의 예수를 향하여 휘두른 정죄의 칼은 실상인즉 허공을 향해 휘두른 것이었다. 허공을 향하여 휘두르던 칼날은 부메랑처럼 그들에게로 돌아와 그들을 찌르고 만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얼마든지 경험하는 일이다. 미움이 없는 사람을 미워하면 그 미움은 미워하는 사람 자신에게 돌아간다. 분노하지 않는 사람에게 화를 내면 그 화는 화를 내는 사람 자신에게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무심 예수를 정죄하던 그 마음의 칼날이 그들을 정죄 하였고 예수그리스도를 죽였던 그 마음의 칼날이 그들을 죽였으며 예수그리스도를 패배시키고자 했던 그 마음의 칼날이 그들 자신을 패배시켰던 것이다. 마음의 연대는 결국 ‘수치의 연대’ 였던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예수님에게는 정죄당 할 마음도 죽어야 할 마음도 패배할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과 관련하여 공(空)이었다 허(虛)였다 무(無)였다! 낮아질 데까지 낮아짐으로써 더 이상 가난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가난하신 분이었으며 자신을 비우시되 더 이상 비울 것이 없을 정도로 마음을 비우신 분이었던 것이다 그 분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서 가장 완벽하게 가장 철저하게 가장 치열하게 ‘영으로서 영을 사신 ’분이었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육신조차도 영적으로 승화시키신 분이었다 결국 십자가 사건은 가장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죄의 우주적 연대의 고리를 깨트린 사건이며 그 사건은 가장 처절한 죽음의 모습으로 죽음의 우주적 권세를 깨트린 사건이며 그 사건은 사탄에 대한 가장 처절한 패배의 모습으로 사탄의 우주적 권세를 깨트린 시간이었다. 인류 역사 속에 이런 사건이 없었다. 이토록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마음의 우주적 권세를 깨트린 사건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으로서 영을 사는‘일은 결코 독자적으로 수행 될 수 없다 영으로서 영을 사는 우리의 수행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우리의 영의 연대의 중심에는 반드시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예수쟁이 영으로서 영을 살아가는 사람 예수쟁이란 어떤 사람인가? 첫째 온전한 영의 사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끊임없이 ‘영의 자극’을 받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의 자극을 통해 자신의 영을 자각하고 영적 차원에 입지를 세우고 예수처럼 영으로서 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둘째 예수그리스도의'십자가의 부활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그 참여를 통해 영으로서 영을 사는 일을 그리스도처럼 완성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사람들이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개인적 생애가 빚어낸 마음의 소용돌이를 다스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셋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우주적 영의 연대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마음의 전 인류적 연대 그리고 삶과 세상에 편만한 마음의 우주적 횡포를 극복하는 성스러운 과업에 참여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개인적이며 기본적이며 물질적이며 현세적인 축복만을 말하고 있는 예수쟁이들은 얼마나 초라하며 예수님을 메마른 교리와 형식 속에 가두고 있는 강단은 얼마나 기독교를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가?
문제는 그리스도와 진정한 사귐이 없는 것이 문제이지 마음 다르시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야 말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우주적 연대의 고리를 깨뜨린 해방과 구원의 공간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다스리는 결정적인 길이라고 한다면 마음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깊어지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리라. 맺는 말: 교회 성장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벗어나 필자는 한때 마음을 다르시지 못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실망스런 일들을 겪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미친 듯이 산을 드나든 적도 있었고 단순 작업에 몰두하려 애쓴 적도 있었고 무의식의 일지를 기록한 적도 있었고 예배 중독자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 효과란 일상의 가벼운 혼란이나 마음의 표충에 있는 상한 감정을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점점 더 마음의 권세에 놀아나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기 일쑤였다 마음은 전인류적 연대요 우주적 권세였기 때문이다. 태산보다 큰마음의 권세 앞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필자의 시도들은 너무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영과 마음의 변증법적 긴장을 경험하고 그것을 스스로 구별 할 줄 알게 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마음과 영의 맥락에서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통해 영으로서 영을 살도록 끊임없이 자극 받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영의 연대를 이루는 것 외에 마음을 다스리는 결정적인 길이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음을 다루는 기술은 정말이지 그 어떤 종교도 도달하지 못한 근원의 경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필자의 이러한 ‘예수 새로 보기’와 예수 새로 만나기‘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관상 기도를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한 때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필자만 느끼는 것일까 한국 교회에서 목회의 열매와 교회의 성장을 위해 애쓰는 것이 반드시 예수님과의 동반과 동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런 느낌이 참이라면 이제 한국 교회는 뭔가를 과감하게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목회의 이름으로 교회 성장의 이름으로 예수 정신과 예수 방식 없이 진행되는 모든 프로그램들과 사업들을 당장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목회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길이 아닐까? 목회와 교회 성장이라는 이름의 욕망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고요와 평화와 안식에 도달한 목회자의 마음에서 오히려 성도들은 진정한 예수쟁이의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도 그들의 목회자처럼 예수님에 온통 사로잡혀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을 습득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의 샬롬을 확장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목표로 여기게 되지 않을까? 아주 예수여 당신의 이름과 현존이 부흥하게 하소서! 상처난 마음엔 사랑의 공동체가 묘약 교회는 사람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장소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다 바로 그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신다. 마태복음18장 20절은“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둘 중에 있느니라.”말씀한다.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는 교회를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셨다 공동체 생활이란 공동의 목표를 놓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은 자신을 철저하게 노출시키는 생활이다. 사랑의 공동체는 치유 공동체다 공동체 생활이 어려운 것은 함께 만나 살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고 싶어 공동체 생활에 합류했다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더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지 못할 때 상처 공동체가 된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는 교회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되지만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는 어디에 가서 치유를 받아야 할지 질문할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을 움츠리게 만다는 것은 상처다 화상을 입은 살은 움추린다 상처를 받은 살은 그 상처를 싸매기 위해 움츠린다 상처를 받은 마음은 그 상처를 감싸기 위해 움추린다 그래서 마음이 좁아진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마음이 좁아져서 바늘도 들어 갈 수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상처가 많은 사람은 피해 의식이 많아져 마음의 문을 닫고 산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 때 상처는 선입견을 낳는다 과거에 받은 상처는 우리의 시각을 굴절시켜서 사람들을 만날 때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과거에 출석하면 교회의 사역자에게 상처를 받은 성도는 일평생 동안 사역자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다 치유되지 않은 선입견이 자신의 영적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상처는 치유돼야 한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독이 된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의 생활 전역에 영향을 끼친다. 목회자는 상처를 치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부름 받았다 목회자에게도 상처가 있지만 그 상처를 잠시 보류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해야 한다 헨리 나우엔은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를 가리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다 목회자는 교회를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더 큰사랑으로 치유돼 상처를 치유하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 사랑 때문에 받은 상처는 더 큰사랑이 임할 때 치유가 된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사는 사람은 상처에 붙잡힌 인생을 살게 된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붙잡은 것에 붙잡히게 된다 과거의 상처를 붙잡고 사는 사람은 과거의 상처에 붙잡힌 인생을 살게 된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은 예수님의 사랑밖에 없다. 예수님의 복음 밖에는 없다 복음 안에는 사람들의 상처를 끌어안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 담긴 십자가의 사랑이 상처 입은 인간을 치유하는 유일한 묘약이다. 예수님은 상처를 치유하고 화복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능력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는 과감하게 상처를 노출해야 한다.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가 있을 때 상처는 치유되기 시작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상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어루만져 줄 때 그 상처가 치유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를 직면해서 어루만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스런 헌신 없이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헨리 나우엔은 “고통으로 도망가지 않고 사랑으로 그 고통을 만지는 사람은 치유와 새로운 힘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상처를 치유하는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상처 입은 영혼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는 것이다 용납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연역하다. 그래서 쉽게 상처를 받는다. 인간은 악하다. 죄인이다. 인간 안에는 이중성이 있다 죄인 된 인간의 모습과 함께 엄청난 가능성을 소유한 인간의 모습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는 사랑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처를 줄 수밖에 없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고 성숙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폴 투르니에는 “질병을 치료하지 말고 환자를 치료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상처 입은 영혼을 치료 할 때 단순히 상처만을 치료해서는 안 된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 인격을 치료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치유법이다. 상처의 치유는 소중한 만남을 통해 일어나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는 사랑을 베풀 때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를 이해해 주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상처의 치유는 소중한 만남을 통해 일어난다.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만남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가장 소중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전인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폴 투르니에는 “환자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약은 의사 자신이다.”라고 말한다. 의사의 인격이 곧 환자를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의사의 사랑이 환자를 치유한다는 것이다. 인격 치유의 핵심은 환자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고 환자를 이해하기 위해 경청해 주는 것이다 그 때 환자의 입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인생이 열리는 것이다. 회복과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가 경청해 줄 때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다. 사람은 자기 혼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자아 발견은 만남을 통해, 자아 개발도 만남을 통해, 자아 초월도 만남을 통해 찾아온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동체는 만남의 장소이다.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참된 사랑은 날개를 동시에 주는 것 장 바니 에는 참된 사랑은 강요하는 사랑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다친 새 한 마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그림을 통해 공동체의 사랑을 소개한다 그림에 나오는 손의 주인공은 혹시 새가 떨어질까 봐 손을 많이 벌리지 못한다. 또 혹시 새가 짓눌릴까 봐 꽉 쥐지도 못한다. 이 손은 보금자리처럼 새를 지탱하고 붙잡아주며 따뜻하게 해주고 안정감을 준다. 다친 새는 때가 되면 다시 기운을 차리고 날 수 있을 것이다(장 바니에「희망의 사람들 라르슈」.홍성사.p60)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참된 사랑이란 새를 감싸고 있는 손과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거나 가두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치유된 후에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뿌리와 날개를 동시에 주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안정감 있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아름답게 성장해서 언젠가는 날개를 달고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참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공동체가 베풀어주는 사랑이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고 성령 안에서 자유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상처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사랑의 공동체는 갈등을 통해 성장한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갈등이다. 공동체 생활을 시작 할 때 우리는 기대와 두려움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와 함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함께 마음에 공존한다 공동체의 초기 단계는 허니문과 같이 기대로 가득 찬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단계가 지나면 거의 예외 없이 갈등이 찾아온다. 갈등을 통과하지 않고 건전한 공동체를 형성 할 수는 없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는 갈등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투고 서로 경쟁하고 서로 분노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는 갈등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갈등은 더욱 깊은 사랑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갈등에 긍정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갈등은 고통스럽다 갈등은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갈등은 좌절과 회의와 실망을 가져온다 갈등은 진리가 아니라 감정을 따라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만든다. 갈등이 심화되면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비전을 상실하게 된다 갈등이 심화되면 분열의 아픔을 경험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갈등을 잘 다루면 이전보다 훨씬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갈등을 통해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데 필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정신 지체 장애인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 장 바니에의 말에 우리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신 요양원은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우리가 그들을 가두어 버린 곳이다.” 그는 정신 지체 장애인을 가두어 놓은 정신 요양원이란 감옥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사랑으로 자유케 하기 위해 라르슈 공동체를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만큼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이해하고 이해하는 것만큼 사랑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용서한다. 사랑하는 것만큼 인내한다. 사랑하는 것만큼 희망한다. 희망하는 것만큼 기다린다. 우리 인간에게 희망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희망과 사랑은 함게 간가. 장 바니에는 “희망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기다린다. 희망이 없으면 생기 없이 슬퍼하며 죽음을 산다"고 말했다. 우리는 갈등을 통해 거짓 평화를 정복 할 수 있다. 참된 평화에 이르는 길은 갈등을 인정하는 것이다.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가 마음을 여는 것이다 갈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갈등을 통해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를 재발견하게 되고 공동체의 방향을 점검하게 된다. 갈등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민감해 질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민감성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민감성이란 서로의 마음을 읽어 주는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상처 나고 아픈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것이다. 민감성은 감수성을 의미하고 민감성을 통해 우리는 더욱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맥스 디프리는 ꡒ감수성과 용서야말로 좀더 완전한 개인과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 일이지만 또한 보상이 따르는 것ꡓ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용서받고, 이해 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고, 그리고 사랑 받고 싶어한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인간의 내면의 깊은 갈망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민감성이다. 민감성을 개발 할 때 우리는 상처받은 영혼의 과거를 이해하고 기질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그 사람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의 공동체는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치유와 회복을 넘어 성장과 성숙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상처와 어두움과 가난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엄청난 잠재력과 숨겨진 재능과 은사까지 함께 용납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을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전 존재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상대방이 성장 할 수 있도록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숙해야 한다 성숙하지 않고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가 없다.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이란 정말로 성숙한 사랑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랑은 성숙한 사랑이다. 기다려 주고 갈등을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보는 사랑은 성숙한 사랑이다. 상대방이 성장하고 성숙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사랑은 성숙한 사랑이다.
성숙한 공동체는 마치 심포니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있다 그리고 악보가 있다 서로 함께 바라보는 지휘자가 있고 함께 연주하는 악보가 있가 그리고 각자가 연주해야 할 악기가 있다. 악기들은 하나씩 연주 될 때도 제각기 아름다운 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모두 함께 연주하는 경우에는 필요한 순간에 다른 악기가 먼저 연주되도록 양보할 때 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말한 것처럼 가장 연주하기 힘든 악기는 제2바이올린이다.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과 같이 열정을 가지고 연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제2바이올린이 없이는 하모니를 이룬 음악이 존재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사랑의 공동체는 모든 사람을 존귀히 여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은사를 존귀히 여긴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재능과 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성실하게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계발해서 공동체를 위해 사용 할 때 공동체는 성숙한 공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사랑의 공동체는 학습공동체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상처만을 치유하는데 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치유된 영혼들을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사랑의 공동체는 치유 공동체, 회복 공동체가 돼야 할 뿐 아니라 학습 공동체가 돼야 한다 학습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성장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움이 없이는 성장이 없다 우리는 학습을 통해 성장한다. 학습을 통해 성숙하고 원숙하게 된다 예수님이 부르신 공동체는 학습 공동체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 동안 가르치셨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학습 공동체였다. 인간은 학습을 통해 변화하고 성숙한다 진정한 학습이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삶의 현장에서 가르치셨다. 말씀을 통해, 만남을 통해, 사건을 통해, 그리고 자연을 통해 가르치셨다 고난을 통해 배신을 통해 그리고 실패를 통해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으셨다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게 하셨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게 하셨다 영원 지향적인 삶을 살게 하셨다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게 하셨다. 한 인간의 온전한 치유는 지나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온전한 치유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고통을 사명으로 자각할 때 상처 입은 영혼은 새롭게 태어난다.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희망의 문을 열게 된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모험하게 된다 그 순간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과거를 떠나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된다. 사랑의 공동체는 서서히 자라는 나무와 같아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율법은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는다.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만이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준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내 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인내이다. 사랑이 자라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곡식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서서히 조용히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의 공동체도 서서히 자라는 것이다. 뜨거운 여름 태양 볕에 곡식이 영그는 것처럼 공동체도 상처와 갈등 속에 영글어 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성장하도록 기다리라. 기다림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무르익는 시간이다. 모든 농부는 자연스럽게 익은 사과가 가장 맛있다는 것을 안다. 기다림은 맛을 깊게 한다. 사랑의 공동체의 맛을 깊게 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기다린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온유함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용기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성령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한다. 사랑의 공동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도와 성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은총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 주실 때 사랑의 공동체는 형성된다. 어떤 한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그 사람을 통해 공동체는 시작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공동체는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진정한 마음의 치유로 맺힌다. 그러므로 마음을 치유하는데는 사랑의 공동체가 묘약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는 사역자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함을 기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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