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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책임 전가의 문제^^

힐링&바이블센터 2006. 7. 31. 21:56
 

상담에 있어서의 책임전가(피해의식)의 문제

        

  Ⅰ. 서론


상담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마음속의 한 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재의 내담자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가족환경과 성장환경, 사회적 환경들을 살피고, 원인을 따지다 보면 이 세상엔 잘못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인간의 잘못과 책임은 없는 것 같고, 모두 다 이유가 있고, 그것을 단지 이해해 주고, 수용해 주고, 싸매 주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상담이라면 뭔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담을 배우는 목적이, 상담을 하는 목적이 단지 인간을 이해해 주고, 인간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차원에서 끝난다면 이것은 목회상담으로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데이빗 A. 씨맨즈가 쓴 ‘탓’이란 책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사실 책임전가, ‘탓’하기는 이미 성경의 가장 처음 부분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13)


  데이빗 A. 씨맨즈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요 치료자요 모사로서 우리를 정서적, 관계적, 영적 온전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도록 돕는 일, 피해자를 돌보는 일에 평생을 보낸 셈이다. 그러면서 가장 놀란 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상담 자체가 하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이 되어 버린 ‘피해주의’ 또는 ‘피해논리’ 현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개인적 챔임을 회피한 채 다른 누군가 책임 전가의 대상을 찾음으로써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에서 발뺌하려 드는 거대한 책임 전가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미국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인의 심성구조에 있어서도 이런 피해의식, ‘탓’하기의 문제는 있는 것이다. 속담에도 이미 ‘조상 탓’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은 어떤 외부 충격에 대한 생각이 자기 생각과 다르거나 이견이 있거나 불만이 있을 때, 그 외부 충격에 자신을 대립시키는 외향처리를 잘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가족이나 단체나 직장 같은 집단의 이해와 일치되지 않는 자기 주장은 아무리 정당하고 옳고 의롭더라도 대부분의 경우에 잘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인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질서를 파괴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피해의식이 많은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책임 있고, 환경과 조건을 뛰어 넘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상담은 이것을 위해서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Ⅱ. 탓(피해의식)의 문제


  A. 한국인의 피해의식

 

  1. 한(恨)의 개념

 

  어느 한 나라의 특수한 상황이나 현상을 나타내는 말을 딴 나라 말로 꼭 들어맞게 옮겨 놓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한국말 가운데 하나가 “한(恨)” 이라고 할 수 있다.  “한(恨)”은 마음을 뜻하는 심(心)과 가만히 멎어 있다는 뜻인 간(艮)과의 회의문자이다. 나무 뿌리가 땅속에 가만히 멎어 있기에 근(根)이듯이 마음속에 상처를 가만히 간직하고 있는 상태가 “한(恨)”이다. 달리 풀이하면 외부의 충격을 반사하지 않고 마음속에 수용 처리하는 과정으로 한이 차지하는 의미공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의미 공간에서 원의의 한은 원한을 품은 상태, 그리고 원한을 품게 한 외부적인 요인을 증오하고 그 원한을 품은 자신을 슬퍼하는 그런 속성을 내포한다.

  한국인의 “한(恨)”이 차지하는 의미 공간은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넓고 크다. 왜냐하면 한국인을 다스려온 문화나 가치관은 외부 충격에서 주어진 긴장의 외향 처리를 부덕시했기에 처리 공간이 확장되고 따라서 넓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자지 주장을 집단 의사에 소멸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이 좌절은 한이 되어 축적된다. 곧 한국인의 한을 구조적으로 따져보면 원한 이외에 피해의식이 복합되어 있다. 외향발산은 가해지만 내향 축적은 피해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관권의 피해자요, 없는 자는 있는 자의 피해자이며,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피해자요, 야당은 여당의 피해자로 생각한다. 그 피해의식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며느리가 자신을 시어머니의 피해자로 인식하듯이, 똑같이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피해자로 여긴다. 서양인이 정신이상에는 가해망상증이 많다던데 한국인에게는 피해망상증이 유별나게 많은 것도 이 한의 구성요소인 피해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2. 한(恨)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양식


  “한(恨)”에 대한 한국인의 남성의 반응은 주로 불암감과 우울증, 분노, 증오, 죄책감, 열등감, 허무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사에 의하면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은 분노감이며, 그 다음으로 불안감이 차지하고 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은 혼자 조용히 삭히는 것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취미활동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상대방과 찾아가서 대화하며, 해결하는 경우도 적었고, 상담자(목회자)를 찾아가는 경우는 2%도 안 되었다.

  여성인 경우에는 여러 가지가 남성과 비슷하게 나타났지만 대처방안에 있어서 대상자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 상담자(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한국인은 이렇게 “한(恨)”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해결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속에 눌러 놓고 있다가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니면 신체적으로 증상이 오게끔 방치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며, 소화가 안 되고, 쉽게 피곤한 증상을 겪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한(恨)”에 대한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노하지 말고 혼자 기도하고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담자를 찾거나, 이야기 할 대상을 찾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극히 미약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마음속의 치유가 필요하며, 그들 자체가 피해의식과 우울함으로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쁨과 책임, 의지의 요소가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B. ‘탓’하기의 문제점


    1. 치열한 책임 전가 싸움


  데이빗 A. 씨맨즈는 성경에서 온갖 종류의 피해자들이 전부 등장하지만 피해주의 사상은 전혀 없으며, 이런 것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존재 모습과 생활 방식의 근거로 삼아도 된다고, 즉 피해의식 속에 살아도 된다고 허용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에 힌트를 얻어서 전체 주제의 두 가지 핵심 단어인 ‘만약(if)’과 ‘만약.....만 했더라면(if only)’ 이라는 말을 연구 바탕으로 삼았다. 성경에는 긍정적인 의미와 ‘만약’과 부정적인 의미의 ‘만약’이 둘 다 나타난다. 나약한 표현 ‘만약...만 했더라면’과 강한 표현 ‘만약’은 요한복음 11장에서 가장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요한복음 11장은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유명한 기사인데,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if only)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하소연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하여 예수님의 도전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if)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것이었다. “만약....만 했더라면”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 “내 잘못이 아니다”등의 태도는 ‘피해 논리’나 ‘피해주의’의 급격한 확산에 세상 언론도 놀라고 있다. 죄의 행동에 대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다른 구실들로 무마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만약..만 했더라면’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쓸모 없는 사람도 중요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당시에는 충분히 느끼지 못했지만 이것은 정말 중요하고도 깊은 깨달음이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신의 변명을 치유하기 전에는 상한 감정의 치유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만약...만 했더라면’이라는 변명을 거부하고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속으로 기도할 때, 끝내는 변명이 완전히 잠잠케 되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는 엄연히 존재한다. 비록 성경에 진짜 피해자들이 숱하게 많이 등장한다 할지라도 ‘피해논리’가 들어설 여지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치유 일정 및 회복 과정 속에는 우리 모두가 상처를 뛰어넘어 용서로, 요행심을 버리고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책임 전가에서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고 강조한다. 피해자가 승리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2.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지나친 열의와 과도한 불안에 휩싸인 마르다가 예수님께 ‘만약...만 했더라면’을 그때 처음 내뱉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으로 강하고 소망에 찬 도전을 준다. 이 둘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하나는 가장 연약한 것이요 하나는 가장 강력한 것이다. 하나는 가장 절망에 찬 말이요 하나는 가장 희망에 찬 말이다. 사랑과 고난은 어딘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처럼 보인다. 이 모순이야말로 치유의 모든 과정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장애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언젠가 한 번은 꼭 부딪쳐야 하는 문제이다. 파스칼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마음에는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의문이 있다”라고 했다. 어려움을 증폭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으며, 또한 그분이 그냥 존재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다. 모순은 단순히 이성적인 차원을 넘어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선한 사람이 당하는 억울해 보이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따지던 중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정한 사람이 부족한 이유를 깨달았다고 한다. 불의한 고난의 신비에 대해서는 성경 어디에도 순수한 철학적 해답이 나와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지금 타락하여 악해진 불완전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재난과 상처와 고통에 대한 특수 면역체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특수 면역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다만 특수 임재, 즉 당신의 임재를 약속하셨을 뿐이며, 결코 해답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다만 해답을 주시는 분인 당신 자신을 약속하셨을 뿐이다.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재난과 사고와 비극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셔야 한다는 비성경적인 가정에 근거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비극을 당할 때 하나님의 개입 여부에 따라 그분의 사랑의 정도나 우리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서 생겨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최상의 동화라는 것이고, 둘째로 부활은 그 피해자들로 승리자가 되게 하시는 그분의 최상의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고난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을 그 누구도 단순 논리로 격하시키게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심오하고도 값비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하나님 자신도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모르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스탠리 존스는 악과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해답을 찾고만 있기를 원하시는 않는다. 그분은 우리 자신이 해답이 되기를 원하신다”라고 했다. ‘네가 믿으면’이라는 예수님의 도전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여정이 끝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방황은 끝날 것이다.


  3. 책임전가의 문제점

 

  ‘만약....했더라면’에 뒤따르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을 과거시제 그러니까 이미 발생한 뒤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행동과 사건을 가리키는 시제 속에 살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모습에 고정시킨다. 그것으로는 잃어버린 날을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 흩어진 꿈을 절대로 회복할 수도 없다. 오히려 더 산산조각이 날 뿐이다. ‘만약....했더라면’은 변화 불능이 지나간 사건들에 집착하게 함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과거의 사건은 바뀔 수 없어도 그 사건을 보는 눈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과거는 얼마든지 재구성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너무 늦었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만약....했더라면’의 크나큰 실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재의 능력을 배제시켰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무력한 과거시제 ‘만약....했더라면’을 강력한 현재 시제 “네가 믿으면”으로 바꾸신 것이다. 시간이 영원과 맞닿는 부분이 바로 현재이기 때문이다.

  사탄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 의지의 결단을 가장 두려워한다. 예수님은 위대한 현재이시다. 바로 이 때문에 성경은 ‘시간’면에서 ‘지금’이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 “임마누엘”. 악과 고난의 신비에 대한 최종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이보다 더 위로가 되고 치유력이 뛰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C. ‘탓’하기의 극복의 조건

1. 진정한 피해자인 예수

  인간이 겪는 악의 문제까지 철저히 다루지 못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 예수님은 직접 죄를 지은 사람들의 형벌과 결과도 담당하셨지만 그와 아울러 타인의 범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겪는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영적 고통도 총망라하여 다 담당하셨다. 타인의 죄로 인해 상한 감정은 그 사람의 관념과 사고를 철저히 왜곡시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죄 없는 고난이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난을 돌보시고 나누시며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죄의 궁극적 구속이자 고난의 궁극적 피해자가 되셨다.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궁극적 승리자가 되셨다. 이것은 악과 고난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의 최종 해답이다. ‘만약....했더라면’의 비극 때문에, 자신들에게는 얼마든지 적대감을 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세상에 가능한 모든 불의를 다 겪으셨다.

  우리와 완전히 동화되기 위해서는 예수님 역시 피해자가 되셔야 했다. 상담을 하다 보면 깊은 상처와 원한, 가해의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얼굴과 머리는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정체감 및 자존감과 깊이 관련되어 있어서 그 곳을 건드리는 것은 아주 심한 비인간적인 모욕을 준다. 그리스도는 물리력의 부재로 무방비 상태에 있던 사람들 또는 당연한 권리마저 다 빼앗긴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신다. 인간이 제 것을 주장할 권리를 완전히 잃으면, 실존의 무게를 감당할 힘을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만물이 그 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지만 이제 그분께서는 사소한 물건 하나 취하실 권리가 없었다.

  죄인들과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과연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내려가실 것인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경험이었다. 하늘은 침묵을 지켰고, 자연의 힘까지도 그분의 고독한 공허를 한층 부추겼다. 치유과정에서 치유력을 발휘하는 전환점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기분을 아시고 그냥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고통이 큰 단계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지금 새롭게 보고 그 사랑을 굳게 붙들어야 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이 그 분의 그 사랑에 붙들려야 하는 것..바로 이것이다.

    2. 사랑과 직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시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둘 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이다. 눈물이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직면은 그 사랑의 깊이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위로할 사랑이 없다면, 그 분께는 우리의 죄를 직면할 사랑은 없다. “예수님의 엄하신 애정”에 대해 행동으로 나타내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인자와 긍휼이 풍성한 사랑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사랑이다. 삶의 어떤 영역도 어두움 가운데 숨기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곧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빛에 온전히 열어 놓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만일 해롭지 않은 개인 줄 알았는데 위험한 뱀으로 밝혀지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제거해 달라고 구하면 된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진실과의 직면을 부정하고 거부하던 우리의 아픈 시절이 있다.

  밝혀진 더럽고 냄새 나고 창피하면 어찌나 두려워 지레 겁을 내 돌을 그대로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완전한 동화를 통해 우리의 기분을 온전히 이해하시고 우리와 함께 우시는 분이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그분을 잊는다는 데 있다. 우리의 모습이 최악에 달한 그 지점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를 이룬다. 본인도 모르고 있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우리 인생의 그 숨은 상처의 영역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을 들처내고 때로는 화상을 입히기도 하지만 언제나 목적은 치유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으면 내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도, 최대의 실패도 똑바로 바라 수 있다”. 그 못 박힌 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얻어 돌을 옮길 수 있다. 타인의 죄가 치유의 진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죄책감과 수치심의 무거운 짐 때문에 그러기도 했다. 대개는 두 가지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내 마음에 두려움을 알게 한 것도 은혜요 그 두려움을 가져 간 것도 은혜라!”. 이 여자는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 행복의 가면 뒤에 내적 공허와 채워지지 않은 삶의 깊은 갈증이 있음을 아셨다. 사실 겉모습만으로 남은 판단하는 내담자들을 꽤 자주 만난다. 십대 아이들은 부모의 끈질긴 ‘믿음’에 반기를 드는 것 말고는 달리 반항할 길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변화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여자로 하여금 가면을 벗고 빛이 들게 하여 현재 사는 죄된 삶을 솔직히 인정하게 하신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성령께서 자기 발견과 예수 발견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일으키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3. 자신을 성찰하기


  ‘만약......만 했더라면’은 여러 가지 형태의 책임 전가로 나타날 수 있다. 우선 본 장에서는 과거 집착형, 동경형, 자기 증오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변명형, 불순종형, 요행심형 등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의 끝없는 고통의 근본 원인은 자기한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들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다리를 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몇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다.


(마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인간의 정서적, 영적 문제들 가운데는 우리 성격의 지하실 속에 묻혀 있는 건강치 못하고 파괴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많다. 성인이 되면서 그 씨앗은 점점 자라 인생 전반에 대한 대응 방식을 망치고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 양식까지 병들게 한다. 과거의 회상이란 단지 그때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감정을 지금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기억이란 양심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세심한 경청과 기도를 통한 분별뿐이다. 치유에는 고비라는 요소와 과정이라는 요소가 수반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앞을 보지 않으면 본래의 고통스럽고 해로운 사건들이 우리의 성장 과정에 슬그머니 끼여들어 와 제 멋대로 온갖 행세를 하고 다닐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상상의 양분과 공포의 비료와 욕망의 연료가 더해져 나중에는 아예 우리의 존재 전체를 좀먹게 한다. ‘만약....했더라면’은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것은 ‘부질없는 후회’라 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판사가 되어 자신의 감옥에 자신을 가둔 다음 스스로 간수 노릇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성장이 가로막혀 영원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게 된다. 피해 의식은 이렇게 자아 정체감과 자기 가치감과 자존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과거에서 우리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내어 준다. 우리의 존재는 더 이상 과거 자신의 행위나 우리를 향한 타인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존재 근거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고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 있다.


(요일3:1-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뒤를 돌아보는 자는 결국 뒤로 돌아가게 되고 거기 그대로 눌러앉기 쉽다는 말이다. 감사가 멎고 불평이 시작될 때 동경과 욕심이 들기는 쉽다. 자유민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잘 먹는 노예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와 매일의 공급은 잊은 채 환상 속의 과거에 동경과 욕심을 품었다. 이런 욕심형 ‘만약...만 했더라면’은 자연히 현재에 대한 불평을 낳았다.

  그리스도인들을 상담하다 보면 왜곡된 기억이 상존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쾌락과 성공만 부각되고 실패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반향 전환이라는 기쁨이 있지만, 그 기쁨이 사라지면 돈 문제, 집 문제, 고독, 오랫동안 학교를 떠났다가 다시 공부하는 어려움 등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고난의 광야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의 고통을 억압할 것과 상담과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치유의 은혜를 외면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차라리 잔혹한 일이다. 자신이 이런 동경형에서 사로 잡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가 바로 그때다.

  하나는 자기 증오형의 ‘만약.....만 했더라면’을 잘못된 형태로 행동에 옮긴 경우이다. 이것은 자기파멸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같은 종류의 ‘만약....만 했더라면’을 바르게 행동하여 옮겨 회개와 회복을 이룬 경우이다. 유다와 베드로는 과거의 죄와 실패를 돌아보는 ‘만약.....만 했더라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가해자였다.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였다. 둘 다 예수님을 버렸다. 둘의 차이는 ‘뉘우침’과 ‘회개’의 일대 차이가 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뉘우침은 후회와 유감과 자기 증오를 포함한다. 그러나 온통 과거에 대한 것뿐이다. 우리 가운데는 마음의 칠판에서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죄를 지우기 위해서라면 은 30이 아니라 은3만이라도 기꺼이 내놓고 싶은 이들도 있다. 뉘우침이란 후회와 자기 비난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에로의 회복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이 회개이다. 유다가 끝내 버림을 받은 것은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뒤만 돌아볼 뿐 방향을 돌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를 결정할 책임이 있다. 베드로도 자기를 증오했지만 그는 예수님을부터 달아나 파멸로 치닫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는 서로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후자 없이는 진정 전자의 기쁨을 경험했다 할 수 없다.


  4. 죄의 해결

 

  민중신학에서 민중이라는 용어의 모호함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민중에 대한 절대에 가까운 선의 가치부여이다. 즉 한을 가진 자는 죄와 회개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며 죄와 회개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대신 한이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미 민중신학은 모든 책임이 사회의 구조와 지배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측면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에게는 죄와 회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죄의 책임을 모호한 대상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예수님 자신도 죄인을 사랑으로 정죄하지 않으시며 긍휼히 여기셨던 것이지, 그 죄가 없다거나 간과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을 가진 자들도 여전히 죄인이며 그 치유는 죄의 문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책임전가는 서로를 비난하고, 환경을 비난하고, 관계를 비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비난을 하나님께 돌린다. 이러한 죄의 주제들과 죄의 결과에서 도피하려는 죄악의 시도는 인간의 책임지기를 싫어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한을 해결할 때, 즉 책임전가의 문제를 해결할 때 그 ‘탓’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인식하고 그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품고 있는 잘못 생각, 즉 죄악된 행동(범죄)과 감정(원망, 불안)을 유발하는 그릇된 생각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죄의 인식과 회개야말로 기독교 상담의 출발인 것이다. 한에 대한 성경적 상담은 단순히 피해자들의 한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는 영적인 전쟁의 측면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D. ‘탓’하기의 극복방안


1. 선택의 책임성


  책임전가 싸움: 미국은 피해자의 나라인가? 책임 전가 싸움을 끝내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기 시작한 바로 그때가 전환점이 되었다. ‘올바른 신앙은 힘을 가져다준다’. 못가의 병자가 변환된 것도 올바른 대상을 향한 올바른 신앙 덕분이었다. 전혀 새로운 능력의 전원에 플러그를 꽂는 것이다. 요한복음 베데스다의 환자를 대하는 예수의 상담의 태도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요5:1-3)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요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이 사람의 신체 장애는 도덕적 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신체적, 정서적, 또는 영적인 병자에게 오히려 절망감과 정죄감을 배가시킬 수 있는 말씀을 입에 담으신 것은 전혀 주님답지 않은 행동이셨다.

  이 심층 질문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첫째, 우리의 소원의 순결성에 관한 것이다.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바에 대해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알고 계셨다.

  둘째, 우리의 선택의 책임성에 대한 것이다. 상황이 어떠하든 상당 부분의 책임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책임이란 ‘나를 향해’ 일어나는 일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무슨 일이 닥쳐오든 거기에 대한 반응 방식을 선택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나를 향해’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병자 속에서 현재의 비참한 상태보다 더 깊은 뭔가를 보고 계셨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그는 그냥 인심 많은 사람들의 자선에 기대어 영영 불구의 몸으로 지내는 데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한 심령에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는 작업, 바로 그것이 재활이 참된 의미이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서 뭔가 숨은 의도를 보시고 그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자기 파멸의 책임 전가로부터 그를 건져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책임 전가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치유의 선물을 받기란 요원하다. 순종하지 않는 타협형의 ‘만약...만 했더라면’을 보게 된다. 발람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도 싶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남겨 두고 싶었다. 우리는 뭐가 옳고 그른지 뻔히 알면서도 이의를 달고 합리화하며 심지어 발람처럼 더 기도해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만약...만 했더라면’을 중단하고 순종을 시작해야 할 사람들이 많다. ‘가장 가까이 있는’ 분명한 의무에도 순종으로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상의 빛을 받을 수 있는 영적 역량을 잃는 것이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영역들에서 날마다 성령의 살피심을 받아 순종하는 일도 중요하다. 중요한 것이 문제의 크기가 아니라 순종하려는 마음의 깊이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마땅히 모든 것의 주님이 되셔야 한다. 매일매일 조용히 들려주시는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훨씬 굉장한 계시(표적과 기사)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덜 중요한 일에 충실할 때 그분은 우리를 더 중요한 일의 주관자로 삼아 주신다.

  정당한 고난을 피하려는 마음은 모든 정서 질환의 뿌리가 된다. 많은 정서 문제와 영적 문제의 근본 원인은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비현실적인 요행심의 수의에 싸인 이성 관계의 잔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현실성 없는 요행심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 변명으로 모면하고 하나님과 타인에게 애꿏게 전가하던 수단이 마침내 빛이신 그분 앞에 밝히 드러났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책임 전가를 그만 두고 믿음으로 돌아서라고 도전하신다. 이제,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가도록 하자.


  2. 온전한 믿음


  언제나 현재이신 당신 자신에 관한 교훈을 통해 이들을 과거에서 깨어나 현재로 돌아오게 하셨다. 절망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앞에서 이들로 하여금 믿음의 싸움을 싸우도록 준비시키시는 데 필요한 과정이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주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인간의 책임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삼는 책임 전가의 ‘만약...만 했더라면’ 가운데 많은 것들에 대한 해답은 바로 믿음과 순종이 따르는 ‘만약’의 기도에 있다. 예수님의 기도 자체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와 모욕, 패배와 환멸, 정서 질환과 영적인 병, 두렵고 막강한 ‘만약...만 했더라면’등 이 모든 것들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지금 기도를 비롯한 많은 영적인 요소가 상담의 본질에서 심각하게 경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정서 문제의 치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본질이 되는 온전함과 거룩함이다. 진정한 목표는 주님을 향한 더 깊은 자기 굴복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은 자이고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은 자이다. 책임 전가를 버리고 믿음을 택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로 전환이 된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믿음과 순종은 원인과 결과의 자리를 서로 맞바꾸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믿음’으로 움직였고 모험을 감행했다. 이들은 순종함으로 믿었고, 믿음으로 순종했다. 디트리히 본회퍼 “우리는 어떤 때는 순종하기 위해 믿어야 하고 어떤 때는 믿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균형을 잃으면 한쪽으로는 ‘값싼 은혜’의 과오에 빠지게 되고 다른 한쪽으로는 ‘행위 구원’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3. 공동체의 협력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노동 분할을 천명하셨다. 오직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 있다. 은혜와 믿음을 가로막는 우리의 장애물은 대부분 과거의 건강치 못하고 파괴적이거나 죄악된 인간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방어 일변도가 되거나 너무 경직되거나 너무 유약하거나 또는 자신과 남들을 기만하려 하며, 그 결과 인생 대처 및 대인 관계에 있어 여러 가지 그릇된 방식들이 생겨난다. 현재의 건강하고 건설적인 인간 관계를 겅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친밀감과 신뢰감의 풍토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믿음 안에서 자라고 싶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 소그룹에 속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소그룹의 열쇠는 하나님께 자신을 더 깊이 오픈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오픈하는 분위기에 있다. 온전한 치유와 회복에는 반드시 그룹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많은 문제의 핵심 즉 교만과 가식을 벗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기 어렵다. 우리가 믿으면, 우리는 영광을 볼 것이다. 우리가 돌보고 있는 자들을 풀어 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볼 것이다. 한 가지 비극은 우리가 때로 자신의 배우자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믿는’ 것이요, 믿음이란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사람들을 풀어 주기만 하면 부활과 해방의 기적은 오늘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계속될 것이다.


  4. 성경적 자아상의 확립

 

  성경적인 자아상은 ‘창조적인 자아상’이다. 창조의식은 비교/차별의식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비교/차별의식이 끊임없이 상대와 비교하며 나를 보는 의식이라면 창조의식은 하나님과의 관점에서 나를 보는 인생관을 말한다. 비교의식으로 인하여 고부간의 갈등이 생기게 되고, 있는 자에 대한 없는 자가 소외감을 느끼고,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가 열등감을 느끼며, 결국은 피해의식 이라는 정서가 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피해의식으로 인해서 책임전가, ‘탓’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창조사역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모든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독특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아주 독특한 창조물이다. 인생처럼 독특한 창조물은 없다. 이 세상에 나같이 생긴 사람이 없고, 나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것은 ‘창조적인 자아상’으로 볼 때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들이 진정한 화해와 용서로 한을 극복해 나가는 인격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창조적 자아상’을 가진 인격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성경상의 인물 중에서 창조적인 자아상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은 요셉이다. 요셉은 ‘만약...만 했더라면’이 없는 사람이다. 정말로 피해를 입은 자로되 모든 것을 뚫고 나와 당당한 승자가 된 사람, 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바로 요셉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 입은 영역에 승리를 끌어들이는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깨어져 엉망이 된 가정과 거기서 받은 상처로 혼돈에 빠진 아이들을 취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는 일에 도통하신 분이니 말이다. 요셉은 에너지를 책임 전가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쏟아 부었다. 요셉이 겪은 것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가장 오래가는 것은 아마 정서적 학대일 것이다. 정서적 학대는 피해자가 자신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될 때까지 아동의 자의식을 저하시키는 행위이다.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된다”는 가정이다. 정서적 학대는 마음에 아픔을 남기고 영혼에 상처를 입힌다. 원한으로 남을 때까지 계속 분노를 품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마귀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해 용서 이외의 다른 방안을 주신 일이 없다. 자신을 해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적, 정서적 건강에 절대 기본 사항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 언제나 건강한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분노와 적의를 품고 남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각종 정서 질환은 물론 심각한 심장 질환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학대자를 용서하지 않고 그 쓴 뿌리는 계속 품고 사는 피해자는 상대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의식, 무의식 할 것 없이 모든 생활이 학대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건강도 나빠졌고 감정도 안정적이지 못했으며 또 대인 관계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용서하고 복수심을 버리고 나서야 변명과 책임 전가를 버리고 내적 평안을 찾을 수 있었고, 또한 건설적인 대인 관계 형성을 통해 원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피해자 요셉은 피해 의식 논리의 사용을 거부한 채 가해자를 용서하고 승리자가 되었다. 성경은 용서만 하면 잘못을 행한 사람과의 화해가 자동적으로 뒤따른다고 보장하지 않는다. 화해란 상대편이 함께 가담해야 하는 양방 통행로이다. 용서란 일방 통로가 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원히 화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피해 논리와 책임 전가의 문화 속에서 공적인 용서 행위를 목격하기란 좀처럼 힘들다. 요셉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잊어버렸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전능자’를 향한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위해 사용하실 수 없을 만큼 우연한 일이나 사소한 일 또는 어리석은 일이나 악한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유리한 고지에서 보았을 때 무의미하던 것이 의미를 찾았고 고통이 뜻을 품게 되었으며 불행은 섬김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 감정에 매달려 삶이 망가지게 내버려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거듭 피해를 당하면서도 절대로 피해자의 ‘만약...만 했더라면’에 빠져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이스라엘의 전능자’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아 결국 승리자가 된 성경에 나타난 유일한 인간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Ⅲ. 결  론

 

  목회상담에서 적용할 수 있는 인간이해는 세상 학문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해하고는 다르다. 목회상담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해는 인간은 변화될 수 있고 성장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결정론적인 존재가 아니며 생의 초기의 경험이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생동안 고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잠재적인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 잠재력을 개발하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자신의 태도로 인해서 크게 달라질 수가 있다. 합리적 사고, 곧 긍정적인 생각은 자신의 삶을 한층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불합리한 사고, 곧 부정적인 생각은 자기 파괴적이 되며 불행한 삶으로 자신을 전락시킨다. 환경은 인간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생의 초기의 부모의 영향은 지대하며, 일생을 통하여 가까운 사람들과 직면하는 환경은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자기실현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기실현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간은 자기를 깨달아 아는 능력이 있으며, 생각하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독특한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가 있을 때, 자기가 기대하고 그려보고 힘을 쏟을 만한 미래가 있을 때 삶의 활력을 가지게 된다. 희망, 미래지향적인 기대야말로 건설적 변화를 초래하는 근원적인 동력이다. 자포자기, 절망, 의미와 중요성의 상실 등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은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꼭 피해의식과 한으로,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책임전가, ‘탓’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들 중에서 선택하며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소유한 자기결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외부조건에 의해 삶이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에 대응할 반응이 인간이 자유롭게 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격상의 문제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개인 내부에 있는 여러 가지 긴장상태를 조화시키는 데 있다. 외부의 여러 가지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은 인격외부의 여러 가지 요인을 인격자체 안에 받아들이고 외부요인을 중심점으로서 이용한다는 사실에 있다.    개개인은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고 자신의 존재의 상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결단할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결단의 존재로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즉 선택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건축해 나가는 건축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건축가가 되게 하기 위한 상담이 ‘책임전가’, ‘탓’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도권을 포기하려는 내담자에게 필요한 상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서사대 기독학생회 카페
글쓴이 : 이송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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