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치유의 상처 정의 및 영향
1.상처의 영향
돌이 날아와 맞으면 나는 상처를 입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도 감정의 돌이 날아와 상처를 입힌다. 또 돌이 호수에 빠지면 돌은 밑으로 가라앉고, 파도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처럼 상처는 우리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면서 잠재의식 밑에 가라앉아서 계속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외부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나 마음에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깊은 곳에 남아서 계속 나에게 영향을 주며, 나의 삶을 좋지 못한 쪽으로, 파괴적인 쪽으로 이끌어간다.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력이 약해짐으로 더욱 강하게 나의 삶에 역사 한다. 그래서 노인들이 더 섭섭해 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상처는 잠복기간이 지나면 꼬리를 들고 일어난다. 상처는 상처를 주는 상대방보다, 쉽게 상처를 받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 평안과 행복은 환경이 이를 주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주체는 나이다.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이 치유되어 있으면 늘 평안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나가서 남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다른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복음의 화평케 하는 의미이다. (고후18-19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는 누구나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이 모든 면에서 풍성해 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우리는 내적치유를 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누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다.
(1)하나님과의 관계(영적)
인간은 대개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다. 근엄하고 권위를 내세우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릴 적부터 많은 상처를 입고 삶을 배운다. 그리고 스스로도 이러한 상처를 주며, 자신도 그러한 아버지가 되어간다.
이러한 아버지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이 왜곡된다. 근엄하기만 하고 책망과 형벌을 주관하는 아버지의 개념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강하게 반영되고, 또 후손에게도 대물림되어 전달된다. 이러한 잘못된 아버지의 개념이 유아기로부터의 계속되는 교육으로 말미암아 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하게 한다. 사랑이 빠진 신앙인, 막연한 종교인이 되어 버리고 만다. 말씀에 대한 불신, 죄에 대한 불감, 도덕감과 윤리감을 상실한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신앙의 성장이 없게 된다.
내적치유를 통하여 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나야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인격체로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된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늘 받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제대로 의식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두려움과 염려를 내어 쫓게 된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놓지 못하게 되면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내면이 너무 허약함으로, 쉽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약한 종교인이 된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이다. 물질이나 건강이 없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만 마음에 채워져 있으면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신다.(롬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것이 바로 내적치유이다. 내적치유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면이 채워지고, 풍성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2)자신과의 관계(심리적, 육체적)
상처가 많으면 자기 자신을 이겨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심하게 비하시키거나,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또는 자신에 대하여 거부감, 증오감, 혐오감, 용서 못함, 열등감을 가지거나, 반대로 극도의 자기사랑, 이기주의 , 배타주의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심한 우울증이나 의존감을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성장기의 상처로 인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가치를 잘못 평가한 것이다. 부모가 어릴 적에 자신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챤은 새로운 아버지, 참 아버지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새롭게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배워야 한다. 마귀는 어릴 적 부모로부터 들은 “너는 왜 이렇게 못하느냐. 너는 못난 놈이다”라는 책망의 말을 자꾸 반복하여 내 마음에 들려준다. 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실수하더라도 책망보다는 새롭게 나서도록 늘 위로와 용기와 격려를 주시는 분이다. “너는 할 수 있다. 한번 다시 해보자”고 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한다. 어릴적 상처의 기억에서 되풀이되는 사단의 비난의 말이 아니라, 내면에서 새롭게 울려나오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바로 내적치유이다.
기억이나 감정에서 나오는 소리는 욕심과 이성과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보다 더 깊은 안에서 조용히 울려나온다. 이 위로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책망하고 비난하고 좌절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라도 이 소리를 붙잡지 말고 안에서 울리는 위로의 소리를 붙잡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며 나서야 한다.
상처에 기억되어 있는 두려움, 아픔을 기본으로 하여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새롭게 마음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생명력을 기본으로 하여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상처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빼내어 버리고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와 격려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하라. 하나님이 깊은 속에서 밀어 올려 주시는 생명력을 부여잡는 훈련을 하라. 그리고 자기를 건전하게 사랑하는 자가 되라. 자기를 건전하게 사랑하는 자는 승리, 발전할 수 있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누리게 된다.
(3)타인과의 관계(사회적)
자기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도 무가치하게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의 총강령(마22:37-40)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해야 다른 사람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부관계, 사회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들 즉 반사회적이고 적대시함, 시기와 질투와 분쟁, 고압적 지배와 피지배적 근성, 믿지 못함, 불쾌하게 함과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수직적 관계의 개념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위에서부터 내리 누르는 수직적 사회에서 생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내리 누르고 억압하시는 분이 아니다. 묶어놓고 뿌리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걸어 다니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셨다. 수평적으로 대하셨다.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용납하셨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수직적으로 생각한다. 경쟁한다. 누르고 눌린다. 억압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교회에서조차 그렇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성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 한다. 수평적 삶을 만들고, 수평적 사회, 사랑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크리스챤이 되고, 풍성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이다.
사람들은 많은 칭찬은 쉽게 잊어버리는 반면에 단 한마디의 상처를 주는 비평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자신이 행한 일보다는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말을 훨씬 더 깊게 받아드린다. 인간성을 깎아 내리는 말은 자존감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상처를 당할 때에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고 상처를 빨리 싸매어 버리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나 그 상처는 소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곪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 싸맨 곳을 통하여 고름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오래 전의 상처가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치유는 하면서 살 수 있다. 상처는 일단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있다. 상처의 악순환, 빈곤한 삶의 악순환이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다. 상처를 치유해야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상처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드디어 풍성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상처가 별로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 되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부드러운 성품이 되며, 상처가 주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든든한 삶을 살게 된다.
크리스챤들끼리 주고받는 상처는 특히 크고 깊다. 영적 상처이기 때문이다. 악한 영이 강하게 역사함으로 크리스챤들이 받는 상처는 깊이 들어가기가 쉽다. 악한 영은 우리의 상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더 강하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의 치유가 아니라, 깊은 내면의 치유, 온전한 치유를 받을 수 있다. 받아야 한다.
2.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병들고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함으로 치유 받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분야만의 치유, 즉 구원만을 받고 다음 단계인 마음, 성품, 상한 감정, 육체적 치유에 관해서는 무지하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육신의 어느 부분이 병들면 고통을 받기에 그 부분의 치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3.구원은 순간적인 사건이나, 성화는 평생을 두고 내면의 치유를 통하여 일어난다.
예수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우리의 영이 거듭난다. 순간적이다. 그러나 그 후의 성화는 평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한다.
4.마음이 치유를 받아야 성령 충만을 받으며, 상한 마음이 치유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인은 되었으나 삶의 본질이 변화 받지 못한 종교인으로 머물게 된다.
상처를 받으면 제일 먼저 마음이 감정이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감정의 상처는 마음을 굳게 한다. 유아기의 부드러운 마음이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으므로 점점 굳게 된다. 점점 강퍅해진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산다. 이런 상태에서 찾아오신 주님이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아직 마음은 굳어진 그대로이다. 굳어진 상태로는 하나님-나-이웃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바꿀 생각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냥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월이 약인 줄 알고 그냥 세월을 보낸다. 그럴수록 마음속의 상처는 더욱 굳어지고 치유가 어렵게 된다.
5.우리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특히 신앙생활의 영역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마음과 성품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 마음이 굳어지면 성품이 굳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돌같이 굳어진 마음, 굳어진 성품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롬12:2)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굳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위로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밖으로 나간 마음은 다시 상처를 입고 더 굳어지게 된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마음에 쌓이게 된다. 사고의 원인이 마음에 쌓이게 된다. 가정과 육신이 건강과 모든 것에 대한 강건함이 마음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축복도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굳어지면 하늘과 막히고, 사람과도 막히고, 나 자신과도 막힌다. 그러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마귀의 밥이 되어간다.
우리는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담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생명을 담는가?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 평안함이 있게 해야 한다. 자유함이 있게 해야 한다. 마음이 굳어지면 마음을 느끼지 못함으로 마음을 지키는 방법도 모르고 관심도 없게 된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하나님의 평강을 담과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생명을 담으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인 영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겔36:25~26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새 마음을 주시려고 우리 속에, 우리 마음속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들어 오셨다.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거기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부드럽게 변화시키려고 하신다. 마음을 부드럽게 함으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을 느껴야 한다. 육신은 날로 후패해져가지만 마음은 늘 새로워져야한다. 육은 내려가고 쇠해지지만, 마음은 늘 새로워지고, 늘 위로 올라가야 한다.
6.마음은 감정, 기분, 지성, 애정을 느끼는 기관이 아니라, 이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의 육신과 정신의 궁극적 기반이며 근원이 되는 기관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에 실감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일상생활을 이성과 육체적 활동으로 하기 때문에 마음의 활동이 마비되어 있다. 마음을 깨워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와 지배와 보호와 축복을 받게 된다. 기도는 잠자는 마음을 깨워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마음은 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부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가득하게 채우라.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여기를 마귀에게 빼앗기고, 마귀가 주는 쓴 물을 담으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음을 지킴으로 하나님에게 빼앗기면, 하나님을 담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채우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된다. 마음은 마귀가 주는 파괴적인 에너지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과 에너지로 가득한 곳이다. 마음은 우리 생명의 중심이다. 건강과도 연관되고, 하나님과도 관계되고, 물질과도 관계되고, 모든 것이 마음과 연관된다. 마음이 살아야 내가 산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재물을 지키는 것이요, 건강을 지키는 것이요, 가족을 지키는 것이요, 사회를 지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겔36:25-27). 하나님의 축복도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임하심도, 하나님의 은혜도 모두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이 막히면 전부 다 막힌다. 내 삶이 막힌다. 하늘이 막힌다. 그러므로 마음을 풀어야 한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씻어야한다. 마음을 깨워야한다.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을 받아야 한다. 육을 죽이고 마음을 살리라. 마음을 세우라.
마음을 온갖 더러운 쓰레기집합소로 만들지 말라. 온갖 더러운 것이 가라앉아 있는 구정물통으로 만들지 말라. 마귀는 수시로 마음을 뒤집어 놓는 존재이고 성령님은 씻어내시고, 평안하게, 맑게 하시는 분이다. 이 더러운 것을 차곡차곡 쌓아놓지 말라. 이것들을 주고받지 말라. 전파하지 말라.
상처가 무엇이 좋은 것이라고 그것을 움켜잡고 있는가! 우리가 이 상처를 움켜잡고 있으면 마귀는 이 상처를 가지고 온갖 좋지 못하고 악한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이 상처를 내어 드리면 하나님은 이 상처를 치유하시고, 사랑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 상처가 오히려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마음이 가벼우면 인생이 가볍다. 발걸음이 가볍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음으로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라.(히12:1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
성령님은 내 마음속에 계시면서 내 영을 도와 모든 내적 상처를 치유하심으로 마귀가 역사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사랑과 생명이 늘 넘쳐나게 하시는 분이다. 마귀는 상처, 특히 내적 상처에 역사 하는 존재이다. 상처가 있는 한 떠나지 않는 존재이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부여잡고, 치유 받지 못하게 하는 존재이다. 십자가의 보혈은 상처를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님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다. 성령님은 용광로처럼 고철을 가지고 새 제품을 만드시는 분이다. 마귀는 바이러스처럼 좋은 것을 망치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쓰임 받을 수도 있고, 마귀에게 쓰임 받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움켜잡고 살면 마귀에게 쓰임을 받는 것이고, 치유 받고, 치유를 주는 것은 성령에게 쓰임 받는 것이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내 속에서 오는 기쁨,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밖에서 오는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변화 받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마귀에 의해서 마귀쪽으로 변화된다. 점점 하나님답게 되지 않으면 점점 마귀답게 되어 가는 것이다. 치유 받지 않으면 점점 더 마귀화 되어 간다.
7.내면에 생기는 문제는 부흥회, 예배출석, 성경 읽기, 공부, 새벽기도회에 참석한다고 모든게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상처 난 부위를 치유해야한다.
8.내적 치유란 딱딱해진 마음, 돌, 가시덤불로 가득 차서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되는 요인을 제거하여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함이다. 굳은 마음을 기경하는 것, 그 속에 있는 돌을 제거하는 것, 가시덤불을 뽑아내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씨앗은 생명이다. 그러나 굳은 마음에는 이 씨앗이 들어가지 못한다. 귀로는 듣지만 마음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몸으로 선행한다고 해서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져야만 한다.
돌들이 가득한 마음은 걱정, 근심의 무거움, 답답함으로 가득한 마음이다. 이러한 것들을 다 뽑아 버리라. 그래야 생명이 마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땅은 스스로 돌을 뽑아낼 수가 없다. 오직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이 해 주셔야 한다. 걱정의 돌, 근심의 돌, 답답함의 돌을 빼내어 주신다.
가시는 상처이다. 이것이 나를 아프게 찌르는 것이다. 마음을 찌르고 감정을 찌르는 것이다. 나도 찌르고 남도 찌른다. 이것을 뽑아내라. 남이 나를 섭섭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가시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남이 나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가시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단지 그것을 살짝 건드릴 뿐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내속에 있는 가시를 뽑아내라. 내속에 있는 상처의 쓴 뿌리를 뽑아내라. 내가 치유 받아 변하지 않으면 아픔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치유 받아서 옥토로 만들라. 땅은 돌과 가시를 스스로 뽑고 뱉어낼 수 없다. 주님이 오셔야 한다. 그분의 손은 정확한 위치와 손길로 모든 돌과 가시덤불을 빼내어준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옥토가 되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내적치유는 상하고 아픈 마음, 눌린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이요, 내 마음속에 있는 무거운 돌이 빼어지는 것이요, 속에 있는 가시가 뽑아지는 것이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별로 아프지 않고, 남을 아프게도 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돌이 가득하고 가시가 가득한 밭에는 아무리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지만, 이런 것들이 다 뽑아진 밭에는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진다. 이런 것들이 그냥 내버려진 마음 밭에는 마귀만이 충만하게 된다.
교회는 마음을 치유하기보다는 씨앗의 질에만 관심을 두고 씨앗의 개량에만 열심을 낸다. 문제는 씨앗이 아니고 마음 밭이다. 마음이 무거우면 인생이 무겁고, 마음이 가벼우면 인생이 가볍다. 마음이 행복하면 인생이 행복하다. 이런 마음에 물질이 따르고, 사람이 따른다. 돌이 가득하고 가시가 가득하면 마귀가 우글거리게 된다. 이것들을 뽑아내라. 이를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라. 하나님이 이를 위해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신다. 돕기 위해서,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있는 가시와 돌을 뽑아내시기 위해서 오셔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에게 우리를 맡기라. 심령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중심이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린다. 중심이 풀리면 환경과 삶의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려나간다. 이것이 자녀문제, 물질문제, 경제문제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겔36:25-27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므로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치유하라. 마음의 안을 치유하라. 잠재의식, 즉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상처를 다 치유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으라. 이를 위해서 내 마음을 귀중하게 여기라. 잘 때 마음에 손을 얹으라. 귀하게 여기라.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와 사랑을 담기 위해 하나님을 사모하라. 초청하라. 간구하라. 그러면서 자라. 마음을 풀라. 마음에 묶인 것을 다 풀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마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마음에 묶게 만드는 존재이다. 마음에서 묶이면, 땅에서 묶는 것이요, 하늘에서도 묶이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풀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유로워지고 풍요로워지라. 악한 영의 역사를 다 뽑아내라. 악한 영의 역사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에게 이 능력을 주셨다.
새 변화를 받으라. 능력을 받으라. 자유함을 받으라.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지 모른다. 우리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그것을 다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풀고, 이 모든 것을 다 받으라. 그리고 모태에서부터 받았던 모든 상처와 쓴뿌리를 다 뽑아내고 치유 받으라. 그리고 점점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며, 그러한 사람의 삶에 성령님의 열매가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삶의 목표, 사역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내적 치유는 열매가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밖으로, 은사로, 능력으로 나타내려고 하기보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 마음을, 내 마음 깊은 곳을 치유하는 쪽으로 나타내려고 하라. 내 마음을 성령님으로 가득하게 채우라. 그러면 자연히 은사는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밖으로 나타나는 은사보다 내적인 치유에 더 관심을 가지라. 내적 치유에 집중하면, 나의 마음이 치유 받으면, 외적인 은사는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내적 치유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외적 은사가 왜곡되고 잘못된다. 은사는 지나고 인격은 남는다. 인격(성품)을 갖춘 다음에 은사가 나타나야 제대로 은사가 나타난다. 은사는 지나가나, 그 은사를 역사한 인격이 그 뒤에 남아서 냄새를 끼친다.
내적 치유는 섬김의 자세, 마음이 중요하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부터가 이미 내적 치유를 받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상처를 치유 받으면,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람의 삶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에게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분으로 하여금 나를 치유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을 내 마음으로 초청하는 것, 늘 마음의 교제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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