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목회 자료실

[스크랩] 제1 대각성 운동

힐링&바이블센터 2010. 8. 15. 18:11




예영수 박사 : 오레곤대 A.D, Ph.D(영문학), 경북대 교육학 박사과정이수, 전 한국외국어대학사범대학장, 한신대학 대학원장, 전국 기독교대학교 대학원장협의회장, 광나루 문인회장, 현 한밀선교회장, 한국영성 총연합회 대표회장, 카리스월드 편집인 겸 발행인

대륙의 동부, 뉴잉글랜드에서 부흥을 소망하다 >> 솔로몬 스토다드
(Solomon Stoddard, 1643∼1729)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은 당시 침체 위기에 있던 미국교회의 토양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 청교도 목사들은 박식한 성경지식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고사되어 가는 교회를 부흥시키지는 못했다. 바로 이때 스토다드 목사는 부흥에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설파했다.
   당시 교회는 겨울나무처럼 영적으로 침체해 있었지만, 그는 겨울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새봄의 생명으로 채우실 것을 믿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85:6)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놀라운 부흥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토다드 목사는 부흥을 위해 강력한 설교와 실천을 행했고, 그 결과 그의 교회에서는 1679년에서 1718년까지 다섯 번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다른 지방에서도 뜻을 같이 한 목사들이 일어났으며, 서서히 영적 대각성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60년 간 목회에 헌신하였고, 말년에는 손자 조나단 에드워즈로 하여금 자신을 돕도록 하였다. 바로 이 에드워즈 목사가 훗날 위대한 신학자이자 영적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이다.

뉴저지에서 외치는 소리 - 또 하나의 부흥의 길을 예비하며 >> 테오도르 야곱 프레린귀센
(Theodore Jacob Frelinghuysen, 1691∼1748)

   독일출신의 프레린귀센 목사는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1719년 미국 이민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뉴저지에 도착했을 때 교인들의 삶은 경마, 도박, 주색 등 온갖 방탕과 무질서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길버트 텐넨트(Gilbert Tennent)목사가 뉴저지로 왔고, 여기에 조지 휫드필드(George White-field) 목사까지 가세하여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중부 식민지에 서서히 대각성운동의 에너지가 집결되게 되었다.
   프레린귀센 목사는 1740년 복음의 빛을 높이 듦으로써 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새빛으로 옛빛을 덮다 >> 윌리엄 텐넨트(William Tennent) / 길버트 텐넌트
(Gilbert Tennent, 1703∼1764)

   미국 중부지역의 대각성운동은 프레린귀센이 뿌린 씨앗에서 텐넨트 목사 부자에게로 이어졌다.
   18세기 초, 미국의 많은 지역엔 목회자들이 부족하였다. 더군다나 서부 변방지역의 거친 환경에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훈련된 목회자가 필요했다. 이에 1727년 펜실바니아주의 윌리엄 텐넨트 목사는 젊은 목사들을 양육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신의 농장에 학교를 세웠고, 이곳에서 신학도를 교육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새빛’(New Lights)이라고 불렀다. 반면 이들의 성령운동에 반대하는 목사들은 ‘옛빛’(Old Lights)그룹이라 불렀다.
   교인들은 건조하고 도덕적인 강의를 하는 ‘옛빛’보다 도전적이고 복음주의적 설교를 하는 ‘새빛’목회자를 선호했다. 두 그룹은 갈등을 빚었고, ‘옛빛’은 ‘새빛’의 목회자들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39년에 휫드필드 목사가 텐넨트 목사의 초청으로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면서, 미국중부의 영적각성운동은 만개하게 된다.

II. 제 1 대각성운동 : 일하기 시작하는 성령의 손길
   미국 각지에서 점화된 성령운동의 불꽃은, 드디어 하나의 정점이 되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한 영적혁명이었다. 동부에서는 스토다드에 이어 에드워즈 목사, 중부에서는 프레린귀센으로부터 텐넨트, 조지 휫드필드 목사에 의해 완전히 개화한 이 움직임은 1730년 말에서부터 40년대 초반까지 절정의 시기를 맞았다. 이들로 주도되었던 영적 흐름을 ‘제 1 대각성운동’이라 부른다.

   대각성운동에 대한 반응은 3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대각성운동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입장 - 이들은 지금까지 해오던 예배 형식만을 고수하며, 영적 대각성운동의 심한 감정 표현을 혐오했다. 이들을 ‘옛빛’이라고 부르며, 대표적인 인물은 찰스 초운시(Charles Chauncy) 목사를 들 수 있다.
둘째, 과격한 감정주의로 치우쳐 버린 입장 - 대표적인 인물로 제임즈 다벤포트(James Davenport) 목사가 있다. 극대화된 거친 행동으로 대각성운동 자체에 대해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대각성운동을 주도한 입장 - 두 과격파 사이에서 중도 노선을 취했으며, ‘새빛’그룹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좌우로 치우침은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빛’을 중심으로 한 대각성운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이 두드러진다.
(1) 성경을 중심으로 한 말씀의 선포
에드워즈목사가 열정적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1735년 봄과 여름에 온 도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가득찬 것 같았다. 거의 모든 가정마다 성령 임재의 뚜렷한 증표가 나타났으며, 구원의 확신으로 기쁨이 충만했다. 반년간 이 도시에서만도 300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특히 16세 이상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많은 목사들이 부흥운동에 나와 말씀을 외쳤으며 이것은 다시 여러 주의 20여 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2) 성령의 임재로 쓰러지고 춤추는 육체적인 현상
대각성운동에는 여러 가지 외적 현상들이 동반되었다. 이것은 무아지경(입신), 쓰러짐, 울부짖음, 거룩한 웃음, 환상 등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무한한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온 방으로 확산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과 감동, 울부짖음, 기절 등의 현상들이 나타났고, 소문이 퍼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기도와 찬양, 상담과 권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집회 장소는 죄인들의 회심, 울부짖음, 쓰러짐, 경련, 비탄, 기쁨 등으로 충만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매 집회 때마다 계속하여 일어났으며, 뜨거운 부흥의 열기를 더해갔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스토다드 목사의 손자로 그 뒤를 이은 에드워즈 목사는 18세기 중엽 미국 뉴잉글랜드에서부터 동부에 있는 13개주를 휩쓴 대각성운동의 중심인물로, 미국과 세계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위대한 신학자요 복음전도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설교로 심판의 두려움을 전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위험을 아십니까? 그것은 분노의 불길로 가득찬 분노의 용광로요, 밑바닥이 없는 지옥입니다!'
   그는 단호한 복음주의자로, ‘지옥불 설교자(hell-fire preacher)’ 혹은 ‘유황불 설교자(창19:24, 계19:20)’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믿었다. 에드워즈 목사는 빼어난 지성에 독창적인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영성으로 지성을 통제하게끔 했다. 그에게 있어 참된 경건과 거룩이란 머리(head)보다는 가슴(heart)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의 몸이 공중으로 뜨는 놀라운 체험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체험들이 정신착란 혹은 뇌의 이상으로 발생한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나의 뇌가 이상한 상태로 머물기를 기도하겠다. 차라리 인간 세계 모두가 이렇게 자비롭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 착란으로 사로잡힐 수 있기를 기도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격렬한 감정주의를 경계했다. 과격파들은 격렬한 육체적 현상이 많을수록 좋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외적현상의 감정적인 영향이 반드시 성령의 증거는 아니라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는 성령의 역사가 많은 만큼 사탄의 거짓역사도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은사의 필요성과 함께 은총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사도바울처럼 환상, 계시, 기적의 은사를 많이 행했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인 지식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증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지 은사 때문은 아니라고 말했다.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버린바 되어 지옥에 가게 될지도 모름을 경계하였다.

   성령의 일하심을 결코 훼방하거나 반대하지 말 것을 권면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12:22-23).
   '나는 여러분들이 성령을 거역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거스리는 죄만큼 인간의 영혼에 해롭고 위험한 죄는 없습니다.'
   그는 과도하게 외적현상에 이끌려 사탄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지만, 또한 성령의 일하심을 훼방하고 비판함으로 인해, 성령을 소멸케 하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위대한 성령의 사자! >> 조지 휫드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에드워즈 목사를 중심으로 불붙은 부흥운동을 단단히 뿌리내리게 한 사람이 성공회의 조지 휫드필드 목사였다. 에드워즈 목사가 대각성운동의 터전을 마련했다면, 휫드필드 목사는 능력의 설교로 대각성운동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같은 시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존 웨슬리와 함께 그는 미국에 영적부흥을 주도했다.
   ‘옛빛’과 ‘새빛’이 갈등을 빚던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온 휫드필드 목사는 ‘새빛’ 목회자들을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극적인 설교를 해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으며,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그 이후 프랭클린과 휫드필드는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에 휫드필드가 설교할 수 있도록 큰 건물을 세웠는데 그것이 오늘날 펜실바니아 대학이다.
   휫드필드의 설교는 목회자들의 갈등을 잠잠케하고, 모라비안, 퀘이커, 영국국교,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 등 모든 교단으로 하여금 영적 갱신을 경험하게 했다. 필라델피아에서의 휫드필드의 성공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며 서쪽으로 이동하여, 노셈프턴에서는 에드워즈 목사를 만났고, 남쪽으로 선교여행을 계속하면서 길버트 텐넨트 목사를 만나 최근에 일어난 성령의 불길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이에 텐넨드 목사는 보스턴으로 가서 휫드필드와 같은 역사를 일으켰다. 각성운동은 계속 확대되어갔다.
   휫드필드의 사역에서도 성령의 권능으로 설교 중에 사람들이 동시에 쓰러지며, 감각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고, 심하게 떨기도 하고, 극심한 충격으로 신음소리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게 되었다.
   1803년경에 이르러서는 설교를 할 때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쓰러져서 그들을 밟지 않고는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조차 없게 되었다.
   휫드필드는 강력한 성령의 사도로 놀라운 회심의 역사를 일으켰고, 교회는 양적 질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거듭하였다. 또한 후에 남침례교의 놀라운 확장을 위해 튼튼한 기초를 닦아 놓게 되었다.

III. 소멸되어가는 대각성운동 누가 성령의 반대자인가?
   에드워즈 목사는 사탄의 세력이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하듯, 대각성운동을 반대하는 자들의 세력이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특별히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작은 실수조차도 부흥운동을 비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염려는 현실화되었다. 과격한 감정적 행동에 대해 반대세력의 비난이 쏟아졌다. 대각성운동 집회에서 나타난 일련의 현상들은 불신자들이 보기에 무질서와 혼란이었다. 각성운동 옹호자들은 이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역사라고 주장하였지만, 비난자들은 혐오감을 보이며 그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에드워즈 목사는 부흥운동을 위하여 양방향으로 싸움을 수행해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외적 표현을 극대화하는데 지나친 관심을 갖는 과격론자들로부터 각성운동의 순수성을 지켜야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각성운동의 현상들을 수용하지 않는 전통주의자들에게, 비록 부흥 운동에 작은 실수나 오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부흥운동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득해야만 했던 것이다.

   대각성운동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은 찰스 초운시목사(Charles Chauncy, 1705-1787)였다.
  초운시는 ‘넘치는 성령의 기름부음’(The Outpouring of the Holy Ghost)이란 설교에서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공격했다. 그는 대각성운동의 결과는 무질서와 혼돈이며,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악의에 찬 말로 다음과 같이 성토하였다.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절제하고 과도한 행동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성령의 특별한 임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예배 처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들끓고, 해괴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들에게 그것이 점잖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충고를 하는 자는 틀림없이 성령의 반대자, 또는 악마의 자식으로 낙인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초운시는 에드워즈를 반박할만한 수많은 자료를 모아 「뉴잉글랜드의 종교 실태에 대한 적절한 견해(Seasonable Thoughts on the State of Religion in New England)」라는 글을 썼고, 이것은 1743년 가을에 출판되어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대각성운동의 모든 결점과 실수만을 과장하여 이런 현상은 성령이 없는 광신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바울의 고린도교회도 성령충만과 무질서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은 무질서하다는 이유로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바울은 비록 은사가 남용될지라도 그것은 받아야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성령의 임재를 막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한 바울의 지혜도 초운시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초운시는 ‘이성적인’ 지도자로 영웅적인 인물이 되어, 휫드필드의 전미 순회 여행에 반대하는 운동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그 결과 1744년 휫드필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거의 모든 교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서히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대각성운동의 바람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1742년 절정에 달했던 제 1차 대각성운동은 그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초운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켰다. 그로부터 다시 부흥운동(제 2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기까지는 한 세대-미국 독립 전쟁 이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대각성운동의 불꽃은 과격파의 소동 때문이 아니라, 반대파의 비난 때문에 소멸되었다.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후대의 대각성운동을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번 부흥운동 초반에 사람들이 많은 실수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여주신 한 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의 사역의 발전에 매우 커다란 유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성운동 초반에 빚어진 실수의 결과로 미리 매를 맞는 것이, 다가오는 수많은 세대동안 끝없이 반복될 수도 있는 동일한 실수를 여유 있게 방어할 수 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제 1 대각성운동과 그 공헌 다시 성령의 바람을 기다리며
  ▶ 영적 갱신과 교회 성장에 대한 공헌 : 대각성운동은 미국 교회를 강화시켰다. 1740년부터 20여 년간 뉴잉글랜드 지방엔 150개의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으며, 5만여명의 교인이 증가했다. 미국 중부엔 ‘새빛’장로교회와 침례교회가 대폭 증가하였고, 그 영향으로 훗날 남부침례교의 놀라운 성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 선교에 대한 공헌 : 대각성운동은 평신도 목회와 기도운동을 활성화하고, 대규모 전도운동에 새롭고 혁명적인 계기를 만들어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 영향으로 교회는 미전도 지역에의 선교와 흑인 전도를 위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 사회에 대한 공헌 : 교인들의 영적 각성과 함께 사회 개혁 운동을 이룩하여 무신론적 경향의 사람들이 정직, 순결, 정의, 거룩함으로 돌아오고, 부패, 부도덕, 불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反)노예운동, 형무소 개선운동, 아동 노동법, 여권운동 등은 주로 제2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성과였다.
  ▶ 새로운 사상에 대한 공헌 : 종교적 사상과 신학적 분위기에도 변화가 생겼다. 에드워즈목사의 영향으로 새롭고 강한 기대감이 교회에 뿌리내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함께 분명한 영성신학이 확립되었다.
  ▶새로운 비전과 교육기관에 대한 공헌 : 이 시대에 설립된 9개의 대학 중에 6개가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태어났다. 프린스톤 대학도 윌리엄 텐넨트의 ‘통나무대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루트거즈(Rutgers), 펜실바니아, 브라운 대학이 모두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세워졌다.
  ▶새로운 자유와 통일성 : 장로교와 침례교의 확장은 다른 견해에 대한 광범위한 관용의 정신을 확장시켰다. 다른 교리의 교단끼리도 함께 자유롭게 말하고 협조하는 정신이 미국에 종교적,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증하는 원리로 뿌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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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무엘의 사역마당
글쓴이 : samuel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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