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목회 자료실

[스크랩] 제3 대각성 운동

힐링&바이블센터 2010. 8. 15. 18:11


미국의 경제공황과 1844년 3월 21일에 예수 재림 주장

1820년에 와서 미국의 제 2 대각성운동은 쇠퇴하는 것 같이 보였으나, 찰즈 피니의 사역으로 뉴욕,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로체스타 등지에서 1830년대까지 큰 부흥이 다시 일어났다. 피니의 부흥운동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자, 여기에 고무된 많은 부흥사들이 모든 주요 교단들에서 일어나 부흥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교회는 1840년부터 1857년까지 쇠퇴하고 있었다. 몇 가지 큰 이유가 있다.
경제적으로 1857년 10월에 경제 공황으로 은행이 문을 닫게 되고, 철도가 파산지경에 이르고, 재정적 혼란이 도처에 발생했다.
정치적으로 노예제도 문제에 대한 갈등이 가열되어 남북전쟁이 폭발할 지점에 이르자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미국은 재난의 가장자리에서 뒤뚱거렸다.
여기에 더하여, 영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밀러라이츠(급진적인 ‘다미선교회’)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 지도자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와 그를 추종하는 일파는 예수가 1843년 3월 21과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이 날짜는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단8:14)는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는 1843년에 재림하신다고 결론지었다.
원래 이 예언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수가 B.C. 171∼165년까지 2,300일 동안이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고 성소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러는 ‘정결하게 함’이란 불로 지구의 정화를 말하고, 1일은 1년으로 환산하여 2,300일은 2,300년으로 계산하였다.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선포한 B.C. 457년에 바사(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칙령(느2:1)으로부터 시작하여 계산하면 1843년이 된다는 것이다.
이 예언된 날에 예수가 재림하지 않자, 밀러는 1844년 10월 22일로 재림 날짜를 조정했다.
그러나 그 예언도 빚나가자, 사람들은 실망하고 격노하게 되었다.
밀러 일파를 일컬어 ‘밀러라이츠’(Millerites)라 부른다.
‘밀러라이츠’와는 관계없이 일반 교회도 조롱을 당했다.
밀러의 추종자는 3만∼10만 명에 이르렀으나, 1844년 이후에 많은 추종자들이 그들의 교회로 돌아갔다.

제 3 대각성 운동의 주자 : 평신도 피비 팔머 여사의 부흥운동

미국의 이런 상황과는 달리 캐나다에서는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태어난 피비 팔머(Phoebe Palmer, 1807∼1874)는 의사인 월터 팔머와 19세 때 결혼했다.
피비는 감리교 평신도로서 여권주의자로서 존 웨슬리의 ‘전적인 성화’를 바탕으로 자신을 산제사로 제단에 바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 믿었다.
  피비는 ‘제단 신학’을 기초로 하여 성화를 위한 추구를 단순한 3가지 과정으로 축소시켰다.
(1)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 (2)하나님께서는 헌신한 사람을 성화 시켜주신다는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는 일, (3)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 하는 일 등이었다.
그녀의 신학은 홀리니스(神聖) 교단들 즉 감리교, 나사렛교, 구세군 등에서 받아들였다.
그녀는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부어주신다고 믿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정결케 해주시고, 믿는 자에게 증거 하는 권능을 주시며, 믿는 자의 교회를 부흥시켜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방언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강조한 오순절과 성령세례는 훗날 오순절 교회와 카리스마 운동이 태동되는 길을 예비하게 되었다.1857년 6월부터 10월까지 감리교 평신도인 월터 팔머 박사(의사)와 그의 부인 피비는 캐나다의 온타리오와 퀘백 지방에서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한 천막집회를 인도했다.그들 부부는 집회를 마치고 온타리오의 헤밀톤에서 뉴욕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무엘 라이스 감리교 목사는 팔머 부부를 멕나브 감리교회에 초청하여 설교를 하게 했다.
사람들은 피비의 설교에 너무나 감동을 받아 다음날 또 설교를 요청했다.
그녀의 설교를 듣고 21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피비는 계속해서 몇 주 동안 집회를 인도했는데, 600여 명이 예수를 믿게되었다.
캐나다에서의 이 집회가 제 3 대각성운동의 시작이었다.피비 팔머 부인이 주 강사의 역할을 담당했고 의사인 남편은 그녀를 도왔다.
미국과 캐나다의 신문들은 부흥집회가 질서정연하다고 논평했다.
그 해 겨울 팔머 부부는 오스웨고, 빙헴톤, 유니온, 뉴욕 등지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들은 초교단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1858년 8월에 캐나다의 메리타임 주에서 집회를 가진 결과 성-존 교회서 400명, 헤리팩크스 교회서 170명,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700명이 회심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피비는 평신도 부흥사로서 미국, 캐나다, 영국령의 섬들에서 300회 이상 부흥집회와 천막집회에 참석했다.
1858년의 부흥운동으로 2백만 명 이상을 교회로 인도했다.
제 3 대각성운동의 특징은 피비 팔머가 교회에 평신도 목회 개념을 소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강조한 평신도 목회는 찰즈 피니의 목사들 중심의 소도시 부흥운동으로부터 드와이트 무디의 대도시 평신도 부흥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게 했다.
피비는 페미니스트(여권운동자)로서, 여성 목회를 실천하는 선례를 보임과 동시에 글을 씀으로써 이론과 실천 양면으로 여성 목회를 촉진시켰다.
피비의 영향은 구세군의 페미니스트 케드린 부스와 여성 크리스천 절제회의 프란시스 윌라드 등에게서 크게 나타났다.피비는 인도주의자로서 감리교와 성공회의 ‘부인가정선교회’에서 봉사했다.
또한 그녀는 뉴욕시의 빈민가에 있던 ‘올드 맥주 공장’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집, 학교, 작업실, 교회를 짓게 했다.
그녀가 세운 ‘선교의 집’은 급속하게 확장되어 가는 미국의 빈민가 지역에서 사회개혁을 시도한 교회(장로교)의 첫 노력이었다.
이 빈민가 선교는 19세기에 교회가 사회 개혁을 해야하는 하나의 패턴으로 그 모범을 보였다.역사학자 티모시 스미스는 「부흥과 사회개혁」에서 보도하기를, 1857년 각성운동에 대한 진지한 기대감으로 작고 큰 도시에서 초교파적으로 기도회가 많은 곳에서 열렸다고 했다.
콘넥티컷 주의 베댈에서 매일 오후 4시에 기도회를 가졌는데, 농민, 기술공, 상점 주인들이 참석했으며, 400명이 예수를 영접했다.
많은 작은 도시에서 매일 혹은 매주 기도회를 가졌다.

제 3 대각성운동의 시작 : YMCA의 역할

제3대각성운동이 동틀 때 YMCA가 필라델피아와 시카고와 같은 큰 도시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 당시 창건된 YMCA는 신앙적으로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도시에서 일하는 빈민 지역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분위기와 기독교적 훈련을 하기 위한 목회사역을 하였다.
지도적인 목회자들은 여러모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필라델피아의 YMCA는 매일 300명씩 참가하는 기도회를 주관하였다.
기도회는 정오 12시에 시작했으나, 자리를 잡기 위해 11시에 왔다.
YMCA는 또한 1,200명을 수용하는 천막집회를 개최하여 전도운동을 벌였다.
시카고 YMCA는 평신도들을 위한 위대한 교육장이었다.
드와이트. L. 무디(1837∼1899) 선생이 기독교에 헌신하게 되는 첫 기회도 YMCA에서였다.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무디는 1858년 시카고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주일학교 부흥운동으로 유명해졌으며, 1866년에는 시카고 YMCA 회장이 되었다.
1871년 시카고 화재로 모든 것이 파괴된 이후에 무디는 가수 아이라 센키와 함께 국제 YMCA를 통해 1873∼75년 사이의 2년 동안의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미국에서의 부흥집회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대학들이 1858년의 대각성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개종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열렬한 학생들이 목사가 되든지 선교사가 되기를 자원했다.대각성운동은 미국 도처에서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대도시에서, 소도시와 읍과 마을까지 확산되어 갔다.
그 영향은 학교와 대학에도 밀려왔으며 환경에 관계없이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오순절과 같은 현상이 수천 번 반복되는 것 같았다.
회심한자의 수는 매주 5,000명에 달했다.
남북전쟁 초야에 미국은 쓴뿌리로 찢겨 졌는데도 1858년의 각성운동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큰 시련을 위해 자기 백성을 강하게 하시는 것 같았다.
대각성운동은 1861년 남북전쟁의 총성이 울렸는데도 끝나지 않았다.전쟁의 고뇌 속에서도 남북의 군대는 천막 속에서 각성운동을 경험했다.
전쟁 초기에 큰 부흥운동이 북버지니아주의 군부대 막사에서 일어나서, 남부 연합군을 통해 확산되어 갔다.
죽음과 고통의 비극적인 분위기 가운데서도 각성운동은 계속되었다.

미국 경제공황은 제3의 대각성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제레마이아 렌피어는 1857년 9월 23일에 뉴욕의 풀톤 거리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는 48세의 사업가로 1857년 7월 북화란 개혁교회를 위해 도시선교를 시작했다.
기도회를 시작한 후 2일 뒤에 필라델피어의 펜실베니아 은행이 문을 닫게 되고, 그 파장이 미국 재계 전체에 큰 충격파를 던지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렌피어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집회는 매일 계속되었다.같은 해 10월 10일 뉴욕 증권시장이 곤두박질쳤다.
많은 증권 직원들과 브로커들이 실직했고 도처에서 상점들이 문을 닫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파산했다.
풀톤-거리의 평신도 집회는 존-거리의 감리교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찰즈 피니는 말하기를 “경제 공황 전에 뉴욕시는 번영의 파도를 타면서 부흥운동의 노력이 죽은 것 같이 보였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경제 공황이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다.
6개월 안에 만여 명이 뉴욕의 여러 곳에서 매일 기도회를 가졌다.「뉴욕 타임즈」의 보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알려진 회중교회 목사 헨리 와드 비처(Henry Wa-rd Beecher, 1813∼1887)는 벌톤 극장에서 3,000명의 사람들을 위해 예배 인도를 하고 있었다.
예배 도중에 비처 목사는 옆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술집에 모여서 기도회를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비처 목사는 그들의 예배도 인도했으며, 미국에서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 감사예배를 드렸다.
비처 목사는 신학이란 그 시대의 문화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맞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성의 권리, 도시 행정의 부패, 노예제도 등 사회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처는 그의 말년에 간통문제로, 1880년대에 진화론, 영원한 형벌의 부정, 칼빈사상의 거부 등으로 뉴욕의 회중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기도회가 열렸다.
예배의 형태는 누구든지 기도인도를 할 수 있었고, 간증하며, 권면하며, 마음에 감동이 되면 남녀 가리지 않고 찬양을 했다.
비처 목사가 참석하여 신도들을 격려하긴 했지만, 평신도들이 예배를 주도했다.예배를 위한 특별한 준비는 없었으나, 정각에 시작하여 정각에 끝나는 것이 규율이었다.
아무도 오래 말하거나 기도하지 못하게 했다.
시카고의 메트로포리탄 극장은 매일 2,000명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켄터키 주 루이스빌의 메이소닉 교회에서는 매일 수천 명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으며, 도시 도처에서 집회를 가졌다.
클리브렌드에서도 매일 2천 명이 모였으며, 세인트 루이스에서도 모든 교회들이 몇 달 동안 계속 가득 찼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 권면, 간증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뉴욕시의 기도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붙여졌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려 하니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기도와 권면은 5분 이상 넘기지 말 것.2번 이상 계속 기도와 권면의 말씀은 못함.」

신문 첫 페이지에 각성운동을 보도하다

제 3 대각성운동 기간동안에 유럽에서 온 화물 선박 한 척이 뉴욕항구로 들어왔다.
부두에 상주하는 선박 안내자가 기독교인이었는데, 그가 배를 항구로 인도하는 동안 선장과 선원들에게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성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갑자기 배 안에는 너무나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배가 부두에 도착하자, 대부분의 선원들이 예수를 영접했다.1858년 2월에 제임즈 골돈 베넷 편집인은 「뉴욕 헤랄드」에 각성운동에 대한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뉴욕 트리뷴」의 편집인 호레스 그릴리는 부흥집회를 더 크게 보도했으며, 1858년 4월에 트리뷴지 전부를 부흥운동 기사를 특집으로 다룰 때까지 계속 보도했다.
다른 신문들도 기도회와 예수를 영접하는 많은 기사를 게재했다.

맺는 말

제 3 대각성운동은 제 1·2 대각성운동 때와는 달리,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외형적인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기자들은 “광신주의적 히스테릭한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다만 기도하고자 하는 충동뿐이었다.
부흥운동과 기도운동은 함께 연결되어 있었다.
설교도 별로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제 3 대각성운동 기간동안은 각성운동에 대한 찬반의 논쟁은 없었다.

 

 

ydjy.pooding.com에서 인용

출처 : 사무엘의 사역마당
글쓴이 : samuel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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