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매주 고린도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고전1장부터 4장까지는 교회의 분쟁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분쟁의 원인 중의 하나가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 때문임을 설명하면서 그 해결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누가 일으킵니까? 주일날만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교인들은 결코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교회 일에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언제나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이 건강한 신앙자세로 일하는 교회요, 건강한 신앙의 일꾼들이 앞장서서 일하도록 만드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병든 교회는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이 병든 신앙자세로 일하는 교회요, 건강한 신앙의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비판하고 상처를 입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실, 어느 교회는 당회가 두 파로 나누어서, 한쪽이 찬성하면 한쪽이 반대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파가 아니면 비판하고 방해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가령 고린도 교회에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일꾼이 바울파에 속했다면, 아볼로파에 속한 사람이 볼 때는 못 마땅하여 비판하고 사사건건 반대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분파적으로 나가면 아무리 선하게 일해도 전부 편견으로 봄으로 선한 일꾼들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차츰 건강한 교인들은 빠져 나가거나 뒤로 물러서고 병든 교인들이 주장질하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건강한 믿음의 일꾼들을 많이 양육하고 그런 일꾼들이 앞장서서 일하도록 넓은 일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믿음의 일꾼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일하도록 만들어 줍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건강한 교회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줄 믿어야 합니다.
1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1절에서 말하는 ‘일꾼’이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라는 말로, ‘휴퍼’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under’ 곧 ‘밑’이라는 말하고, ‘페레테스’라고 하는 말은 ‘노를 젓는다.’라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큰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을 말합니다.
주인은 자기 생각대로 노예들을 이곳저곳 앉게 하고 자기 생각대로 중간 지도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는 주인이라도 노예들은 감히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라는 배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의 하나인 것입니다. 일꾼들이란, 캄캄한 배 밑창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무조건 명령대로 노 젓는 노예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선장들이 택한 사람들이요, 선장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노 젓는 노예는 밖을 못 봅니다. “저어라”면 젓고, “빨리 저어라”면 빨리 젓고, “멈춰라”면 멈출 뿐입니다. 그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면 젓고, 아니면 멈출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노예든지 “나는 이 자리가 싫고 저리로 보내주십시오.”라든지 “내가 저 사람보다 실력이 있는데 왜 저 사람에게 십장 일을 맡기는가?”라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일꾼이 되었습니까? 담임목사나 당회가 세웠습니까? 아니면 세례교인들의 투표에 의해서 되었습니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별하여 임명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일꾼은 하나님이 맡기신 줄 믿을 때 건강한 믿음의 일꾼이 됩니다.
또한 각각의 직책도 하나님이 세우신 줄 믿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목사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어느 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 장로들이 자기보다 학벌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실력 면에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직책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고 순종하고 협력하는 자세가 건강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언제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 교단 총회장을 세 번 역임한 이자익 목사님은 원래 조덕삼 장로님의 머슴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덕삼 씨는 그가 신앙이나 머리가 뛰어난 줄 알고 자기보다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신학교까지 공부시킨 후에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을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자익 목사님보다 조덕삼 장로님의 그릇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조 장로님은 자기 집 머슴 출신을 자기보다 앞서 장로가 되게 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게 한 후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모실 수 있었습니까? 교회의 목회자나 일꾼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교회 모든 일꾼은 하나님이 세우신 줄 믿고 그 직책을 귀히 여기고 서로 적극 협력하심으로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더욱 든든히 서가는 건강한 믿음의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건강한 교회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우리가 무슨 비서나 사원, 혹은 종업원에게 일을 시킬 때 가장 신용하는 자에게 갖가지 중요한 비밀을 맡기는 것입니다. 공장의 기술, 거래처, 은행의 예금 구좌, 금고를 여는 방법, 그 외에 가장 중요한 비밀을 다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귀한 일꾼이냐, 아니냐를 알려면 ‘얼마나 주인의 비밀을 많이 맡았느냐’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자기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은 갖가지 성경의 깊은 이치와 경륜, 하나님의 신령의 은사를 알게 하시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맡은 자’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오이코노’는 ‘집’이란 뜻이고, ‘모스’는 집사란 말입니다.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 곧 집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가장 명심할 것은 재산을 잘 관리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히 주인이 원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요, 특별히 주인이 원하는 비밀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청지기는 열심히 수고함으로 주인의 사업이 잘 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의 약점은 말이 많은 것입니다. 주인의 사업적인 비밀을 마음대로 떠듭니다.
더 나가서는 주인의 가정의 비밀을 여기저기 옮깁니다. “주인이 몰래 만나는 여자가 있다.” “자녀가 이혼직전에 놓여 있다.”는 등 함부로 떠듭니다. 주인이 그런 말을 들으면 그 청지기를 당장 해고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청지기는 사업은 잘 못해도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무슨 비밀이라도 일생 지키는 것을 물론이고, 주인 가정의 문제는 일체 입을 다뭅니다.
주인은 그런 청지기는 일생동안 신임하고 무엇이든지 맡길 것입니다. 그만큼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가 봅니다. 때로는 당회에서 아주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너나없이 약속하기를 ‘당분간 이런 문제는 비밀로 하자. 절대로 부인에게도 말하지 말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교회 안에 그 이야기가 전부 퍼집니다.
그러므로 비밀은 없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밀을 맡은 자들로 잘 관리하고 지키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함부로 가감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 나가서는 자기의 주장을 나타나기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자기에게만 주신 특별한 계시나 환상, 혹은 꿈을 너무나 함부로 떠듭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보여주시거나 들려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은바 은혜도 간증이나 전도할 때 외에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어느 남녀가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인이 너무나 입이 가벼워서 친구들에게 어제 밤에 남자가 ‘자기를 포옹했다, 입을 맞췄다.’라고 떠든다면 그런 여인에 대해 점점 정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 목회자들은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말씀을 준비할 때나 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까 해서 조심스럽고, 혹은 하나님 말씀보다는 내 말이 더 앞설까 해서 조심합니다. 사랑하시는 청지기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맡기신 비밀들을 잘 지키고 관리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건강한 교회 일꾼은 충성을 다하는 자입니다.
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성은 ‘신실’'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을 나타내는 신실이나, 충성을 나타내는 ‘피스토스’는 모두 한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충성’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시간, 그리고 모든 재능, 모든 소유물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은 자가 가장 구할 기도제목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다’는 ‘찾아 헤맨다’란 뜻입니다. 가능하면 찾는다는 말이 아니고, 꼭 필연적 욕구를 가지고 이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청지기들이 혼신을 다하여 찾아야 될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일꾼들은 어떻게 충성합니까?
세 가지 자세로 충성해야 합니다.
(1)은혜 갚은 심정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충성할 때에 반드시 명심할 것은 어떤 대가나 축복을 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감격이 없습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심을 감사하여 은혜 갚는 심정으로 충성해야 감격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9:15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고문했고 심지어 초대교회 기둥 같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요, 다메섹으로 가던 이유도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엄청난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는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 갚기 위해 바울은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2)작은 일에 충성입니다.
마25장에 보면 칭찬받은 청지기들은 작은 일에 충성했던 자들이 입니다. 그것이 큰 일, 큰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첩경이 됩니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큰일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어느 시골교회 목회자는 자기 양떼는 돌보지 않으면서 허구헌날 큰 교회 갈려고 정치만 하고 다닙니다. 어느 분은 돈을 왕창 벌은 후에 큰일을 하겠다고 벼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큰일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느 분은 아주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하다 보니 점점 하나님을 맡기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가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웠을 때 사람들은 그의 후계자 문제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그의 후계자를 지목했을 때는 전 미국과 세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쉬브라고 하는 무명의 사람을 후계자로 지목하였기 때문입니다. 쉬브는 초등학교 학력밖에 없었고 청소부로 회사에 입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런 거대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까?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큰 공장의 한 부분 정원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부분의 정원 관리 뿐 아니라, 공장의 여러 구석진 곳까지 청소하였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 일에도 얼마나 땀흘려 충성했는지 나중에는 카네기의 비서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카네기의 비서가 된 후, 바로 그의 눈과 손과 발이 되고 입이 되었습니다. 카네기가 움직이는 곳에는 쉬브가 있고, 쉬브가 있는 곳에는 카네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가 자기 혼자서 밤이 늦도록 사무실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문밖에 쉬브가 서 있습니다.
카네기는 놀라면서 “오! 쉬브군! 자네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는가? 너무 밤이 깊지 않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쉬브는 조용히 웃으면서 “사장님! 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지 알 수 없는데 어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카네기는 그처럼 전력을 다해 충성하는 사람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3)변함없는 충성입니다.
시종 여일한 충성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충성은 자기 이해득실 따라 달라집니다. 내게 유리하면 충성하고 불리하면 충성을 피합니다. 또한 주인의 상황에 따라 충성의 자세가 변합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잘 해주면 충성하고 아니면 충성을 멈춥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충성은 내게 불리하든지, 주인이 힘이 없어지든지,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는 입장에 있어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금년은 개해입니다.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신탕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개는 자기 주인에게 변함없이 충성합니다. 주인이 가난하든지, 주인이 도둑이든지, 주인이 노인이든지 관계하지 않고 충성합니다.
어느 때는 주인이 화가 나서 발로 배를 찰지라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충성을 보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동기회 모였을 때 설교하면서 재미있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작년에 은퇴하면서 교회 사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가장 큰 고민은 기르던 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기르면서 정이 든 개지만, 아파트로 가져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팔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동물 병원에 가서 안락사를 시키고 부부가 산에 묻으면서 울었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교인들이 돌아갔을 때는 울지 않던 목사가 개가 죽었다고 우는 자신이 한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친구 목사가 그 말이 이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교회에서 많은 반대를 만나면서 거의 모두가 자기를 싫어하더랍니다.
그런데 자기가 기르던 개만은 얼마나 자기를 반기는지, 깡충깡충 뛰어오르면 반가워함으로 큰 위로를 받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 개가 죽으면 자기도 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충성 면에서는 사람은 개만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신년도 맡은 직분이 무엇입니까? 충성하되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대로, 작은 일에, 변함없이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건강한 교회 일꾼은 다른 이를 판단하지 않는 자입니다.
3-5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 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었고,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만 눈에 발견하고 판단합니다. 어떤 분은 이야기 중에 거의 70-80%가 남을 비평하고 판단합니다. 경계할 사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항상 말씀을 통해서 옳고 그른 것을 배운 탓인지, 다른 이를 보면 벌써 쉽게 판단이 됩니다. “그 사람 회개해야지, 아니면 하나님이 매를 때리실지 몰라.” “기도생활을 하지 않더니 시험 들었군요.” “그러니까 가정을 구원시키지 못하지.” 심지어는 나이 많은 성도가 돌아갔을 때 “그 집사님은 과연 천국 갔을까?”라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정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남을 비판하는 자는 하나님이 비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하나님도 그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판이나 판단으로 앞장 서 일하는 선한 일꾼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그 죄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명심할 것은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3절에 보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판단에 휘말리어서 낙심하거나 열심히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남을 정확히 판단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던지 간에 자기 신앙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지금은 판단받을 시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판단을 받을 때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이 분명 잘한 것과 못한 일을 판단하고 칭찬과 책망, 상과 벌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고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어느 사람이 여름에 과수원에 가서 열매를 보고 익지 않았다거나 맛이 시다고 판단하고 비판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지금 광야를 지나가면서 한참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데, 마치 미숙하여 잘못된 양,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므로 그 일꾼이 상처를 받거나 실족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범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앞장 서 일하는 일꾼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하기보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인가 무르익은 열매, 더 귀하고 성숙한 일꾼이 될 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빙점(氷點)」을 읽어보신 분들이 적지 않으실 줄 압니다. 그 여성 작가는 사실은 아주 불행한 젊은 날을 산 분입니다.
불치병인 폐결핵을 앓았을 뿐 아니라 24세 때부터 결햇 척추 카리에스와 대상 포진, 직장암, 파키슨 병 등으로 온 몸에 기브스를 하고 13년 동안 베드에 묶인 채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을 병상에서 남의 손에 의해 대소변을 받아내며 산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만약 그 때에 누가 "이 여자는 얼마나 범죄를 했으면 저런 형벌을 받을까?"라고 판단했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병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고 기적 가운데 퇴원한 후에는 1959년에는 좋은 남자와 결혼까지 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장편 「빙점」으로 소설 공모에 응함으로 1천만 원의 상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줌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출석하는 이시히가와 로쿠죠 교회를 그 작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불행한 가운데 있거나 오늘 신앙적으로 나태 가운데 있거나 더 나가서는 범죄의 자리에 있더라도 결코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어떻게 성숙한 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이 최종 평가의 날이요, 그 평가도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그 날까지 하나님이 맡기신 직책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심으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주님으로부터 좋은 판단을 받아 칭찬과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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