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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난주간·부활주일 설교 참고하세요

힐링&바이블센터 2009. 4. 2. 09:26

고난주간·부활주일 설교 참고하세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앞두고 그와 관련된 설교 모음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자료 중에서 몇 편을 선정, 핵심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종려주일 설교 모음은 별도로 편집했습니다. 고난주간 부활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고난주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부활절 전의 한 주간을 ‘거룩한 주간(Holy Week)’이라고 부른다. 한국교회에는 ‘고난주간’이라는 표현이 더 친숙하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와 가정마다 이 주간을 성별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이 주간의 목요일은 ‘세족 목요일’로 정하여,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을 베푸시던 저녁을 기억한다. 또한 그 다음 날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정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재연하며 명상할 수도 있다.


 

 

 

고난주간(월요일)
제목:
성전 숙청
본문: 예레미야 7:1-15, 사도행전 7:44-53, 누가복음 19:41-48

 

 

예수님은 고난주간 월요일에 성전을 숙청하셨다. 당시에는 예수살렘 성전이 형식적인 제사로 인해 타락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부에 난 종기를 치료하더라도 병의 근원을 치료하지 않으면 새로운 종기가 또 나타나게 되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부터 고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병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거짓 예배, 하나님이 없는 성전, 바른 삶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였다.

 

 

세 곳의 본문에서 거짓예배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된다.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유다백성들을 타락한 제사, 형식적인 예배 행위와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사악한 행위들을 꾸짖었다. 9-10절에는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다백성들의 겉과 속이 다른 신앙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예레미야는 과거 이스라엘의 악으로 인해 실로가 멸망했듯이 북이스라엘이 죄악으로 멸망당했듯이, 유다도 멸망당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스데반 집사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열린 재판에서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으신다”(왕상 8:27, 사66:1-2)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하여 성령을 거스리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신앙으로 예배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설교한다. 이 일이 스데반 집사의 직접적인 순교의 원인이 되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의 파멸을 예고(41-44)하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질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와 야합하고 백성의 탄식을 외면하며 제사만 그럴 듯하게 행하는 제도종교, 거짓종교, 형식종교를 비판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빙자하여 백성을 수탈하는 온상지로 성전을 이용하는 것을 꾸짖으셨다. 예수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성전을 회복하신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본연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축복, 은혜, 성장의 신기루 속을 헤매면서 불의에 입 다물고 있지는 않은가? 바른 삶으로 드리는 예배보다는 하나님 없는 성전에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거짓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주님의 채찍을 맞을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는 7:3에서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바른 삶을 드리는 예배만이 회복의 길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삶의 변화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바른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이 땅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살피는 것이 고난주간 월요일에 드릴 우리의 기도이다.

 

 

 

고난주간(화요일)
제목: 버림받은 모퉁이 돌
본문: 이사야 5:1-7, 고린도전서 2:1-10, 누가복음 20:9-19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나무, 포도원으로 묘사한다(렘2:21, 겔19:10, 호10:1, 시80:8). 이사야 예언자는 5:1-7에서 ‘여호와의 포도원을 이스라엘 족속’으로 비유하여 포도원의 노래를 부른다. 하나님께서 정성을 다해 포도원을 가꾸시고 좋은 포도를 기대했는데, 들포도를 맺었다고 이스라엘에 대한 실망을 노래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깊은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불고하고 그들이 오히려 배은망덕했음을 책망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포한다. 들포도 맺는 포도원이 짓밟히듯 예루살렘의 유대인도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고린도전서 2:1-10에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하여 십자가의 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울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예비하신 계획을 인간이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고린도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기를 권면한다.

 

 

누가복음 20:1-19은 포도원소작인의 비유다. 선지자들과 성자를 죽인 유대인 지도자들이 장차 멸망받을 것을 경고하시는 비유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모릿돌이 되리라”(눅 20:17)는 말씀은 시편 118:22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리라는 예언처럼,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계 구원의 초석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세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 구원하시는 사랑, 하나님의 섭리를 어리석은 인간들이 바르게 깨달아 그 뜻대로 살아가며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주간을 보내며 우리의 삶속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성육신 사건, 십자가 사건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좋은 포도를 맺기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들포도를 맺거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영접하지 못하고 배척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깨닫게 되는 비밀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그 뜻대로 살면서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살피시는 것이 고난주간 화요일에 드릴 우리의 기도이다.

 

 

 

고난주간(수요일)
제목: 성전파괴
본문: 예레미야 22:1-9, 히브리서 9:23-28, 누가복음 21:5-19

 

 

히브리서 9:23-28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속죄를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의 속죄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해마다 드려야 하는 제사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제사는 단 한번으로 드려지는 영원한 제사다. 죄를 없애기 위한 속죄의 제사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죽음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의의 모형인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참 성소,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셨다(9:24).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22:1-9에서 여호야김 왕 때의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 멸망하게 되리라고 예언한다. 예레미야는 공평과 정의로 행치 않으며,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지 않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학대하며 무죄한 피를 흘리는(22:3) 유다의 죄로 인하여 유다를 황무하게 하실 것이며(22:5), 유다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실 것(22:7)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성의 파괴와 명망을 보고 유다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떠나서 우상숭배와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게 될 것(22:8-9)이라고 예견한다.

 

 

누가복음 21:5-19은 예수님의 성전파괴 예언과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에 대한 말씀이다. 헤롯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 66년-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에서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21:6) 다 무너진다. 로마군이 불에 녹아내린 금을 찾기 위해 돌들을 하나씩 모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박해를 당할 것이지만 주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며, 인내하는 자는 영원의 구원을 얻을 것이니(21:18-19)용기를 잃지 말고 신앙을 지키라고 권면한다.

 

 

세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세운 성과 성전과 건물은 죄로 인해 파괴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참 성소는 파괴되지 않으며, 그것은 온전한 예배와 삶을 드릴 때 회복된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속죄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도성과 성전은 파괴되지 않는다며 죄와 악행을 범하던 유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처럼 안이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반복되는 제사를 드리며, 바른 삶으로 드리는 예배보다는 하나님 없는 성전 건물에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건물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른 예배가 없는 교회는 예루살레 성전처럼 무너질 것이고 올바른 예배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속죄제로만 온전한 교회, 구원의 성전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고난주간 수요일에 드릴 우리의 기도이다.

 

 

 

고난주간(세족 목요일)

 

①제목: 언약 갱신
본문: 출애굽기 12:21-28, 히브리서 8:1-6, 누가복음 22:7-23

 

 

출애굽기 12:21-28은 첫 번째 유월절 규례를 가르치는 모세의 이야기다. 모세는 첫 번째 유월절 의식을 규례로 삼아 이스라엘과 그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을 명령하였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가장 큰 절기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모든 초태생을 치실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지나가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히브리서 8:1-6은 새언약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증거한다.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백성을 대신하여 예물과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죄를 위해서도 예물과 제사를 드려야 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그들의 제사는 옛언약에 따른 것이요, 하늘의 예배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 그러나 하늘의 보좌 위에 앉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없고 흠없는 완전한 제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대속 제물로 자기 몸을 드려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사함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한번에 영원히, 완벽한 제사를 드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드리신 이 제사는 더 좋은 약속 위에 새언약에 기초한 것이요, 우리를 참다운 생명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중보의 제사이다.

 

 

누가복음 22:7-23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신다. 출애굽의 희생과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 만찬을 최후의 만찬(성만찬)으로 지키셨다.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실 자신의 몸(떡)과 피(포도주)를 나누시면서 그 일을 지켜 행함으로써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첫 번째 유월절, 구약의 옛언약은 짐승의 피로 맺어진 것이지만, 새로운 유월절, 새언약은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셔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영원한 속죄물로 주셔서 맺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대속하시는 구원의 제사이다. 첫 번째 유월절에 희생된 여린양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해방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받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어진 것이다. 짐승의 피로 맺어진 옛언약은 해마다 반복되는 제사요, 온전하지 못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언약은 영원한 것이며, 온전하고 완전한 제사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목요일이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새언약이 세워지고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언약을 갱신하시어 새언약을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의 사랑을 기념하고,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써 삶을 채우는 것이어야 한다.

 

 

 

②제목: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 밤
본문: 출애굽기 12:1-14, 고린도전서 11:23-26, 요한복음 13:1-17, 31-35

 

 

서론: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가지셨다. 이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매우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마치 주인을 섬기는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이었다.

 

 

정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행함이 따르지 아니하는 말뿐의 사랑이 아니었다. 높은 위치에 서서 낮은 자에게 나누어주는 값싼 동정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낮아져서 섬기는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셨고,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시려 하심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낮아짐과 섬김이 있어야 한다.

 

 

1. 주님은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임을 본으로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세상의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다가도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변하면 사랑을 쉽게 그만둔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지금도 하늘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사랑해야 지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

 

 

2. 주님께서는 주님을 본받아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스승이셨으나 오히려 종과 같은 자세를 취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겉옷을 벗는 것이나 수건을 허리에 동이는 것이나 주인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당시 종들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종처럼 낮아지시고 겸손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후에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종이 되어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말씀하셨다. 높아진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 아니다. 교만한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 아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시고 겸손해져서 본을 보이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

 

 

3. 주님은 주님을 본받아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행동의 이유를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참 사랑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를 통해서도 행함의 사랑을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이르기를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하면서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 2:14-17)

 

 

결론: 예수님을 본받아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도 우리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제자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고난주간(성금요일)
①제목: 십자가의 그리스도
본문: 출애굽기 14:8-14, 골로새서 2:8-15, 누가복음 23:33-49

 

 

출애굽하여 홍해에 이른 이스라엘의 뒤로 애굽의 군대가 따라왔다. 뒤를 돌아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의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한다. “왜 우리를 광야로 끌고 나와 죽게 하느냐”(출 14:11)고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모세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군대를 볼 때에는 두려워하여 떨면서 하나님께 불평하였지만, 그들은 모세를 통해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골로새서 2:8-15에서 바울은 십자가로 승리하시는 주님을 증거한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 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믿음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고 죄사함 받음을 증거한다. 세상의 철학과 초등학문을 바라보고 지혜를 의지할 때, 율법 안에 살 때에는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을 때에는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된다.

 

 

해골 골짜기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백성들과 관원들과 군병들은 “만링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눅 23:35)라고 조롱한다.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 중 한 명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며 비방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죄수를 책망하며,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을 영접한 죄수는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세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고 믿으며, 주님을 영접할 때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당하신 성금요일이다. 절망의 날 우리의 죄와 허물을 뒤집어쓰신 날, 죽음의 날이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희망을 주시며, 죄사함과 구원을 베푸시고,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 주신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고, 영접함으로 희망과 구원과 새생명을 얻게 된다. 성금요일에 주님을 바라보고, 영접하는 믿음의 삶을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②제목: 십자가의 공포
본문: 이사야 52:13-53:12, 히브리서 4:14-16, 5:7-9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사실이다. 주후 29년경에 나사렛 예수께서 예루살렘성 바깥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논쟁의 여부가 안 되는 확실한 사건이다. 우리가 복음서들의 약 1/4에 해당하는 양이 그리스도께서 수난 당하신 마지막 주간을, 특별히 십자가의 수난 설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이 십자가의 수난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 무서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십자가는 가장 잔혹한 죽음의 형벌이다.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가장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형벌이었다.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은 너무도 지독해서 많은 사람들이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갔다. 바로 그 십자가의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 구원의 믿음의 기초임을 말씀하신다(고전 15:1-3).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임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복음이다. 바울은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2b)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구원받는 백성이 되려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그의 사하심의 은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희생양이심을 밝히고 계신다(요1:29).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을 가리켜 증언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20:28)고 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라고 말씀하시어 자신이 우리 모두를 위한 십자가의 어린 양이 되실 것을 밝히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때가 되어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모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완전한 희생양으로서의 죽으심이었고,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속죄의 어린 양으로서의 죽으심이었던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아나갈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선언한다(고후 5:21, 벧전 2:24).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으셨고 모든 지옥의 저주를 견디어 내셨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그 모든 것을 감당하셨던 것이다. 이제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이들은 미소 지으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망므에 승리의 기쁨을 안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미소 지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③제목: 고난으로 얻은 영광
본문: 이사야 52:13-53:12, 시편 22편, 히브리서 10:16-25

 

 

서론: 흉악한 죄를 저지른 한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 마음의 분노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감옥에서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고 모범수로 수형생활을 감당하였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곧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고 나아가 사형제 폐지론자들과 함께 사형 반대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은 곧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하여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 죄수는 처음 형이 확정된 대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운동을 바라보던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무도 저 사람대신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군요.”

그렇다. 사람들은 사형제의 폐지에 대하여 운동을 하고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위한 구명 운동은 하지만 아무도 그를 대신하여 죽겠다고 나서지는 않는다. 이것이 인간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현주소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간들을 구하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위하여 우리들이 감당할 죄를 직접 대신하셨다.

 

 

1. 의미를 왜곡하는 인간, 떠넘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하지만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그 형벌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죄지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가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거룩한 침묵을 지키신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신다. 이는 항변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고통이 참을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어서도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침묵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죄책을 느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보다 큰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가 그 고통을 감당하지 않으면 그 죄과를 모든 사람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침묵은 바로 사랑의 침묵이요 대속의 침묵이었다.

 

 

2.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

 

태어나자마자 발견된 백혈병으로 병원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탄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말하기를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어린 것이 이 엄청난 일로 고통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고통당하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바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아픔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아무 죄과도 없이 단지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는 예수님의 희생의 마음뿐 아니라 그러한 아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차리라 자신이 직접 고난 받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그런데도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려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 53:19). 무엇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속건 제물로 삼으셔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사랑 때문이다.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영원한 죽음이라는 형벌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업슨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 바로 이 마음이 그러한 아픔까지도 감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범죄보다 더 크게 실현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엑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3. 영원한 승리.

 

이러한 고난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뜻이 성취”(53:10)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의롭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는 모두 의롭게 되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53:11). 그렇다. 우리의 의로움은 전적으로 그분의 희생의 대가다. 이는 우리가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할 이유가 된다. 이어서 하나님은 그러한 형극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결론: 우리의 은혜는 값싸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주어졌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더욱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④제목: 하나님과 화해하는 날
본문: 고후 5:14-21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왔는지에 관해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1. 인간은 하나님의 만족스런 동반자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물을 지으신 후에 덤으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장 공극적인 창조 계획의 목표가 인간의 창조에 있었다. 유독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창1:26), 인간에게만은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창 2:7).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야 창조의 일이 완결되었던 것으로 창세기 1장은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창조의 일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을 별로도 특별하게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할 존재로 인간을 구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에 맞추어 인간은 지으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동산 안에서 피조물들의 관리자로서 복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복된 나날’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았더라" 또는 “심히 좋았더라”(1:31)라는 표현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떻게 좋았는지 소상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종합적인 소감이 ‘좋았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무엇이 부족하겠으며, 무슨 일그러짐이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만족하였고, 모든 것이 충실하였을 것이다. 그 속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섬기고 살고 있었다.

 

 

2.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함으로써 저주 아래 살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슬픈 악연에 관하여는 성경(창 3장)이 소상하게 그 전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무시했고 하나님 앞에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그 계약을 위반했다. 이것이 선악과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전하여지는 악연의 시작에 관한 설명이다.

인간들은 하나님께 극악하게 반역을 하면서도 무엇을 믿고 장담을 하는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다”(마 27:25)고 했다. 결국 아담의 반역으로부터 빌라도 법정의 반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심령 속에서 한없이 자행되는 주님께 대한 모반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는 악연이 쌓일 대로 쌓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 성문을 빠져나가실 때, 여자들이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도 아니요, 또는 당신의 마음의 여유를 나타내시려고 하신 말씀도 아니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주님도 가련하게 되셨지만, 그러나 정말 가련한 자들은 ‘너와 너의 자녀들’ 곧 ‘인류’라는 말씀이다. 의로운 이를 잡아 죽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못살게 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운명에 있는 인류를 위하여 울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주님의 진정한 권고이셨다.

 

 

3. 십자가 처형의 반역적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인간과 화해하실 길을 열으셨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냈다. 빌라도 총독도 그랬고, 제사장 가야바도 그랬다. 헤롯왕도 그랬고, 빌라도 법정에 모였던 많은 유대인들 또한 그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두고 보실 필요가 없을 만큼 극한 진도에 도달 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다(롬 5:8).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롬5:6,9). 그러니까 인간들이 철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물 삼으시어 인류의 구원의 다리를 장만하고 계셨다. 이토록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우시다.

 

 

오늘 우리 모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자. 어떤 잔혹한 처형도 그렇게 잔혹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음을 당해야 했을 자는 누가인가? 바로 나다. 내 죄로 말미암아서 나는 죽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고 내 대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다. 세상을 미움과 분열과 싸움의 도가니로 만들어 온 자도 나요, 무책임과 불성실로 소망 없는 세상을 만들어 온 자도 나다. 그러나 나는 멀쩡하게 살아 있고, 도리어 아무 죄 없고, 해맑으시며, 가장 의로우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오늘 우리 모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자. 펴신 팔은 화해를 위하여 나에게 내미시는 사랑의 팔이다. 나는 철없이 뿌리치고 있었을 때에도 먼저 내미신 주님의 화해의 손은 거기 있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거두신 일이 없는 그 화해의 손이 여전히 나를 향하여 종종하시며 화해를 청하신다.


 

 

 

제목: 그리스도의 수난
본문: 요한복음 19:1-42
김서택/대구동부교회 담임목사

 

 

요한복음 19장은 총독 빌라도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로마총독의 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시킬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순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매국노도 아니고 민족주의자도 아닌데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하여 로마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형을 결정하고 집행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온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당국도 결국 사탄의 한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있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왕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자기 아들을 죽인 나라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장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해야 옳은데 그것을 의의 제사로 받으셔서 인간들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 그는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1-3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1절). 예수의 죄는 십자가에 처형할 정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빌라도는 적당하게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줄 생각이었습니다. 로마법에는 채찍질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좀 가볍게 때리는 채찍질도 있었고 살이 완전히 찢어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초주검이 되게 하는 채찍질도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에 빌라도가 때린 채찍질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채찍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수욕과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2-3절). 특히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왕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힘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을 예수님 한 사람에게 퍼부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을 지키면서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박봉에 시달리면서 받던 모든 불만을 예수님에게 왕의 옷을 입힘으로 다 퍼부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이 우리에게 이런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2:24, 사 53:5). 즉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당하신 것은 우리가 맞아야 할 것을 대신 맞은 것이며 우리가 조롱당해야 할 것을 대신 당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채찍질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선저인 죄들, 죄를 짓고 또 짓는 연약함, 마음속에 양심을 누르는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주님이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아무런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감추고 또 감추고 싶은 부분들을 믿는 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남에게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상처가 아물었고 치료받았기 때문입니다.

 

 

2. 빌라도의 법정(4-16절)

 

(1) 빌라도의 무죄 주장(4-6절)

 

빌라도의 재판에서 놀라운 것은 모라 총독인 발라도 자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무죄를 주장한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유죄를 주장하며 처형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4절). 빌라도는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로마에 해를 끼칠 위인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에 개입할 입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정당하게 채찍질을 하고 무죄 방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당국은 예수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로마 당국보다 예수님을 더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그들이 선동자라고 고발한 예수님을 우스꽝스러운 왕복을 입혀서 보였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더 건드려 놓았습니다(5-6절).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조롱이 아니고 이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일단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선동자로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런 반역의 기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을, 그래서 무죄임을 밝힙니다. 그랬더니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선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처음엔 이것을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로 생각하고 발을 빼려고 했던 빌라도가 점점 이 올무에 걸려들게 됩니다.

 

 

(2) 유대인들과 빌라도의 타협(7-9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 정도로 끝내고 그냥 내어놓으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며 죽일 것을 요구합니다(7-8절). 그의 죄명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들의 종교법으로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빌라도와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번 유월절에 우리가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하게 넘어가 줄 것이니 당신도 우리의 요구를 하나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라도에게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기가 신의 아들을 처형하는 것이 되며 또 다른 문제는 설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추종자들도 많이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빌라도는 원치 않게 자기의 생애에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한 재판장의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입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확인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8-9절). 그런데 빌라도는 아직까지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예수님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이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 자기 통치에 유리하냐 아니면 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자기 통치에 유리하냐 하는 것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에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워낙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니까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를 죽이는 것이 나올까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하신 것은 ‘이것은 네가 결정할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결정하기 어려울 때 은근히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자기가 결정을 할 수 없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현명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사작 결정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유대인들의 소동(10-12절).

 

빌라도는 지금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고민입니까?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극단적인 선택의 자리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자기들이 고발을 했는데 이 사람을 풀어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종교적으로 협상을 시도하던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계속 망설이자 다시 정치적인 문제로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12절). 즉 이 예수와 자기 왕 가이사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는 가이사를 반역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 추종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 한 사람 처형하는 것은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이렇게 강한 소원을 한 들어주면 그들이 자기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다시 물어보았습니다(10-11절).

 

 

빌라도는 자기에게 예수님을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준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그 권세를 빌라도는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빌려 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의 권세나 지위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로마의 힘이 크게 보였고 힘없는 예수님보다는 유대인들의 말을 한번 들어주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4) 빌라도의 재판(13-16절).

 

드디어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13절). 빌라도는 곧니 그 자리에 앉지 않아도 총독이며, 그가 내린 결정은 유효합니다. 그러나 굳이 그가 그 자리를 택한 이유는 자기의 권위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라는 자는 자기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전혀 굽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수만 믿고 마치 예수를 놓으면 그를 가이사의 반역자로 고소할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자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번 한다고 하면 하는 자들입니다.

 

 

빌라도는 왜 자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무력으로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일만큼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진리냐, 현실이냐’라는 문제였습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진리를 새로 받아들이고 현실을 모두 부정하고 버리느냐’라는 문제였습니다. 거기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무엇보다도 총독으로서의 자기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박석이라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거기에 앉으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앉아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빌라도보다 한 술 더 떴습니다. 빌라도가 “보라, 너희 왕이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을 때 그들은 더욱더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들의 왕은 가이사 한 분밖에 없습니다”고 했습니다(14-16절).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소리에 져서 예수님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3. 십자가에 못 박히심(17-21절)

 

본문은 우리 주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처형당하신 장면을 비교적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7-18절). 우선, 예수님이 처형된 장소는 ‘골고다’라는 언덕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해골인데, 아마 산 자체가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 것 같습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처형된 장소로 이동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어서 시골 구레네라는 곳에서 온 시몬이라는 자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전에 그에게 모진 채찍질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채찍질은 거의 초주검이 되도록 때리는데 뼈가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었는데, 그 두 사람은 강도였습니다. 이 강도들은 남의 물건을 강탈하는 강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 편에서 부자들을 공격하는 테러범들이었습니다. 로마는 죄 없는 예수님을 두 테러범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그가 완벽한 반역자의 한 명으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연출은 대제사장이지만 빌라도는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사이에 죄패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19절). 총독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죄명을 써 붙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한 반역자들인데, 그 대표가 예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자칭...’이라는 말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총독이 정식으로 죄명을 쓴다면 ‘반역자 예수’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에게서 그런 반역의 혐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유대인들 안에 반역의 혐의가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처형하면서 대신 모든 유대인들을 처형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죄패를 썼다면 ‘자칭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무죄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이 십자가의 처형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재판장에게 있습니까? 유대인들에 있습니까? 아니면 인류 전체에게 있습니까? 우선 재판장은 이 사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는 압력에 의하여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유죄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압력을 넣은 자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분입니다. 이분은 그저 평범한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임무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대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나라 전체의 대표의 신분으로 보냄을 받은 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유대인들과 로마인이 함을 합해서 처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4. 운명하심(28-37절).

 

(1) 예언의 성취(28-29절)

 

요한이 가장 강조해서 증거하고 있는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상황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나하나의 일들을 알고 보니까 우연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시편 22:18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목이 말랐다는 것이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28절). 사실 예수님은 목이 말랐습니다. 그 뜨거운 중동 지방의 더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그 뜨거운 햇볕 아래 그대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으면 얼마나 목이 타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이 목이 말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들어 있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군인들이나 작업하는 자들이 일하는 중에 너무 목이 마를까봐 준비해 놓은 음료수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니까 신포도주를 해면에 적셔서 갈대 같은 것 위에 끼워서 예수님의 입술을 적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신포도주를 입술에 약간 적신 후에 머리를 숙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머리에 떠나지 않은 사실은 바로 예수님이 느끼셨던 갈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뜨거운 태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장시간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목이 마르지만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약간의 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그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까? 그러나 물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목말라하실 때 나는 왜 보고만 있었을까?”하는 후회가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신앙적으로 좀더 자랐을 때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이 단순한 육체적인 목마름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이미 말씀된 것이고 그것에 대한 성취였습니다(시 69:21).

 

 

여기서 요한이 우리에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한 감정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깨달은 것은 예언을 성취하시는 주체로서의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그런 행동을 통하여 예언을 성취시키는지 모르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군병들도 자기들이 예수님의 옷을 탐내어서 제비를 뽑는 것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요한을 불필요한 죄의식에서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습니다. 요한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목말라하실 때 물을 드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주님은 아주 작은 말씀이라도 반드시 성취시키는 분이며, 지금이라도 빨리 말씀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지금이라도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2) 다 이루었다(30절).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30절).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참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끝까지 사신 것입니다. 마귀가 지금까지 주자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기 때문이며 애당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ㅔ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끝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인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없는 몸으로 그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의 새로운 대표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이러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주의 죽음, 지옥의 고통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장사되심(38-42절)
이 본문에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장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장사를 보면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38-42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습니다. 본문에도 그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8절). 그러나 예수님을 장사한 이는 바로 이 숨은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는 니고데모라는 율법사입니다(39). 니고데모에게는 꼭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이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눈을 피하여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못했었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그토록 주님을 내어놓고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모두 다 숨어 있습니다.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숨은 제자들은 당당하게 빌라도 앞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고, 다른 유대인들이 보능 앞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정성껏 장사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장사의 의미

 

예수님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너무나도 의심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요셉이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하면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방치되어서는 안 되고 그의 의로우심에 대한 고백으로 정성껏 장사를 치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하심, 하늘로 올리우심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완전한 연속된 하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살아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올리우셔야만 하며 거기서 성령을 부어주셔야만 합니다.

 

 

(3) 예수님의 고귀한 죽음(39-42절)

 

예수님을 장사한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것으로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41절). 이사야는 예수께서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53:9). 이것은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이며,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에서라도 그의 죽음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시신을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은 나이가 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하나의 무덤을 준비해놓았습니다.

 

그 무덤은 바위를 옆에서 쪼아 들어간 것으로 시신을 누일 수 있고 돌로 입구를 막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덤이 자기가 아닌 주님이 누우실 자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의 무덤을 준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준비는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어떤 것을 준비하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사용될 때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엄청난 구원 사건으로 사용됩니다. 만약에 요셉이 그 무덤을 아까워했다면 그 무덤은 그저 한 부자의 무덤에 불과할 뿐이며, 아마도 도굴꾼이나 그 무덤을 기억할지 모르지요.

 

 

하나님께서는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대하여 최대의 예우를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무시하고 바로 축복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무덤 앞에 오랫동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이 단지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 모 세(Moses)
글쓴이 : 모 세(Mos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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