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설교 자료실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요일 4:12-21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8. 11:00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요일 4:12-21

2/27-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매일같 이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 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 다.
특별히 이 세상이 향방없이 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은 미래학자의 말 치고 맞아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치 럭비 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 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 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 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 습니다. 어쩌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더 확실하게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 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 노래라고 하는 것, 노래라고 하지 않았죠. 소리라고 했죠. 소 리, 가락, 그렇게 했습니다 만은 그 다음에 뭐 자꾸 변하는데 트로트, 재즈, 락앤롤, 비틀즈,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요새 와서 테크노. 아무리 제가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 려고 해도 이게 정말 노래인가, 이 발악인가 노래인가 알 수 없어요. 아무리 좋아지려고 해도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저는 제 나이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합니다만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노래, 어느 나라 노래든지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 떠 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 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 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 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되요.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무서운 맹수들도 한번은 사랑해야 생명을 생산합니다. 또 사랑 속에서 생명 이 자랍니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 사랑하는 걸 보면 신기합디다.
그 렇게 사랑해서 생명은 태어나고, 키 워나고, 자라납니다. 그런고로 생명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옛날 책이나, 혹은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는 이것 을 가마에다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 얘기니까 그저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가마꾼이 색시를 태우고 앞에서 가마꾼이 메 고 가고 뒷사람이 또 메고 갑니다.
이런 경우 앞에서 가는 사람은 앞을 내다보며, 앞을 환히 보면서 가마꾼 이 가마를 메고 갑니다 만은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입 니다. 앞에는 가마가 꽉 막았는데 이걸 붙들고 갑니다. 이래서 옛날 어른들은 이걸 이렇게 설명합니다. 앞에 있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 딸려 가는 가마꾼은 믿음이요, 가운 데 있는 색시는 사랑이라고. 그래 서 신랑집에 가면은 이 두 가마꾼은 물러가고 가마는 해체됩니다. 그리 고 신부만 신랑 방에 들어갑니다 그 런고로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그렇 게 옛날 어른들은 비유해서 설명했 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 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때는 심지어는 죽음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참 사랑에 감격 하면 죽는 문제가 하등의 문제가 되 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 입니다. 월남전 때에 있었던 실화 입니다. 전세가 불리해 가지고 일 선에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후퇴할 때가 이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 후퇴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총에 맞았습니다. 뒤에서 쏘는 총 에 맞아서 지금 비틀거리고 있습니 다.
이렇게 후퇴 먼저 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보니까 저기에 비틀거리고 쓰러져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 은가, 여기서 이 사랑하는 친구 하 나가 그 총알이 비오듯하는 가운데 를 뚫고 들어가서 저걸 구출하겠다 고 하니까 소대장이 말렸습니다.
"이미 총을 맞았고 피를 많이 흘렸 고, 저 사람은 살지 못한다. 굳이 네가 거기에 들어갔다가 너까지 죽 을 거 없지 않느냐? 가지 마라" 그 랬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거기 서 손을 들며 쓰러져있는 그 친구를 바라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대로 그 총알 속을 뚫고 들어가서 친구를 업고 나옵니다. 업힌 친구 는 귀에다 대고 자기를 업고 가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빙그레 웃으 면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나는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아무 여한이 없다" 그리고 죽 었어요. 죽은 시체를 업고 와서 내 려놓을 때에 소대장이 "거 봐라! 너 그거 죽을 사람, 어차피 죽을 사 람 살리려고 하다가 너까지 죽을 뻔 했다" 그럴 때에 이 친구는 말했습 니다.
"아닙니다. 내 친구는 내 등 에 업혀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참 사랑!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면 뭐 고생이 다, 질병이다, 문제가 되지 않고 죽 음까지도 넉넉하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에요. 결국은 사랑입니다.
이 귀한 사랑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예요. 둘째는 사랑이 병들어서 문제예요.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 에요 병들었어요. 또 사랑에 거짓 이 문제입니다. 사랑에 속았어요.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 게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 도 있습니다. 사랑의 무지가 문제 입니다.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사 랑을 모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사랑의 Discommunication입니다. 사랑이 통하질 않습니다. 분명히 사랑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의사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 랑이 절단됩니다.
그 문제는 내가 믿질 않기 때문에. 분명히 사랑하 고 있고 사랑 받고 있는데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되고, 사 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사랑을 모르면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의 원초적 속 성을 설명하는 귀중한 말씀이 이어 집니다. 사랑이 중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이 참 사랑의 의미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 이 참 사랑으로 그 의미를 다시 찾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