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리 는 사 람
요한일서 4:7-10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이것은 그가 인간적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에 대해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친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내가 세상에 온 것은"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세상에 낳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사랑은 살리는 사랑이고 이 세상을 살리려고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정신은 살림 정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사람을 살렸고, 역사를 살렸으며,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살리고, 하는 일을 살려 놓았습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 심령이 살고, 정신이 살고, 육체도 살고, 사업도 살아나고, 가정생활도 살아나고, 특별히 이 민족이 통일되어 서로 잘 사는 나라, 전 세계가 전쟁이 없고 평화로 사는 세계가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살으신 생애 전부를 간략하게 한마디로 살리는 생애였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이는 정신이 있고 하나는 살리는 정신이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그는 죽이고 빼앗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마귀였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세상을 살리러 오셨고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 되어있든, 어떤 형편에 처해있든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만보다 더 악한 것은 인간이 절망하는 것이다.” 인간이 교만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으로 전락할 수 있는 비극도 있지만 그러나 절망은 그냥 죽는 것이니까 죄를 짓고라도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심과, 살으심과, 죽으심입니다. 그의 나심은 겸손이었습니다. 그의 살으심은 섬김의 정신이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희생 정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살리기 위해서 겸손했고, 살리기 위해서 섬겼으며, 살리기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겸손하게 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그의 나심이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비웠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마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는 겸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는 나실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여관방은 모두 부요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가난한 시골 나사렛에서 올라온 요셉과 마리아는 만삭의 몸이었으나 거처할 방이 없어서 여관방 마굿간에서 해산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누울 곳이 없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생애 시작이 겸손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가난하게 태어나셨을까요? 이 가난은 당시에 유대땅에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굶주리고 헐벗은 민중들,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누울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난 나를 보라.’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귀한 신분으로 영광스럽게 태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 신분이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자기 신분에 대해서 비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을 생각하면 살아납니다.
또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예루살렘 도시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지역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멸시당하는 나사렛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말했던 것처럼 당시에 가장 멸시받는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이뿐입니까? 예수님은 용모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혹시 자기 용모에 대하여 비관하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겸손하게 모든 약한 것과, 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들을 자기 몸에 지니시고 모두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살려놓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는 학교를 다닌 일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랍비 학교를 나와야만 엘리트가 되는 것인데 그는 학교를 간 일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 교육은 배우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배우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진학하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라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으나 모두의 구주가 되었다 나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국경을 넘어간 일이 없습니다. 유대땅 팔레스타인 좁은 땅에서 그는 거닐고 사셨습니다. 지금 전 세계 지구촌에서는 자녀들을 외국으로 연수 보내고 유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난해서 유학을 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국경을 넘어 타문화권에 가서 공부하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 나와 같이 이 세상에의 지평적인 국경이 아니라 수직적인 하늘 국경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수를 배우고 하늘을 배우는 사람이 된다면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통해서 배울 것은 그가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그 사시는 생애가 섬김의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면서 살려주었습니다. 병든 자를 섬김으로 고쳐 건강하게 살려놓았습니다. 낙심된 자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지은 자를 정죄할 때 예수님께서 그를 살려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아침에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서 말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
그때 예수님께서 잠잠히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듣고 저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하나씩 하나씩 다 가고 예수와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주님께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주님은 살려주십니다. 죄 지은 자도 살려주시고, 가난한 자도 살려 부요케 하시고, 낙심된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면서 살려주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기 전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주님께서 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까? 이것은 발을 안수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신 것은 발의 신비를 담아준 것입니다. 발은 우리 지체 중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발은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모든 더러운 것을 홀로 담당하고 다른 지체를 깨끗하게 합니다.
발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잘 있었느냐”고 하면서 악수도 하고, 머리에 면류관도 씌워주고, 가슴에 훈장도 달아주지만 발보고 ‘수고했다’고 훈장을 채워주는 일이 없습니다. 발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낮은 자리에서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섬기는 자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서 친히 하늘을 버리고 땅에 오셔서 무거운 짐 홀로 지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 높이 올리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피흘리시면서 ‘내 피로 깨끗이 죄사함을 받아라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라 내가 낮아져서 너희를 높여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발처럼 살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그대들은 땅끝까지 이르러 발의 사도로 가라” 섬김의 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시므로 우리를 한없이 높여주셨습니다.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들에게 ‘희생의 제물로 아들을 보냈으니 희생하는 예수를 통해서 살아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에서 살 것이고 땅에서도 그 살림 정신으로 당당하게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마귀는 죽음을 가져왔고 예수는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죽기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요 성자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하늘을 버리고 오실 때도 “내가 가야 세상이 살지 내가 가는 곳마다 섬겨야 저들이 살지 내가 죽어야 저들이 살지” 이 생각을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이 아지 못하여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무슨 정신입니까? 살림 정신입니다. 죄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님은 희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거미같은 인간, 개미같은 인간, 꿀벌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거미는 처마밑 컴컴한 곳에 그물을 치고 곤충들을 거미줄로 묶어서 잡아먹고 삽니다. 이와같이 이 지구상에는 캄캄한 밤에 골목길에서 온갖 사기꾼들이 죄악을 저지르면서 인류를 죽이고 있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히 일을 해서 저축하지만 자기 혼자만 먹습니다. 꿀벌은 꽃을 옮겨다니면서 꿀을 만들어놓고 자기는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좋은 보약을 제공합니다. 꿀벌같은 사람은 살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세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빼앗는 강도같은 사람, 자기만 살겠다고 피하여 가는 제사장과 레위인같은 사람, 자기와 상종도 안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거반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물인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에 붓고 싸매고 짐승에게 태워서 주막집에 맡기면서 돌봅니다. 이것이 바로 살리는 정신입니다. 인자가 온 것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하려 함이니라
성탄을 맞아 우리는 살림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내가 살아서 ‘너도 세상에 가서 네 가정을 살려라, 네 남편을 살려라’ 직장에서 퇴직하고 좌절하고 의기소침한 남편에게 “여보 우리 예수 믿고 잘 삽시다.” 그 말 하는 아내가 되어다오. 대학을 실패하고 좌절하는 아들에게 “아들아, 낙심말라 우리 예수 믿고 힘차게 살자”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서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은 ‘살리러 오신 예수 믿고 함께 삽시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북한 동포를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아버지, 저들은 아지 못해서 아직도 공산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와 같이 살려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 땅에 먹을 것을 보내고 우리의 사랑을 보내야 합니다. 언론이 끊임없이 북한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살림 정신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신문은 모두 죽이는 소리밖에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것 하나 살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살리는 소리를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산다는데 보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살림의 정신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은 부모를 살려드려야 됩니다. 학교 선생님은 자녀들을 살려야 됩니다. 정치가가 있습니까 이 민족을 살리는 정치를 하십시오. 언론인이 있습니까 펜을 들면 민족의 정신을 살려놓는 문필가가 되십시오. 남 헐뜯고 죽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살려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우리의 삶의 정신입니다. 성탄에 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면서 “내가 살리러 가노니 나를 따라 이 역사에서 살림 정신으로 모두 다 살자” 하는 정신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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