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요한웨슬레의 성결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2:06

차 례

 

 

Ⅰ.서론1

A.연구의 의의와 목적B.연구방법과

Ⅱ.요한 웨슬레의 성결사상4

A. 웨슬레의 성결이해 5

1.웨슬레의 성결의 근거 5

2.성결의 성서적 의미 6

3.성결과 삼위일체의 관계11

4.성결의 필요성:죄의 이중성17

B.성결의 증거25

1.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25

2.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25

3. 온전한 헌신을 하게 된다26

4.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26

C.성결에 대한 설명27

1.이 명직의 설명 27

2.조 종남의 설명31

3.웨슬레의 설명33

 

Ⅲ.성령과 성결 38

A.성령의 역사39

1.성령의 즉각적 역사?39

2.성령의 지속적 역사?41

B.성결을 가져오는 성령의 사역43

C.성결과정에서 성령의 사역?45

1.관계적 성화46

2.초기의 성화47

3.점진적 성화49

4.온전한 성화50

5.그리스도인의 완전51

D.성결의 확신:성령의 증거53

1.성서적 근거54

2.증거의 내용55

 

Ⅳ.성결된 삶의 표적58

A.기독교적인 사랑58

B.웨슬레의 사랑 관념 59

1.사랑과 믿음59

2.성결의 표적인 사랑61

C.사랑과 그 대상61

 

Ⅴ.결 론64

A.요약64

B.비평과 제언65

 

참고도서67

 

 

I. 서 론

 

 

A. 연구의 의의와 목적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났던 어느 누구보다도 실제적인 종교면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웨슬레의 신학을 취급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문제나 연구할 점이 있으나 그 중에도 특히 웨슬레 신학을 지배하는 것은 성결의 신학이다. 그렇기에 그의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 이는, 그 핵심이 성결과 관련을 갖게 된다. 또한 이 성결의 본질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완전이 성결사상의 촛점이 된다.

성결이란 용어가 죄로부터의 온전한 구원, 또는 신자의 생활의 완전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다. 그러기에 성결은 도덕적, 영적으로 순결한 상태, 모든 죄가 씻음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고 성령으로 충만한 온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루돌프 오토(Rudolph Otto)는 그의 책 “The Idea of the Holy”에서거룩에 대한 경험이야 말로 바로 종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성결은 종교의 영역에서만 해석되어지고 평가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결은 하나님께 기원을 갖으며 신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진다.

웨슬레는 그의 완전론에 관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변화되고, 그 변화의 성장 과정 중에서 보다 높은 혹은 깊은 또 한번의 은총의 경험을 통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단계, 즉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이른다’ 라고 하였다. 웨슬레의 이와같은 심오한 완전론은 1739년 1월 1일의 성령 세례의 체험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웨슬레 신학을 연구하는 많은 신학자들과 전도자들은 웨슬레 신학의 진수를 잃어버리고 피상적인 완전에만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웨슬레 신학의 중심인 성결사상을 연구한 후 성결과정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더 깊이 연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B. 연구 방법과 범위

 

성결은 웨슬레 신학의 중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처럼 귀중한 웨슬레 신학이 오늘날 변질되고 망각되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다시한번 웨슬레의 성결사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성결과정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을 고찰하려고 한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문헌 연구 방법으로 연구될 것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웨슬레 자신의 자료를 참고하려 한다. 이차적으로 웨슬레의 번역된 서적을 통하여 연구할 것이며 국내서적과 출판된 간행물을 통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본장은 전부 5장으로 구성된다. 제I장에서는 연구의 의의와 목적을 다루려 한다. 그리고 연구의 방법과 범위에서는 연구 자료의 선택을 밝히고자 한다.

제II장에서는 웨슬레의 성결사상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웨슬레의 성결의 근거를 살펴본 후, 신 구약에 나타난성결의 성서적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뿐만 아니라 웨슬레가 이해한 성결과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연구하며, 성결의 필요성을 연구하고 그리고 성결에 대하여 설명 하고자 한다.

제 III장에서는 성결과 성령과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 웨슬레가 바라보는 성령의 이해를 살핀 후 성결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을 연구하고자 한다.

제IV장에서는 성결된 삶의 표적인 사랑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웨슬레의 성결의 표적인 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을 살펴 볼 것이다.

제 V장에서는 본 논문의 결론으로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얻어진 중요점을 요약 정리한 후에 비평과 함께 웨슬레 신학에 기초를 둔 기독교대한 성결교회의 방향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성결인의 자세를 제언하려 한다.

 

II. 요한웨슬레의 성결사상

 

 

‘성결’이란 단어는 종교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사용되고 또 종교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리고 성결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The Moral Attribute)중의 하나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성결은 하나님을 가장 하나님되게 하며 신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진다. 또한 성결은 영원자이신 하나님께 그 기원을 가진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심으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사5:16)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은 그의 의로우신 행동을 통하여 표현됨을 뜻한다. 성결은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하심의 충만이요, 표현이며 하나님의 행동의 표준이다.

웨슬레는 성결에 대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변화되고, 그 변화의 과정 중에서 보다 높은, 보다 깊은 또 한번의 은총의 경험을 통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단계, 즉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이른다고 하였다.

한편 웨슬레는 성화의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순간부터 거기에는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점진적인 성화(Gradual Sanctification)가 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거기에는 또한 순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무엇이 있는 마지막 순간과 무엇이 없는 처음 순간이 있어야만 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결은 중생으로 시작한 구원 역사의 완성이요, 그 정점(Climax)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성서에서는 ‘온전한 구원’ 이라고 한다.

따라서 필자는 본장에서 웨슬레의 성결론을 언급하고자 한다.

 

A.요한 웨슬레의 성결이해

 

1.요한 웨슬레의 성결의 근거

기독교 진리는 모두 성서의 교훈에 근거해야 하며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되어져야 할 것이다.

요한 웨슬레는 자신의 기독자 완전의 교리 즉 성결교리를 어디에서 발견하였나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1729년 나는 성경을 진리의 유일무이한 표준으로, 순수한 경건의 유일한 궤범(軌範)으로 읽고 또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과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 그것도 그의 마음의 어느 부분만 아니라 그 전부를 품으며, 여러 점에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점에 있어서 그의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함을 더욱 더 선명한 빛으로 보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시기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경건을 그리스도에게 대한 한결같은 추종이요, 주님께 대한 내적(內的) 외적(外的) 동화(同化)라고 생각하게 된 관점(觀點)이었다’.

따라서 성결이란 성경에 거룩함이라고 한 바 영혼의 그 상습적 경향이다. 그것이 바로 죄 씻음 받는 것, 즉 ‘육체와 영혼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해 지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레가 주장하고 가르치던 성결은 바로 ‘성서적 성결’(Scriptual

Holiness)이었다. 그의 성결의 교리는 단순히 인간 이성이 만들어 낸 이상론이거나 관념론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적 성결이며 실제적 성결이다.

 

 

2.성결의 성서적 의미

a.구약에서 성결의 의미

성결에 대한 구약원어는 코데쉬( )이며, 이것은 명사이고 형용사는 카도쉬( )이다. 코데쉬( )는 ‘거룩한 장소’나 ‘물건’을 뜻하며, 추상적으로는 ‘신성함’,‘거룩함’으로 번역되고, 카도쉬( )는 ‘거룩한’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성결이나 성화는 원래 같은 어원 즉 Qadosh에서 나온 말이므로 같은 사건의 여러가지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카도쉬(Qadosh)는 세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광휘(光輝), 둘째 성별(聖別), 세째 정결(淨潔)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광휘는 영광과 관련된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 빛은 거룩의 빛이요, 영광의 빛이므로 속된 것들은 감히 그 앞에 나설 수 없는 두려운 빛이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나타나실 때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할 때의 그 빛이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완성하였을 때와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였은 때 충만하였던 바로 그 영광이다.(출40:34-38, 대하7:1이하). 죄인들이 이 영광의 빛 앞에 설 수도 없고, 단지 성결한 자만이 가까이 할 수 있다(출20:20-25,3:5). 이 빛은 신성의 핵심의 표현이다. 창조하고 파괴도 하며 벌하기도 하며(민14:10) 자비로도 나타난다(출33:18).

둘째 성별은 광휘와 관련된 말이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환상을 봤을때 영광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과는 구별되는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이었다(사6:1이하). 성별은 적극적 의미로는 하나님을 위한 구분 또는 헌신이며, 소극적 의미로는 모든 부정하고 속된 것으로부터 구별됨이다. 크리스챤은 죄로부터 떠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을 위한 구별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분된 것이므로 맏아들이 거룩하고 (출13:3이하), 이스라엘이 거룩한 민족이다(레19:2,신7:6). 심지어는 제사장의 옷도(출28:2) 하나님을 위하여 구분되었기에 거룩하다. 그러나 성별된 것이 모두 내적으로,실제적으로 거룩해지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많았으며, 제사장이 거룩하지만 내적 정결 없는 이들도 있었던 것과 같다. 성별은 구약에서는 의식적 의미가 강하나 신약에 와서는 실제적 성결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우리로(하여금)그의 거룩함에 참여케”(히12:10)하여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1:4).

세째 정결은 의식적인 면과 도덕적 실제적인 면이 있다. 구약에서는 대부분이 의식적 정결의 의미와 관련되며 특히 제사의식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신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정결을 요구하신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로다”(시24:3,4).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레위기에 많이 나타나는 희생 제물이 형식적, 의식적, 외적인 속죄였다면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내적, 실제적, 도덕적인 정결이 가능케 되었다(히9:13,14). 성결과 관련하여 완전(Perfection)이란 말은 구약에서 주로 두가지 말이 사용된다. 하나는 ‘완전한’ ‘충만한’ ‘건강한’ 등의 뜻을 지닌 샬렘(Shalem)이요, 다른 하나는 ‘완전한’ ‘전체의’ ‘건전한’ ‘흠이없는’ ‘진실한’ 등의 뜻으로 쓰이는 탐(Tam)과 탐밈(Tamim)이다. 완전은 온전함, 완전한 평화, 의로움, 마음이 바름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b.신약에서 성결의 의미

구약에서 성결이 여호와와 그의 백성에 대해 사용된 것처럼, 신약에서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신약에서 성결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은 다음과 같다.

(1)하기오스(Hagios):거룩한(Holy)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구약적 의미의 성별의 개념을 1차적으로 가지면서 실제적인 변화와 정결을 표현한다. 바울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성도를 일컫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롬1:7,고전1:2). 말썽 많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자들”(고전1:2)이었으며, 베드로는 “너희도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벧전2:5)고 권면하면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벧전2:9)라고 구별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기오스는 자주 성도나 신실한 자들로서 사용되기도 한다(엡1:1, 골1:2, 계13:10).

신약의 성결 사상을 잘 나타낸 곳은 벧전1:15-16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결의 근거는 하나님의 성결이다. 성부가 성결하시므로 자녀들도 거룩해야 한다. 또한 “모든 행실에서” 거룩할 것을 명령함으로 실제적이며 윤리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바울은 엡1:4에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함으로, 하기오스의 윤리적 성결을 말하고 있다. “흠이 없게” 라는 말은 구약에서 제사드릴 소나 양은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찌니”(레22:21)라는 말과 같으며,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으며”(히9:14),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1:19)라고 함으로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다.

(2)하기아스모스(Hagiasmos):가지지 못했던 것이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벧전1:2에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에서 처럼 외부의 행동이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이 인간 자신의 공로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 수 있다(고전1:30, 히12:14, 살전4:3,7).

(3)하기아수네(Hagiasune):하나님을 닮은 도덕적 정결을 의미한다.

이 도덕적 정결은 성서가 요구하며 또 나누어 주기로 약속된 것이다. 고후7: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하여 도덕적 정결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4)하기아죠(Hagiadzo):거룩케 하는 행동을 표현하는 동사이다. 즉 인간의 거룩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요17:17,19에 이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케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엡5:26에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으며, 살전5:23에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하여 거룩케 하신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서에는 성결의 사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구약에서는 의식적 성결의 의미가 강하지만 그러나 내적이며 실제적인 개념도 나타나 있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나서 실제적 성결의 개념이 강하다. 구약이 성별의 의미가 강하다면 신약은 정결의 의미가 강하다. 성별된 자가 온전히 정결하기 까지의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3.성결과 삼위일체의 관계

 

a.요한웨슬레의 삼위일체 이해

성결이란 신성에 관계되는 특수한 것이다. 여러 속성 중의 하나이면서 또한 그 이상이다. 성결이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의 총체와도 같으며, 하나님의 여러가지 속성을 모두 합한 것이다.

1775년에 요한1서 5:7절을 가지고 “삼위일체에 관하여”라는 설교를 하였는데 거기서 웨슬레는 자신의 삼위일체관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삼위이시며 한 분이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하시냐 하는 방법(manner)에 대하여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 신비성이 있다....... 나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하신 만큼만 믿고 그 이상을 믿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삼위가 일체되는냐 라는 방법은 계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 대하여 믿는 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라는 그 방법을 모른다고 하여 그 사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웨슬레는 올바른 교리 형성에 있어서 그것이 한갖 사변적 관심으로 탈락하는 것을 피하려는 노력을 그의 신학적 작업에서 언제나 기울여 왔다. 웨슬레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였다.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의식적으로 모든 철학적 사변(Philosophical Speculation)을 피하기로 하였다.”

웨슬레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삼위일체의 사실(fact)은 믿지만 삼위일체의 양식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다. 하나님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만으로써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교리의 ‘본질’과 그것의 ‘철학적 해석’의 어려운 구분을 지으면서 교리의 ‘사실’(fact)과 ‘해석’(Manner how)을 구분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이고, ‘해석’은 그가 계시하지 않은 것이다. 철학적 해석은 계시의 사실들을 그 시대의 언어로 밝히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본질적인 교리의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삼위일체 신에 관한 지식은 참된 기독교 신앙 즉 생명적 종교

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 요한이 말한대로, 그의

속에 성령의 증거, 즉 성령이 그 자신의 영으로 더불어 그가 하나

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이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자이신 하나님의 공

로에 의하여 자신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성령이신 하나님의 증거하

심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참된 종교를 가진 자라 볼

수 없다.

 

 

그에게는 삼위일체에 관한 철학적 해석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그 사실을 믿고 그것을 신앙에 적용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삼위일체’또는 ‘인격’(Person)이란 말의 사용을 거절하면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화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것 처럼 생각하고, 그 말을 꼭 써야 한다는 요구를 자기 개인적으로는 할 수가 없다고 솔직히 시인한다. 왜냐하면 이런 말들은 성서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계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이요, 아버지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에 대한 설명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아들과 성령과 아버지를 한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웨슬레 신학의 실용적인 면을 볼 수 있다.

한영태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웨슬레의 신학이 실용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한 기독교 신학의 사변적인 면을 회피하거나, 신앙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신학과 사역은 죄인의 구원, 실제적 변화를 강조하였기에 실용적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웨슬레의 신학은 구원을 위한 실용주의(redemptive pragmatism)라 할 수 있다. 더우기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성결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웨슬레 신학의 중심은 성결론이다. 웨슬레는 구원이 칭의와 중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목표로 한 부단한 과정이라 보았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그 구원은 겨우 초기의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성화(성결 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를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성화의 교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성화를 단지 성령의 사역에만 귀속시키는 오류를 방지하고 바로 잡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필자는 이제 웨슬레의 성결론을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살펴봄으로 웨슬레의 성결론이 보다 성서적이고 엄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완전한 진리인 것을 설명하기로 하겠다.

 

 

b.성결과 삼위일체

 

(1)성부 하나님의 성결

그리스도인의 성결은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다. 이는 그분의 전능한 사랑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의 성결은 절대적이요, 완전한 성결이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나 신성의 본질이다. 아모스 4:2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르켜 맹세하시되”(God has sworn by his Holiness)라고 할 때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며, 그의 본성에는 거룩성이란 전혀 없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그가 가졌던 원초적 의로움(original righteousness)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있어서 성결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만 한다. 이는 자녀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선물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죄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해 구별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품에까지 참여하기를 원하신다(벧후1: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성결)함이라”(살전4:3)고 하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7)라고 분명히 나타내었다. 성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부르셨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성결을 명령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45, 19:1,2, 20:26, 사57:15, 벧전1:15, 마5:48, 살전5:24). 이것이 죄인을 향한 거룩한 사랑이다.

 

(2)성자 하나님의 성결

그리스도인의 성결은 십자가 위에서 흘린 보혈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셨고 죄가 없으셨다. 곧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며,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였다(히7:26).

웨슬레의 성결의 정의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품으셨던 마음 전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완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살아야 한다(히12:2). 무엇보다도 주님의 십자가에 궁극적 목적이 바로 우리의 성결을 위한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이 땅에 오셔서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우리는 흔히 십자가의 은총이 내 죄를 용서하고 나를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는 의인(義認)과 중생( 重生)을 의미함이다. 그러나 주께서 예비하신 은총은 그보다 더 높은 성결의 단계가 있으니 십자가는 바로 우리를 성결케 하심이 그 궁극적 목적이었다. 곧 성결이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가 내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성령 하나님의 성결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며 동시에 거룩케 하는 영이시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擇)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라고 분명히 거룩케 하는 행위자가 성령임을 밝히고 있다. 성령은 성결의 집행자(행위자,agent)이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성결교회 헌법에도 “성결이라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의 세례를 받음이니 곧 거듭난 후에 신앙으로 순간으로 받은 경험이다” 라고 하여 성령에 의해 성결케 됨을 말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를 정결케 함으로 온전히 성결한 상태를 이룬다.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3:5)구원을 받으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살후2:13)구원을 받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성결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성삼위 하나님의 본성과 역사에 근거를 가진다. 우리의 구원 과정과 같이 성결은 성부의 계획을 성자가 실천하심으로 예비하셨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이다.

 

4.성결의 필요성 : 죄의 이중성

 

웨슬레가 타락한 인간을 말함에 있어서, 어떤 근거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는가? 라는 것은 그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웨슬레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가지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자연적 형상, 둘째는 정치적 형상, 세째는 도덕적 형상이다. 그러므로 웨슬레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이성과 의지 그리고 자유의 천부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영(spirit) 혹은 혼(soul)이다. 인간은 모든 하등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서 창조된 원상태로서의 인간은 의롭고 참으로 성결하게 살았던 것이다. 인간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고, 바로 그 사랑은 인간의 성질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관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 이성 등 본래의 기능을 옳게 사용함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순종했다. 이것이 범죄 이전의 인간의 상태였다. 이때의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복된 삶을 누렸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웨슬레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한 원상태로 부터 타락하였다. 웨슬레는 이같이 아담의 불순종과 반항이 자유를 남용한 것이며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원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즉 죄인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 인류에게 만연되고 있는 죄의 기원이다.

 

a.죄의 종류

 

(1)원죄:상태로서의 죄

웨슬레에 의하면 인간은 모태로부터 타락된 죄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이 그의 영혼 전체에 파급되어 모든 능력을 전부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 악한 뿌리에서 솟아나는 악한 기질들을 보게 된다. 그 악한 기질은 교만, 정신적 불손, 편견, 허영, 증오, 시기, 질투, 보복, 분노, 원한, 비통, 적개심, 세상에 대한 애착, 자아의지 그리고 우매한 욕망들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욕망들이 원죄의 악한 뿌리로부터 나오지만 자연인(natural man)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연인은 자기들의 정신적 결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해의 눈을 열어주시면 그들도 자기들의 공허, 우매, 무지, 그리고 죄와 부정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원죄라는 말은 모든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의 도덕적 영적 상태가 나면서부터 죄에 감염되어 더러워졌다는 것이다.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는 탄식이나 “악인은 모태에서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58:3)라는 말들은 모두 유전된 부패성 즉 원죄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은 가르치기를 인간의 사망과 모든 악한 부패성은 인간의 죄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이것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도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유전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의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2)자범죄:행동으로서의 죄

웨슬레는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여 원죄는 죄의 뿌리 또는 모체와 같아서 자랑, 고집, 불신앙, 우상숭배 등이며 자범죄는 원죄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싹과 같은 것으로서 여러가지 있으며 이것을 특수한 죄라고 보았다. 순수한 죄는 개인의 죄이며 이것이 바로 자범죄이다. 그래서 원죄는 원인이며 자범죄는 결과이기 때문에 둘은 서로 구분된다. 그리고 원죄를 내적인 죄, 자범죄를 외적인 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한 것을 권장하고 악한 것은 금지시키는 것이 계명의 목적이다. 따라서 이 계명은 인간의 행위를 제지시키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계명을 위반했을 때는 죄가 되는 것이다. 즉 유혹이 있을 때에 나의 의지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내적인 죄가 된다. 그리고 내적인 죄가 있은 후에 영혼 속에 악한 욕망이 형성되고 팽창하여 결국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은 사라지게 되고, 마지막으로 외적인 죄를 범하는 단계에 이른다.

 

 

b.성결의 필요성

사람에게는 아담으로부터 전해오는 원죄가 있고, 또 죄로 인하여 부패하여진 악한 정욕과 구습이 있고, 양심이 더러워졌으니, 여기에서 성결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끝까지 성결함 속에서 주를 섬기게 될 것이며, 재림하시는 주앞에 흠없이 서게 될 것이다. 이 은혜는 인간의 수양이나 고행이나 노력으로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주의 보혈을 믿는 순종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성결이 필요하다.

(1)성결은 하나님의 요구이다.

성경을 종합해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결을 요구하시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3),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벧전1:15-16)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성결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1:4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는 말씀속에서 하나님은 현세에서 인간에게 성결을 강조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결 요구는 영적 성결뿐만이 아니라 몸의 성결 즉 전체의 성결(Whole Holiness)을 강조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원죄에서 깨끗함을 받는다.

성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담의 유전으로부터 정결함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범죄에서만 구원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아담의 유전죄에서까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인간이 아담의 유전죄에서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곳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이 본문에서 옛 사람이나 또는 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의 유전죄를 말하는 것이며, 단순히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 말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 죄의 몸이 멸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담의 유전죄까지 담당하여 구속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본문에서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담의 유전죄에서 정결함을 받아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들 중에서 아담의 유전죄가 어떠한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죄에서 정결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성결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육을 쓰고 사는 동안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결은 이러한 유전죄로부터 깨끗함을 받으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이러한 아담의 유전죄에서부터 벗어나 인간이 현세에서 완전하여 질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3)주님을 닮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고 하였다. 주님을 닮으려면 성결해야 되며, 거룩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닮을 수가 없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닮는 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여 준비하여야 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려는 사람들에게 내적 성결은 물론 외적 성결까지 강조한 것을 볼 수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 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이 말씀은 성결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며 아울러 그리스도의 재림을 영접하려는 성도들에게 성결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성도들은 성결의 은혜가 필요하며 성결함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c.성결의 방법

성결의 은혜를 받으려면 중생한 후에도 죄가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웨슬레는 그리스도인이 거듭난 후에 계속 내적 죄가 남아 있다고 보았으며, 그 내적 죄가 그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죄를 위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본성과 은혜가 대결하고 또 다른 표현으로는 영과 육이 싸우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온전한 성결을 위한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필자는 성결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말씀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강조했다. 요한복음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케 하는 방법이 된다.

둘째:예수의 피이다.

히브리서 9장13-15절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였고 요한 일서 1장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은 모두가 예수의 피로 성결케 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세째:믿음이다.

사도행전 15장 8-9절에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하였다. 이는 예수의 은총을 믿음으로 모든 죄에서 용서함 받고 성결함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결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B.성결의 증거

 

1.모든 죄에서 자유를 얻는다

모든 죄란 범죄자와 원죄에서 자유를 얻어 범죄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됨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인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류의 시조 하와가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범죄함으로 그 귀한 자유의지를 잃어버리고 죄의 종이 되고 말았다. 그 후부터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항상 죄를 짓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성결의 은혜를 받게 되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자유를 얻게 되는 특전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결된 증거는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죄에서 자유를 얻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성결한 증거를 알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8:2)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성결된 증거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2.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성결된 증거는 마음의 평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평안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평안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결한 심령은 세상적으로는 근심과 두려움이 있어도 마음에는 평안이 있게 마련이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고 권면했다.

 

3.온전한 헌신을 하게 된다

웨슬레는 미국 죠지아 선교에서 실패하고 귀국한 후 자기 신앙을 재확인하였으며,올더스게잇(Aldersgate)의 경험 이후 그 신앙이 뜨거워져서 온전한 헌신자가 되었다. 그후부터 53년간 웨슬레는 실패하지 않고 온전한 헌신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이것이 웨슬레의 성결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헌신에는 성결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4.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성결의 증거로 나타나며, 내적 역사지만 외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아홉가지로 설명하였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여기에 기록된 아홉가지의 열매는 성결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높은 단계에 있는 영적인 열매들이다. 이 아홉가지 열매를 사도 바울은 왜 성령의 열매라고 말했을까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열매들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서 새 생명이 생기고 자라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라고 말했던 것이다.

 

C.성결에 대한 설명

 

웨슬레 신학에서 성결론의 중요성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 성결교회도 성결이 중심사상이다. 헌법 제1조에는 본 교회의 목적은 “국내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 성결의 은혜를 전하여......”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 8조 본교회 사명은 “......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교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하에서......”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의롭다 함을 얻을 뿐 만 아니라 “거룩하여 진다”라는 교리는 “현재 여기에서”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깊이를 말하는 성서적 교리이며, 중생한 자는 완전(기독자 완전 또는 성화)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성결”의 도리이다.

 

이제 성결에 대한 정의와 그 본질을 설명하고자 한다.

 

1.이 명직 목사의 설명

 

a.성결의 정의

이 명직 목사는 1929년에 ?성결교회 약사?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완전한 성결이라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의 세례를 받음이니 곧 거듭난 후에 믿음으로 순간에 받는 경험이니라. 또한 완전 성결은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능력을 주심이니라.” 그의 정의에서 성결은 성신세례, 중생후의 이차적 경험, 원죄에서 정결, 성별, 능력받음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 명직 목사님은 그의 책 ?기독교의 사대복음?에서 성결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즉 성결은 하나님의 성결인 절대적 성결과 인간의 성결인 상대적 성결로 구분한다.

 

(1)절대적 성결

절대적 성결은 하나님의 성결로서 하나님만 가지신 성결이다. 즉 “지존무상(至尊無上)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通悔)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이사야 57장 15절).

또한 욥4: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결은 그 이상의 성결이 없는 것이요. 또한 거룩하사 악(惡)으로 시험을 받지도 않고 그 성결하심을 잃어버리지도 않으시는 성결인 고로 하나님과 같이 성결한 자는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없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가지신 성결이니 그 이상의 성결이 없는 것이다.

 

(2)상대적 성결

상대적 성결은 인간의 성결이며 하나님의 성결을 상대로 하여 우리 성도가 원하는 성결이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라고 요구하시는 성결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이요, 인간 스스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벧전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에 근거한 우리의 성결이다.

이와 같이 이 명직 목사님은 성결을 죄를 짓지 않고 “무죄하게 사는 생활을 가리킴”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에서만 죄없이 사는 성결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하면서 성결을 단순히 내적, 영적 차원에서만 두지 않고, 성도의 실제 생활로까지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웨슬레가 주장하던 “내적 성결과 외적 성결”의 사상과도 같은 것이다.

 

 

b.성결의 필요

성결의 필요성에 대하여 신학대강(神學大綱)에서 다음 여덟가지를 말한다.

(1)성결의 은총은 永遠前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인 까닭에 (엡1:4, 요일3:8).

(2)성결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까닭에 (벧전1:15-16,마5:48,약4:8,요13:8등).

(3)성결은 하나님의 뜻인 까닭에(살전4:4,7).

(4)성결은 하나님이 約束하셨으므로(살전5:23,딤후2:13).

(5)肉의 性質을 滅하는데 필요함(롬6:6,8:6-8).

(6)성결은 贖罪의 목적이므로(엡5:26,27 히13:12 딛2:14).

(7)재림하시는 주를 영접하기 위하여(마5:8,히12:14,히9:28).

(8)성경 전체가 성결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c.성결과 성장

성결체험에 순간적 변화의 요소와 점진적 성장의 요소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 명직 목사의 견해는 순간적 변화에 치중하고 있고 점진적성장은 단지 은혜의 성장일 뿐 성결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구분하여 설명한다.

(1)성결은 죄악이 제거된다는 것이요, 성장은 은혜가 증가되는 것이다. 죄는 은혜가 성장함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단순히 믿음으로 제거되는 것이요, 이 죄가 제거된 후에 더하는 일(은혜의 성장)이 따라온다.

(2)성결은 心中罪에 관한 것이요, 성장은 心中 은혜에 관한 것이다.

(3)성결은 단지 하나님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요, 은혜의 성장은 하나님과 함께 일한 결과이다.

(4)성결은 신앙으로만 되는 것이요, 영의 생명의 성장은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여 이루어진다.

(5)마음의 성결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진실과 사랑의 성장은 점차적이다.

(6)마음을 성결케 하는 것은 직접 성신의 증거가 있고, 심령상의 발달은 성신의 진리로 말미암아 진보되는 마음에 의하여 발견할 수 있다.

(7)마음의 성결은 그 소유자만 알 것이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나, 성장은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된다.

(8)성결은 영적 성장을 위한 터전이다.

(9)성결은 완성하는 일이지만(罪에서 완전히 깨끗해졌다), 성장은 우리

생존중에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10)마음의 성결은 누가 가지든지 차별이 없으나, 은혜의 성장은 각자가 같지 않다.

(11)성결은 천국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것이나, 성장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상에서 소개한 이 명직 목사님의 성결론은 웨슬레의 신학에 입각한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2. 趙鍾男 박사의 성결론

 

a.정의

消極的인 면에서 보아 성화는 죄의 세력에서 자유케 하며 죄의 성질로부터 씻기게 된다. 그리고 積極的인 면으로는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 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며, 새생명이 은총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자의 완전’이라고도 말하는데 이것은 의도의 순수성이요, 生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과 모든 내적 외적 불결을 탈피하는 마음의 할례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b.현세에서의 성결의 가능성

웨슬레는 우리가 성결을 얻을 수 있는 시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이 순간은 보통 죽음의 순간 즉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직전의 찰나임을 믿는다. 그러나 그 순간이 죽기 십년 전 이십년 전 혹은 사십년 전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믿는다.”

곧 웨슬레는 현세에서 우리가 성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c.완전 상태의 維持

인간이 가진 制約性은 완전의 상태에서 인간을 후퇴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완전 상태의 유지란 그것의 획득보다 더욱 어렵다. ?결이란 質에서 완전한 것이며 동시에 量에 있어 부단히 성장하는 완전이다. 또 이것은 순간순간 主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유지된다.

 

3.웨슬레(John Wesley)의 설명

1740년 말경으로 웨슬레는 당시 런던의 주교 깁슨(Gibson)박사와 화이트홀에서 면담한 일이 있었다. 그는 내가 말하는 완전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나는 조금도 꾸밈이나 숨김 없이 설명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웨슬레 씨, 당신의 완전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 뿐이라면 이것을 온 세상에 공포하시오. 누구든지 당신 말을 반증할 수 있다거든 실컷 해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고 말하였다. 웨슬레는 대답하기를, “주교님, 그리 하겠읍니다”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라는 설교를 써서 발표하였다.

웨슬레는 자신의 성결 또는 완전론에 대하여 자신있게 말하였던 것이다.그와같은 웨슬레의 완전(성결)에 대한 정의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a.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그리스도 안의 젖먹이라도 죄를 범하지 않을 만큼은 완전하다’는 의미이다. 비록 베드로가 외식함으로써(갈라디아2:11-13), 그리고 바울은 바나바와 심히 다툼으로써(사도행전 15:39),범죄하였다 할찌라도 그렇다고 해서 사도 중 두 사람이 한때 범죄했었으니 모든 세대의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살아 있는 동안은 범죄할 수 밖에 없으며 실제로 범죄한다고 하는 이론을 세울 수 있는가? 결단코 그럴 수 없다. 범죄의 필연성은 그들에게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넉넉했으며(고린도 후12:9),오늘날 우리에게도 넉넉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못 짓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은혜 안에,말씀안에 거하면,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죄를 안 짓는 것과 못 짓는 것은 다른 것이다.

 

 

b.악한 생각, 악한 기질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의미에서 완전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2:20)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도 악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웨슬레는 ‘악에 관한 생각’이 반드시 ‘악한 생각이’이 아니며 죄에 대한 생각과 죄된 생각과는 아주 뜻이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즉 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죄되게 생각하는 것은 같지 않은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선량한 사람도 살인자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악하다고 죄된 생각이라 할 수는 없읍니다. 은혜로우신 우리 주님께서도 마귀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 4:9)고 시험하셨을 때 그 마귀의 말을 틀림없이 생각하고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주님께서 악한 생각이나 죄된 생각을 품으셨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님은 참으로 그런 생각을 품으실 수가 없읍니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도 그런 생각을 품으실 수가 없읍니다.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누가6:40)라는 말씀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악하고 죄된 생각에서 해방되셨다면 그의 제자인 그리스도인도 악하고 죄된 생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 것입니다.

 

c.원죄에서 정결케 된다는 의미이다.

웨슬레는 완전히 성화된 사람은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외적인 죄는 물론 내적인 죄에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은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이 없다.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이란 사랑에 배치되는 그릇된 성품이 전혀 그 영혼안에 남아 있지 않으며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사랑에는 순수한 마음과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이 수반된다.

중생한 자는 외적인 죄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내적인 죄는 계속 남아 있다. 죄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다. 완전 성화된 사람은 외적인 부정은 물론 내적인 부정으로부터의 정결을 받는다. 그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형상으로 완전히 새로남을 의미한다.

 

d.온전한 사랑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1744년 6월 25일, 감리교회 최초의 연회에서 성화 또는 완전의 교리에 대하여 신중히 토의하였다. 그 문답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문) “성화된다” 함은 무엇인가?

(답) “진리에서 나온 의와 성결”로 하나님의 형상에 새로와지는 것이다.

 

(문)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답)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신명기 6:5).

 

(문) 이 말은 “내적인 죄가 다” 제거되었음을 의미하는가?

(답)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가 “모든 더러움에서 구원되었다”(에스겔 36:29)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하나님을 전심전력 사랑할 때에 우리의 영 속에는 불의한 성품이나 사랑에 위배되는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사고, 말, 행동이 순전한 사랑에 의해 지배될 뿐이다. 그리고 성결이란 현세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 완전이지 도달이 불가능한 절대적 완전이 아니다. 성서가 요구하고 제시하는 수준에서의 완전이요 그 수준에서의 성결을 뜻한다.

 

웨슬레는 성결함을 받는 믿음을 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원칙에 진실하십시오! 그리고 이 축복을 구하십시오 !

구하시되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just as you are), 곧 더 나은 상태나 더 약화된 상태에서가 아니라, 그대로에서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가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지불할 것 없는, 또한 간구할 자료도 없는 다만 가엾은 죄인의 자리에서 구하십시오. 당신이 있는 그대로에서 이것을 구하신다면, 그럼 지금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지연시킬 이유는 없읍니다. 어찌하여 지연시킬 것입니까? 그리스도는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당신의 원하는 바의 전부이십니다.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문에 서 계십니다! 마음 깊이에서 부르짖으십시오.

 

 

그대, 하늘의 손님이시여

들어오시오, 들어오시오

그리곤 다시 떠나지 마시고

저와 더불어 먹으며

이 찬치가 영원한

사랑의 잔치가 되게 하옵소서.

 

 

 

III. 성령과 성결

 

 

하나님의 성결의 도구로서 성령은 웨슬레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 성결의 구별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결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성결의 증거도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웨슬레의 성결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 성결은 구원과 연결되는데,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신자들의 종합적으로 성숙된 과정을 성화’ 로볼때, 그 성화를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다. 즉 구원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만, 인간 심령 속에서의 성결의 성취는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이다.

웨슬레도 구원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며, 따라서 마음 속에 일어나는 어떠한 변화도 성령의 역사라는 점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도 크리스챤이 아니다. 웨슬레는 성결이나 기독자 완전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도 성령없이 성결될 수 없다. 성결은 성령에 기인한다. 그리고 성결은 성령의 사역에 기인한다. 즉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롬15:16)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후2:13)이라는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본 장의 제목을 “성령과 성결”이라 정하였다. 따라서 본 장에서 먼저 웨슬레가 바라본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본 후 성결과정에서 성령의 사역을 연구한 후 성결의 확신을 갖게하는 성령의 증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A.성령의 역사

 

웨슬레는 사람 속에서 성령께서 은혜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은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점진적인 방법과 즉각적인 방법이 있다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그 깨달음의 순간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계속적이고 점진적인 역사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기까지 성령의 점진적인 역사가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1.성령의 즉각적 역사

 

웨슬레는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 이후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것은 성령의 계속적이고 점진적인 은혜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원은 칭의와 성화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

의 은총을 회복하고, 성화에 의해서 우리는 죄의 세력과 그 뿌

리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모든

경험과 성경은 이 구원의 방법이 즉각적임과 동시에 점진적임

을 보여준다. 이 구원은 우리가 칭의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거룩해지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인내하며 하나님과 사

람을 사랑하게 된다. 이 구원의 은혜는 그 순간부터 점점 증가

하기 시작한다......따라서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에 대한 순수

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

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모든 면에서 성장해 가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점진적인 성화의 발전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생활은 결국 성화의 성숙한 단계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에 도달할 것이다.

 

린드스트롬(Lindstrom)은 구원의 질서에 관한 웨슬레의 이론 즉 신앙의 성장과정에서 점진적인 것과 즉각적인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생과 온전한 성화는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유기적

관련이 없이 두 개의 독립된 현상으로 관찰되어진다. 웨슬레는

두 가지가 모두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하므로 웨슬

레의 구원론에서 순간적인 요소만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웨슬레가 또한, 구원은 하나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으로 파악한 사

실은 경시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점진적 발전의 사상은 그의 구원

관에서 가장 특출한 요소이며 실제 그의 사상의 일반적인 특징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두 가지 요소 즉, 즉각적인 것과

점진적인 것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며, 웨슬레에게 특유한

구원의 질서는 이러한 두 요소의 결합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

다. 구원은 사람이 여러 단계의 신앙 과정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이해되며 각 단계는 여러 가지의 신앙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웨슬레는 사실상 즉각적인 면과 점진적인 면을 똑같은 비중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크고 위대한 변화가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구원은 언제나 연속적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 성결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점점 더 거룩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웨슬레는 순간적으로 큰 은혜를 부어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그러한 은혜를 사모하도록 권면하였고 동시에 은혜의 지속과 보다 더 큰 은혜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는 전진과 노력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웨슬레는 점진적 역사와 즉각적인 역사를 모두 수용하면서 계속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강조했다.

 

2.성령의 지속적 역사

 

웨슬레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크게 셋으로 나눈다. 첫째는 자연상태(the natural state), 다음에는 율법적 상태(the legal state), 끝으로 복음적 상태(the evangelical state) 혹은 사랑의 상태(the state of love)로 보았다. 그러나 사람은 세 가지 영적 상태 중 어느 한 곳에만 전적으로 속해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 속에 여러 가지의 영적 상태가 섞여서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신자들은 대개 자연상태와 율법적 상태가 섞여진 상태에 있고, 제자들은 대개 일반적으로 율법적 상태와 복음적 상태가 섞여진 상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한편 웨슬레는 그의 사상의 초기에는 진실한 기독교인은 오직 복음적 상태에만 머물러야 하며 율법적 상태와 섞여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웨슬레는 1738년에 행한 ?믿음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Faith)이라는 설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 가졌던 믿음에 대하여, 그것은 우리를 구원시키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이 비록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일으키고 천국의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런 믿음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웨슬레는 신앙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게 되었고 온전에 대한 그의 사상도 조금씩 변화를 갖게 되었다. 즉 후기에는 사랑의 충만을 통한 온전 혹은, 자신의 무력을 깊이 인식하고 철저히 의지하는 가운데서 온전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율법적 상태에 있는 사람의 연약한 믿음도 하나님께서는 물리치지 아니하고 받으실 것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다. 웨슬레는 1788년에 행한 ?믿음의 발견에 대하여?(On the Discoveries of Faith)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천국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켜 주신다. 그 방법은 우리 심령의 베일을 벗기시고 우리

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

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 즉, 우리의 악한 성품과 악

한 기질과 악한 말과 행동 등을 분명히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이런한 모든 죄들을 우리의 심령 속에서 나오는 것들로서 우리

의 심령을 부패시키는 것들이다. 성령께서는 다음에 우리 죄의

보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는 입을 다물고 하나님

께 사죄의 탄원을 하게 해 주신다.

 

 

웨슬레의 원숙한 사상의 특징으로서 지속적 성장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해야만 하며 신앙의 현상유지란 일종의 퇴보라고 웨슬레는 강조했다.

따라서 영원한 성장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은 웨슬레의 구원관의 점진적 성격과 함께 그의 온전한 성화론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점진적인 성장이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웨슬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질문:사랑으로 온전해진 사람들도 은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가.

대답:의심없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육체 속에 머물 때 뿐만 아니라 아마 영원토록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B. 성결을 가져오는 성령의 사역

 

거듭난 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성결, 또한 사랑의 행위는 성령께서 동시에 역사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것은 의인의 근거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과 같이 성화의 동인(agent)은 성령임을 말 해 준다. 믿음에 의한 의인은 구원의 뿌리(root of salvation)이고 성령에 의한 성화는 구원의 본질(substance of salvation)이다. 성결의 은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받게 되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을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결의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또한 성령의 강력한 협력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 명직 목사는 성결의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신께서 불로 임하사 사람의 마음에 유전죄와 거기 속한 악한

정욕과 죄의 정욕을 정결케 하시나니 제자들이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신을 받음으로 그 정과 욕까지 정결하여졌느니라.

 

 

이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간의 유전 죄까지 정결하게 하심으로 성결의 은혜를 받게 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결의 은혜는 반드시 성령의 강력한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 따라서 성결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우리의 마음속에서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성령이 협력해 주는 것이다. 한편 중생된 인간의 영혼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새로나게 되며 성결된 인간의 영혼은 육적인 모든 것을 양보하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서 그리스도가 내안에 계시므로 산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성결의 은혜는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히2:1-4)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성결의 은혜를 가져오는 성서적인 근거라고 하겠다.

웨슬레 자신도 성령께서 한 순간에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거나, 혹은 온전히 성화되게 하실 수 있다는 점을 올더스게잇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올더스게잇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의 사역 방법에 대해서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C. 성결과정에서 성령의 사역

 

중생한 사람은 성결을 향하여 성장하여야 하며, 성결한 사람은 더 완전한 성숙단계에 이르도록 노력하여야 된다. 성결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태만하거나 교만하다면 후퇴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웨슬레는 완전 성화에 이르기 까지는 점진적인 성장의 과정이 있음을 그의 설교 “그리스도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서 ‘어린이’, ‘청년’ 그리고 ‘어른’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한일서에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요일2:12-15)라고 하였다. 즉 자녀들(baby)은 중생한 자 곧 초기의 성화의 단계이며, 청년들(young man)은 점진적 성화의 과정에 있는 신자이며, 어른들(father)은 온전한 성화에 이른 자, 즉 성결한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성결한 성도는 계속하여 구원을 향하여 계속 성장하는 것이다.

 

1. 관계적 성화 (Positional Sanctification)

 

누구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믿음으로 인하여 전에 원수되었던 사이가 부자관계로 회복된다. 이때에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 즉 거룩한 백성이 된다. 관계적 성결이란 이와같은 관계의 변화에서 본 것이다. 이는 주관적 변화라기 보다는 객관적인 변화이며,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관계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관계적 성화는 의식적 성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분된 물건이나 사람은 모두 거룩하다. 실제로 이들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성자를 통해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것이요,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칭의에서 사역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칭의의 조건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17:5),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고전12:9)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우리가 칭의되는 것과 동시에, 바로 그 순간에 성화가 시작되는데, 우리가 다시 나며, 위로부터 나며,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그 순간에 관계적 변화 뿐만 아니라 진정한 변화가 생기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내적으로 새로와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에 의한 관계적 성결 만으로는 온전한 성화라고 볼 수 없기에 더욱 나아가야 한다. 믿고 용서받은 신자는 이제 실제적인 영적 도덕적 변화를 받아야 한다. 이 실질적 변화를 웨슬레는 초기의 성화, 온전한 성화 그리고 그 전후에 있는 점진적 성화의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2.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

 

사람이 거듭날 때 성화가 시작된다는 것이 웨슬레의 견해인데 이는 흔히 초기적 성화, 거듭나서 성화의 단계에 들어섰으나 완전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 이르기 전의 신자의 상태를 말한다.

 

웨슬레는 초기의 성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전적인 성화가 그의 영혼에서 발생하기까지, 그의 성결은다른 것 과 혼합되어 있다(all his holiness was mixed). 즉

그는 겸손하지만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그의 겸손은 자만

과 섞여 있다. 그는 온유하긴 하지만 그의 온유는 분노나 어

떤 사나운 성정(turbulent passion)때문에 자주자주 깨지고

만다.

 

그러므로 비록 중생은 했지만 여전히 세상의 힘에 눌려있는 사람이 온전한 성결을 체험하기 전의 상태는 퍽 불안정한 것이다.

웨슬레는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했다. 중생은 성화의 첫 단계이다. 이것을 초기의 성화라고 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 의로워지고, 거듭나게 되며, 초기의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죄에서 용서받으며, 죄의 세력이 깨어지며, 성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영태 박사는 학위 논문에서 중생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인간 심령 속에서 일으키는 큰 변화이다.

이것이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 의

와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나는 것이다.....우

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됨을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중생할 때 즉 내적, 외적 성결은 시작한다고 하였다. 또한 중생과 성화는 모두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3. 점진적 성화(Gradual or Progresive Sanctification)

 

많은 사람들은 즉각적 성화만을 강조하면서 점진적인 성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웨슬레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부터 거기에는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점?적인 성화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믿음을 지속하고 있는한 성장을 거듭하여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 하? 순간적 체험 인?완전한 성화에 나아가는 것이라 했다.

 

 

한영태 박사는 점진적 성화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고전1:2)이라고 불렀으나, 3장에서는 저들이 아직도 젖먹이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꾸중한다(3:1-3).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중에서 성장하여 온전한 성결을 이룬 자들이 있음

을 “너희 중에 이와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

을 얻었느니라”(고존6:11)라고 쓰고 있다. 어린 아이가 태어

나면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한

다. 성장하지 않으면 무언가 병들었거나 문제가 있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과 같이 신앙도 마찬가지다.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신자의 성화의 과정이다. 이 기간에 신자는 영적인 싸움을 무수히 겪게 되며 승리와 패배를 교대로 겪게 될 때가 많다. 유혹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중요하며, “무릇 지킬만한 것 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3:23)는 말씀은 특히 중요하다.

 

4.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온전한 성화는 신자가 다시 자신의 무능과 자신안에 남아 있는 죄를 자각하고 믿음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 ?웨슬레는 이 체험을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라 하면서 이 체험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는 다고 하였다. 중생의 순간부터 성화의 역사는 시작되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만큼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모든 죄로부터의 정결함을 받으며(소극적 의미의 성결), 성령의 역사로 순수한 사랑의 충만을 (적극적 의미의 성결)얻게 된다.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를 두번째 경험이라 했다. 두번째 은총의 체험이란 뜻에서 “제2의 축복”, “제2의 은혜”, “두번째 변화”, “온전한 구원”,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불렀다. ?온전한 성화는 바로 “온전한 사랑” 또는 “순수한 사랑”이며 이 사랑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며, 하나님과 이0웃을 사랑하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온전한 성화는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을 말한다. 즉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 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라고 하였다. 성령으로 마음이 정결해 진다. 성령께서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으로 충만케 하신다.

 

5.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레는 완전의 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의 설교의 관심이 신자로 하여금 성결의 은혜를 받도록 하려는 데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는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위배되는 그릇된 기질이 조금도 그 영혼에 남아 있지 않고 그의 온갖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 성결해도 연약성을 지니며, 무지나 실수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비록 육체가 죄는 아니더라도 육체 안에 있는 동안은 죄의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이 타락하고 부패한 연약한 인간성이 영화의 단계에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함을 얻을 수 있다. 현세에서의 완전은 이 최종적 완전을 얻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완전은 끝이 아니다. 완전한 자라도 계속 은혜 안에서 성장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최종적인 칭의를 얻어야 한다. 이를 최종적인 완전(final stage of perfection) 또는 영화(glorification)라고 한다. ?그리고 웨슬레의 완전은 절대적, 천사적, 아담적인(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 완전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웨슬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지나, 과오나, 결점이나, 유혹받을 가능성 등에서의 완전을 말하지 않는다. 즉 완전은 ‘제한된 완전’이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나 천사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연약성을 인정하는 ‘인간적 완전’이라고 할 것이다.

 

조종남 박사는 웨슬레의 인간적 완전에 대하여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이해와 강조의 차이는 우리의 눈과 안경에 적절히

비유될 것 같다. 안경을 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안경

을 아무리 잘 닦아서 써도 깨끗한 상태의 유지는 그 순간일

뿐 곧 먼지가 쌓이게 된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안경이 정결을 유지할 수 없듯이 세상에서는 무지와 실수

로 신자(信者)는 정죄 아래 있음을 면할 길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보자. 안경에 먼지가 잠시도 쉬지 않고 쌓이듯

이 눈에도 그러할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항상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눈물이 언제나 흘러

먼지를 씻어내기 때문이다. 성결한 자가 그 자신의 연약성

으로 인하여 무의식적인 죄를 범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으로 그 성결을 지속할 수 있다는 웨슬레의 주 장은 바로 이렇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웨슬레는 보혈을 항상 의지하는 신자는 계속하여 그 죄를 씻음받고 있으며(요일1:7), 신앙으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인격적 관계 안에서 그의 사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D. 성결의 확신:성령의 증거

웨슬레 신학의 공헌중에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확신의 교리라 할 수 있다. 이 확신의 교리는 성서에 근거한 것으로 초대교회에서 특히 교회가 핍박속에 있을 때 활력소의 역활을 하였다. 웨슬레는 이 성령의 증거의 교리야말로 메소디즘의 공헌 가운데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위탁한 교리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한 특권을 표시한다. 성경의 기록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라고 하였다. 즉 성령의 증거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성서에서 출발한다.

웨슬레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진리의 중요성을 의심할 수 없으며 계시된 이 진리는 단 한 번 만이 아니요, 또 불명료하거나 우연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엄숙하게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가지고 계시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특히 확신의 교리는 웨슬레 자신의 신앙 체험에 의해서 분명해졌다.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신앙 체험을 기술하면서 자기의 마음이 뜨거워진 경험을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의 죄 까지도 없이 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올더스게잇 사건은 그에게 확신의 교리를 얻는 성령의 증거라고 하겠다.

 

1.성서적 근거

 

‘성령의 증거’는 성령께서 신자의 의식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계시해 주는 - 하나님에게 열납되었다는 일에 대한 - 내적인 증거를 말한다. 성서는 성령의 증거를 향수한 수많은 사람들의 실례를 제공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 중에는 아벨(히11:4), 에녹(히11:5), 욥(욥19:25), 다윗(시32:5,시103:1,3,12) 이사야(6:7) 및 다니엘(9:23)의 기록이 있다. 신약성서에도 이 교리에 대한 인용이 많이 나타난다(행2:46,8:3916:34). 특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롬8: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1서 5:7).” 이 성구들은 성령께서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관계에 대해서 증거해 주시는 사실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2.증거의 내용

 

성령의 증거에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the direct witness of the Spirit)와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the indirect witness of the Spirit)의 두 종류가 있다. 웨슬레는 “성령의 증거”라는 두 편의 설교에서 성령의 증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령의 증거는 영혼 위에 나타나는 하나의 내적 인상(inwa impression on the soul)인데, 즉 하나님의 영이 이것을 통하여

나의 영에게 직접 증거하는 바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셨으며,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과 또한 나의 모든 죄는 도말 되었고, 나 아니, 나 같은 사람

과 하나님과 화목되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게 강하게 주는 내적 느낌이다. 또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성령의 증거는 영혼에 주어지는 내적인 납득인데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령은 직접적으로 내 영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하는 일, 나의 모든 죄는 도말되었으며 나 같은것까지도 하나님과 화해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신다”고 주장했다.

 

성령의 간접 증거에 대해서 웨슬레는 우리 영의 증거(the witness of own Spirit) 그리고 선한 양심의 증거(the witness of a good conscience)라고 하였다.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영혼이 땅 위에서 어떤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면 그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과 같이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

뻐할 때 그것을 친히 또는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것은 영혼이 존재하느냐 안하느냐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과 같이 영혼이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가 안하는가도 의심

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공정히 추리한다면 지

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겸손한 사랑과 거룩한 기쁨과 순종하는 사랑

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의 증거는 가장 온전한 확신과 더불어 우리 마음에 나타나서 우리의 아들 됨을 증명하며 내적 증거를 만든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것과 이 증거는 칭의와 성화를 포함한 우리 구원의 전 과정에 존재한다.

 

한편 한영태 박사는 성령의 증거에 대한 확신의 범위를 3단계로 말한다.

1)신앙의 분명한 확신(clear assurance of faith):의심과 두려움이 섞여있는 신앙,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특권으로 설교되는 것.

2)신앙의 충만한 확신(full assurance of faith):의심과 두려움없이 용서에 대한 완전하고 내재적인 신앙.

3)희망의 충만한 확신(full assurance of hope):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에 대한 완전한 확신.

 

따라서 성령의 증거는 구원의 확신 뿐 아니라 신자의 삶에 소망을 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승리로운 삶의 경험을 위한 길을 열어 주게 된다. 성령께서 친히 그의 영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 하나님의 가족중에 입양되어졌다고 증거해 주실 때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IV.성결된 삶의 표적

 

A.기독교적인 사랑

 

성결된 삶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사랑은 구속과 의인이란 객관적인 사건과, 성화라는 주관적인 변화에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될 주요한 요소가 된다. 특히 웨슬레의 성결의 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서는 성결의 본질이며 표적이되는 사랑을 분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웨슬레 신학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완전 개념을 정의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여기에서 웨슬레는 실수까지도 없어야 한다는 절대적 완전을 요구한다면 이것은 완전을 성경의 표준보다 지나치게 높히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질문 : 어떻게 하면 완전을 너무 높게나 너무 낮게 설정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가.

대답 : 성경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완전을 성경의 표준에 맞추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순수한 사랑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온 심령과 영혼

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

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령과 생활을 다스리는 사랑이며 우리

모든 성품과 말과 행동에 고루 퍼져있는 사랑이다.

 

 

이와같이 웨슬레는 사랑의 충만을 완전의 완성으로 보았다. 웨슬레는 완전의 완성은 곧, 온전한 사랑이며 이것이 바로 성서적 완전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성서에서 완전을 목표로 제시하고 완전해지도록 촉구하므로 웨슬레는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며(마22:38), 율법의 완성(롬13:10)임을 알고 웨슬레는 사랑의 완성을 통한 율법의 온전한 준수를 주장했던 것이다.

한편 기독교적 사랑에 대하여 윌리암 로오(William Law)는 ‘우주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즉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인 것과 똑같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우주적인 것이 아니면 안된다. 사랑이 만물에게 미치게 될때 그 사랑은 기독교적인 사랑이 될 수가 있다.

따라서 웨슬레의 성결한 삶이야말로 기독교적인 사랑의 윤리에 근본적인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B.웨슬레의 사랑 관념

 

1.사랑과 믿음

 

웨슬레는 믿음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중생과 성결이 믿음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올더스게잇의 체험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믿음도 사랑에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음이란 그것이 비록 기독교인의 믿음이든지,택함을 받은

사람의 믿음이든지 혹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든지

간에 그 믿음 자체는 사랑의 시녀에 불과한 것이다. 믿음은

명예로운 것이지만 이것이 율법의 목적은 아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영광을 오직 사랑만이 갖도록 했으며 사랑은 하

나님의 모든 율법의 목적이 된다. 사랑은 이 세상이 시될

때부터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날까지 하나님의 모든 섭

리의 유일한 목적이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사랑

은 홀로 남아 영원히 있을 것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하

신 모습을 마주 대하게 됨으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웨슬레는 사랑은 영원한 것이지만 믿음은 일시적인 것임을 밝히고 믿음은 사랑의 완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올더스게잇은 웨슬레에게 믿음의 위대성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하여 웨슬레는 그가 바라던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길을 갈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전보다 더욱 순수하고 능력있는 사랑을 하게 되었으며, 진실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설교하기에 합당한 사도가 되었다. 즉 웨슬레는 믿음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온전히 이룬 것이다.

 

2.성결의 표적인 사랑

웨슬레는 기독교인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완전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완전한 사랑의 증거가 당연히 나타나야 한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는 십가가 위에서 표현되었으며, 이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의지할 때에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모

든사람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은 그리

스도의 수치, 조롱, 멸시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허용 하는 범위내에서 사람과 마

귀가 범 하는 어떠한 악한 일도 기쁨으로 인내하게 해 주는 것이

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

구나 거의기독교인(Almost Christian)이 아니고 온전한 기독교인

(Altogether Christian)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의 가장 위대한 표적은 사랑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심령 속

에흘러 들어 온 것이다(롬5:5).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

을 그들에게 보내심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여’ 라고

부를 수 있게된 아들이기 때문인 것이다(갈4:6).

 

 

C.사랑과 그 대상

 

웨슬레의 사랑을 일반적으로 분석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만 언제나 주의를 집중시켜 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선행한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이 그의 사랑을 하나님에게만 집중하여야 함은 하나님이 최고선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요 이웃을 사랑하여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함축되어 있거나 혹은 당연히 그 사랑 밑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하나님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언급하면서 웨슬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자기사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즉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이웃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필연적인 열매로 간주된다.

인간이 왜 이웃을 사랑해야 되느냐 하는 이유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모방하게 될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의 주요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같이 사랑하시므로 인간도 역시 그것을 본받지 않으면 아니된다.

웨슬레는 이웃사랑에 관하여 말할 때 가끔 자기사랑에 관하여 언급하곤하였다. 그러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마태복음 22장 39절에 나타난 계명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는 이웃사랑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자기 사랑을 이웃사랑의 한계를 결정하는데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이웃사랑을 자기 사랑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했다. 그 계명은 자기사랑과 이웃 사랑간에 균형이 잡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자기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따라서 성결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이다.

 

V. 결 론

 

A. 요 약

 

종교개혁자들은 “비참한 죄인으로서의 기독교”(miserable sinner christianity)에 관심을 가지고 현생에서 기독교인의 계속적인 불완전(the continued imperfection of Christian)을 강조하여 성화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적었다. 그러나 웨슬레는 계시된 하나님, 지금 여기에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셔 우리안에 거하시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정결케 하시며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완전성화를 성취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결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결은 사람이 출생 후 성장하는 것과 같이 거듭난 후에도 성장하는 것이라고 웨슬레는 말하고 있다.

한영태 박사는 웨슬레의 성결의 과정과 완성을 5단계로 보고 있다. 첫째 관계적 성화 둘째 초기의 성화 세째 점진적 성화 네째 온전한 성화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 보았다. 웨슬레는 성화의 점진적인 성장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성결이 완성된다고 하였다.

한편 성결의 과정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이라고 하였다. 웨슬레의 성결의 출발점인 중생은 칭의와 동시에 시작되며 이는 인간 안에서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성결의 전 과정은 성령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 웨슬레는 성결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했다. 특히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성결의 확신을 강조하였다.

한편 그는 성결된 삶의 표증으로 기독교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자연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보아서 자연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확신을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원인이며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그것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근원이다.

 

 

B.비평과 제언

 

18 세기 웨슬레의 부흥운동으로 인한 성결운동은 19세기 초 중반의 Finney의 부흥운동과 19세기 후반의 성결운동, 더 나아가서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성령의 직접적, 즉각적 역사로서의 성령세례의 체험으로 전승됨으 로 인하여 그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웨슬레는 성결에 바탕을 둔 그의 구원신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열광주의,신비주의 배척운동에 입각한 철저한 합리주의 사조의 팽배로 인하여 광신주의자라들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으나, 성서와 이성과 경험에 입각한 웨슬레의 성결사상은 초대교회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성결의 전통을 원형 그대로 전승할 수 있었고, 성령의 직접계시를 주장함으로 타락한 사회에 혁신적인 생명 복음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레의 성결운동은 미국 성결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고, 오늘날의 오순절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한국성결교회도 초기 웨슬레 신학을 발견하고 돌아가려는 성결의 복음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는 성결한 신앙과 생활, 즉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체험하고, 전하고, 생활할 것을 다짐하는 교단이다. 일찌기 교단 헌법에 ?본 단체에서 주장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교리가 아니요,옛날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던 교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느니라?고 명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웨슬레의 성결복음에 입각한 한국성결교회의 비젼(Vison)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생명의 복음인 성결복음을 만방에 전하여 세계를 구원하여야 할 막중한 사명이 있으며, 성결의 복음으로 한국교회와 사회에 뜨거운 성결운동의 열기를 일으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개인주의적, 이기적인 위험성에서 벗어나 개인과 교회와 사회를 성결시키고 세계를 향하여 성결의 복음을 선포하는 세계지향적이고 선교지향적인 성결 운동으로 반드시 연결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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