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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속죄론 가운데 '화목'의 석의적 연구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10:29

바울의 속죄론 가운데 '화목'의 석의적 연구
- 고후5:11-21을 중심으로 -

 

 

  여는말

 

  교회개혁이후에 칭의교리를 바울이해의 열쇠로 삼음은 당연하다하였다. 따라서 바울신학을 연구할 때 종교개혁 이후 400여년 이상을 개신교회가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바울의 중심과제의 하나인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구원서정의 도식에 넣어서 이해하였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인 배경에 근거하여 그외 다른 서신들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 서신들에서는 로마서, 갈라디아서와는 다른 접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전개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구원서정 혹은 순서의 도식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구원사적 관점에서 개진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셨다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선포는 Hermann Ridderbos의 지적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 부활이 가져온 종말론적인 구원시대를 선포하고 설명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 섭리를 전개해 오셨는지의 관점에서 복음과 율법과 관계를 다룬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칭의교리의 주제는 바울의 설교에 있어서 루터의 경우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관계들 중 오직 한 부분만을 담당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바울이 십자가에 못박고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바울에게 계시해 주셨다. 십자가에  부활한 구세주에게서 하나님의 때의 큰 전환점이 도래했다는 것은 새롭고도 압도적인 확실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사역과 서신의 주제였다. 따라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국면아래에서 화목교리를 가리치고 있으며, 그는 또한 칭의와 더불어 밀접한 관련속에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사역을 염두에 두고 선포했다. 하나님의 의, 종말론적인 사죄에 대한 선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때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의의 나타내심과 동시에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된 것이다. 화목(katallagh)은 칭의와 함께 구속에 근거하여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객관적 사건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셨기 때문에 새 시대는 도래하였고 옛 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바울의 설교는 구속의 새로운 사실들을 선포하고 해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구원의 새시대의 도래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약의 메시야적 구원의 약속들은 옛 세대속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모든 신학적인 개념들의 공통되는 특징은 그것들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행위와의 관계성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으로서, 화목된 존재로서, 즉 종말론적 회복의 것으로 나아가게 하셨다. 화목은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대한 바울의 설교가 가르치는 진리의 한 국면인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교리를 유일한 통로로 하여 바울을 접근함은 그가 전개하는 넓은 관점인 구원사를 보지 못하게 된다.
  본 연구는 바울이 화목사상을 어떤 관점에서 가르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어원적 고찰및 그리스도의 속죄적 의미를 고찰하며, 고후5:11-21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구절과 단어의 의미와 용법 및 메시지를 살펴보고, 바울설교에 나타난 화목사상의 특징적인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펴는말

 

  구약이나 신약에서 공통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사랑의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태도에 대하여 구약은 여러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죄는 형벌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이나 민족의 정상적인 관계를 방해하거나 파괴한다.
  구약의 대전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므로 그대로는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고, 지은죄에 대해서는 보응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죄가 사해질 길이 허락되었는데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율법을 주어 지키게 함으로서 의식과 규례, 뜻을 지닌 성막, 성소, 지성소, 제사직의 중보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향한 접근을 일정한 경우에 가능하게 하였다.
  신약에는 죄로 인하여 생긴 인간과 하나님과의 소원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를, 즉 사랑과 축복의 관계를 깨뜨린 것은 인간의 죄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회복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요청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목적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화목(katallagh)이 없이는 이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바울은 이 비밀을 계시하기 위하여 그의 서신을 통해 화목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이 말은 그리스도 사역의 중심이요 바울 복음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바울 서신들에 있어서 화목의 개념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1. "katallagh"의 어원적 고찰

 

1.1 동사 katallasw(화목하다)와 명사 katallagh(화목)는 신약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단어들이다. 사도 바울만이 이 단어들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이 비추어 사용했으며, 동사 katallasw(화목하다)는 신약에 6회 나타난다(롬5:10에 2회, 고전7:11, 고후5:18, 19, 20). 명사 katallagh(화목)은 오직 4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화목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롬5;11; 11:15; 고후 5:18, 19이다. 이 말들은 성경신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말들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화목은 복음의 총체요, 본질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쓴 서신에서 화목은 기독교 메세지의 중심사상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신학적 전문용어가 되었다.
  바울서신에 나타난 화목의 개념은 총 12회 사용되어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헬라인의 공동체에서 사용해오던 찬미, 예배 찬양의 전승에 의해 형성된 귀절 가운데 나타난다.
  Lenski는  "katallassein"의  kata는 완료의 뜻을 가지며 동사의 어근은 allas이다. 곧 "그를 철저하게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화목은 적의를 제거하여 선하고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불화가 종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적이다(롬 5:10). 신약은 하나님을 모든 악한 것에 대한 강한 대적자로 묘사한다. 화목의 방법은 적의의 근원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죄를 제거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참된 화목을 이루기 위해 죽으셨다. 신약은 항상 거룩하신 사랑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죄인)을 강조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태도에 변화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더 이상 우리에게 임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화목적 의미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이라는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생애 및 부활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의 복합체를 가리키는 일종의 간단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화목'(reconciliation: 화해)사건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사건의 효과를 묘사하려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여섯가지의 귀중한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법정에서 따온 의인의 은유, 우의로부터 따온 화목의 은유, 노예제도에서 딴 구속, 제사제도에서 따온 화목제물의 은유 등이다.

 

2.1 속죄(atonement)는 재물을 대고 죄를 면하는 일이다. 화목이라는 용어는 속죄라는 용어의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속죄라는 용어는 '카바르'이다. 이말의 뜻은 '덮는다' 혹은 '숨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이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덮는일'을 의미한다. 이 말을 신학에서 사용할 때에는 배상이나 혹은 보상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문에서 속죄라는 단어는 '둘을 하나로 만든다' atonement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결합시킨다', '화해시킨다는', '공식적으로 사과하다', 그리고 '형벌을 타인에게 대치하라'는 뜻이 포함된다. 따라서 구약의 용어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창3:21)서 하체를 덮으므로 수치를 면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히브리어의 속죄에 대한 용어는 그 용어 자체가 속죄의 정의를 잘 해석해주고 있다.
  속죄 (atonement)는 앵글로 색슨어의 기원을 지닌 몇 안되는 신학용어 가운데 하나로 그 뜻은 '한가지 결과에'(at-one-ment)라는 뜻이며, 사람의 죄라는 비극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사59:2),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놓은 뒤(골1:21) 그 둘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실제로 헬라어의 속죄에 대한 해석은 화해(the reconciliation)의 뜻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화해는 상호간에 조건을 보고 그 조건에 따라서 화해를 결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속죄의 정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된 것을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사역을 통해서 화해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화해시키는 사역을 속죄라 부른다. 따라서 이 교리가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속죄의 방법으로 구약시대는 제사장제도를 두고 동물을 통해서 속죄제를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던 것을 화해하게 된 것이다. 

 

2.2 속죄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일이다. 지은 죄를 전에 세운 공로로써 비기어서 없애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며 계속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실천하고, 사람의 힘으로 못할 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민족 전체의 죄를 속량하는 길이 허락되었다.  
  죄는 개인이 짓는 것이지만 전공동체가 연대책임을 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남과 공동체로서 계약을 맺은 백성이며 전체로서 그의 뜻을 실현할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수7:1). 이러한 형태는 예언자 시대에 분명한 형태로 발전되는데 백성의 대표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중보이 기도를 드림으로써 속죄하게 된다.
  죄를 속죄하는데 있어서 중보자의 인격을 바쳐서 백성에게 미칠 징벌을 제한다는 예즈잉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달랜다든지 신의 호의를 산다는 관념이 없이 죄가 사해지기 위해서 인격자가 대신 징벌을 받고 몸을 바침으로서 이루어지는 이치를 증거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성취하신 위업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 관계가 의인의 개념과 함께 화목의 개념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은 헬라어 ilasthrivon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 이말은 원래 제물을 드림으로써 진노를 돌이킨다는 것을 의미한다(롬3:24, 25; 히2:17; 요일2:2; 4:10). 구약에서는 주된 히브리어 단어가 Kipper(   )인데 이 단어가 70인역에서는 보통 ejxilasjkmai로 번역되어 있다. 이 동사는 헬라문헌에서 손상을 입은 어떤 사람과 화해하거나 그를 달래는 것을 의미한다.

 

2.3 기독교 교리는 속죄를 바라보는 어느 특정한 방식을 정통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속죄교리에는 기독론의 두 본성 교리와 비슷한 데가 없다. 그 결과 "그렇게 오래전에, 그리고 그렇게 먼 지역에서 발생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오늘날 이곳에 있는 나를 구원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대답하는 방식도 여러가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사 20세기 동안에 나타난 다양한 속죄이론들은 대체로 다음 세가지 경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2.3.1. 안셀므스의 전통적인 견해의 객관적 속죄론이다. 켄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므스(1033경-1109)는 이탈리아 아오스타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에 집을 나와 몇년동안 방랑을 한 그는 26세에 노르망디에 있는 베크대수도원에 정착하여 란프랑쿠스의 영향으로 수사가 되었다. 60세에 그 대수도원을 떠나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으며, 생을 마칠때까지 그 직책에 있었다.
  전통적인 견해로 속죄론을 철저히 사색에서 교리로 서술한 시작은 칸터베리의 안셀므스에게서 찾을 수 있고 그는 교리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e?)란 책에서 전개한 만족설(滿足說)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업적은 마귀를 이긴 일이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진압할 수 있었다. 안셀므스는 구원을 육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더 오랜 견해 대신에 죄책에서의 구원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전개시켰다. 특히 그는 "객관적인" 속죄론을 가르쳤는데 그것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행위의 대상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서 화해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안셀므스 그는 죄를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모욕으로 보았다. 그리고 신인(神人)이 십자가에 달여 이 모욕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와 비슷한 노선에서 생각하기를, 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초래한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치렀다고 하였다. 이 안셀므스 이론의 강점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점과, 사죄의 과정에서 도덕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2.3.2. 아벨라르(Peter Abelard)의 주관적 견해의 속죄론이다. 안셀므스와 그의 젊은 동시대인 아벨라르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며 후자를 속죄론의 소위 "주관주의"적 견해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랜동안 교리사 공부의 정석이었다. 이런 주장은 대체로 건전한 것이다.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흥미있는 일은 라틴형의 속죄론이 완전한 신학적 서술을 얻지마자 비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같이 하여 시작된 논쟁은 오늘날까지 줄곧 계속되는 것이다.
  아벨라르는 안셀므스의 이론과 함게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의 표상들과 그 이원론적 전망을 공격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속죄사상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악마와 관련시키는 것을 거부하였다. 다른 편으로, 그는 만족 행위란 사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만일 아담의 적은 허물이 그런 만족행위를 요구한다면 그리스도를 반항한 죄는 더 큰 만족행위를 요구할 것이 아닌가. 이같이 그는 다른 각도로 연달아 생기는 무제를 공격하였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속에 응답적 사랑을 일으키는 큰 교사요 모범이라고 강조한다. 이 사랑이 화해와 용서가 의거하는 근본이라고 한다. 그는 여기서 눅7:47을 인용한다. "사랑함이 많은 자에게 용서함이 많다." 사람들 안에 촉발된 이 사랑은 아벨라르에게는 공로를 지우주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도 역시 공적이라는 전통적 라틴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비록 그의 가르침이 이같이 주관적주의적성격을 띠지만 그가 이선을 시종 일관하게 견지하였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벨라르는 그의 말대로 하면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중재했기 때문에 사람의 공로를 완성하게 된 그의 공로를 중요한 지위에 두어야 하는것이라고 느꼈다.
  아벨라르는 속죄를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끼친 효과라는 면에서 본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사랑을 묵상할 때 사람음 감동을 받아 회개를 하고 다시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이로써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것이 주관적이다.

2.3.3. '고전적', '극적' 견해의 속죄론 및 아울렌의 합리적 이론의 가능성이다. 아울렌은 속죄론을 '고전적', '극적'견해로 부른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속죄를 속전(ransom)으로 말하는 성경 본문들에 크게 의존하며, 죄인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당연히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음으로 그들의 구속의 값을 지불하셨으며, 사단은 죄인들 대신에 예수를 받았지만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부활절에 예수는 원래의 포로들이나, 또한 그들을 위해 치른 속전도 사탄에게 남겨두지 않은채 당당하게 살아나셨다. 아울렌은 교부들이 이 이론을 표 현할 때 기괴한 표현을 쓰기는 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난 승리에 대한 언급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속죄의 본질을 죽음과 악의 모든 세력에 대한 승리의 과정으로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승리가 중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을 이야기 전체로 보지는 않는다.
  아울렌은 객관적 견해와 주관적 견해의 형식에서 합리적인 성격의 비교를 첨가하려 하였다. 고전적 견해는 고립해 있고 나머지 객관적, 주관적 두 견해는 서로 대립일련의 개념이지만 이 두 견해는 이율배반의 대립된 사항을 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방향으로 합리적인 해결점을 갖음을 말하였다.
 고전적 견해는 많은 반박을 받게되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18,19세기의 신학논쟁 배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계몽주의 시대의 신학자들은 정통주의의 공인된 적으로 그들의 첫 공격대상은 속죄론의 만족설이었다. 그것을 기독교 안에 존속하게 된 유대주의의 잔재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논쟁이 속죄의 교리사를 바로 해득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두번째 이유는 신학자들이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를 라틴적 견해와 혼동하게 되면서 이다. 고전적 견해와 라틴적 견해를 이같이 구별하지 못하게 된것은 둘이 함께 같은 계통의 개념이나 비유등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죄론에 사용된 "희생", "만족", "그리스도의 공로"등의 술어를 사용하려면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세번째 이유는 정통신학을 변호하는 보수신학자나 그것을 공격하는 자유주의신학자는 함께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속죄론이 단지 낮은 차원의 신학적 견해요,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을 제공할 뿐 잘 다듬어진 신학적 체계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끝으로 18,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원론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기에 고전적 속죄론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고전적견해의 속죄론은 '이원론적'이고 '극적'이었다.
  고전적 견해의 그 모순이 루터에게서 가장 심한것을 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자이시며 동시에 악한 세력과 투쟁한다는 점에서이다. 이 세력들은 악한 세력들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을 수행하는 자다. 하나님은 동시에 화해하는 자며 화해받으시는 자다. 사람도 그의 것이고 진노도 그의 것이다. 사랑은 진노를 이기지만, 또한 사랑이 죄를 정죄하는 것도 절대적이다. 사랑은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고 이성과 법에 반대해서 움직이며 사람을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거나 인간의 공로를 고려하는 일없이 의롭다 인정하신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요구는 극단에까지 철저화시킨다. 이것들은 논리적 모순을 이룬다. 예를 들면, 루터가 그리스도인을, 동시에 의인이요 또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고 말할 때 그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같은 때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무죄하고 유죄하다는 것이 아니다. 두 다른 원칙이 그 사람에게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두 관점에서 관찰된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을 항하여 살며 의로다 인정받았다. 다른편으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가치없는 자다. 그가 깊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의 죄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가 다시 말한것 같이 "누구든지 더 경건할 때에 큰 투쟁을 느끼는 것이다".
  이 개념을 순전히 합리적 사상체계에 억지로 맞추어 넣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종교적인 깊이를 빼았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한다. 신학은 외견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대립을 결합시키고서 살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부시대의 논쟁에서 성육신의 교리와 구속의 교리가 신학을 사변적인 형이상학이나 관념론 철학으로 변질시키려고 했던 당시의 경향을 막는 방벽과 같이 엄연히 서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루터에게서 이 기독교 신학의 구조가 더 명확한 형태로 나타났다. 모든 논점에서 루터의 신학은 합리주의적 스콜라주의를 강하게 배격하였다. 그에게는 계시된 하나님은 이성의 하나님과 전혀 동일시 할 수 없었다. 이 논점은 우리가 계시된 하나님은 동시에 "숨어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하였을 때 가장 밝히 이해되었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인간 사상의 범주로는 해득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교회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함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을 집중한다. 하나님의 정의의 지시를 받으며 정의가 지시하는 한계 안에서 행동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법, 합리성과 정의는 함께 제휴해 간다. 그러나 루터가 기독교 신앙에 관한 사실에 있어서 최후 결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거절한 것이 바로 이 둘이다. 이것은 스콜라 신학이 변증법적 합리적 기초위에 건설되었다는 것을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 문제에서 변증법적 방법이 최후의 단언을 말할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란 말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포괄적인 설명을 마련해 주며 이 세상뿐 아니라 장차올 세계의 모든 문제를 대답하고 모든 수수께기를 풀어줄 신학을 건설하려는 기도가 스콜라 신학자들로 진행되었다.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즘의 자유주의 신학은 속죄론의 견해를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 그것이 공격하는 스콜라주의적 신학에 여러 방면으로 대립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스콜라주의의 합리주의적인 이념은 용납하였다. 그것은 속죄론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고전적 견해에 많이 나오는 대립된 사상들을 완화시켜 버렸다.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명백하게 설명되었다.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합리화되었다. 그 이상으로 이 자유주의신학은 철두철미적이요 진화론적인 세계관의 빛 아래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을 관찰하여야 한다. 이 사실은 형이상학을 불러드리는 일을 한 릿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학을 억지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형틀에 넣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합리적 세계관은 보편주의의 인기가 지시하는대로 장래의 세계도 포섭하려고 한다.
  이런 고려는 왜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가 억제와 경멸을 받게되었는가 하는 최후의 이유를 우리에게 해명하여 준다. 신학이 만사를 전적으로 합리적인 설명으로 설명해 보려고 나선다면 그것을 모순 투성이요 조잡하고 원시적 지식으로 진리를 표현하려는 것이라고 하여 저 고전적 견해를 밀처버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더 정확하고 적당한 신학 서술과 바꾸어 놓으려고 한 것이 아울렌의 합리적 이론의 시도였다.

 

2.4 한편 ilasthrivon이 전통적으로 "화목"으로 번역되어 바울의 문맥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왔다. 죄인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고, 그의 은혜로운 사랑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원시적인 정령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이나 정령들 혹은 조상의 분노를 달래는 일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바울도 자기의 엄격한 의를 증명하기 위해 일종의 인신제사를 요구한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을 선포하였겠는가 하는 의문으로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노와 화목교리에 관한 불쾌함 때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의 어휘를 다시 조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흠정역에서 "화목"이라는 말로 번역된 일단의 어군들에 특별히 주의 를 집중했다. 여기서 핵심적 문제가 되는 것은 속죄행동의 대상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G. C. Berkouwer에 의하면 "우리는 화목의 신학이 거의 변함없이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이 배타적으로 화목의 대상이며, 성경은 어느 곳에도 하나님 자신이 화목되어진다는 말을 하는 곳이 없다는 생각이 거의 일치된 생각이란 것을 알고 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화목이 효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바꾼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근본적이며 본질적으로 사랑과 화목을 수여하시지 않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대한 그의 정결케함, 그의 희생, 그의 행동의 기초위에 그렇게 하도록 움직여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다드(C.H. Dodd)는 강력하게 주장하기를 이 어군이 칠십인역과  신약성경에 나타날 때에는 속상(贖償, 죄를 도말함)을 가리키고 화목(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킴)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란 죄에 대해서는 재앙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라는 인과 관계 과정 이상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Dodd의 주장에 대한 비판학자로는 니코올(Nicole)과 모리스(Morris)의 주장).  여기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어군(語群)들이 속상을 가리킨다고 하는 다드(Dodd)와 기타 사람들의 주장이 성경적 가르침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만족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은 분명히 구약성경에 근거한 것으로서, 구약성경에만 585회나 언급되어 있다. 힐라스코마이라는 어군(語群)은 단순히 '죄의 용서'나 '죄를 없이함'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것이 내포된 죄의 용서나 죄를 없이함을  가리킨다(예,  애 3:42, 43).  이것은 천상적인 수회(收賄)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노를 옮기는 것도 결국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희생 제사를  통해 속죄하는 과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었다"(레 17:11).  "그가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셨다"(시 78:38). 하나님의 진노가 신약성경에는 그것이 구약성경에 언급된 것같이 자주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인간의 죄는 어떤 비인격적인 징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그 죄에 대해서 임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롬 1:18, 24, 26, 28).  로마서 서두의 전체적인 논의는 모든 사람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같이  죄인들이고,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힐라스테리온(화목 제물; 롬 3:25)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구약성경의 역설이 신약성경에도 반복되고 있는데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진노를 제거할 수단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는 데서  보여진다.  그리스도께서 "자비롭고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신 목적은 "백성의 죄를  화목시키려"(구속하려; 한글 개역)는 것이었다(히 2:17). 그의 화목은 모든 사람을 위해 적절한 것이다(요일 2:2). 일관성 있는 성경적 견해는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유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로써만이 돌이켜진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화목'으로 일컬어짐이 마땅하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께서 이루어 놓은 화목속에서 하나님과 매일 교제를 나누면서도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때가 많다. 바울은 고후5:19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며"라고 그의 화목사상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을 통하여 성취하신 화목은 전 세계,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케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였으나 모든 인간이 실제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시키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구체적 구원이 달려있다.

 

3. 고후5:11-21 분해

 

3.1 본문의 기능

  고후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고 강조하면서, 사도들에게 주어진 "화목케 하는 직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며,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고후5:18이하). 여기서 이 모든 과정의 주도권은 하나님께만 있다. Murray는 "하나님 사역의 단독성에 대한 강조는 화목이 인간의 행위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사역임을 말해준다"고 했다. 5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셨다"는 중요한 사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 구절이 성육신을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점에 대해 L. Morris는 "그후에 나오는 말씀은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말로 묘사된 특별한 방식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일을 수행하는 이가 신적인 인격이어야 할만큼 이것은 중요한 사역이었다. 여기엔 분명히 기독론에 대한 어떤 함의가 있다."

 

3.2 본문의 구조
  본문 고후5:11-21은 모두 11절인데, 바울은 5:11-17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하여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강조하면서 새 피조물이 될 수 있는 대상, 방법, 내용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5:17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고후5:18절 이후에는 새롭게된 피조물의 근원, 직책(직분), 역할을 기록하였고, 20절에는 그 결과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새로운 피조물의 대상으로는 우리(고후5:11, 12, 13, 14, 16, 18, 19, 20, 21), 모든 사람(15), 누구든지(17), 모든 것(18)이라고 표현하였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상                                              주체 (근원)

 11절 peivqomen, 우리가-권하노니 (we persuade)               qew'/ 하나님 앞에 (unto God)/
 12절 sunistavnomen 우리가-천하는 것이 (we commend)
      hJmw'n, 우리를 (our)
 13절 ejxevsthmen, 우리가-미쳤어도 (we be beside ourselves)   qew'/: 하나님을 (it is to God)
 14절 hJma'" 우리를 (us)                                      Cristou' 그리스도의 (of-Christ)
 15절 pavntwn 모든사람을 (all)                                ejgerqevnti 다시 사신(rose again)
 16절 hJmei'" 우리가 (we)                                     Cristovn 그리스도 (Christ)
 17절 ti" 누구든지 (any man)                                Cristw' 그리스도 (Christ)
 18절 pavnta 모든 것이 (all things)                            qeou' 하나님께 (God)
      hJma'" 우리를 (us)
 19절 aujtoi'" 저희에게 (unto them)                            qeo;"  (하나님께서)
 20절 presbeuvomen 우리가 (we)                                qeou' 하나님이 (God)
 21절 hJmw'n 우리를 (us)                                       qeou' 하나님의 (of God)

 

  본 문단은 11-17절과 18-21절로 구분할 수 있는데, 17절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새롭게 전환시켜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w{ste ei[ ti" ejn Cristw'/, kainh; ktivsi": ta; ajrcai'a parh'lqen, ijdou; gevgonen kainav: (ta;) (pavnta.)
  그런즉(w{ste, Therefore) 이라는 우위접속사를 통하여 글의 주변을 환기시키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전제를 통하여 신분과 그 역할이 바뀌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되었도다"(gevgonen)는 동사는 3인칭 단수, 완료형으로 그 안에 거하는 능동성을 통하여 되었음(are become)을 보여준다.
  18-21절 전체부분은 언어구조나 내용에서 철저히 사고된 문장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3단계의 토론인데, 각 부분이 독립적이고 또 서로 보충적으로 함께 하나님의 화해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1단계 18b,c절, 2단계19절, 3단계(결론절)이 20-21절이다. 각 단계에서 바울은 명료한 방도로 화해의 행위의 관점과 화해의 말씀의 관점을 서로 구별한다.

 

3.3 내용분석과 원문주해

  고후5:11-16절에는 구체적으로 "우리가"(hJmei'")라고 기술하면서 화목의 대상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14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sunevcei)고 강조하고 있다. 그 강권은 사랑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랑의 강권이다.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hJ ga;r ajgavph tou' Cristou' sunevcei hJma'", krivnanta" tou'to, o{ti (eij) ei|" uJpe;r pavntwn ajpevqanen: a[ra oiJ pavnte" ajpevqanon:)

  이 강권은 그리스도의 사랑(h ajgavph tou' Cristou')으로 지성, 감정, 의지를 함게 견고한 끈으로 매어서 통일적인 자아를 형성케하여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 되게한다. 죽은것이라(ajpevqanon)는 의미는 아담의 죄중에 전 인류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죄의 총계와 그 결과는 암당의 죄의 총계와 그 결과에서 있어서 볼 수 있다.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자를 위하여 살게하려 함이니라. (kai; uJpe;r pavntwn ajpevqanen i{na oiJ zw'nte" mhkevti eJautoi'" zw'sin ajlla; tw'/ uJpe;r aujtw'n ajpoqanovnti kai; ejgerqevnti.)

  여기 "대신하여"라는 말 uJpe;r는 14절에서 등장하는데, 일찌기 이 말이 "대신하여"라는 의미보다는 "위하여"라는 뜻이라하고, "대신하여"란 의미는 다른 말, 곧 anti라는 말로써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피루스문건들이 발견됨에 따라 증명되는 것은 uJpe;r이라는 말이 오히려  anti라는 말보다 더 많이 "대신하여"라는 뜻으로 사용된 사실이다.
  여기 "산자들"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은 이제부처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vWste hJmei'" ajpo; tou' nu'n oujdevna oi[damen kata; savrka: eij (de;) kai; ejgnwvkamen kata; savrka Cristovn, ajlla; nu'n oujkevti ginwvskomen.)

  "그러므로" @vWste는 우의접속사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 사실로 좇아 나오는 결론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는, 다른 사람을 취급할 때, 전과 같이 육체의 부패와 동기로 취급하지 않는다. 위의 14절 초두에 말한것과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랑의 강권 하에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중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모든 다른 사람들을 취급한다. 바울은 자기와 육신적으로 상관없는 듯한 사람들을 상관없이 보지도 않고, 이제부터 뜨거운 사랑으로 그들의 영혼구원을 위하여 책임있는 행동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친연(親緣) 혹은 혈연(血緣)있는 자들을 취급함에 있어서도 자기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중심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는 문궁 대하여 해석상 서로 달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는 바울이 전에 예수를 직접 팔레스틴에서 회견한 경험이 있다는 뜻을 여기 보여주었다고 하며, 이제부터는 바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할 때에 몸으로 계신 주님을 상대함 보다 신령한 가운데에 계신 주님을 영적으로 사귄다는 의미라고 한다(Olshausen등의 주장). 둘째로 바울이 그 개종 전에는 예수를 메시야로 알지 않고 그저 외모로만 판단하여 한 개인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예수를 그렇게 알 것이 아니고(곧 육체대로 알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속죄의 사실 밑에서 그 사랑의 강권으로 인식되어지는 그리스도 견해를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를 속죄자로 아는 신세계의 지식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신이 새로워졌으니 만큼 모든 것을 보는 법도 새로워졌다는 해석이 적당할 것이다.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w{ste ei[ ti" ejn Cristw'/, kainh; ktivsi": ta; ajrcai'a parh'lqen, ijdou; gevgonen kainav: (ta;) (pavnta.)

  이 말씀은 기독자의 현재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를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였고 또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다. 이렇게 과거사로 말하여 신 인격이 완결된 듯이 표현된 이유는 그 집행자가 하나님이시니 완결되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는 견해와 새롭게 하는 역사는 인생이 표면에서 행실을 개혁시키는 정도의  일이 아니고 인간의 가장 깊은 근본, 곧 영을 새롭게 한 것으로 일은 성립되었으니 그 일이 성취될 것은 너무나도 확실하다는 것이다. 설혹 개종자의 외부적인 행실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시하여 그의 구원 문제에 의문을 붙일 것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그리스도안에"(ejn Cristw)의 전제가 결부되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신자들에게 적용될 때는 항상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구절은 그 동의어를 포함하여 바울 서신에서 모두 172번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을 가리키는 말로, 구원론의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와 연합된 진자들은 그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신자들은 그와 함께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원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고후5:18-21절의 화목사상은 신학적으로 특별히 강조되었기 때문에 이 본문이 우리 연구의 기초로 봉사한다. 그것은 "변명의 서"(2:12-6:13)안에 자리하여 바울이 그의 사도직이 사명의 기초와 본질을 서술하는 5:14-21절 부분의 절정을 이룬다. 더 좁은 부분에서 화해발언은 17절에 연결되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읍니다." 이 구절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서 성취된 종말론적 새 창조를 말한다. 죄의 세력에 끌려가며 따라서 구원받지 못할 옛 실존이 폐기되었다. 그 옛 실존이 새로운 구원받는 복된 실존을 선사받았다는 것이다. 18절 상반에서 이 새로운 실존은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업적이요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호피우스(Otfried Hofius)는 18-21절이 바울이 작성한 완결한 통일체라고 주장한다. 그보다 일찌기 케제만은 19-21절이 바울 이전의 원시교회 송가의 단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지만 호피우스는 이 구절들의 언어는 순수한 산문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앙양된 산문시이기는 하지만, 바울적 토론과 일치하는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18b절에서 우선 화해의 행위를, 그리고 18c절에서 (kai;란 계사를 통하여 사상의 이전을 표시하면서) 화해의 직분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18b절 안의  diav Cristou(그리스도를 통하여)란 말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관련시켜질 것이라는 것은 로마서에 이것에 평행되는 말(롬5:10)에서 분명하다. 18c절의 "화해의 사역" 이란 말은 선교의 사도적 봉사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18절 가운데서 말해진 것이 19절에서 더 설명되고 근거를 제공받는다. 호피우스는 19절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확신한다. 곧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면서 그들의 죄과들을 그들에게서 간주하지 않으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확립하셨읍니다."
  18, 19절에서 함께 화해의 관점과 말씀의 관점이 계사 kai;로써 같은 정도로 구별되고 연관되었다. 이 구별하면서 결합시키는 것이 20-21절에서 이제 교차법적인 뒤집음에서 두 관점의 접속사 없는 결합이 이루어진다.

 20절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uJpe;r Cristou' ou\n presbeuvomen wJ" tou' qeou' parakalou'nto" di! hJmw'n: deovmeqa uJpe;r Cristou', katallavghte tw'/ qew'/.)

  하나님의 화해의 행위는 21절에서 다시 한번 선포된다.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to;n (ga;r) mh; gnovnta aJmartivan uJpe;r hJmw'n aJmartivan ejpoivhsen, i{na hJmei'" (ginwvmeqa) ((genwvmeqa)) dikaiosuvnh qeou' ejn aujtw'/.)
  이 말로써 바울은 19a, b절에서 이미 울려났던것, 화해의 행위는 죄없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명료히 기술한다.
  이같이 고후 5장에서 화해라 일컬어진 하니님의 구원행위가 구성적 동기를 내포한다. 두 동기는 서로 구별되는 관련에서 죄된 인간들의 새 창조를 실현하는 단 하나의 구원사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화해의 행위를 더욱더 관찰한다면, 그 근거로서 확립되어야 하는 것은 화해의 주체는 압도적으로 배타적으로 하나님 자신이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당당히 선언된 "그리스도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바울의 그리스도론 일반과 구원론에서 그러했던 것 같이, 그의 화해론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하나님의 존재의 통일성을 이루고 또 행동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 사실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자 안에 현재 하였고 그 분 안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화해를 성립하게 하는 매개가 아니고 화해의 수행이며, 단순히 그 가능화일 뿐 아니고 그 실현인 것이다.

 

  닫는말

 

  바울은 복음을 '화목의 말'로, 그리고 복음전파를 '화목의 직무'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다음 말속에서 그의 위대한 확신을 표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과 화목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안에 계셨다." 그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호소할 때에도 이런 공식을 사용한다. 그는 '우리의 화목을 받으시는' 조건으로 복음에 요구하는 바 믿음의 응답을 제시하였다. "바울에 의하면 화목은 분명히 복음의 중심부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사역-이를테면 구속, 칭의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말중에서 화목은 아마 가장 완전하고 분명하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Ridderbos의 말을 상기해 볼 때 좀더 분명한 시사를 얻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아무리 개인적인 측면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모든 구속사역의 체계내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목은 실제로 매우 완전하다. 즉 성경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집에 양자가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놀라운 유산의 수여자로, 포도나무가지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몸, 신랑의 신부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화목은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선언이며, 동시에 개인적 신자가 실존하는 깊은 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목은 구속적이며, 기독론적이고 교회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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