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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수단들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09:58

은혜의 수단들

 

은혜의 수단들 혹은 방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사랑과 능력을 베푸시기 위해 정하신 일반적 수단들을 가리키며 이 수단들은 교회를 통해 사용된다. 그 수단들은 주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소요리문답  88문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택들을 전달하시는 일반적 외적 수단들은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들과 기도인데, 그 모두가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효력이 있다."

은혜의 수단들의 역할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수단들로 제시하나 성례를 더 강조하며, 더 나아가 교회 자체를 은혜의 중요한 수단으로 주장한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성례들 안에 객관적으로 내재(內在)하며, 성례는 '집행된 행위에 의해'(ex opere operato)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둘째로, 루터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례들보다 강조하며, 성례들이 가견적 말씀으로서 말씀을 떠나서는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그 수단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들 자체가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로, 신비주의는 은혜의 외적 수단들이 자연 세계에 속하므로 어떤 영적 효력과 결실들을 낳지 못한다고 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외적 수단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을 완전히 혹은 상당히 무시한다.

넷째로, 이성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을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의 도구들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의 도덕적 설득을 위한 도구 정도로 본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혹은 개혁신학은 은혜의 수단들 자체에 하나님의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고 본다. 은혜의 수단들은 미신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되지만, 귀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은혜의 수단들은 특히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화의 수단들이다. 쉐드나 댑니는 이것들을 '성화의 수단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수단들을 존중히 여기며 사모함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12. 하나님의 말씀

첫번째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성경 말씀과 그것에 근거한 설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은 성경 자체가 많이 증거한다. 시편 1:2, 3,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9:7, 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행전 17:11, 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로마서 1: 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전통 본문)." 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며 이 둘이 다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구약은 율법을 강조하고 신약은 복음을 강조하며, 그 둘 다 사람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사용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로마서 3: 20-22, "이제는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나 구약 속에도 의식법을 통해 은혜의 복음이 증거되고 있고 신약 속에도 은혜의 복음과 더불어 도덕적 율법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은 복음이 없는 율법뿐이요 신약은 율법 없는 복음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신약의 복음 아래서 율법 즉 도덕법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① 율법은 세속 사회를 위하여 죄를 억제하고 의를 조장한다. ② 율법은 구원 사역을 위하여 죄인의 죄를 깨우치며 그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율법도 은혜의 수단이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③ 율법은 성도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해 준다. 다시 말해, 율법 즉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칙이 된다. 이 세번째 역할은 은혜와 성화의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중요하다. 로마서 7:12, 14,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디모데전서 1:8,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율법과 성도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성도는 언약적 관계에 있어서, 즉 칭의의 조건으로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의무에 있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는 여전히 율법을 지킬 의무 아래 있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 . .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로마서 7:12, 14,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그것이 단지 도덕적이라고 보며 말씀을 통한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을 부정한다(펠라기우스파, 이성주의자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의 도덕적 영향력이 불충분하고 성령의 보충적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반[半]펠라기우스파, 알미니우스파). 또 다른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불필요하다고 보며, 신자 속에 있는 내적인 말씀 혹은 내적인 빛, 즉 성령의 직접적 활동만을 강조한다(신비주의자들).

그러나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과 함께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효력을 가진다고 본다. 성경은 말씀의 능력을 증거하는 동시에,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를 증거한다.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베드로전서 1:23,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일차적 수단이므로, 성경적 설교는 복음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영혼의 구원과 및 성화와 성장은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목사는 특히 다음 몇 가지 점들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① 설교자는 무엇보다 성경 연구와 기도와 함께 설교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② 설교는 항상 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해야 한다. ③ 설교자는 빈번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④ 설교자는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균형있게 강조해야 한다. ⑤ 설교자는 교리와 윤리(생활 교훈)를 균형있게 강조해야 한다. ⑥ 설교자는 신구약 성경을 골고루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⑦ 설교자는 남의 설교를 베껴서 설교해서는 안된다.

 

13. 성례들

두번째의 은혜의 수단은 성례들(聖禮, sacraments)이다. 성례들에 대한 교리적 진술들은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1, "성례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시들과 확인물들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들을 나타내며, 그 안에서의 우리의 유익을 확증하며;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나머지 세상 사람들과 사이에 유형적 차이점을 주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엄숙히 서약하게 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92문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인데, 거기에서 감각적 표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혜택들이 표시되며 신자들에게 확인되고 적용된다." 한마디로, 성례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들과 확인물들이다.

성례는 말씀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죄 씻음이 성례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성례는) 유형적(有形的) 말씀들이다." 그 둘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내용으로 가진다. 그러나 말씀은 적어도 성인들에게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나, 성례는 그렇지 않다. 성례는, 비록 그리스도의 명령이므로 모든 신자들에게 의무적이지만, 구원에 절대필수적이지는 않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성례는 단지 언약 백성들에게만 주어진다.

신약성경은 오직 두 가지의 성례들만을 가르친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이다. 이 두 가지는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에서 각각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졌던 규례들이다. 골로새서 2:11, 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마태복음 26:19,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고린도전서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천주교회는 성세(聖洗, 세례) 성사(聖事)와 성체(聖體, 성찬) 성사 외에 견진(堅振, 주교가 특별한 은혜를 줌), 고해(告解), 신품(神品, 임직식), 혼배(婚配, 결혼식), 병자(病者=종부 終傅) 등 7가지 성사들 혹은 성례들을 말한다. 트렌트 회의는 이 일곱 가지 성례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제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례와 성찬 외에 어느 것도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제정되지 않았고, 또한 신품과 혼배는 성경에 언급된 규례이지만 은혜언약의 상징인 성례에 포함될 수 없다.

성례들의 정당성은 바른 재료와 바른 형식과 바른 의도에 있다. 예를 들어, 세례에서 바른 재료는 물이요, 바른 형식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요, 바른 의도는 세례주는 자의 편에서는 세례받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인도하려는 마음이요 세례받는 자의 편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성례의 효력은 객관적으로 성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달려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3, "올바르게 사용되는 성례들 안에서 혹은 그것들에 의해서 표시되는 은혜는 그것들 안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집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활동과 성례 제정의 말씀에 달려 있는데; 그 말씀은, 그것의 사용을 인가하는 명령과 함께, 그것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에 대한 은혜의 약속을 포함한다."

성례 집례자의 자격에 관하여는, 성례들이 복음 진리의 엄숙한 유형적 제시이므로 말씀의 전파와 수호의 책임을 합법적으로 맡은 사역자들에 의해서만 집행되어야 합당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4, "(세례와 성찬) 그 어느 것도 합법적으로 임직된 말씀의 사역자 외에 누구에 의해서도 거행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상 교회는 일반적으로 분파주의자들의 세례를 인정하였고 개신교회들은 천주교회의 세례를 인정하였다.

 

14. 세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시고 제정하신 성례이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러므로 이 규례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5, "이 규례를 멸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은 큰 죄이다."

(1) 세례의 의미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4문답, "세례는 성례인데, 이 의식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 됨과 은혜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또 주의 것이 된다는 우리의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세례의 의미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세례는 신자의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이것은 세례의 기본적 의미이다. 사도행전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사도행전 22:16,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에베소서 5:26,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물은 씻음 곧 죄씻음을 상징한다.

둘째로, 세례는 신자와 그리스도의 영적, 신비적 연합을 상징하며 확증한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안으로, 에이스) 세례를 주라." 사도행전 8:16, "주 예수의 이름으로(안으로) 세례를 받으니." 사도행전 19:5도 동일함. '안으로'(에이스)라는 말은 연합의 의미를 가진다. (참조)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에이스 헨 소마)."

셋째로, 세례는 신자가 은혜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은혜언약의 혜택들이란 중생, 영적 부활, 영생, 양자됨 등을 가리킨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안으로, 에이스)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안으로)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안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넷째로, 세례는 신자가 주의 백성이 된다는 공적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유형교회의 회원이 되는 기본적 절차이다. 세례교인만이 교회의 정회원이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사도행전 2:38,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2) 세례의 정당한 방식

세례의 정당한 방식은 무엇인가? 교회 역사상 일반적으로 인정된 세례의 방식들은 세례받는 자의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혹은 그를 물 속에 담그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물 속에 담그는 것(침수 浸水, immersion)만 세례의 정당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① '세례준다'는 원어(밥티죠)가 '물에 담근다'는 의미이며, ② 물 속에 담그는 것(침수)만 세례의 근본적 의미인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례의 방식을 명확히 지시하지 않는다. 더욱이, 다음 네 가지의 사실들은 침수만을 고집하는 침례교회의 입장이 정당하지 않음을 증거한다:

첫째로, '세례준다'는 헬라어(밥티죠)는 일차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전 헬라어와 70인역 헬라어에서 그것은 '물에 담근다'는 뜻 외에 '깨끗케 한다,' '씻는다'는 등의 뜻도 가진다(James Dale, Classic Baptism <1912>, pp. 234-354). 신약 헬라어에서도 그러하다. 마가복음 7:4,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밥티죠)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 . 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식탁들을 씻음이러라(밥티죠)." 히브리서 9:10, "여러 가지 씻는 것(밥티스모이스, washings)."

둘째로, 세례의 예들은 세례가 반드시 침수의 방식이었음을 증거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이것은 단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에 내려가셨음을 증명할 뿐이다. 사도행전 8:38, 39,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또한, 오순절에 3천명이 받았던 세례(행 2:41)나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이 밤에 받았던 세례(행 16:33)는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더 적다. 덧붙여, 초대교회의 관습에 관련하여 에드워드 로빈손(Edward Robinson)은 말하기를, "아직 보전된 어떤 세례용 돌항아리는 너무 작아서 세례 지원자의 몸 전체를 담글 수 없다. 또 실상 매우 믿을 만하고 상당히 오래된 몇 개의 기념 유물들은 물을 붓는 세례들을 보여 주는데, 예를 들면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의 경우 등이 그렇다"(Robert Dabney, Lectures in System- atic Theology, p. 776).

셋째로, 세례의 의미는 반드시 침수를 요구하지 않는다. 세례의 기본적 의미는 죄씻음이며, 그것은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도 충분히 표현된다. 구약성경은 피나 물을 뿌림으로 깨끗게 됨을 풍성하게 증거한다. 레위기 1:5,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여기에 '뿌린다'는 히브리어(자라크)는 구약에서 35회 사용되었는데, '듬뿍, 풍부하게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70인역은 '붓다'(프로스케오, pour)로 번역하였다. 레위기 4: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여기에 '뿌린다'는 히브리어(나자아)는 구약에서 24회 사용되었다.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자라크) 너희로 정결케 하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세례에 내포된 의미이기는 하지만, 부수적 의미이다.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 12에 언급된 죽음과 부활은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내포하는 바에 대한 것이고, 세례 자체가 그 상징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골로새서 2:11,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넷째로, 복음의 보편적 성격은 '물 속에 담그는 것(침수)만 정당하다'는 주장에 반대된다. 예를 들어, 심각한 병자들, 사막 지방, 추운 지방의 경우들에 세례 대상자들을 물 속에 담그는 것은 부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물을 뿌리거나 물을 붓거나 물 속에 담그는 세례 방식들이 다 정당성을 가진다고 본다. 세례에서 물이라는 상징물이 중요하지, 물의 양(量)은 중요하지 않다.

 (3) 유아세례의 정당성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참으로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독특하게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주장한다. 그들이 유아세례를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① 유아가 예수 그리스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없고, ②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확한 명령이나 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록 성경에 유아세례를 베풀라든가 베풀지 말라는 명확한 지시가 없으나, 다음의 사실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확증한다.

첫째로, 구약과 신약에서의 은혜언약의 동일성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구약에서 은혜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나타났는데, 그 표는 할례이었다. 유아들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였다. 창세기 17: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언약은 영적인 의미에서 신약 아래서도 유효하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약 아래서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받으신 이후 유아들을 언약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신약 아래서도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지, 결코 믿는 가정 안에 있는 이방인들일 수 없다. 신자들의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이와 같이, 은혜언약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 유아세례의 근본적 근거이다. 구약에서 유아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면, 신약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사실, 신약은 구약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히 나타난 시대이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둘째로, 유아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사도의 태도는 유아세례를 지원 혹은 확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유아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천국백성으로 여기셨다. 마가복음 10:13-16,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 .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누가복음 18:15, 16, "사람들이 . . .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또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자녀들을 거룩하다고 불렀고, 교회의 회원(교인)으로 간주하여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7:14, "이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음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셋째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정 구원의 약속과 가정 세례의 예들은 가정적 구원을 암시하는 동시에 유아세례의 원리를 지지한다. 사도행전 2:38,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12-15,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6:32-34, 빌립보 간수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다.

넷째로, 교회의 역사는 유아세례를 지지한다. 유아세례는 신약교회의 매우 초기로부터 시행되어 왔던 보편적, 전통적 의식이다. 이 의식의 정당성은 종교개혁시기에 재세례파가 반대하기까지는 반대되지 않았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증거하기를, 사도 시대에 이방인 가정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유아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고 한다(Joachim Jeremias, Infant Baptism in the First Four Cen- turies <1960>, pp. 23 f).

폴리갑(69-155년경)은 순교시 자신이 86년간 그리스도의 종이었다고 말하였다(폴리갑, 9). 순교자 저스틴(100-165년경)은 말하기를, 그의 당시 60세나 70세의 그리스도인 남녀들 중에 "유아 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이었던" 자들이 있었다고 하였다(변호, 1. 15).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해 중생하는 모든 연령의 사람, 즉 영아들과 유아들과 소년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하였다(이단 반박, 2. 39). 오리겐(185- 254년경)은 말하기를, "유아세례는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확정된 풍습이다"고 하였다(레위기 설교, 8. 4; 로마서 주석, 5. 9).

카르타고 회의(253년경)는 유아세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유아들이 제8일 이전에 세례받을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만 토의하였고 그렇게 결정하였다. 처음 4세기 동안 오직 두 신학자들만 유아세례의 연기를 주장하였는데, 터툴리안은 이방인 부모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세례에 관해 말한 것이고,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는 3살 될 때까지 연기할 것을 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둘 다 그들의 견해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시하지 못하였다(Jeremias, p. 98).

어거스틴(354-430년)은 말하기를, "유아세례의 교리가 교회 회의들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으나 전세계교회가 일반적으로 실행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 교리는 아마 사도들의 권위로 확정되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유아세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론들이 있었다. 첫번째 반론은 신약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인 혹은 명백한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 명령만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반대할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신약성경에 유아세례를 반대하거나 제외하라는 명령도 없다. 사실 성경의 침묵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구약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언약의 원리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신 이후 그들을 제외시키신 일이 없으므로 유아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누려야 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두번째 반론은 신약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실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유아세례를 반대하거나 제외한 예도 없다. 신약성경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선교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사도들의 선교의 활동 이외에는 많은 내용들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언급된 가정 세례의 예들은 유아세례를 포함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당시의 유대교의 풍습도 이러한 사실을 지지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세번째 반론은 세례의 조건이 바른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이 말씀은 믿음을 세례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침례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신자의 유아들이 아직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다 구원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가정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요 지옥갈 자들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 16:16의 말씀은 성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며 유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본다. 유아들은 언약의 원리에 따라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유아세례에 대한 네번째 반론은 유아세례와 성인 세례의 근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두 세례의 근거는 다르지 않다. 모든 세례의 근거는 '은혜언약'이다. 단지 차이점은, 성인은 신앙고백을 통하여 은혜언약 안에 들어 오지만, 유아는 출생을 통하여 은혜언약 안에 들어 온다는 사실뿐이다. 두 세례의 근거는 동일하다.

유아세례에 대한 다섯번째 반론은 유아들이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 참여는 분별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뿐이다. 고린도전서 11: 27-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 ."

유아세례에 대한 여섯번째 반론은 유아세례 받은 자들의 생활이 해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의 잘못들이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유아세례를 베푸는 교회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양육하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 즉 성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하여 또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인격과 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15. 성찬

성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고린도전서 11: 23-25,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성찬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째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표시한다. 고린도전서 11: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떡은 그의 살을, 포도즙은 그의 피를 상징한다.

둘째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에 참여함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0:16,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이다. 고린도전서 11:27,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받으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요한복음 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소요리문답 96,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 . . 신앙으로 그의 몸과 피에, 그리고 그의 모든 은혜들에 참여하여 영적으로 양육되고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된다."

세째로, 성찬은 성도 상호 간의 연합과 교제를 표시하고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 성찬의 재료와 대상

성찬의 재료들로는 초대교회에서는 보통 식사의 빵이 사용되었으나, 천주교회나 루터교회에서는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 사용되었다. 개혁교회는 초대교회의 풍습을 따랐다. 포도즙은 발효되지 않은 것이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26:29, "포도나무에서 난 것"(막 14:25; 눅 22: 18).

성찬의 대상들은 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유아들은 주의 몸을 분별할 수 있는 연령이 될 때까지 제외된다. 범죄자나 권징 아래 있는 자 등 흠과 결함이 있는 신자들도 제외된다. 고린도전서 11:27-3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역사상, 성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臨在, 함께하심, presence)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마태복음 26: 26, 28, "이것이 내 몸이니라 . . . 이것은 나의 피니라." 이 말씀은 문자적 의미인가, 아니면 상징적 의미인가?

초대 교부들 중에는 상징론적 견해와 문자적(실재론적) 견해가 섞여 있었다. 오리겐, 유세비우스, 바실,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 같은 이들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였고, 시릴, 닛사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다메섹의 요한 등은 그것을 문자적(실재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어거스틴은 성찬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지만, 떡과 포도즙의 실체들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 후 천주교회는 떡과 포도즙의 실체들이 미사 때에 신부의 선언으로 그것들의 특질을 가진 채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소위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이 견해는 9세기 초에 정식으로 제안되고 1215년 제4 라테란 회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종교개혁 때, 성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하심에 대하여 의견이 셋으로 나뉘었다.

첫째로, 루터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 곁에, 그리고 그것들 밑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함께 있다는 소위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편재성(遍在性)과 함께 주장되었다. 루터의 견해는 강경하여 즈빙글리의 견해를 거부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주요한 차이점이었다. 그 밖에도 루터교회에는 신인협력설적(神人協力說的),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 요소들이 있다.

둘째로, 즈빙글리는 떡과 포도즙이 단지 상징물 혹은 기념물에 불과하다는 상징설을 주장했다. 이것은 개신교회의 일부의 견해이다.

셋째로, 칼빈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 계신다는 소위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說)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표준적 견해이다. 성경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주의 몸과 피라고 불렀고 그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간주하였다. 고린도전서 11:27, 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7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은, 그것의 유형적 재료들에 외적으로 참여할 때, 믿음에 의해 내적으로,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그러나 육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가 아니고,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의 모든 은택들을 받으며 먹는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비록 그 때 그 빵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과 함께, 혹은 그것들 아래, 육체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있지 않지만; 그 재료들 자체가 그들의 외적 감각들에 그러한 것처럼, 그 규례에서 신자들의 신앙에 실제적으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 있다."

 

16. 기도

세번째의 은혜의 수단은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영적 은혜들을 받을 수 있다.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우리는 보통 성부 하나님께 기도드리지만(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삼위 하나님께 다 기도할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한 예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누가복음 23:42, "예수께 가로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사도행전 7:59, 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고린도후서 12:8, "이것이[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의 내용들은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 간구 등이다. 소요리문답  98, "기도는 우리의 죄들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그의 뜻에 맞는 것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원을 그에게 아뢰는 것이다." 구약 시편의 많은 시들(특히 95편 이후)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찬송은 곧 기도요 기도의 주요한 부분은 찬송과 감사이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죄의 고백도 기도이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물론, 기도는 간구의 내용을 포함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간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먼저 영적인 것부터 기도하고 그 후에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 또한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후에 남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마태복음 6:9-13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주요 내용들을 깨닫게 해준다.

① "주의[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② "주의[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천국 뿐만 아니라, 현재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나라, 즉 교회를 가르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스런 천국이 오기를 간구하는 뜻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어 택한 백성들이 다 주께로 돌아오는 것, 다시 말해 참된 교회의 설립과 확장을 간구하는 뜻인 것이다. 이것은 전도를 위한, 그리고 전도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에베소서 6:19; 골로새서 4:3; 데살로니가후서 3:1에도 동일한 말씀들이 있다.

③ "주의[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전(全)포괄적이다. 나 개인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나의 사회와 국가, 온 세계의 문제들을 포함한다. 또한 정신적, 영적 문제들 뿐만 아니라, 물질적, 육신적 문제들까지 포함한다. 이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사람의 범죄와 불순종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었으나, 하나님은 그것들까지도 그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삼으셨다.

④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의 육신의 양식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이 말씀은 혹 우리의 영혼의 양식 곧 우리가 날마다 공급받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한다는 뜻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가 지은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⑥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시험에 떨어져 범죄치 않기를 기도하고 혹시 악에 떨어졌다면 거기로부터 건짐 받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기도의 방법들에 관하여, 우선 기도의 시간은 어떤 일정한 고정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로마서 12:12, "기도에 항상 힘쓰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물론, 공적 기도회들, 즉 수요기도회나 새벽기도회는 유익하다.

새벽기도회에서는 말씀을 간단히 전하고 기도하게 인도하는 것이 좋다. 한국교회의 전통인 새벽기도회에 관하여는 장단점이 없지 않다. 장점은 기도 생활에 힘쓴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각자의 생활 리듬이 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옛날과 달리,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부득이한 이유로 늦게 자기 때문에 새벽 4시 혹은 4시 반에 일어나면 새벽 기도 후 다시 자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정상적 생활 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서양의 경건한 신앙의 선조들처럼, 각자의 생활 리듬에 따라 아침에 일어나 기도와 말씀 묵상의 경건 시간을 갖도록 권장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를 규칙적으로 지키는 장점도 많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더 많이 배우고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고 교역자들도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연구하게 된다.

기도의 장소는 예배당이나 어느 기도원에 국한시킬 수 없다. 기도원은 유익하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또한 신약 교회의 예배당은 교회의 공적 집회 장소의 의미가 우선이다. 구약의 성전의 개념은 부차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성전의 건립을 명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꼭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다. 어디서든지 조용한 장소가 있으면 그 곳이 곧 나의 기도의 골방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광야, 빈 들]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기도의 소리에 관하여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좋다. 묵상 기도는 졸음이나 잡념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집회시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유다서 20, "성령으로[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성도들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생활을 도우신다.

기도의 유익은 실로 크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 성장 곧 인격의 성화를 이룬다. 기도는 또한 주를 믿고 따르며 그를 섬기는 힘을 공급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이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인 것이다. 권능은 하나님께 있다(시 62:11). 하나님의 일은 힘으로 능으로 이룰 수 없고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이룰 수 있다(슥 4:6). 그러므로 우리편에서는 기도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마태복음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11:13,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윌리암 윌버포스, "지금까지 나는 개인적인 기도, 묵상, 혹은 성경 읽기의 종교적 훈련을 위해 너무도 적은 시간을 습관적으로만 배당하여 둔 것같이 생각된다. 그 결과로서 나의 영혼은 말라빠지고 냉냉해지고 따라서 굳어지고 말았다." 리차드 뉴톤,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은 말씀에 합당치 않는 기도 생활의 퇴보에 있다." 촬스 스펄젼, "세상과의 접촉은 자주 우리의 경건에 더러움을 가져온다. 우리는 멀리 낙원에 가서야 더러움 없는 순결을 볼 것이다. 그 동안 이 세상에서 은혜로운 생활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많이 홀로 있어야 한다." "밀실의 기도가 봉사 생활에 주는 큰 복은 글로 표시할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성령께로 온 힘이다." 이 엠 바운즈, "밀실은 설교자에게 참된 교사요 학교이다. 사상은 기도를 통해 광채가 나고 분명해질 뿐 아니라, 기도 중에 생겨난다. 중심에서 나오는 한 시간의 기도는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결과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설교를 하기 위한 성령의 힘은 기도, 즉 시간을 들인 기도에서만 얻어진다. . . . 쉬지 않는 기도가 없이는 이 성령의 힘은 결코 설교자에게 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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