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전도

능력전도와 교회성장

힐링&바이블센터 2008. 3. 11. 16:05

 

이 재 범 목 사

(아세아 연합신학대학 강사)

서 론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언어학적인 요인으로서 한글이 복음전도와 신자 양육을 위한 효과적인 문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사회학적인 요인으로서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삶의 양식이 가족 중심적이었다는 점입니다. 대개 많이 모이는 교회는 이런 가족중심의 문화권에 속합니다. 이를테면 한국이나 남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셋째는, 방법론적인 요인으로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비판적인 면도 있지만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한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넷째는, 샤머니즘 요인으로서 무속이 복음수용을 위한 토양을 준비 하도록 터전을 닦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미신화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적 측면에서 보면 이런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 사이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정치적인 요인으로서 한국교회 성장 초기에는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에 대한 수용적인 자세가 성장요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일본은 적대시했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성령의 능력을 통한 능력전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 능력 전도는 다른 전도 방법을 무시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능력전도가 모든 전도 방법 중에서 가장 효과장인 방법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전제 아래 이야기하겠습니다.

본 론

프로그램 전도(Program Evangelism)와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현재 세계 교회를 통해서 볼 때 전도에 대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프로그램 전도요, 또 하나는 능력 전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 전도는 방법 중심의 전도입니다. 그러나 능력 전도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전도 방법입니다. 프로그램 전도는 선포중심의 전도 방법이요, 능력 전도는 설득 중심의 전도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그램 전도는 결신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능력전도는 제자화에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람은 동시에 제자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프로그램 전도는 조직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능력 전도는 개인이 받은 능력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전도 방법이 합리적이라면 능력 전도는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프로그램 전도의 형태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십자군 전도(Crusade Evangelism)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중전도 집회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둘째로 침투 전도(Saturation Evangelism)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전재 속에서 출발합니다. 즉 침투 전도의 전략은 교회 조직의 리더십을 통해 전체 신자들을 동원시켜 그리스도의 증인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총동원 전도 주일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개인전도(Personal Evangelism)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삶의 양식을 통해서 전도하는 방법입니다. 즉 크리스챤이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전도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상에서 든 프로그램 전도 방법들이 가치있고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전도 방법을 통해서 많은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 중요한 전도방법이 바로 능력전도 방법인데 이것을 우리가 이용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능력 전도는 성력의 능력에 의한 전도 방법입니다. 이 능력전도의 결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교회들이 세계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이제는 프로그램 전도와 능력 전도의 예를 살펴봅시다.

먼저 프로그램 전도 중에 십자군 전도의 경우입니다. 1978년 1월, 2월에 시애틀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때「미국 교회 성장연구」의 조사에 의하면 그 집회에 434,100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18,136명이 결신을 했는데 9,739명은 재 헌신자이고, 5,500명이 구원을 받았고 2,847명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 1,285명이 개 교회에 출석하게 됐습니다. 이 결과는 아주 좋은 결과로 비율로 따지면 전체 참석자의 0.29%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다른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본다면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0.001%만이 개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입니다.

둘째로 침투 전도의 경우를 봅시다. 카나다 써든 갈보리 교회에서 2,3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전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397명에게 사영리를 설명하였고, 100명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단 1명만이 성경공부에 참석했고, 6개월 후에는 그 1명마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총동원 전도의 예입니다. 광주에서 모교회가 “꼭 한번만”이라는 표어를 걸고 총동원 전도주일을 지켰습니다. 600명의 전교인이 총동원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14,000명이 모이게 되었고 그 중 4,000여명이 결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그 중 20~30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능력 전도의 결과에 해서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미국의 ‘성 바울 성공회’의 경우입니다. 이 교회는 1,000명이 모이는 교회로서 치유 목회를 하는 미국 성공회 중에서는 제일 큰 교회입니다. 둘째는 ‘캠퍼스 교회’의 경우 입니다. 이 교회도 주일 예배에 1,000명이 모이는 교회로서 정기적으로 치유예배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크랜쇼 크리스챤 센터’의 경우입니다. 1973년도에 300명 모이던 교회가 현재는 9,00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강조점은 성경공부, 성령의 은사들, 치유, 축복입니다. 넷째는 ‘멜로디랜드 크리스챤 센터’의 경우입니다. 이 교회는 1961년 12명이 가정집에 모여서 시작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1972년에는 18,000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교회이름이 예시하듯 생음악이 나오는 음악목회를 하면서 치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음악과 치유를 통해서 예배를 다이나믹하게 이끌어가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인야드 크리스찬 펠로십’이라는 교회가 있는데 1977년에 시작해서 10년이 지난 지금은 약 1만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치유와 축사를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1979년 5월부터 9월까지 이 능력 전도를 통해서 3개월 반만에 1,700명의 신자를 얻었습니다. 현재 이 교회에는 140개의 지교회들이 있고, 도합 4만명의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능력 전도의 신학적 기초 : 하나님의 나라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성장의 테크닉만 배웠지 교회 성장의 신학적인 배경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능력 전도라는 것도 신학에 기초하지 않았다면 수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성서적인 신학적 기반이 있다면 과감하게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능력전도의 신학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세계관과 신학

사람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실체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구의 세계관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서구의 세계관은 세속주의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속주의의 전제는 신적 간섭으로부터 우주가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주의는 물질주의와 합리주위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로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 영향을 받아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물질주의는 우리의 사고를 왜곡시킴으로 초자연적인 세계, 즉 천사들이나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희박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 합리주의를 생각해 봅시다. 합리주의는 하나님, 타락한 천사들인 사탄, 마귀, 신유의 역사 같은 것에 대해서 잘 설명을 못합니다. 그래서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이 교인들이 병들어서 기도받기를 원할 때 오늘날은 그런 역사가 나타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이 무당이나 마법사에게 가서 병침을 받고, 급기야는 교회를 떠나고 마는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2.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은 세속적인 세계관과 갈등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서구 크리스챤들은 이런 갈등을 실제로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서구적인 세계관, 즉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속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그 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속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육체와 세상과 악마를 말합니다. 크리스챤은 이 세가지 적과 계속 싸워야 합니다. 성서적인 세계관은 초대 크리스챤들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대 크리스챤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남을 실제로 경험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물질적, 정치적 명예에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서로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배우고 생활로 실행하지 않을 때는 커다란 역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를 미국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요청됩니다. 예수께서도 죄는 없었으나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때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적 기독교 신학은 정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성서를 정경으로 믿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초자연적인 신학을 믿어야 합니다. 즉 기독교 신학은 오늘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기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3. 예수의 사역

예수의 이적과 기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증명해 주는 표적입니다. 그러면 왕국의 표적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1~2을 읽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그리고 예수께서 나인성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후에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를 보내 “ 오실이가 당신이니이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악귀들을 쫓아내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눅 7:20~21).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논리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이것을 가지고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왕국의 표적을 두 범주로 나눕니다.

첫째 범주는 사회적 표적들로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표적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7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 주의 은혜로 죄를 깨끗케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범주는 개인적인 표적들로서 특정 개인에게 주어지는 표적입니다. 여기에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것, 귀신들과 악귀들을 쫓아내는 것, 병든 자를 고치는 것,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것, 문둥이를 깨끗케 하는 것, 귀머거리를 듣게 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범주에 속한 이 표적들은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표적들의 주된 영향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문을 열어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대중의 주의를 하나님의 능력에로 이끄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첫째 범주의 표적에만 관심이 있고, 그것만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범주는 초대교회의 예수 당시에나 있었고 오늘날은 그쳤다고 하면서 선택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추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적인 순종이 아니라 첫째 부류의 표적과 둘째 부류의 표적을 다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4. 예수의 치유사역의 원리

첫째는 병자에 대한 동정심, 즉 사랑 입니다. 복음서 제자들은 예수의 치유사역이 사랑에 의한 동기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믿음을 중요시했습니다. 백부장의 큰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을 고치셨고(마 8:5~13), 소경들의 믿음을 보셨고(마 9:27~31), 열 두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의 믿음을 보셨고(막 5:25~34),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믿음을 보셨습니다.(막 9:14~29). 그러나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믿음이 없는 고로 많은 치유를 베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눅 4:23~30, 막 6:1~6).

셋째로 예수님은 항상 치유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고쳐 주리라’(마 8:7)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로 치유의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 손을 댔다(마 8:15), ② 기도로써(요 11:41~42), ③ 명령-가라(마 8:5~13), 일어나라(눅 5:17~26), 손을 펴라(눅 6:6~10), 가서 씻으라(요 9:7),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눅 17:11~19), ④ 손을 대시고 동시에 명령하심(눅 5:12~16), ⑤ 진흙 또는 침을 사용하셨습니다(막 7:31~37).

다섯째로 예수의 치유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치유를 은밀히 하신 적도 있긴 합니다(막 5:35~43, 막 8:22~26, 눅 4~38~39).

여섯째로 환자에게 질문을 하심으로 치유를 하셨습니다. 소경에게는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고(막 8:22~26), 귀신들린 자에게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고(막 5:1~13),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또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로 예수께서는 치유에 대한 의학적인 증명을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치유 사역에서 문제되는 것이 바로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지 말라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치유하시고 나서 의학적인 수단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배경은 레위기 13:49, 14:2~32에 그 근거가 있고 예수께서는 의학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문둥병 환자들에게 병고침을 베푸시고 난 후 “가서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제사장들은 의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 8:1~4, 눅 17:11~19, 막 2:17).

여덟째 계속해서 기도하셨습니다(막 8:22~26, 눅 4:31~41).

이런 치유 사역을 하신 예수님의 삶에는 네 가지의 중요한 삶의 국면들이 있습니다.

① 성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17~21에 보면 예수는 아버지가 하신 것을 본 그대로 행동하고 말씀하셨습니다.

②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받을 때에 성령으로 충만하셨고(눅 3:21~23), 성령이 충만하여 세례 후에 시험을 받으셨고(눅 4:1이하),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가셨고(눅 4:14),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하셨습니다(눅 4:18). 또 성령의 권능으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눅 5:17).

③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신약에서 기도는 치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후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세례받을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바쁜 속에서도 기도하셨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열 두 제자를 선택하셔서 파송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눅 6:12~16). 마찬가지로 말씀이 확실히 증명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되고, 기도할 때 여러 가지 표적이 확실히 증명하고 흥왕하게 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막 16:20).

④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기를 원하셨습니다. 대개 하나님 나라 하면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종말에 되지만 말씀과 신유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와 치유 사역의 훈련

이제 과연 예수께서 행한 치유사역을 오늘날 교회가 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를 언급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심으로 자신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 치유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원했습니다. 왜 하나님나라와 치유가 관계가 있습니까. 치유가 될 때에 치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일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치유 사역을 강조하고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첫째로 예수께서는 치유사역의 모델이셨습니다. 그는 12제자를 택하시고 70인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자신의 치유사역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배웠으며, 그들이 스스로 나가서 치유사역을 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치유사역을 한 후에 예수께 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둘째는 훈련입니다. 예수는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즉 치유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힘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치유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충만히 받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넷째는 지혜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치유사역은 교만과 자신의 욕망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심이 되어 자기 베벨탑을 쌓을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치유 목회를 하게 되면 주변에서 시기하고 험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 치유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능력 전도와 교회 성장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교회성장의 요인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생물학적(Biological)인 요인입니다. 즉 기성 교인이 아이를 낳아서 자연 증가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생물학적인 증가는 10년에 25%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둘째는 전입성장(Transfer Growth)이 있습니다. 즉 타 교회에서 이전해 오는 성장입니다. 셋째는 회심 성장(Conversion Growth)입니다. 즉 예수를 처음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성장 중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성장은 바로 회심 성장입니다. 생물학적 성장은 아직 중생의 체험이 없는 명목상의 교인이고, 전입성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왼쪽 주머니에서 오른쪽 주머니로 옮겨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드먼드 크라우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 성장은 성령의 능력 즉 새 피조물의 활력에 의한 왕국 성장이라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통치이며 그의 통치의 축복이 경험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며 교회에 의해서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능력전도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교회 성장은 하나님 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능력전도가 활발히 전개되어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생황양식에 따라 살아가는 교회로 성장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밀접하게 관계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능력전도는 참된 교회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 론

우리는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성서를 볼 때 성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2천년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발전해 온 신학을 재조명해 보고 다시 한 번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조심할 것은 위대한 신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어떤 사상의 영향을 통해서 그러한 신학이 나왔는가를 철저하게 연구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신학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전도의 방법 중에서 과연 능력전도의 방법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이 능력전도의 방법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바뀌고 시야가 넓혀져서 이 능력전도에 대해 눈을 뜨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교회에 커다란 성장이 있을 줄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