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전도

능력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

힐링&바이블센터 2008. 3. 11. 16:01

 

능력전도하나님 나라 능력




  은혜받기만을 사모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집회나 세미나를 통해 배운 내용을 실상황에서 활용해 보아야 합니다. 실제를 경험하며 배우는 것이 진리를 제대로 배우는 겁니다. 이론만 있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지금은 나가야 할 때입니다.


  부흥이 우리 가운데 임해도 세상에 나가 전도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부흥은 머지않아 떠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을 정결케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을 통해 세상을 만지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져주십니다. 그런데 만져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세상을 접촉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체로 여러 번이나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마감지어야 할 시점에 로마의 감옥에서 말년을 보냅니다. 바울은 수인의 몸으로 성도들에게 몇 개의 서신을 씁니다. 우리가 흔히 ‘옥중 서신’이라고 부르는 책들입니다. 옥중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이 진실로 주님을 더 알기 원하노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유인즉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부터 12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방금 말씀드린대로 그는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삼층천을 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들을 듣고 왔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바울에게서 그가 줄기차게 주님께 가까이 가기 원하는 간절함을 봅니다. 그가 주님을 가까이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을 더 알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실제보다 이론을 구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론이야 몇 번 들으면 다 됩니다. 또 책 한 권 읽으면 됩니다.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나면 본인은 이제 아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실재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알기를 열망하며 구하는 사람은 더 갈급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으로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 주님을 알기를 원하며 간구하게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쉽게 나태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주님의 얼굴을 더 구하며 주님알기를 구하고 사모하여 엎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태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면 밖으로 나가서 실천하면 됩니다. 실천할 때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를 배우는 겁니다. 능력전도는 바로 이 일에 아주 좋은 실천의 장을 제공합니다. 집회 때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음을 위해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즉 밖으로 나가 실상황 속에서 실제를 배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기름을 부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도는 능력전도입니다. 능력전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전도하신 방법, 둘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전도, 셋째는 명령을 듣고난 후의 제자들의 전도입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말합니다.


알짜는 길거리에 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존 윔버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깊이가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존 윔버 목사님은 그 원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깊이가 없다면 진리의 진수를 더 깨달아 깊이 있는 설교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존, 알짜는 길거리에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나서야 존 윔버 목사님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알짜는 길거리에 있다’는 말은 배운대로 나가서 길거리에서 실천할 때 배우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감동적인 설교를 들었다고해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적 성숙이란 깊은 진리를 깨달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배운대로 삶의 거리에서 실천할 때 사람은 영적으로 자라는 법입니다. 그 때야 비로소 실제를 배우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함으로 자랍니다. 이것은 마치 공중낙하 이론을 배운다음 실제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영에 관한 이론을 배운다음, 물 속에서 배운대로 팔과 다리를 흔들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곧 예수님의 전도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전도하셨을까요?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사역이 곧 예수님의 전도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번 앞서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이었습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에서 28절입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복음서마다 처음 기록하고 있는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 기록하고 있는 사건이라고해서 예수님이 가장 먼저 행하신 사건은 아닙니다. 복음서마다 다른 첫사건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각복음서의 처음 기록한 사건은 각 복음서가 예수님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던집니다.


  위 구절에는 두 권세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권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왜 권세가 있었을까요?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왜 하나님의 권세를 느낄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나 이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그저 감동받고 은혜받고 돌아가라고 말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몇 일이 지나면 감동이 사라지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값싼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내용을 성경에서 보다보면 별 감동받을 부분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 목사님들의 설교는 예수님의 설교보다 훨씬 더 감동적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사도행전에서 읽으면 별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도취되어 흠뻑 젖을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늘 듣던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가 권세를 가진 이유는 예수님이 단순히 이론을 전한 것이 아니라 실제를 전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설교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전하셨습니다. 여기에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뒷받침하니까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둠의 세력들을 멸하시고 파하시는 권능으로 왕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역사가 임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의 설교에 권세가 나타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기도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온 것을 나타내 보였으니 권세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워야할 전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 6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에게 전도하시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위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전도법인 능력전도를 말하기 전에 확인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영리’라는 책자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개인전도를 하기에 적합하게 만든 전도책자입니다. 예수를 단시간 내에 소개하며 영접시키는 일에 아주 유용한 전도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면서 사영리같은 전도책자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함으로 전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위 구절에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 중에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는 부분이 있음을 봅니다. “남편을 데려오라”가 그것입니다.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를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활용하여 언급하셨습니다. 이 대목은 여인에게 일대 전환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과거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기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을 전환점으로 하여 대화를 계속하는 가운데 여인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기를 싫어하던 이 여인은 이제 담대하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전하는 메센저(messenger)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한 말이 흥미롭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능력전도의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삭개오의 예가 그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기 국민들에게서 로마제국을 위한 세금을 거두었으니까요.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이라도 세리의 직업을 가진 자들을 동포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삭개오가 자기의 생을 일대 전환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로 하여금 일대 전환을 이루게한 대목은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른 대목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이름을 예수님에게 가르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으며 그에 관한 정보를 아셨습니다. 삭개오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같아도 아마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자기 능력을 활용하여 사역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면은 오늘날 능력전도를 사모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사역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면은 우리 역시 예수님과 똑같은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전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전도는 단순히 사람들이 듣게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듣고 보게 하심으로 전도하셨습니다. 듣고 보는 일은 다음에 소개되는 구절에 잘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 22절과 4장 18절부터 21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전도법을 명령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전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들이 몇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태복음 10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6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은 제자들의 사역의 범위가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훗 날,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의 사역 범위를 땅끝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7절에서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언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 보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론이 아닌 실제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음을 봅니다. 제자들의 메시지가 실제여야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포하라고 명령하신 메시지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이 감동받고 눈물 흘리게 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코 끝이 찡한 설교는 삼사일 동안은 감격 속에 살게할지 모르지만 삶에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우리 삶에 어떠한 변화도 주질 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은 삶의 원리요 신앙의 본질이었습니다. 삶의 실제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신앙의 실제를 전하며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사실을 나타내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행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절부터 9절입니다.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여기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은 예수님 자신이 행하셨던 사역을 제자들도 똑같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방법 그대로 전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했는가 즉 제자들은 어떻게 전도했는가 하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부터 5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합니다. 이는 바울의 설교가 단순히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코 끝이 찡하게 하여 단편적인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즉 살아계신 예수님의 실제를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과 8장에 보면 스데반집사와 빌립집사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스데반에게서 우리는 말씀의 능력이 그에게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빌립 역시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0절과 8장 5절이하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런가하면, 집사가 아닌 평신도들 역시 예수님의 사역 방법 그대로 사역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0절부터 19절입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보십시오. 아나니아 역시 똑같은 사역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 평신도였던 것같습니다. 아나니아는 사도들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성도는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아마 사도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던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사도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었고 사도들에게 이어진 사역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제자들에게 이어진 사역은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역을 감당해야할까요?  우리가 너무나도 익히 잘 아는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능력전도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가는 일입니다


  첫째, 우리가 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가야’합니다.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는 것’은 가장 간단한 부분이지만 가장 잘 안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음만 먹고 가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능력은 이미 우리 속에 있습니다. 가야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병든 이들 곁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죽은 이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억압 속에 사는 이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주변의 병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 보십시오. ‘가셔야’ 이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면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미 일을 다 하신 상태에서 아나니아를 당신의 일에 초청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울이 있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실제로 아나니아가 한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갔을뿐이었고 바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였을 따름이었습니다. 만약 아나니아가 가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나가는 일이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하찮은 일에서부터 섬기려는 자세를 가지고 ‘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전도는 하나님의 보여주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두 번째, 사역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의 보여주심이 있어야 합니다. 대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가보면 알게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교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수가성 여인을 전도하는 교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교본은 없습니다.


 

전도 교본

 

   1. 여인을 전도하려면

      낮 12시에 우물가에 찾아가라 

   2. 여인이 오면 물을 좀 달라고 하라 

   3. 물을 받으면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하라

   


  교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교본에 따라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가면서 물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무엇을 할까요? 다음은 무엇을 할까요? 등의 질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해야할지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뛰어나거나 특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듣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무런 하나님의 감동이 없다면 그저 조건없는 사랑으로 상대방을 위해 축복하고 돌아오십시오.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능력전도는 감동을 주시는대로 순종하는 전도입니다


  세 번째는 감동하시는대로 순종하십시오. 기도하다 보면 상대방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라는 감동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또 상대방의 비밀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상태가 어떤지를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알려주시는대로 순종하시면 됩니다.


  흔히 전도를 어렵게 느낍니다. 그러나 전도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의외로 전도를 받고싶어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못하는 겁니다.


  가다보며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어떨 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는 단 한 마디의 격려나 칭찬, 한 번의 포옹이 상대방의 닫혔던 마음을 녹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건네는 말 한 마디와 아버지의 마음으로 포옹함이 상대방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좋은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상을 접촉하시기 원하십니다. 설사 하나님의 감동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랑으로 섬기면 진실은 전달됩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순종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기름부음을 나누어야 새로운 기름부음이 더욱 부어지는 법입니다. 산모들은 묵은 젖을 짜야 새로운 젖이 나오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