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누가복음-가난한자들을 위한 복음

힐링&바이블센터 2008. 2. 19. 13:55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
누가복음 1:46-56

김경진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I. 서론
온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계절의 이맘때면 우리는 항상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찾아 말하곤 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주님은 이 땅에 오셨을까? 아울러 이즈음에,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성탄의 의미 중 하나로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을 말하며, 또 행동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아마도 연말이면 어김없이 거리에 등장하는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그 대표적 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주님 탄생과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구제와 자선은 어떤 관계로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요? 달리 말하면, 인류 구원의 영적 복음은 구제와 자선이라는 사회 복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의 해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증거되고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에, 영적 복음은 사회복음과 그 성격상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과 구제, 즉 영적 복음과 사회 복음과의 관계를 흔히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본문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본문의 구조 및 배경을 이해하며, 아울러 누가복음의 두드러진 신학적 주제 하나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 및 배경
본문은 마리아가 친족 엘리사벳이 그녀의 거룩한 잉태를 축복하는 찬송시에 화답하여 부른 찬송시입니다. 이 찬송시를 흔히 마그니피카트라고 부르는데, 이는 찬송시의 시작인 46절 중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에서 '찬양하며'에 해당하는 라틴어 Magnificat에서 유래된 명칭입니다. 본문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졌는데, 전반부인 46-50절에서는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고, 후반부인 51-55절에서는 아브라함과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이 선사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구약 사무엘상 2장 1-10절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그 전체적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한나의 노래는 그녀의 원수들의 면전에서 외치는 승리의 노래인 반면에,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의 자비를 겸손하게 묵상한 데서 나오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해 가는 4일 동안의 여행길에서 한나의 노래를 깊이 묵상한 후에 이 찬송시를 지어 불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회복음으로서의 누가복음의 특징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사회적 성격이 특히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일명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the Gospel for the Poor)이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이런 누가복음의 특징은 누가복음 4장 18-19절의 예수님의 취임설교(inauguration sermon)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더라.
이와 비교하여,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취임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그것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막 1:15; 마 4:17). 취임설교란, 오늘날 대통령의 취임사와 마찬가지로, 그 직분을 맡아 수행함에 있어서 앞으로의 행동 방향 및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취임설교는 마가, 마태복음의 그것과 구별되면서, 주님의 사역의 새로운 면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가난한 자들, 포로 된 자들, 눈먼 자들, 눌린 자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 사역의 특징은 누가복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들의 목록이 모두 다섯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4:18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6:20-22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 당하는 자
7:22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
14:13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 소경
14:21 가난한 자, 병신, 소경, 저는 자
이 다섯 번의 경우 가운데, 마가복음에는 병행구절이 한 곳도 없고, 마태복음에는 6장 20-22절과 7장 22절의 병행구절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가 누가복음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의 팔복설교에서도 가난한 자와 주린 자, 핍박당하는 자가 소개되고 있지만, 그 앞에 '심령' 혹은 '의'(義)란 단어가 추가됨으로 인하여(마 5:3, 6, 10), 더 이상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가난이나 주림(배고픔)은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갖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가난과 배고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4장 18-19절에 나오는 주님의 취임설교와 연결되면서, 주님의 사역이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본론
이제 이러한 본문 구조와 사회복음으로서의 누가복음의 특징을 고려한 채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란 주제로 본문말씀의 의미를 크게 세 대지(大旨)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님은 비천한 계집종을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46-50, 52절).
2. 주님의 사역은 비천하고 굶주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51-53절).
3.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신 주님의 사역은 구약성경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54-55절).
첫째로, 주님은 비천한 계집종을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48-50, 52절).
① 주님이 비천한 계집종인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주님 사역의 성격과 아울러 복음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가난하고 비천한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누가복음의 사회적 성격과 같은 맥락에서, 주님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름 부음 받았다는 주님 자신의 말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4:18).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주님은 가난하고 비천한 시골 처녀를 통하여 사람의 아들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그 사역과 행동이 일치한 삶을 사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여자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다면 주님의 메시지는 그만큼 손상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오늘날 주의 종인 사역자들에게 귀한 교훈을 전하여 줍니다. 사역과 삶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곧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역으로 우리의 행동은 메시지로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도들에게 이 교훈은 믿음과 삶의 일치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명에 합당하게 행동하셨던 분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믿음은 삶으로 보여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주님이 비천한 계집종 마리아를 주님의 종으로 사용하신 것에서 또 다른 교훈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 진리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주님이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때 그 통로가 된 사람은 그 신분이 높고 존귀한 여인이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이란 시골의 비천한 처녀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불렀지만(048절), 주님은 그 '비천한' 처녀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 되게 하심으로 높이셨습니다(52절). 이런 사실은 엘리사벳의 찬송시에서 발견되고(42절 -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5절 -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 자신도 이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48절 -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아울러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 중 일부는 마리아의 이 같은 복을 부러워하였습니다; 11장 27절 -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이런 말씀을 참작할 때, 우리는 비천한 시골 처녀 마리아가 주님의 모친의 됨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사람들 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선택받은 종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의 사역은 비천하고 굶주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51-53절).
51-53절은 서론에서 설명한 누가신학의 주제 중 하나인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특징을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특별히 여기서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자, 주리는 자와 부자의 대조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 중 팔복(Beatitudes)에 대응되는 누가복음의 평지설교 중 사복 사화(四福 四禍)와 그 내용이 유사합니다(눅 6:20-26). 마태복음에는 사화(四禍)가 없는 대신에 다른 종류의 사복(四福)이 추가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부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는 자에 대한 화(禍)가 그대로 언급되면서,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 받는 자에 대한 복(福)과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대조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오신 주님의 사역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오히려 더욱 부각시키는 것으로도 보여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탄생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누가복음의 탄생기사는 마태복음의 그것과 사뭇 다릅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탄생기사는 아기 예수의 탄생 직후에 벌어진 사건을 보여주는 것인데 반해, 마태복음의 탄생기사는 어느 정도 시일이 경과된 후에 벌어진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합니다(마 2:1-12). 마태복음에서 그들의 등장은 그들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백성들인 유대인들은 헤롯 왕을 위시하여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탄생기사의 이런 측면은 주님이 다만 유대 민족만을 위해 오신 구세주가 아니라, 동방박사와 같은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임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사건은 유대 특수주의를 넘어선 이방(구원) 보편주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들이 등장하는 것(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즉 밧세바)과 주님이 승천하시며 남긴 마지막 지상명령(마 28:19-20) 또한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과 더불어 마태복음의 탄생기사에서 동방박사의 등장의 의미는 그들이 부요한 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의 동방박사들은 사회ㆍ경제적 여건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웠을 고대 세계에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이 가져온 황금, 유향, 몰약이 값비싼 물건임을 고려할 때 필시 부자들이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의 탄생기사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목자들입니다(2:8-21). 사실 이스라엘은 초기 시절부터 목자 생활을 하였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 자신이 목자로서 활동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삼상 16:11; 17:15, 28, 34-35; 삼하 7:8; 시 78:70-72).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천사들이 유독 목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구주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알린 것은 목자 민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각별한 섭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대에 목자들은 매우 천한 직업으로 낙인 찍혀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세리와 마찬가지로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요아힘 예레미아스가 쓴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이란 책을 보면, 신약 시대에 목자들은 대부분 파렴치하고 도벽이 심했으며, 그들의 가축을 남의 땅으로 몰고 다녔을 뿐 아니라 그 가축에서 나온 소산을 착복하기 했던 까닭에 '도둑질과 같은 직업', 즉 사람들을 부정직하게 만드는 직업이라서 자기 아들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던 직업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은 목자들은 사회적으로는 비천하였고 또한 경제적으로 볼 때는 가난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마태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에서 온 백성, 즉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구주 탄생의 소식이 당대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에 속한 목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사역이 바로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매우 확실하게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들에게 동일한 명령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성탄을 보다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님이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해 오셨고 또 그들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처럼 우리 주위의 헐벗고 굶주리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각오와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신 주님의 사역은 구약성경 말씀의 성취였습니다(54-55절).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란 주님의 사역은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연장선상에서의 성취임을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한 것으로 소개한 후, 구약성경의 여러 곳의 말씀을 암시적으로 인용하는 것은(사 41:8; 시 98:3; 미 7:20; 삼하 22:51) 이러한 주님의 사역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54-55절이 앞서 살핀 51-53절의 말씀의 성취라는 전제 아래 51-53절을 문법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51-53절은 예언적 미래가 아니라 모두 부정과거(aorist)로 기록된 과거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51-53절은 하나님의 관습적인 행위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과거로 기록된 것은 어색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특별한 일들을 회고하면서, 과거에 이렇게 행하셨으므로 그것이 곧 오늘 전해야 할 복음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미래에 성취될 일이 이제 막 실현되기 시작함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바람직한 해석은 마리아가 예언의 영(靈)으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이 장차 행하실 일이 너무도 확실하므로 마치 성취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사용하였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한 자와 비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으신 주님의 사역은 전혀 새로운 별개의 사역이 아니라, 이제껏 하나님이 성경(구약)에서 아브라함과 조상들에게 행하신 일들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성경에 합치한 행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확증을 통하여 주님의 사역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으며 더욱 공고히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주님 사역의 정당성은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들에게 당위성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고치시며, 돌보신 것은 성경말씀의 성취로써,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불우한 자들을 돌보고 돕는 것은 성경말씀을 성취하는 일이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 12:33)
이 말씀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6장 19-20절과 비교할 때 우리는 다시금 누가복음의 예수님이 구제와 자비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누가복음 11장 41절과 마태복음 23장 26절의 비교 역시 누가복음에서 구제가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행하시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들도 그 말씀을 따라 당연히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믿는 제자로서의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III. 결론
어느 덧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거리의 구세군 자선냄비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종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종소리는 또한 주님의 성탄을 맞는 우리들에게 성탄에 합당한 삶의 양식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돕는 것은 단지 이웃사랑의 견지에서 시행되어져야 할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삶을 본받고 그 교훈을 따라 사는 일임을 오늘 마리아의 찬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완성됩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롬 13:10).
끝으로, 가난하고 비천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 포로 된 자들, 눌린 자들, 눈먼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고 또한 그들을 위해 일하신 주님을 본받아, 오늘날 우리 주위의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곧 주님의 성탄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뤄지는 일의 하나임을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자 약력

저자 김경진 교수는 총신대학교 신학과(B.A.)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과 서울대학교 대학원(Ed.M.)을 거쳐,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는 글라스고우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대학원에서 신약학을 전공하였다(Ph.D.). 「한국복음주의 신약학회」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다년간 교무처장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는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신약학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연구처장직을 수행하면서, 동교의 신학전문 학술지인 『기독신학저널』편집인으로 수고하고 있다. 아울러 <두란노 성경대학>, <로스 성경대학>, <계속교육원>(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등 여러 교회 및 교육기관에서 신약성경 및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 방배동에 있는 <기독대학교회>의 협동목사이기도 하다.

저서
Stewardship and Almsgiving in Luke's Theology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누가신학의 제자도와 청지기도} (도서출판 솔로몬, 1996)
{성서주석 사도행전}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대한기독교서회, 1999).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주님} (한국성서학연구소, 2000).
『제자와 제자의 길』(도서출판 솔로몬, 20023)

역서
리차드 A. 버릿지, {네 편의 복음서, 한 분의 예수} (기독교연합신문사, 2000).
데이빗 앨런 블랙, {설교자를 위한 신약석의 입문} (도서출판 솔로몬, 1997)
알렌 버히, {신약성경 윤리} (도서출판 솔로몬, 1997)
캐롤라인 오시에크,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R. E. O. 화이트, {누가신학연구} (한국로고스연구원, 1995)
마이클 그린, {초대교회의 전도} (생명의 말씀사, 1994)
알란 P. F.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생명의 말씀사, 1989)